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춘추 #산해경 #우공구주 #현이창수玄夷蒼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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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之前君無余者, 〈無余, 禹之六世孫, 少康之庶子也. 初受封於越, 越舊經作無餘.〉 夏禹之末封也.
禹父鯀者, 帝顓頊之後. 〈《帝王世紀》曰: 「鯀, 帝顓頊之子, 字熙連.」 《山易》曰: 「鯀封於崇, 故《國語》謂之崇伯鯀.」 《史記》曰: 「鯀之父帝顓頊.」 《世本》亦以鯀為顓頊子. 《漢律曆志》則曰: 「顓頊五世而生鯀.」 《通鑑外紀》從之. 《古史》曰: 「太史公以鯀為顓頊之子, 其世太廹.」 班固以為五世孫, 近得之. 此書以為顓頊之後, 曰『後』者, 可以通子孫言之也.〉
鯀娶於有莘氏之女, 名曰女嬉. 年壯未孳. 嬉於砥山得薏苡而吞之, 意若為人所感, 因而姙孕, 剖脅而產高密. 〈《世本》曰: 「鯀娶有莘氏女, 謂之女志, 是生高密.」 宋忠曰: 「高密, 禹所封國.」 《世紀》曰: 「鯀妻脩已, 見流星貫昴, 夢接意感, 又吞神珠薏苡而生禹, 名文命, 字密.」 《史記》以文命為禹之名. 孔安國謂「禹為名」, 張晏謂「禹為字」, 今並存之.〉
家於西羌, 地曰石紐. 石紐在蜀西川也. 〈在茂州石泉縣, 其地有禹廟. 郡人相傳禹以六月六日生. 《元和郡縣志》: 「禹汝山廣柔人生於石紐村.」 《水經註》: 「縣有石紐鄉, 禹所生也.」 廣柔即今石泉軍.〉
월越의 이전 군주 무여無余는 〈무여는 우禹의 6세손이며 소강少康의 서자이다. 처음으로 월越에 봉해졌으며, 옛 문헌에서는 ‘무여無餘’로도 쓴다.〉 하나라夏 우禹의 말년에 봉해진 인물이다.
우의 아버지 곤鯀은 제선욱帝顓頊의 후손이었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곤은 제선욱의 아들이며, 자는 희련熙連”이라 했고, 《산역山易》에서는 “곤은 숭崇에 봉해졌으며, 그래서 《국어國語》에서는 그를 숭백곤崇伯鯀”이라 했다. 《사기史記》는 “곤의 아버지는 제선욱”이라 하고, 《세본世本》도 곤을 제선욱의 아들이라고 했다. 《한율력지漢律曆志》에서는 “제선욱으로부터 5세가 지나 곤이 태어났다”고 하고, 《통감외기通鑑外紀》도 이를 따른다. 《고사古史》에서는 “태사공太史公은 곤을 제선욱의 아들이라 했는데 세대가 너무 가깝다”고 말했고, 반고班固는 5세손이라 보아 더 근거 있는 설로 여긴다. 이 책에서는 곤을 제선욱의 ‘후손’이라 했는데, ‘후後’란 자손 전체를 포괄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곤은 유신씨有莘氏의 딸을 아내로 삼았고, 이름은 여희女嬉였다.
그녀는 장성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지산砥山에서 율무[薏苡]를 얻어 그것을 삼키고는, 마치 사람의 감응을 받은 듯한 기운을 느껴 임신하게 되었고, 갈빗대를 갈라 고밀高密을 낳았다.
〈《세본世本》에는 “곤이 유신씨의 딸 여지女志와 결혼했고, 그녀가 고밀을 낳았다”고 했고, 송충宋忠은 “고밀은 우가 봉해졌던 나라이다”라고 했으며, 《세기世紀》에서는 “곤의 아내 수이脩已가 유성을 보고 감응을 받아 꿈을 꾸었고, 다시 신령한 구슬과 율무를 삼켜 우를 낳았는데, 이름은 문명文命, 자는 밀密”이라 했다. 《사기史記》에서는 문명을 우의 이름이라 하고, 공안국孔安國은 ‘우’가 본명이라 했으며, 장안張晏은 ‘우’가 자라고 했다. 오늘날에는 두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그 집은 서강西羌에 있었고, 그 땅을 석뉴石紐라 했다. 석뉴는 촉蜀의 서쪽 지방인 서천西川에 있었다.
〈무주茂州의 석천현石泉縣에는 그 지역에 우묘禹廟가 있었고, 고을 사람들은 우가 음력 6월 6일에 태어났다고 전했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서는 “우는 여산汝山 광유廣柔의 석뉴촌石紐村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며, 《수경주水經註》에는 “현에 석뉴향石紐鄉이 있었는데, 그곳이 우가 태어난 곳이다”라 했다. ‘광유廣柔’는 지금의 석천군石泉軍을 가리킨다.〉
帝堯之時, 遭洪水滔滔, 天下沉漬, 九州閼塞, 四瀆壅閉. 帝乃憂中國之不康, 悼黎元之罹咎, 乃命四嶽, 乃舉賢良, 將任治水. 自中國至于條方, 莫薦人, 帝靡所任. 四嶽乃舉鯀而薦之於堯. 帝曰: 「鯀負命毀族, 不可.」 〈《尚書》〈堯典〉作「方命圯族」, 《史記》〈堯本紀〉作「負命毀族」. 《正義》曰: 「負音佩, 違也. 鯀性狼戾, 違負教命, 毀敗善類, 不可用也.」〉四嶽曰: 「等之羣臣, 未有如鯀者.」 堯用治水, 受命九載, 功不成. 帝怒曰: 「朕知不能也.」 乃更求之, 得舜, 使攝行天子之政, 巡狩. 觀鯀之治水, 無有形狀, 乃殛鯀於羽山. 〈《地志》: 在東海郡祝其縣南, 今海州朐山縣.〉 鯀投于水, 化為黃能, 〈或作熊〉因為羽淵之神. 〈《左傳》昭公七年: 晉侯有疾, 夢黃熊入於寢門. 子產曰: 「昔堯殛鯀於羽山, 其神化為黃熊, 以入于羽淵.」 杜預解: 「熊音雄, 獸名, 亦作能. 如字, 一音奴來切, 三足鼈也.」 按《說文》及《字林》皆云: 「能, 熊屬, 足似鹿.」 然則能既熊屬, 又為鼈類. 作能者勝也. 東海人祭禹廟, 不用熊白及鼈為膳, 豈鯀化為二物乎? 〉舜與四嶽舉鯀之子高密. 四嶽謂禹曰: 「舜以治水無功, 舉爾嗣, 考之勳.」 禹曰: 「俞, 小子敢悉考績, 以統天意, 惟委〈委字下當有任字〉而已.」
제요帝堯의 때에 큰 홍수가 일어나 물결이 넘실거렸고, 천하는 잠기고 침수되었으며, 구주九州는 막혔고, 사독四瀆은 메워져 흐르지 못했다. 요는 중원[中國]의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백성들이 재앙을 입는 것을 슬퍼하여 사악四嶽에게 명하여 어진 이를 천거하게 하고, 치수를 맡기려 했다. 중원에서 조방條方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폈으나 마땅히 추천할 사람이 없었고, 요도 마땅히 임명할 자를 얻지 못했다. 이에 사악이 곤鯀을 천거하여 요에게 올렸다.
요가 말하기를, “곤은 명을 거역하고 족속을 무너뜨렸으니 쓸 수 없다.”고 했다.
〈《상서尚書》 〈요전堯典〉에는 ‘방명이족方命圯族’이라 하고, 《사기史記》 〈요본기堯本紀〉에는 ‘부명훼족負命毀族’이라 했다. 《정의正義》에서는 “부負는 패佩의 음으로 ‘거역하다’는 뜻이다. 곤은 성품이 흉포하고 교화와 명령을 어기며 선한 무리를 해쳤으므로 쓸 수 없는 자이다.”라 했다.〉
사악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 가운데 곤과 같은 자는 없습니다.”
요는 결국 곤을 등용하여 치수를 맡겼고, 9년 동안 명을 받들었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다.
요는 분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가 해내지 못할 줄 알았다.” 하고는, 다른 인재를 구하여 순舜을 얻어 천자의 정사를 대행하게 하고, 순행을 맡겼다.
그는 곤이 치수에 아무런 성과가 없음을 보고, 곤을 우산羽山에 가두어 죽였다.
〈《지지地志》에 따르면 이는 동해군東海郡 축기현祝其縣 남쪽, 지금의 해주海州 구산현朐山縣이다.〉
곤은 물속에 몸을 던졌고, 황능黃能으로 변했으며 〈혹은 ‘곰熊’이라고도 한다〉, 이후 우연羽淵의 신이 되었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7년에 따르면, 진후晉侯가 병들어 황곰이 침실 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자산子產이 말하기를 “옛날 요가 곤을 우산에 가두었는데, 그의 신이 황곰으로 변해 우연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두예杜預는 “웅熊은 ‘웅雄’과 같은 음이며, 짐승의 이름이고, ‘능能’이라고도 한다. ‘능’은 ‘노래奴來’의 반절음으로 읽히면 세 발 달린 자라를 뜻하기도 한다. 《설문說文》과 《자림字林》에 따르면, ‘능’은 곰의 일종이며 발이 사슴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능’은 곰에 속하기도 하고 자라류이기도 하다. ‘능能’이라는 글자는 ‘이김’을 뜻하기도 한다. 동해東海 사람들은 우묘禹廟에 제사할 때 곰고기, 흰고기, 자라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곤이 두 가지 동물로 변했다는 전설 때문일지도 모른다.”라 했다.〉
그 뒤 순은 사악과 함께 곤의 아들 고밀高密을 천거했다. 사악이 우禹에게 말하기를, “순이 치수에 공을 이루지 못한 자를 대신하여 너를 후계로 삼았으니, 너는 그 공적을 살펴 계승하라”고 했다.
우가 말하기를, “예, 이 어린 자가 감히 모든 업적을 살펴 하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다만 맡을 뿐입니다.”
〈‘위委’ 자 아래에는 마땅히 ‘임任’ 자가 있어야 한다.〉
禹傷父功不成, 循江, 泝河, 盡濟、甄〈甄字不通, 疑暨字之誤〉、淮, 乃勞身焦思以行七年. 聞樂不聽, 過門不入, 冠挂不顧, 履遺不躡. 功未及成, 愁然沈思.
乃案《黃帝中經歷》, 蓋聖人所記. 曰: 在於九山東南天柱, 號曰宛委. 〈在會稽縣東南十五里, 一名玉笥山.〉 赤帝在闕, 其巖之巔, 承以文玉, 覆以盤石. 其書金簡, 青玉為字, 編以白銀, 皆瑑其文.
우禹는 아버지 곤鯀이 업적을 이루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강江을 따라 내려가고, 하河를 거슬러 올라가며, 제수濟水, 급수暨水, 〈‘견甄’은 통하지 않으므로 ‘급暨’의 잘못된 자로 보인다〉 회수淮水를 끝까지 따라가며 살폈다.
그는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태워 생각하며 7년을 다녔다. 음악을 들어도 듣지 않았고, 집 앞을 지나도 들어가지 않았으며, 갓을 걸어 두고도 돌아보지 않았고, 신을 잃어버려도 다시 신지 않았다.
공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수심에 잠겨 깊이 생각하던 중, 그는 《황제중경력黃帝中經歷》을 펼쳐 살펴보았다. 이는 성인이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아홉 산의 동남쪽, 하늘 기둥 같은 곳에 ‘완위宛委’라 부르는 산이 있으니, 〈회계현會稽縣 동남쪽 15리에 있으며, ‘옥사산玉笥山’이라고도 부른다〉, 적제赤帝의 궁문이 그곳에 있고, 그 험한 바위 꼭대기는 무늬 있는 옥으로 받쳐져 있으며, 넓은 바위로 덮여 있다. 그곳에는 금간金簡의 책이 있으며, 청옥青玉으로 글자를 새기고, 흰 은으로 엮었으며, 모두 정교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다.
禹乃東巡, 登衡嶽, 血白馬以祭, 不幸所求. 禹乃登山, 仰天而嘯. 因夢見赤繡衣男子, 自稱玄夷蒼水使者, 聞帝使丈命於斯, 故來候之. 非厥歲月, 將告以期, 無為戲吟. 故倚歌覆釡之山. 〈《輿地志》: 會稽山有石狀如覆鬴, 謂之覆鬴山. 一名釡山. 鬴亦作釜. 《史記》〈黃帝本紀〉曰: 「合符釜山.」 《索隱》以為: 「合諸侯符契圭璋而朝之於釜山, 在媯州懷戎縣北三里.」 非此之釜山也.〉
東顧謂禹曰: 「欲得我山神書者, 齋於黃帝巖嶽之下三月. 庚子登山, 發石, 金簡之書存矣.」
禹退, 又齋三月. 庚子登宛委山, 發金簡之書. 案金簡玉字, 得通水之理. 〈徐天祐曰: 「禹未嘗兩至越, 其至越在會計之時, 非治水時也. 《禹貢》記南方山川多與今不合, 禹治水時未嘗親至南方故也. 《孟子》曰: 禹八年於外. 《禹貢》云作十三載乃同, 或者以為比禹治水之年通鯀九載言之也. 馬融曰: 禹治水三年而八州平, 是十二年而八州平, 十三年而兗州平. 兗州平在舜受終之年, 然則禹之成功不過三四年間耳. 此書謂勞身焦思七年, 功未及成, 乃東巡登宛委, 發金簡之書, 得通水之理, 使禹之治水七年而後得神書, 始知通水之理, 不已晚乎? 諸若此類, 蓋傳疑尚矣.」〉
우禹는 동쪽으로 순행하여 형악衡嶽에 올라, 흰 말을 잡아 피로 제사했으나 바라는 바를 얻지 못했다. 이에 산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쳤다. 그러자 꿈에 붉은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서, 스스로를 ‘현이창수사자玄夷蒼水使者’라 칭하고 말하기를, “천제가 이곳에서 명을 내리셨기에 찾아온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약을 알려 주겠다. 헛된 읊조림을 하지 말라.” 그리고는 복부覆釜처럼 생긴 산에 기대어 〈《여지지輿地志》에는 회계산會稽山에 솥을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돌이 있어 복부산覆鬴山이라 하며, 또 이를 ‘부산釡山’이라 하고, ‘부鬴’는 ‘부釜’로도 쓴다. 《사기史記》 〈황제본기黃帝本紀〉에서는 “부산釡山에서 부계符契를 모았다”고 했고, 《색은索隱》은 “제후들이 부계符契와 규장圭璋을 가지고 모여 조회하던 곳이 바로 규주媯州 회융현懷戎縣 북쪽 3리의 부산釜山이다.”라고 하여, 여기서 말하는 부산釜山과는 다른 곳이다.〉동쪽을 바라보며 우에게 말했다. “우리 산의 신령의 서책을 얻고자 한다면 황제의 암악巖嶽 아래에서 석 달 동안 재계하라. 3월 경자일에 산에 올라 바위를 깨면 금간金簡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우는 물러나 다시 석 달 동안 재계하고, 경자일에 완위산宛委山에 올라 바위를 깨니 금간의 책이 있었다. 그 금간에는 옥으로 새긴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것으로 물을 통하게 하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서천우徐天祐는 말하길 “우는 월越에 두 번 이른 적이 없으며, 그가 월에 간 것은 회계會稽를 정리하던 시기의 일이고, 치수를 하던 때가 아니었다. 《우공禹貢》에 기록된 남방의 산천은 지금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으니, 이는 우가 치수하던 시기에는 남방에 직접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맹자孟子》는 우가 8년 동안 외지에 있었다고 했고 《우공禹貢》에서는 13년에 걸쳐 작업했다고 하니, 혹자는 이것이 곤鯀의 9년을 포함하여 계산한 것이라 한다. 마융馬融은 “우가 치수를 3년 동안 하여 8주州를 평정했으니, 이는 12년에 8주를 평정한 것이고, 13년에 연주兗州를 평정한 것이다. 연주가 평정된 것은 순舜이 제위를 넘겨준 해이므로, 우의 공업은 3~4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우가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태워 7년간 노력했으나 아직 성공하지 못했을 때 동쪽으로 순행하여 완위산에 올라 금간의 책을 열고 수리水理의 이치를 얻었다고 한다. 만약 우가 7년이 지나서야 신의 책을 얻고 비로소 물을 통하게 하는 이치를 알았다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이와 같은 류의 서술은 대체로 전하는 내용에 의심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復返歸嶽, 乘四載〈陸行乘車, 水行乘船, 泥行乘橇, 山行乘檋. 橇音蕝, 檋丘遥切.〉 以行川. 始於霍山〈南嶽衡山, 又名霍山. 泰與岱、衡與霍, 皆一山二名.〉 , 徊集五嶽. 詩云: 「信彼南山, 惟禹甸之.」
우禹는 다시 돌아와 오악五嶽으로 귀환했고, 사륜의 탈 것을 타고 강을 따라 다녔다.
〈육지에서는 수레를 타고, 물에서는 배를 타며, 진흙에서는 썰매를 타고, 산에서는 ‘국檋’을 탔다. ‘취橇’는 ‘절蕝’과 같은 음이며, ‘국檋’은 ‘구요丘遥’의 반절음이다.〉
그는 물길을 따라 나아갔으며, 그 시작은 곧 곽산霍山이었다
〈남악南嶽 형산衡山은 곽산霍山이라고도 불린다. 태산은 대산岱山이라 하고, 형산은 곽산이라 하니, 다 같은 산이면서 이름만 두 개이다.〉
그는 오악을 두루 돌며 집결했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참으로 저 남산은 신뢰할 만하니, 바로 우가 다스린 땅이다.”라 했다.
遂巡行四瀆, 與益、夔共謀, 行到名山大澤, 召其神而問之: 山川脈理、金玉所有、鳥獸昆蟲之類, 及八方之民俗、殊國異域、土地里數. 使益疏而記之, 故名之曰《山海經》.
우禹는 이에 사독四瀆을 따라 순행했고, 익益과 기夔와 함께 의논하며, 명산과 큰 못에 이르렀다. 그곳의 신을 불러 물었다. 산천의 흐름과 맥락, 금옥金玉이 나는 곳, 새와 짐승, 곤충의 종류, 그리고 팔방의 풍속, 서로 다른 나라와 이국의 형세, 땅의 거리와 면적에 대해 살폈다. 이에 익으로 하여금 조목별로 정리하여 기록하게 했고, 그래서 그것을 《산해경山海經》이라 이름 지었다.
禹三十未娶, 行到塗山. 〈《會稽志》: 塗山在山陰縣西北四十五里. 蘇鶚《演義》: 塗山有四, 一會稽, 二渝州已南舊江州, 三濠州, 四當塗縣. 按《左氏》昭公四年傳: 「穆有塗山之會.」 哀公七年傳: 「禹合諸侯于塗山.」 杜預解並云: 「在壽春東北.」 說者曰: 「今濠州也.」 柳宗元〈塗山銘序〉曰: 「周穆遐追遺法, 復會于是山.」 然則禹與穆王皆嘗會諸侯於塗山矣, 然非必皆壽春也. 若禹之所娶, 則未詳何地. 《水經注》: 「江州縣水北岸有塗山, 南有夏禹廟、塗君祠, 廟銘存焉.」 常璩、庾仲雍並言禹娶於此. 《越絶》等書乃云: 「禹娶於會稽塗山.」 應劭曰: 「在永興北.」 永興今蕭山縣也, 又與郡志所載不同. 蓋會稽實禹會侯計功之地, 非所娶之國. 下文兼載白狐九尾之異, 尤為可疑.〉
恐時之暮, 失其度制, 乃辭云: 「吾娶也, 必有應矣.」 乃有白狐九尾造於禹. 禹曰: 「白者, 吾之服也;其九尾者, 王之證也.」 塗山之歌曰: 「綏綏白狐, 九尾厖厖. 我家嘉夷, 來賓為王. 成家成室, 我造彼昌. 天人之際, 於兹則行.」 明矣哉.
禹因娶塗山, 謂之女嬌. 取辛壬癸甲. 〈《呂氏春秋》曰: 「禹娶塗山氏女, 不以私害公, 自辛至甲四日, 復往治水.」〉
禹行, 十月, 女嬌生子啓. 啓生不見父, 晝夕呱呱啼泣.
우禹는 서른이 되도록 장가들지 않았고, 도산塗山에 이르렀다.
〈《회계지會稽志》에는 도산이 산음현山陰縣 서북 45리에 있다고 했고, 소악蘇鶚의 《연의演義》에는 도산이 네 곳 있다 하며, 첫째는 회계會稽, 둘째는 유주渝州 이남의 옛 강주江州, 셋째는 호주濠州, 넷째는 당도현當塗縣이라 했다. 《좌전左傳》 소공 4년조에는 “주목왕周穆王이 도산에서 제후들을 회합했다”고 하고, 애공 7년조에는 “우가 제후들을 도산에 모았다”고 했으며, 두예杜預의 주석에는 “도산은 수춘壽春 동북에 있다”고 했다. 어떤 이는 지금의 호주라 하며, 유종원柳宗元의 〈도산명서塗山銘序〉에는 “주목왕이 옛 법을 좇아 다시 이 산에서 회합했다”고 했으니, 우와 주목왕 모두 도산에서 제후들을 모은 적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수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가 아내를 맞은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수경주水經注》에는 “강주江州 현수縣水의 북쪽 기슭에 도산이 있고, 남쪽에는 하나라 우의 사당과 도군塗君의 사당이 있으며, 사당의 명문이 지금도 전해진다”고 했다. 상거常璩, 유중옹庾仲雍 등은 모두 우가 그곳에서 아내를 맞았다고 했으며, 《월절서越絶書》 등은 “우가 회계 도산에서 혼인했다”고 했다. 응소應劭는 “도산은 영흥永興 북쪽에 있다”고 했고, 영흥은 지금의 소산현蕭山縣이다. 또 다른 문헌들과도 다르다. 대체로 회계는 우가 제후들과 만나 공을 헤아린 곳이지, 아내를 맞은 나라가 아니다. 아래에는 아홉 꼬리의 흰 여우 이야기까지 함께 실려 있어 더욱 의심스럽다.〉
우는 날이 저물까 두려워 길과 제도를 잃을까 염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가들려는 것은 반드시 하늘의 감응이 있을 것이다.”
그러자 아홉 꼬리를 가진 흰 여우가 우 앞에 나타났다. 우가 말하기를, “흰 것은 나의 의복이고, 그 아홉 꼬리는 왕이 될 징조다”라 했다.
도산의 노래에 이르기를, “순하고 부드러운 흰 여우여, 아홉 꼬리가 무성하도다, 우리 집 훌륭한 이가 손님으로 와 왕이 되었네, 집을 이루고 가정을 이루니, 내가 그 창성함을 이루리라, 하늘과 사람의 경계에서 여기에서 실현되리라.” 했다.
이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우는 이에 도산의 여인을 아내로 삼았고, 그녀를 여교女嬌라 불렀다. 신일辛日, 임일壬日, 계일癸日, 갑일甲日을 택해 우는 다시 길을 떠났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우는 도산씨의 딸과 혼인했으나, 사사로운 일로 공을 해치지 않고, 신일부터 갑일까지 나흘간 함께 지낸 뒤 다시 치수 사업을 하러 갔다.”고 했다.〉
우가 길을 떠난 뒤, 10개월이 지나 여교는 아들 계啓를 낳았다. 계는 태어나면서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밤낮으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禹行, 使大章步東西, 豎亥度南北. 〈《淮南子》: 禹使大章步自東極至於西垂, 豎亥步自南極盡於北垂. 許慎曰: 「大章、豎亥善行, 人皆禹臣.」〉暢八極之廣, 旋天地之數.
우禹는 길을 나서 대장大章에게 동서 방향을 따라 걷게 하고, 수해豎亥에게는 남북을 따라 측량하게 했다.
〈《회남자淮南子》에는 “우가 대장으로 하여금 동쪽 극지에서 서쪽 끝까지 걷게 하고, 수해로 하여금 남쪽 극지에서 북쪽 끝까지 걷게 했다.”고 하며, 허신許慎은 “대장과 수해는 걷기를 잘했으며, 모두 우의 신하였다.”고 했다〉
그리하여 팔극八極의 넓이를 소통시키고, 천지의 수數를 두루 측정했다.
禹濟江, 南省水理. 黃龍負舟, 舟中人怖駭. 禹乃啞〈鳥格切, 笑聲. 《易》〈震卦〉: 「笑言啞啞」, 音同.〉 然而笑, 曰: 「我受命於天, 竭力以勞萬民. 生, 性也;死, 命也. 爾何為者? 」 顔色不變, 謂舟人曰: 「此天所以為我用.」 龍曳尾, 舍舟而去.
우禹는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물의 이치를 살폈다. 그때 황룡黃龍이 배를 등에 업었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놀랐다. 우는 이에 아아 하고 웃었다.
〈‘아啞’는 새가 우는 소리와 같은 웃음소리이다. 《역경易經》 〈진괘震卦〉에 “웃는 말소리가 아아啞啞”라 하며, 소리가 같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명을 받았고, 온 힘을 다해 만백성을 위해 수고하고 있다. 삶은 본성이고, 죽음은 운명이다. 너는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했다.
그의 얼굴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배 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를 위해 보내준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용은 꼬리를 끌며 배를 놓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南到計於蒼梧, 〈《檀弓》: 「舜葬於蒼梧之野.」 《史記》: 「舜死於蒼梧之野, 葬於九疑.」 今九疑山在道州寧遠縣南六十里, 亦名蒼梧山.〉 而見縛人, 禹拊其背而哭. 益曰: 「斯人犯法, 自合如此, 哭之何也? 」 禹曰: 「天下有道, 民不罹辜;天下無道, 罪及善人. 吾聞: 一男不耕, 有受其飢;一女不桑, 有受其寒. 吾為帝, 統治水土, 調民安居, 使得其所. 今乃罹法如斯, 此吾德薄, 不能化民之證也. 故哭之悲耳.」
우禹는 남쪽으로 내려가 창오蒼梧에 이르렀다.
〈《단궁檀弓》에는 “순舜이 창오의 벌판에 묻혔다.”고 했고, 《사기史記》에는 “순이 창오의 벌판에서 죽고 구의산九疑에 묻혔다.”고 했다. 지금 구의산은 도주道州 영원현寧遠縣 남쪽 60리에 있으며,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한다.〉
그곳에서 결박된 사람을 보고, 우는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익益이 말했다. “이 사람은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는가?”
우가 말했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백성은 죄를 입지 않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죄는 선한 이에게까지 미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한 남자가 밭을 갈지 않으면 누군가는 굶주리고, 한 여자가 뽕을 따지 않으면 누군가는 추위에 떤다. 나는 천자로서 수토水土를 다스리고 백성을 조절하여 편안히 살게 해 각기 제자리를 얻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이 이처럼 법에 걸려 형벌을 받았으니, 이는 내 덕이 박하여 백성을 교화하지 못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내가 우는 것은 다만 슬픔 때문일 뿐이다.”
於是周行㝢內, 東造絕跡, 西延積石, 〈《地志》: 在金城郡河關縣西南, 今邵州龍支縣界.〉 南踰赤㟁, 〈《水經》: 新安縣南白石山名廣陽山, 水曰赤岸水.〉 北過寒谷, 〈劉向《別錄》: 燕有黍谷, 地美而寒, 不生五穀. 鄒子居之, 吹律而温氣至. 左思《賦》: 「寒谷豐黍, 吹律煖之也.」〉徊崑崙, 〈《崑崙說》曰: 崑崙之山三級, 下曰樊桐, 一名板松;中曰玄圃, 一名閬風;上曰層城, 一名天庭. 《地理志》: 在臨羌西, 即河源所出.〉 察六扈, 脈地理, 名金石.
寫流沙於西隅, 〈《地理志》: 流沙在居延西北. 杜佑曰: 「在沙州西八十里, 其沙隨風流行, 故曰流沙.」〉决弱水於北漢, 〈《地理志》: 弱水在張液郡刪丹縣. 柳宗元曰: 「水散渙無力, 不能負芥. 投之則委靡墊沒及底而後止, 故曰弱.」〉青泉、赤淵分入洞穴, 通江東流, 至於碣石. 〈《地理志》: 在北平郡驪戎縣西南, 今平州之府.〉
疏九河於潛淵, 開五水於東北, 鑿龍門, 〈《地志》: 在馮翊夏陽縣, 今河中府龍門縣.〉 闢伊闕, 〈在洛陽西南五十里. 禹疏以通水, 兩山相對, 望之若闕. 伊水歷其間北流, 故曰伊闕.〉 平易相土, 觀地分州. 殊方各進, 有所納貢, 民去崎嶇, 歸於中國.
우禹는 이에 온 천하를 두루 돌았다. 동쪽으로는 사람이 발길을 끊은 극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적석積石까지 뻗어갔다.
〈《지지地志》에 따르면 적석은 금성군金城郡 하관현河關縣 서남, 지금의 초주邵州 용지현龍支縣 경계에 있다.〉
남쪽으로는 적안赤岸을 넘었고,
〈《수경水經》에 따르면 신안현新安縣 남쪽에 있는 백석산白石山은 광양산廣陽山이라 하며, 그 물을 적안수赤岸水라 한다.〉
북쪽으로는 한곡寒谷을 지나갔다.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에는 연燕 지방에 기장이 풍성한 골짜기가 있는데 땅이 추워 오곡이 자라지 않으므로 ‘한곡寒谷’이라 하며, 추자鄒子가 그곳에 거처하며 퉁소를 불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고 했다. 좌사左思의 《부賦》에는 “한곡에 기장이 풍성한 것은 퉁소로 따뜻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우는 곤륜산崑崙을 돌고,
〈《곤륜설崑崙說》에 따르면 곤륜산은 세 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는 번동樊桐 혹은 판송板松, 가운데는 현포玄圃 혹은 낭풍閬風, 위는 층성層城 혹은 천정天庭이라 한다. 《지리지地理志》에는 이 산이 임강臨羌 서쪽에 있으며, 황하의 근원이라고 했다.〉
육호六扈를 살펴보고, 지세의 맥락을 따져 금석金石의 이름을 정했다.
서북 끝의 유사流沙를 기록했고,
〈《지리지》에는 유사가 거연居延 서북에 있으며, 두우杜佑는 “사주沙州 서쪽 80리에 있고, 그 모래는 바람에 따라 흐르므로 ‘유사’라 한다.”고 했다.〉
북한北漢 지방에서는 약수弱水의 흐름을 열었다.
〈《지리지》에 따르면 약수는 장액군張液郡 산단현刪丹縣에 있으며, 유종원柳宗元은 “물이 흩어져 흐르고 힘이 없어, 겨자씨 하나조차 떠받치지 못한다. 그것을 던지면 축 늘어져 가라앉아 바닥에 닿은 뒤에야 멈추므로 ‘약’이라 한다.”고 했다.〉
청천青泉과 적연赤淵의 물줄기는 동굴 속으로 나뉘어 흘러 들어가 장강江과 합류해 동쪽으로 흐르며, 마침내 갈석碣石에 이르렀다.
〈《지리지》에 따르면 갈석은 북평군北平郡 여융현驪戎縣 서남, 지금의 평주平州 부근에 있다.〉
그는 잠연潛淵에서는 구하九河의 흐름을 정리하고, 동북 지방에서는 오수五水를 열었으며,
용문龍門을 뚫고,
〈《지지》에 따르면 이는 풍익馮翊 하양현夏陽縣, 지금의 하중부河中府 용문현龍門縣에 있다.〉
이각伊闕을 넓혔다.
〈이곳은 낙양洛陽 서남쪽 50리에 있으며, 우가 이곳을 뚫어 물이 통하게 했고, 두 산이 서로 마주 서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궁문의 문처럼 보여 ‘이각伊闕’이라 한다. 이수伊水는 그 사이를 따라 북쪽으로 흐른다.〉
우는 상토相土의 땅을 평탄하게 만들고, 땅의 형세를 살피며 구주九州의 구획을 정했다.
변방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공물을 바쳤으며, 백성들은 험한 땅을 떠나 모두 중원[中國]으로 돌아왔다.
堯曰: 「俞!以固冀於此.」 乃號禹曰伯禹, 官曰司空, 賜姓姒氏, 領統州伯, 以巡十二部.
堯崩, 禹服三年之喪, 如喪考妣. 晝哭夜泣, 氣不屬聲.
堯禪位於舜, 舜薦大禹, 改官司徒, 內輔虞位, 外行九伯.
요堯가 말했다. “좋다! 이곳에서 기주冀를 굳건히 하겠다.”
이에 우禹를 ‘백우伯禹’라 칭하고, 관직을 사공司空이라 하며, 성씨를 사씨姒氏로 내려주고, 주백州伯을 총괄하게 하여 12부十二部를 순행하게 했다.
요가 붕어하자, 우는 삼년상三年喪을 치렀고,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낮에는 울고 밤에는 눈물 흘리며, 울음소리는 숨과 이어지지 않았다.
요는 제위를 순舜에게 선양했고, 순은 우를 천거하여 관직을 사도司徒로 바꾸고, 안으로는 우가 우씨虞氏의 왕위를 보좌하게 하고, 밖으로는 구백九伯의 일을 맡겨 행하게 했다.
舜崩, 禪位命禹. 禹服三年, 形體枯槁, 面目黎黑. 讓位商均, 退處陽山之南, 〈《史記註》劉熙曰: 「今潁川陽城是也.」〉隂河之北. 萬民不附商均, 追就禹之所, 狀若驚鳥揚天, 駭魚入淵. 晝歌夜吟, 登高號呼, 曰: 「禹棄我, 如何所戴!」 禹三年服畢, 哀民, 不得已, 即天子之位.
순舜이 붕어하자, 제위를 우禹에게 선양했다. 우는 삼년상을 치렀고, 몸은 마르고 초췌했으며, 얼굴빛은 검게 변했다. 그는 제위를 상균商均에게 양보하고, 양산陽山의 남쪽 〈《사기주史記註》에서 유희劉熙는 지금의 영천潁川 양성陽城이라 했다〉, 은하隂河의 북쪽에 물러나 살았다. 그러나 온 백성은 상균에게 따르지 않고, 모두 우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 모습은 놀라 날아오르는 새처럼, 놀라 물속으로 숨는 물고기처럼 급박했다. 낮에는 노래 부르고 밤에는 탄식하며, 높은 곳에 올라가 크게 외치며 말하기를, “우가 우리를 버렸으니,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라 했다. 우는 삼년상을 마친 뒤, 백성을 불쌍히 여겨 마지못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三載考功, 五年政定, 周行天下, 歸還大越. 登茅山, 〈《史記註》: 禹到大越, 上苖山. 《十道志》: 會稽山本名茅山, 一名苖山.〉 以朝四方羣臣, 觀示中州諸侯. 防風後至, 斬以示衆, 示天下悉屬禹也.
乃大會計治國之道, 內美釜山州慎〈慎當作鎮〉之功, 外演聖德以應天心. 遂更名茅山曰會稽之山, 因傳國政, 休養萬民, 國號曰夏后.
封有功, 爵有德;惡無細而不誅, 功無微而不賞. 天下喁喁, 若兒思母, 子歸父.
而留越恐羣臣不從, 言曰: 「吾聞食其實者不傷其枝, 飲其水者不濁其流. 吾獲覆釜之書, 得以除天下之災, 令民歸於里閭. 其德彰彰若斯, 豈可忘乎? 」
乃納言聽諫, 安民治室, 居靡山, 伐木為邑, 畫作印, 横木為門, 調權衡, 平斗斛, 造井示民, 以為法度.
鳳凰棲於樹, 鸞鳥巢於側, 麒麟步於庭, 百鳥佃於澤.
우禹는 3년에 걸쳐 공적을 살펴보고, 5년에 걸쳐 정사를 안정시켰으며, 온 천하를 순행한 뒤 대월大越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산茅山에 올랐다.
〈《사기주史記註》에는 “우가 대월에 이르러 묘산苖山에 올랐다”고 하고, 《십도지十道志》에는 “회계산會稽山의 본래 이름이 모산이고, 다른 이름으로 묘산이라 한다”고 했다.〉
사방의 여러 신하들을 조회하게 하고, 중주의 제후들에게 자신의 위엄을 보였다. 방풍防風이 늦게 도착하자 참수하여 무리들에게 본보기를 삼았고, 천하가 모두 우에게 속함을 알렸다. 그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정리하여 회계했고, 안으로는 부산釜山 주의 진〈‘신慎’은 ‘진鎮’의 오자〉의 공을 찬미했고, 밖으로는 성덕을 펼쳐 하늘의 뜻에 부응했다. 이에 모산의 이름을 회계산會稽之山으로 바꾸고, 국정을 전하고 백성을 쉬게 했으며, 국호를 하후夏后라 했다. 공이 있는 자는 봉했고, 덕이 있는 자는 작위를 내렸으며, 악은 작더라도 벌하지 않음이 없었고, 공은 작더라도 상하지 않음이 없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우를 찬양했고,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아이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듯 따랐다.
그러나 월越에 남아 있던 자들이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해 말했다. “나는 듣기를, 열매를 먹는 자는 가지를 상하게 하지 않고, 물을 마시는 자는 그 흐름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복부覆釜의 책을 얻어 천하의 재앙을 제거하고, 백성들이 마을로 돌아가게 했으니, 그 덕이 이처럼 뚜렷한데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간언을 받아들이고 백성을 안정시키며 집안을 다스렸고, 미산靡山에 거처하며 나무를 베어 마을을 이루고, 도장을 그려 만들었으며, 나무를 가로질러 문을 만들었다. 저울과 추를 조정하고, 말·되·홉을 고르게 했으며, 우물을 파서 백성에게 보이며 법도로 삼았다. 봉황이 나무에 깃들고, 난새가 그 곁에 둥지를 틀었으며, 기린이 뜰을 거닐고, 백 가지 새가 못가에서 노닐었다.
遂已耆艾將老, 歎曰: 「吾晏歲年暮, 壽將盡矣, 止絕斯矣.」 命羣臣曰: 「吾百世之後, 葬我會稽之山, 葦椁桐棺. 〈《墨子》曰: 禹葬會稽, 衣裘三領, 桐棺三寸.〉 穿壙七尺, 下無及泉, 墳高三尺, 土階三等. 葬之後曰: 『無改畝, 以為居之者樂, 為之者苦. 』」
우禹는 마침내 늙고 쇠약해지자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긴 세월도 저물었고, 수명도 다해가니, 이제 멈추고 끊어질 뿐이다.”
그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말했다. “내 백세 뒤에는 나를 회계산會稽之山에 묻어라. 관곽은 갈대로 만든 궤짝에 오동나무 관으로 하라. 〈《묵자墨子》에는 ‘우는 회계에 장사되고, 옷은 가죽옷 세 벌을 입혔으며, 오동나무 관의 두께는 3촌이었다’고 했다.〉 무덤은 깊이 7척으로 파되 아래가 샘물에 닿지 않게 하고, 흙무덤은 높이 3척으로 하며, 흙계단은 3단으로 만들라. 장사를 마친 뒤에는 이렇게 말하라. ‘논밭을 바꾸지 마라. 사는 사람은 즐겁고, 만드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