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1661, 8세의 나이로 즉위(재위기간 61년으로 중국 역대 황제 중 최장수)
- 1669, 16세의 나이로 실질적인 親政 시작
- 1681, 삼번(三藩)의 난[1] 평정
- 1683, 대만의 反淸세력 괴멸
- 1689, 네르친스크 條約[2] 체결, 러시아의 남하 저지
- 1696, 외몽고 점령
- 1718, 티베트 원정 및 복속
시대적 배경
少數 滿洲族이 淸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지 45년, 제4대 황제로 등극
反滿勢力의 한가운데서 민족통합을 이루고 국가역량을 결집시켜야 하는 과업에 직면
성장 과정
8세 때 즉위하여 오배(鰲拜) 등 4명의 대신의 비호 아래 성장
16세 때 황후측 일가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전횡하던 오배 등을 처형하고 권력을 장악
주요 업적
淸나라에 의한 평화시대(Pax Sinica)[3]를 연 “중국의 계몽군주”[4]. 경이로운 리더십을 발휘, 재위기간(61년 간) 중에 국가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강희제(康熙帝)~옹정제(雍正帝)[5]~건륭제(乾隆帝)[6]’로 이어지는 淸나라 전성기를 開幕
거대민족 漢族의 완강한 저항의 벽을 뚫고, 이들의 에너지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원
대만과 티베트 복속으로 현대 중국의 지도 완성
후대에 미친 영향
최근 중국 최고위급 관리들 사이에서 ‘강희제 따라 배우기’ 열풍. 특히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가 강희제 배우기를 독려
중국 관영 CCTV에서는 강희제의 치세를 다룬 ‘康熙帝國’을 황금시간대에 방영(2002.3)
리더십 특성
① 超人的인 誠實性과 學習熱
聖君의 탄생은 努力의 결과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여덟 살에 帝位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영지(芝草)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天書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리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잠시도 쉬지 않는 초인적 성실성 발휘
일일만기(一日萬機), 곧 하루에 1만 건의 사무를 처리
“옛 사람들은 언제나 ‘帝王은 마땅히 크고 중요한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순간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千代, 百代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 강희제의 日課
새벽 4시, 기상 후 先代의 가르침을 담은 조직과 보훈을 읽음
아침 7시, 대신들과 정치를 논의, 업무상 접견을 오후까지 계속
늦은 오후, 학자들을 불러 經書와 歷史 청강
저녁 7~8시, 지방관들이 보내온 주접(奏摺)[7]을 읽고 이에 대한 답장, 즉 유지(有旨)를 작성
황제는 물러나 쉴 곳도 없다
“나는 항상 부지런했으며 조심스러웠고 … 수십 년 동안을 하루같이 온 마음과 힘을 다했노라. 옛날의 제왕 가운데 혹 수명이 길지 못했던 자들에 대해 史論에서는 너무나 방탕하고 주색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대체로 평하고 있지만, 사실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너무 번거로우므로 힘들고 고달픈 바를 감당하지 못해서(일찍 죽은 것)”라고 변론
“늙은 대신들이 올린 물러가 쉬기를 청하는 상주(上奏)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다. 너희는 물러가 쉴 곳이라도 있지만, 짐은 물러가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그의 遺書인 ‘고별상유(告別上諭)’에서 “자신의 마음을 천하를 보살피는 데 다 쏟아 부었노라”고 자부하고, 자신이 “50여 년 동안 태평스러운 세상을 만들려고 애쓴 천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과 “내 삶이 평온한 죽음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란다”는 지극히 평범한 소망을 피력
신하들이 지칠 정도로 맹렬한 학습열 과시
학습에서도 100% 완벽주의를 지향, 책을 통한 학습이 아니라 실증해서 아는 것을 중시
“어떤 것을 확실히 알려면 직접 관찰하거나 경험해보아야만 한다. 귀동냥해서 또는 책장을 넘기다가 언뜻 보고서 무엇을 안다고 하면 진짜로 아는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螢雪之功의 이야기를 듣고 실제 반딧불을 수백 마리 잡아 상자 안에 넣어본 후 글자 한 자 읽을 빛이 나오지 않음을 확인
북변 순행 중 朝鮮에서 보내온 바다사자를 보자 즉시 베이징으로 사람을 보내 서양 사람들이 이 동물을 뭐라고 부르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을 가져오도록 지시
天文學, 地圖製作, 光學, 醫學, 數學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임
4만 9천여 자가 담긴 중국 최고․최대의 사전인 「강희자전(康熙字典)」[8]을 비롯해「全唐詩」,「朱子全書」, 「性理大全」등을 편찬
② 滿洲族-漢族 간 民族統合에 주력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는 대연회를 통해 민족통합의 이벤트를 개최
만주족 출신과 한족 출신 관료들을 함께 초청
상호 이질적인 만주족 먹을거리인 滿食과 한족의 먹을거리인 漢食을 전부 한 데 모으도록 지시. 이들 중에서 요리 비법․색상․맛과 향․건강의 네 가지 기준을 적용해 108가지의 음식을 최종 선발
만주족과 한족의 에너지를 융합하여 大中華의 시너지 창출
15만 명 남짓한 소수민족의 수장으로서 100배에 달하는 1억 5천만 명의 한족을 통치, 268년 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
③ 과감한 대외정복으로 ‘大中國’ 건설 → 현대 중국의 版圖 형성
강희제는 雲南, 臺灣, 蒙古, 티베트 정복으로 오늘날의 중국 영토 확립
집권 초기(1681)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운남 곤명을 장악
1683년 대만을 지배하고 있던 鄭氏의 내분을 계기로 대만을 공격하여 정복함
1689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 후 1697년까지 몽고를 정벌, 외몽고까지 영토를 확대
1720년 중가르 부족[9]을 축출하고 티베트를 복속시킴
강희제는 자신이 삼번의 난을 정벌하고 고비사막을 건너 타타르 원정을 성공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먼 곳에서 온 자를 부드럽게 대하고, 능력 있는 자를 가까이 두며, 세금을 낮추어 백성의 재력을 넉넉하게”했기 때문이라고 자평

자신이 정복한 제국의 판도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한 ‘황여전람도 (皇輿全覽圖)’ 편찬
피에르 자르투, 장 바티스트 레지 등 서양 전문가들에게 제작을 지시. 三角測量 등 당시의 발달한 서양의 測量術을 활용. 1708년부터 측량을 시작, 제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해 1717년에 완성

前왕조의 역사를 편찬하여 지식인들의 反淸감정을 완화하고, 새 시대의 출발을 대내외에 천명
明나라에 향수를 느끼는 지식인, 선비들이 지속적으로 반청감정의 화약고로 잠재
明나라 역사편찬을 통해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사업을 추진. 한림원(翰林院)에 주이존(朱彛尊) 등 50명의 석학들을 모으고 공식 史書(official history)인 「明史」를 편찬(1679년에 시작, 1739년에 간행)
고염무(顧炎武, 1613~1682), 황종희(黃宗羲, 1610~1695) 등 당대 최고 석학은 끝까지 참여를 거부했으나, 제자들의 질의․자문을 통해 최소한의 협력을 유도, 명분을 확보. 황종희는 자신의 제자와 아들을 편찬 작업에 참여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협력
※ 明史 편찬의 의도
1) 新왕조가 前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오랜 전통을 계승하여 淸이 합법적인 新왕조임을 천명
2) 공식적 역사인 明史 편찬으로 明나라가 과거사가 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明朝回復 운동을 좌절시킴
3) 明史 편찬사업에 明나라 석학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지식인들의 국가에 대한 협력을 유도하고 그 명분을 축적
[1] 삼번(三藩)의 난: 중국 淸나라 때인 1673∼1681년에 일어났던 漢人將軍의 반란. 삼번이란 윈난(雲南)의 오삼계(吳三桂), 광둥(廣東)의 상지신(尙之信), 푸젠(福建)의 경정충(耿精忠)을 지칭. 이들은 각자 藩部를 설치하여 淸朝에 대립. 오삼계(吳三桂)의 사망 후 청조에 의해 평정되고, 이를 계기로 淸나라의 중국지배권이 확립.
[2]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 1689년 淸나라와 러시아가 헤이룽 강(黑龍江) 주변에서 빈발했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네르친스크에서 맺은 조약으로 淸이 유럽 여러 나라와 맺은 최초의 평등조약. 러시아는 淸과 교역을 희망하였고, 淸은 러시아와 강화하여 당시 몽골에서 위세를 떨치던 중가르 부족을 고립시키고자 함
[3] 팩스 시니카(Pax Sinica): 중국이 세계를 제패해 세계 평화가 온다는 의미. 차이나(China)의 유래가 秦(Chin)이며, 진을 라틴어식으로 표현하면 시니카(Sinica).
[4]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인 볼테르(Voltaire)의 이야기.
[5] 옹정제(雍正帝, 1678∼1735): 淸나라 5대 황제(1722∼1735).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치세가 13년이었으나 강희제 60년의 방만정치(放漫政治)를 물려받아 관료의 기강을 확립하고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였으며, 재정을 개혁하고 淸나라의 지배권을 확립.
[6] 건륭제(乾隆帝, 1711∼1799): 淸나라 6대 황제(1735∼1795). 묘호는 고종(高宗)으로 옹정제의 넷째아들. 선대에 확립된 국위를 확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淸왕조의 최고 전성기를 개막.
[7]주접(奏摺): 관료들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종의 비밀통신.
[8]강희자전(康熙字典): 중국 최대의 자전. 大學士 장옥서(張玉書), 진정경(陳廷敬) 등이 강희제의 칙명으로 5년 만에 엮은 것인데 총자수가 4만 9,030자이며, 1716년 완성. 오늘날의 한자사전 체제를 정립.
[9]중가르(準喝爾, 준가얼, Jungar): 17세기초 서북 몽골 고원에서 발흥하여 18세기 중엽까지 이어진, 오이라트([瓦刺)족이 세운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