걸견폐요(桀犬吠堯)라는 고사성어의 원전인 사마천(司馬遷) 선생의 사기(史記) 중에서 해당부분을 싣습니다.
출처: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사기史記 -> 열전列傳 ->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1~14는 노중련 열전이고 16~25까지가 추양 열전입니다. 여기는 추양 열전만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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鄒陽者, 齊人也. 游於梁, 與故吳人莊忌夫子、淮陰枚生之徒交. 上書而介於羊勝、公孫詭之閒. 勝等嫉鄒陽, 惡之梁孝王. 孝王怒, 下之吏, 將欲殺之. 鄒陽客游, 以讒見禽, 恐死而負累, 乃從獄中上書曰:
추양(鄒陽)은 전한(前漢) 제군(齊郡) 사람이다. 양(梁)나라를 유람하면서 오(吳)나라 사람 장기부자(莊忌夫子)와 회음(淮陰) 사람 목생(牧生)의 무리와 사귀었다. 그가 [양 효왕에게] 글을 올려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등에 끼어들어 문객이 되었다. 양승 등이 추양을 시기하여 양(梁) 효왕(孝王)에게 그를 헐뜯었다. 효왕이 노하여 추양을 옥리에게 넘겨 죽이려 했다. 추양은 객으로 유세하다가 참소를 당해 감금당하여 억울한 죄를 쓰고 죽을까 두려워 이에 옥중에서 [양 효왕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올렸다.
16
臣聞忠無不報, 信不見疑, 臣常以為然, 徒虛語耳. 昔者荊軻慕燕丹之義, 白虹貫日, 太子畏之;衛先生為秦畫長平之事, 太白蝕昴, 而昭王疑之. 夫精變天地而信不喻兩主, 豈不哀哉! 今臣盡忠竭誠, 畢議願知, 左右不明, 卒從吏訊, 為世所疑, 是使荊軻、衛先生復起, 而燕、秦不悟也. 願大王孰察之.
“신은 충성은 보답을 받지 않는 경우가 없고, 신뢰는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으며, 신은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한낱 빈말일 뿐이었습니다. 옛날 형가(荊軻)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의로움을 사모했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뚫는 현상이 있었지만 태자 단은 형가를 의심했습니다. 위선생(衛先生)은 진을 위하여 장평의 전투를 계획했을 때 태백성(太白星)이 묘성(昴星)을 범하는 현상이 있었지만 진 소왕(秦 昭王)은 위선생을 의심했습니다. 무릇 정성이 자연현상을 변화시켰지만 두 군주는 이들의 충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신은 충성과 정성을 다해 드리고자 하는 말씀을 알아주시기를 바랐지만, 대왕의 주변 사람들이 밝지 못한 탓으로 오히려 옥리에게 심문을 당하고 세상에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형가와 위선생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연나라와 진나라는 그들의 충성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주시기를 바라옵니다.
17
昔卞和獻寶, 楚王刖之;李斯竭忠, 胡亥極刑. 是以箕子詳狂, 接輿辟世, 恐遭此患也. 願大王孰察卞和、李斯之意, 而後楚王、胡亥之聽, 無使臣為箕子、接輿所笑. 臣聞比干剖心, 子胥鴟夷, 臣始不信, 乃今知之. 願大王孰察, 少加憐焉.
예전에 변화(卞和)는 보옥을 바쳤음에도 초나라 왕은 변화의 발꿈치를 잘랐습니다. 이사(李斯)는 충성을 다했지만, 호해(胡亥)는 그를 극형에 처했습니다. 기자(箕子)가 미친 척하고, 접여(接輿)가 세상을 피해 살았던 것도 다 이런 환난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변화와 이사의 충성을 깊이 살피셔서 앞으로는 초나라 왕과 호해처럼 잘못된 참소를 받아들이는 일이 없고, 신이 기자와 접여에게 비웃음 당하지 않게 해주시오. 또 신은 비간(比干)이 가슴을 찢기고, 오자서(伍子胥)가 말가죽에 담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신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자세히 살피셔서 신을 조금이라도 가련히 여겨주시길 바라옵니다.
18
諺曰: 「有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 故昔樊於期逃秦之燕, 藉荊軻首以奉丹之事;王奢去齊之魏, 臨城自剄以卻齊而存魏. 夫王奢、樊於期非新於齊、秦而故於燕、魏也, 所以去二國死兩君者, 行合於志而慕義無窮也. 是以蘇秦不信於天下, 而為燕尾生;白圭戰亡六城, 為魏取中山. 何則? 誠有以相知也. 蘇秦相燕, 燕人惡之於王, 王按劍而怒, 食以駃騠;白圭顯於中山, 中山人惡之魏文侯, 文侯投之以夜光之璧. 何則? 兩主二臣, 剖心坼肝相信, 豈移於浮辭哉!
속담에 ‘백발이 되도록 알고 지냈으나 여전히 낯설고, 지나다 수레의 차양을 잠깐 기울였는데도 오래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서로의 마음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 때문입니다. 옛날 번오기(樊於期)는 진(秦)나라에서 연나라로 달아난 뒤 형가에게 자신의 머리를 내주어 연 태자 단(丹)의 계책을 받들게 했습니다. 왕사(王奢)는 제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도망을 갔다가 성에 올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제나라를 물리치고 위나라를 보존했습니다. 왕사와 번오기가 제나라와 진나라가 새롭고 연나라와 위나라가 친숙한 것은 아니지만 두 나라를 떠나 두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까닭은 군주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뜻에 맞았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사모하는 군주들의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진(蘇秦)은 세상의 신임을 받지 못했지만 연나라에 대해서는 미생(尾生)과 같은 신의를 지켰습니다. 백규(白圭)는 중산의 장수로 싸움에서 패배해 여섯 개의 성을 잃은 뒤 위나라로 망명했지만 나중에 위나라를 위해 중산(中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서로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연나라의 재상이 되자 연나라 사람이 왕에게 그를 헐뜯었지만, 왕은 칼을 만지며 소진을 비방한 자를 꾸짖고, 자신의 준마인 결제(駃騠)를 잡아 소진에게 먹였습니다. 백규가 중산에서 공을 세우자 중산 사람이 위 문후(文侯)에게 그를 비방하였지만, 문후는 오히려 밤에도 빛을 발하는 구슬을 백규에게 내렸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두 군주와 두 신하가 각각 마음을 열고 서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근거도 없는 말에 마음이 흔들릴 수 있겠습니까?
19
故女無美惡, 入宮見妒;士無賢不肖, 入朝見嫉. 昔者司馬喜髕腳於宋, 卒相中山;范睢摺脅折齒於魏, 卒為應侯. 此二人者, 皆信必然之畫, 捐朋黨之私, 挾孤獨之位, 故不能自免於嫉妒之人也. 是以申徒狄自沈於河, 徐衍負石入海. 不容於世, 義不茍取, 比周於朝, 以移主上之心. 故百里奚乞食於路, 繆公委之以政;甯戚飯牛車下, 而桓公任之以國. 此二人者, 豈借宦於朝, 假譽於左右, 然後二主用之哉? 感於心, 合於行, 親於膠漆, 昆弟不能離, 豈惑於眾口哉? 故偏聽生姦, 獨任成亂. 昔者魯聽季孫之說而逐孔子, 宋信子罕之計而囚墨翟. 夫以孔、墨之辯, 不能自免於讒諛, 而二國以危. 何則? 眾口鑠金, 積毀銷骨也. 是以秦用戎人由余而霸中國, 齊用越人蒙而彊威、宣. 此二國, 豈拘於俗, 牽於世, 系阿偏之辭哉? 公聽并觀, 垂名當世. 故意合則胡越為昆弟, 由余、越人蒙是矣;不合, 則骨肉出逐不收, 朱、象、管、蔡是矣. 今人主誠能用齊、秦之義, 後宋、魯之聽, 則五伯不足稱, 三王易為也.
그러므로 여자는 아름답든 못생겼든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면 질투를 받게 되고, 선비는 어질든 어리석든 조정에 서게 되면 시기를 받기 마련입니다. 옛날 사마희(司馬喜)는 송(宋)나라에서 종지뼈를 도려내는 형을 받았지만 훗날 중산(中山)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또 범수(范睢)는 위나라에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가 깨졌으나 마침내 진나라에서 응후(應侯)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계책을 믿고서, 사사로이 붕당을 지어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홀로 처신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질투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도적(申徒狄)은 스스로 황하에 몸을 던졌고, 서연(徐衍)은 돌을 짊어지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도의상 구차하게 취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당파를 만들어 군주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백리해(百里奚)는 길에서 밥을 빌어먹었지만 진 목공(秦 穆公)은 그에게 정사를 맡겼고, 영척(寧戚)은 수레 아래에서 소를 먹이고 있었으나 제 환공(齊 桓公)은 그에게 나라를 맡겼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조정의 관리들에게 천거를 받거나, 좌우의 칭송을 받은 후에 진 목공과 제 환공에게 등용된 것이겠습니까? 마음이 서로 통하고 행동이 일치하면, 아교나 옻칠한 것보다 더 친밀하며 형제처럼 되어 그들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으니 어찌 뭇 사람들의 말에 현혹될 리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한쪽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겨나고, 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면 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옛날 노나라는 계손(季孫)의 말을 듣고 공자(孔子)를 내쫓았고, 송나라는 자한(子罕)의 꾐에 빠져 묵적(墨翟)을 가두었습니다. 공자와 묵적의 달변으로도 참소와 아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노나라와 송나라는 위태로워졌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떠들면 무쇠도 녹이고,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秦)나라는 서융(西戎)의 유여(由余)를 등용해 중국을 제패했고, 제나라는 월(越) 사람인 몽(蒙)을 기용해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때 강해졌습니다. 이 두 나라가 세속에 얽매이어 끌려가거나, 아첨하여 한쪽 말에 사로잡혔겠습니까?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봄으로써 이름을 당대에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만 맞으면 호(胡)나 월(越)처럼 먼 곳의 사람들과도 형제처럼 될 수 있으니, 유여나 몽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반대로 뜻이 맞지 않으면 골육(骨肉) 사이라도 내쫓고 쓰지 않습니다. 주(朱), 상(象), 관(管)과 채(蔡)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날 백성의 주인 된 사람이 실로 제나라와 진나라처럼 옳은 방법을 쓰고 송나라와 노나라처럼 잘못된 말은 듣지 않는다면, 오패의 명성은 물론 삼왕(三王)의 공적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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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以聖王覺寤, 捐子之之心, 而能不說於田常之賢;封比干之後, 修孕婦之墓, 故功業復就於天下. 何則? 欲善無厭也. 夫晉文公親其讎, 彊霸諸侯;齊桓公用其仇, 而一匡天下. 何則, 慈仁慇勤, 誠加於心, 不可以虛辭借也.
그러므로 성군은 깨달아 자지(子之)와 같은 위선적인 마음을 배제할 수 있고, 전상(田常)의 유능함을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 무왕(周 武王)은 충신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분을 덮고, 주왕(紂王)에게 배를 찢겨 죽은 임신한 여인의 무덤을 손질해줌으로써 자신의 공적을 천하에 떨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주 무왕이 선행을 하는데 만족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진 문공(晉 文公)은 그의 원수 발제(勃鞮)와 친하게 지냄으로써 제후들의 패자(覇子)가 될 수 있었고, 제 환공(齊 桓公)은 자신의 원수 관이오(管夷吾)를 등용해 천하를 바로잡았던 것입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진 문공과 제 환공이 자애로움과 인자함, 겸손하고 정중함으로 진정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는 빈말로써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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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夫秦用商鞅之法, 東弱韓、魏, 兵彊天下, 而卒車裂之;越用大夫種之謀, 禽勁吳, 霸中國, 而卒誅其身. 是以孫叔敖三去相而不悔, 於陵子仲辭三公為人灌園. 今人主誠能去驕傲之心, 懷可報之意, 披心腹, 見情素, 墮肝膽, 施德厚, 終與之窮達, 無愛於士, 則桀之狗可使吠堯, 而蹠之客可使刺由;況因萬乘之權, 假聖王之資乎? 然則荊軻之湛七族, 要離之燒妻子, 豈足道哉!
진(秦)나라는 상앙(商鞅)의 변법을 써서 동쪽으로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천하제일의 강군을 만들었으나 끝내 상앙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습니다. 또 월나라는 대부 문종(種)의 계략을 이용해 강국인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패자가 되었으나, 결국은 문종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손숙오(孫叔敖)는 세 번이나 해임되었어도 낙담하지 않았던 것이고, 오릉(於陵)의 진중자(陳仲子) 역시 삼공(三公)의 직책을 사양하고 남의 집 채소밭에 물을 주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군주가 진실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공이 있는 자에게) 보답할 뜻을 품고 속마음을 열어 진심을 보여주며, 진실된 마음을 숨김없이 털어 덕을 두터이 베풀고 빈궁과 영달을 끝까지 함께 하고 선비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으면, 포악한 걸왕(桀王)의 개라도 요 임금에게 짖어대게 할 수 있고, 도척(盜跖)의 식객들에게 허유(許由)를 찔러 죽이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만승(萬乘)의 권세를 잡고 성왕의 자질을 빙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형가(荊軻)가 실패하여 칠족(七族)을 재앙에 빠뜨린 일이나, 요리(要離)가 처자식을 불타 죽게 만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22
臣聞明月之珠, 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何則? 無因而至前也. 蟠木根柢, 輪囷離詭, 而為萬乘器者. 何則? 以左右先為之容也. 故無因至前, 雖出隨侯之珠, 夜光之璧, 猶結怨而不見德. 故有人先談, 則以枯木朽株樹功而不忘. 今夫天下布衣窮居之士, 身在貧賤, 雖蒙堯、舜之術, 挾伊、管之辯, 懷龍逢、比干之意, 欲盡忠當世之君, 而素無根柢之容, 雖竭精思, 欲開忠信, 輔人主之治, 則人主必有按劍相眄之跡, 是使布衣不得為枯木朽株之資也.
신은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을 던지면 칼을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아무 이유 없이 (보물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나무뿌리가 뒤틀리고 기이해도 군주에게 바칠 그릇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이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그것을 치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이유 없이 눈앞에 나타나면, 아무리 수후주(隨侯珠)나 야광벽이라고 해도 원한만 맺게 될 뿐 고맙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미리 이야기를 해두게 되면 마른 나무와 썩은 등걸과 같은 공이라도 잊어지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지위도 벼슬도 없는 곤궁한 선비들은 빈천한 처지에 있습니다. 비록 요임금과 순임금의 통치술을 이해하고, 이윤(伊尹)이나 관중(管仲)과 같은 말재주를 지니고, 용봉(龍逢)과 비간(比干)과 같은 뜻을 지니고서 당대의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싶어 해도 나무뿌리를 다듬듯이 평소에 천거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비록 마음과 생각을 다해서 충성과 신의를 보여 군주의 정사를 보좌하고 싶어도, 군주는 구슬을 던진 사람을 대하듯이 칼을 잡고 노려봅니다. 그래서 벼슬 없는 선비를 마른 나무와 썩은 등걸의 쓰임만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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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以聖王制世御俗, 獨化於陶鈞之上, 而不牽於卑亂之語, 不奪於眾多之口. 故秦皇帝任中庶子蒙嘉之言, 以信荊軻之說, 而匕首竊發;周文王獵涇、渭, 載呂尚而歸, 以王天下. 故秦信左右而殺, 周用烏集而王. 何則? 以其能越攣拘之語, 馳域外之議, 獨觀於昭曠之道也.
그래서 성군은 세상을 다스리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 도공이 물레 위에서 그릇을 만들 듯이 자기만의 교화방법이 있어, 천박하고 혼란한 말에 이끌리거나 뭇 사람들의 근거 없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중서자(中庶子) 몽가(蒙嘉)의 말만 들었기 때문에 형가(荊軻)의 감언이설을 믿었다가 몰래 감추어둔 비수에 찔릴 뻔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주 문왕(周 文王)은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가에서 사냥을 하다가 여상(呂尙)을 수레에 싣고 돌아와 그의 도움으로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진시황은 측근의 말만 들었기 때문에 살해당할 뻔했고, 주 문왕은 까마귀 모여 앉듯이 우연히 여상을 만나서 천하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주 문왕은 속박하는 말 따위를 초월하고 국한되지 않은 의견에 마음을 쏟아, 밝고 넓은 길을 홀로 살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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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人主沈於諂諛之辭, 牽於帷裳之制, 使不羈之士與牛驥同皁, 此鮑焦所以忿於世而不留富貴之樂也.
오늘날 세상의 군주는 아첨하는 말에 빠져 있고, 애첩과 근신들에게 매여 뛰어난 선비들을 대우하는 것이 소와 천리마에게 같은 사료를 먹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포초(鮑焦)가 세상을 분개해 하며 부귀의 즐거움에 마음을 두지 않은 까닭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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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聞盛飾入朝者不以利汙義, 砥厲名號者不以欲傷行, 故縣名勝母而曾子不入, 邑號朝歌而墨子回車. 今欲使天下寥廓之士, 攝於威重之權, 主於位勢之貴, 故回面汙行以事諂諛之人而求親近於左右, 則士伏死堀穴巖(巖)[藪]之中耳, 安肯有盡忠信而趨闕下者哉! 書奏梁孝王, 孝王使人出之, 卒為上客.
신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들어온 사람은 이익을 위해서 의로움을 더럽히지 않으며,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행실을 해치지 않는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증자(曾子)는 ‘승모(勝母)’라는 이름의 고을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묵자(墨子)는 ‘조가(朝歌)’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수레를 되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포부가 원대한 선비들을 위엄과 막중한 권력으로 다스리고 있으며, 세력 있는 자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일부러 사악한 얼굴과 행실을 더럽히면서까지 아첨을 좋아하는 선비들을 섬기고, 군주의 측근에게도 친하고 가깝게 하기를 바라니, 이렇게 된다면 뜻있는 선비들은 바위 동굴[늪] 속에서 늙어 죽을 수밖에 없으니, 어찌 자신의 충성심과 신의를 다해서 조정을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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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史公曰: 魯連其指意雖不合大義, 然余多其在布衣之位, 蕩然肆志, 不詘於諸侯, 談說於當世, 折卿相之權. 鄒陽辭雖不遜, 然其比物連類, 有足悲者, 亦可謂抗直不橈矣, 吾是以附之列傳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노중련(魯仲連)이 의도는 대의(大義)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나는 벼슬도 지위도 없는 그가 제멋대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쳐 제후들에게 굽히는 일 없이 당대를 평론하고, 고관들의 권력을 꺾은 일은 칭찬한다.
추양(鄒陽)은 말은 비록 공손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사물을 끌어다가 자신의 뜻을 비유한 것은 감동적인 면이 충분히 있으며, 그 또한 강직하고 불굴의 정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때문에 나는 그를 열전(列傳)에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