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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번역]《천하도》의 ‘진형’에 대한 고찰: 고대 지도 연구의 방법론적 문제를 겸하여 논한다: 李軍(2020). 跨文化脈絡下朝鮮《天下圖》之’真形’ – 兼論古代地圖研究的方法論問題[J].

#천하도 #고조선 #산해경
李軍. 跨文化脈絡下朝鮮《天下圖》之’真形’ – 兼論古代地圖研究的方法論問題[J]. 美術大觀, 2020[12]20-37.
李军. 跨文化语境下朝鲜《天下图》之’真形’ 兼论古代地图研究的方法论问题[J]. 美术大观, 2020[12]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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跨文化脈絡下朝鮮《天下圖》之’真形’ – 兼論古代地圖研究的方法論問題
《천하도》의 ‘진형’에 대한 고찰: 고대 지도 연구의 방법론적 문제를 겸하여 논한다

内容摘要

朝鲜王朝从17~19世纪流行一类奇怪的圆形《天下图》, 它由两重大陆和两重大海相互套叠而成, 其图形、布局和地名大致相同, 具有相当的稳定性. 长期以来, 国内外学术界对此类图进行了大量研究, 但众说纷纭, 其真相一直处在扑朔迷离之中. 本文在对学术史进行了细密的梳理和辩证之后, 从三个方面尝试对《天下图》进行最新解读.

초록

조선왕조에서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특이한 형태의 원형 《천하도》가 유행했다. 이 지도는 이중의 대륙과 이중의 대해가 서로 겹쳐 구성되어 있으며, 도형, 구도, 지명 등이 대체로 유사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국내외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지도에 대해 많은 연구를 진행해 왔으나, 다양한 견해가 엇갈리며 그 실상은 여전히 불분명한 상태에 놓여 있다. 본문에서는 학술사에 대한 치밀한 정리와 비판을 바탕으로 《천하도》를 세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关键词: 《天下图》《山海经》《山海舆地全图》《五岳真形图》 昆仑山 长白山
키워드: 《천하도天下圖》, 《산해경山海經》,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 《오악진형도五嶽真形圖》, 곤륜산崑崙山, 장백산

목차

서문: 이상한 초상 한 장

1. 형태와 연대

2. 관찰과 논증

1. 왜 두 개의 중심과 오악五嶽이 이중으로 존재하는가?
2. 《산해경도山海經圖》인가, 《구구주도九九州圖》인가?
3. 원형: 불교의 환우도寰宇圖?
4. 세계도식: 《강리도疆理图》의 변형인가?

3. 도형으로서의 지식: 마테오 리치의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에서 시작

4. 도형 지식의 재구성: 《오악진형도五岳真形圖》의 시각에서

5. 곤륜산과 장백산: 풍수학설 뒤에 숨은 관념

引子: 一张奇怪的肖像
서문: 이상한 초상 한 장

1895年, 法国东方学家莫里斯·古朗[Maurice Courant]在《朝鲜书目》[Bibliographie coréenne]一书的第二卷, 复制了一幅称为《天下诸国图》的18世纪朝鲜“世界地图”[1][图1]. 这是一幅圆形地图, 很容易让人想起西方的一类被称作“寰宇图”[mappa mundi或mappemondes]的地图, 又称“T-O图”[T-O Chart]或“轮形地图”[Circular Map], 其形状约等于字母“T”和“O”的组合“O”代表当时已知的世界, “T”代表将欧亚非三洲分开的水域, 主要流行于中世纪. [2]尽管《天下诸国图》并不是一幅真正的“T-O图”, 但它确实予人以一种十分古老的感觉. 朝鲜学者李益习早在此前三年, 即已断言此类图的年代“漫漶而不可追索”[3]. 古朗的复制是一幅彩绘稿本的黑白图像, 原图已不知去向. 正好现藏于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的一张彩绘设色图[图2]与之十分相像, 可以借此来仔细端详一下.

1895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그의 저서 《조선서목[Bibliographie coréenne]》 제2권에서 한 장의 18세기 조선 “세계지도”를 복제해 실었다. 이 지도는 《천하제국도天下諸國圖》라 불리며, 원형으로 된 도판이다[1][그림1].

[1] Maurice Courant, Bibliographie corenne . Tableau littraire de la Core. Contenant la nomenclature des ouvrages publis dans ce pays jusqu’en 1890 ainsi que la description et l’analyse dtailles des principaux d’entre ces ouvrages, Tome II [Paris: E. Leroux, 1895, No. 2187].

图1. 天下诸国图 原图设色 约 18 世纪下半叶 法国学者古朗收藏
그림1. 《천하제국도》 원도 채색본, 18세기 후반경, 프랑스 학자 Maurice Courant 소장본

 

이 원형 지도는 쉽게 서양의 중세 시대에 유행했던 일종의 “환우도寰宇圖[mappa mundi]” 또는 “T-O도[T-O Chart]”라 불리는 지도 유형을 연상시킨다. 이 지도 유형은 원형의 “O” 안에 “T” 자 모양으로 유럽·아시아·아프리카 3대륙을 구분 짓는 수계를 표시한 형식으로, “환형 지도[Circular Map]”라고도 불렸다[2]. 《천하제국도》는 비록 진정한 의미의 “T-O도”는 아니지만, 매우 고대적인 느낌을 강하게 준다.

[2] 关于“宗教寰宇图”和“T-O图”的相关情况, 参见李军: 《图形作为知识—十幅世界地图的跨文化旅行》[上], 《美术研究》2018年第2期, 第74~76页.

조선의 학자 이익습李益習은 이보다 3년 앞선 시점에 이미 이와 같은 지도의 연대를 “지나치게 희미하여 추적할 수 없다”고 단정한 바 있다[3].

[3] Yi Ik-Seup, “A Map of the World,” in The Korean Repository, vol. I[Seoul: The Trilingual Press, 1892], p.336.

쿠랑이 복제한 지도는 채색본 사본을 흑백으로 전사한 이미지였으며, 원본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다행히도,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한 장의 채색본 지도[그림2]가 그것과 매우 유사하여, 이를 통해 《천하제국도》의 실제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图2. 天下诸国图 纸本设色 约 18 世纪下半叶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
그림2. 《천하제국도》 지본 채색, 18세기 후반경, 한국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两张图都在右上角署名《天下诸国图》, 下注小字“一百五十三国”. 然后映入我们眼帘的是地图约略呈苹果状的形体, 和它犹如苹果被从中间剖开的内部结构. 在最外面的果皮部分, 是一圈用蓝色表示的大海, 海上只在东西两端有两个孤岛. 东面的岛上有两棵交叉在一起的连理树, 写着“日之所出”和“扶桑”, 下面的山上标出“流波山”; 西面的岛上有一棵盘曲的松树, 写着“日月所入”和“盘松”. 然后是一圈略呈矩形的大陆, 其弯弯曲曲的形状, 就像一道被虫蛀出的虫道; 上面的矩形方框内, 写着近百个奇奇怪怪的国家、山岳和湖泊的名字[国家有41个], 如“大人国”“比肩国”“不白山”“封渊”; 还在北部居中处画了一棵巨大的树, 旁边写着“千里盘木”. 再往里一圈, 又见蓝色大海, 和大海上点缀着的数十个国家、岛屿或神山之名[国家有47个], 其中混杂着我们熟悉的“日本”“琉球”等历史名称, 以及“瀛洲”“方丈”“蓬莱”“不死国”“长臂国”等神话地名; 最重要的是在海上, 按照东南西北的方位, 出现了四个标志性的地名: “东岳广桑”“南岳长离”“西岳丽农”和“北岳广野”[下文将详细讨论]. 再往里, 也就是这个苹果的果核部分, 我们看到一个略呈平行四边形、有五条大河流贯其中的中心大陆; 大陆上共有65个国家的名字, 其中除了“中国”“朝鲜”之外, 绝大部分都是在中国史书中出现过的历史国家如“大宛”“鄯善”“精绝”和“大秦”; 地名亦然, 最引人注目的是中国部分, 上面清晰地标出了中国的五岳镇山[“华山”“衡山”“泰山”“恒山”和“嵩山”], 东南还有一座“天台山”. 有意思的是, 两幅地图都在中央大陆最靠近中心的部位[图1更明显], 画出了一座占据特殊地位的山, 它就是“昆仑山”. 地图作者在“昆仑山”字样之侧加上了“中岳”两字, 还在“昆仑山”下两条河流夹峙的一个三角形部位, 标出了“天地心”字样, 表示此处是天地的中心. 在奎章阁彩绘图[图2]中, “天地心”与“中国”是中央大陆同时也是“天下”全部两处最显眼的地方, 它们约呈中轴对称, 均由红色整体平涂; 中央大陆上另一处红色标注的地域, 是东部边缘的“朝鲜”, 也就是地图作者的祖国; 此外, 还有“日本国”和“琉球国”也用红色标注, 但它们位于中央大陆之外的海上, 故与朝鲜“相比”, 无疑离两个“中心”更远, 也更为边缘. 这一点也可以通过另一处细节的图形语言来说明, 即“中国”和“朝鲜”是整幅地图中唯一两处其名字被镶以瓣状花边的地方, 说明了二者之间的特殊关系[类似于“中华”和“小中华”].

두 지도 모두 오른쪽 위에 제목으로 《천하제국도》라 쓰여 있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153개국”이라 적혀 있다. 그 다음 우리의 눈앞에 들어오는 것은, 대략 사과 모양으로 표현된 지도 전체의 형상과, 그 사과를 반으로 가른 듯한 내부 구조이다.
가장 바깥의 사과껍질[果皮] 부분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바다의 고리로, 동서 양쪽 끝에 각각 고립된 두 개의 섬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 섬 위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연리지連理枝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해가 뜨는 곳[日之所出]”과 “부상扶桑”이라 쓰여 있다. 그 아래 산에는 “유파산流波山”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 섬에는 구불구불한 소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으며, “일월이 지는 곳[日月所入]”과 “반송盤松”이라 적혀 있다.
그 다음 안쪽으로는 약간 직사각형 형태를 띤 대륙이 둘러져 있다. 이 대륙은 구불구불한 형태로 마치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네모난 방형 칸들이 나열되어 있으며, 그 안에 “대인국大人國”, “비견국比肩國”, “불백산不白山”, “봉연封淵” 등 낯설고 기묘한 나라, 산, 호수의 이름이 약 100여 개 적혀 있다[이 중 나라 이름은 41개]. 북쪽 중앙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천리반목千里盤木”이라 쓰여 있다.
그 다음으로 또 하나의 푸른 바다 고리가 등장하며, 이 바다에는 수십 개의 나라, 섬, 신산神山의 이름이 흩어져 적혀 있다[그 중 나라 이름은 47개]. 여기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일본日本”, “류큐琉球” 같은 역사적 지명도 포함되어 있지만, “영주瀛洲”, “방장方丈”, “봉래蓬萊”, “불사국不死國”, “장비국長臂國” 등 신화 속 지명들도 뒤섞여 있다.
이 바다 위에는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따라 네 개의 대표적 지명이 눈에 띈다. 곧 “동악광상東岳廣桑”, “남악장리南岳長離”, “서악려농西岳麗農”, “북악광야北岳廣野” 등인데, 이들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 다음 가장 안쪽, 즉 이 사과의 가운데[果心] 해당하는 부분에는 약간 평행사변형에 가까운 형상을 띤 중앙대륙이 있다. 이 대륙에는 다섯 갈래의 큰 강이 흐르고 있으며, “중국”과 “조선”을 포함해 총 65개의 나라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대완大宛”, “선선鄯善”, “정절精絕”, “대진大秦”처럼 중국 사서에 나오는 역사적 국가들이다. 지명 또한 그러하며, 특히 중국 부분에는 “화산華山”, “형산衡山”, “태산泰山”, “항산恒山”, “숭산嵩山” 등 중국의 오악五嶽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고, 동남부에는 “천태산天台山”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두 지도 모두에서 중앙대륙의 가장 중심에 가까운 부위에 특별한 지위의 산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곤륜산”이다. 지도 제작자는 “곤륜산”이라는 글자 옆에 “중악中岳”이라는 글자를 더했고, 곤륜산 아래 두 강이 에워싼 삼각형 부위에는 “천지심天地心”이라는 글자를 표시해, 이곳이 바로 천지의 중심임을 명시했다.
특히 규장각의 채색 지도[그림2]에서는 “천지심”과 “중국”이 중앙대륙, 곧 ‘천하’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배치되어 있으며, 붉은 색으로 넓게 칠해져 있다. 중앙대륙에서 붉은 색으로 칠해진 또 다른 지역은 동쪽 가장자리의 “조선”으로, 이는 곧 지도 제작자의 조국이다. 이 외에 “일본국”과 “류큐국”도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들은 중앙대륙 바깥의 해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조선”에 비하면 두 중심에서 더 멀리 떨어진, 보다 변두리적인 위치로 해석된다.
이 점은 또 다른 세부적인 시각적 표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중국”과 “조선”만이 전체 지도에서 이름 주위에 꽃잎 모양의 장식 테두리[花邊]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자 사이의 특별한 관계[이를테면 “중화中華”와 “소중화小中華”]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当然, 对这个图像还可以有另外的解读. 日本学者中村拓即从中看出了一个像章上的“男人的右侧面肖像”: 他有着“仔细梳理的头发和张开的嘴”, 中国“占据着这张面孔的中央”, 其“下巴和脖子是安南和印度”; 而“发型的前端或者东部”是朝鲜, “发型的后端或者西部”则是西方诸国[4]. 这种洞见令人惊异, 不过似乎还可以补充一个细节: 一方面被中村拓称为“环形”的海外的“第二块大陆”, 其实是一个接近于方形的形状[其意义将在后文揭晓]; 另一方面, 这个近乎方形的形状正好可以给中央的侧面人像提供一种外框, 使中央的人像更加突出和显著, 并使之看上去, 犹如一幅18世纪欧洲贵族头戴假发的“肖像”.
那么, 这幅“肖像”真的存在吗? 作为一张古代朝鲜的“天下图”, 它与真正的“天下”, 也就是同时代的“世界”, 是否存在联系? 它难道不是制图者某种纯属偶然的制图效果, 或者仅仅出自观图者异想天开的自我投射?
如果它真的是一幅“肖像”, 那么它是“谁”的肖像? 如果它不是, 那么在它“奇怪”的表象之下, 会不会也以某种特殊的方式, 隐匿或折射着所在时代十分珍贵的历史情形和历史真实?
那么, 它的原形或历史“真形”, 究竟是什么?

물론, 이 이미지에 대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일본 학자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는 이 지도에서 일종의 훈장勳章 속에 새겨진 “남성의 오른쪽 얼굴 옆모습”을 보아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인물은 “정성스레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벌어진 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얼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중국”이고, “턱과 목”은 안남安南[베트남]과 인도에 해당하며, “머리 모양의 앞부분, 즉 동쪽”은 조선이고 “머리 모양의 뒷부분, 즉 서쪽”은 서양 여러 나라들이라고 한다[4].

[4]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in Imago Mundi, Vol. 4[1947], p.3.

이러한 통찰은 놀라움을 자아내지만, 거기에 하나의 세부 사항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카무라가 “환형環形”이라고 부른 지도 바깥의 두 번째 대륙은 사실 원형이라기보다는 거의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운 모양이다. [이 형상이 지니는 의미는 후속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이 정방형의 형태는 중앙의 옆얼굴 형상에 일종의 외곽 틀을 제공함으로써, 그 얼굴을 더욱 뚜렷하고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이 도상 전체는 마치 18세기 유럽 귀족이 가발을 쓴 모습의 “초상화”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초상화”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고대 조선에서 제작된 이 “천하도”는 당대의 “진짜 세계”, 곧 실제 세계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형상은 단지 지도 제작자가 무의식 중 만들어낸 우연한 결과이거나, 혹은 도해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과도하게 투사해낸 공상적 해석일 뿐일까?
만약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초상화”라면, 그것은 “누구의” 초상인가? 반대로, 그것이 초상화가 아니라면, 이 기묘한 형상 속에 혹시 당대의 소중한 역사적 현실이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숨어 있거나, 은연중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지도는 어떤 원형原形을 갖고 있으며, 그 역사적 “진형真形”은 무엇인가?

1. 形态与年代
1. 형태와 연대

一个多世纪以来, 随着越来越多相似地图的发现, 《天下诸国图》的形态已愈益为人所知. 它的名称并不限于《天下诸国图》, 也可以叫《天下总图》《天地图》《普天之下地图》, 甚至《太极图》. 当然, 更多、更常见的名称则叫《天下图》. 而且, 它也不限于一幅单独的地图, 而是一套地图册中的其中之一. 一般而言, 《天下图》位于地图册首页, 其后则有《中国图》《日本图》《琉球图》《朝鲜图》和《朝鲜八道图》; 有时, 《天下图》也有可能放在整套地图册的最后.
其材质和工艺, 除了一类我们前面有所讨论的彩绘图, 还有一类是木刻印制图. 中村拓指出, 尽管彩绘图在数量上远远超出木刻图, 但实际上彩绘图并不比木刻本更真实或者古老, 而往往是对后者的复制, 故中村拓的文章只限于对十二个木刻本进行描述和分析. [5]本文中的图3和图4, 是两件出自同一版本的木刻本《天下总图》, 其中图3来自韩国学者李灿的藏品, 在地图整体之外的左侧边缘, 刻印了“康熙二十三年甲子谨制”一行字, 是所有《天下图》中唯一有制作年代的一件[1684年]. 需要指出, 这件图年款的位置在正图之外, 字体大小不一且有欠恭正, 与正图上的文字显然不同. 此图尚存其他版本, 但都没有文字, 也显出此图的特别. 另外, 朝鲜王朝于明亡之后, 除了在政府和外交公文上奉清朝为正朔之外, 在私下和民间基本上奉明朝为正朔和沿用崇祯年号[6], 因此, 该地图堂而皇之地署上康熙年款, 不知何故. 无论如何, 17世纪晚期出现的这类图, 是已知《天下图》中年代最早的图.

1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사한 지도들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천하제국도》의 형태는 점차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도는 단지 《천하제국도》라는 명칭 하나로만 불렸던 것은 아니며, 《천하총도天下總圖》, 《천지도天地圖》, 《보천지하지도普天之下地圖》, 심지어 《태극도太極圖》 등으로도 불렸다. 물론, 가장 많고 흔하게 사용되는 이름은 단순히 《천하도》이다.
또한 이 지도는 하나의 독립된 지도가 아니라, 일종의 지도첩地圖帖 속에 포함된 도판 가운데 하나인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천하도》는 지도첩의 첫 페이지에 위치하며, 그 뒤에는 《중국도中國圖》, 《일본도日本圖》, 《류큐도琉球圖》, 《조선도朝鮮圖》,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 등이 이어진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천하도》가 지도첩의 마지막에 배치되기도 한다.
제작 방식과 재질 측면에서 보면, 앞서 살펴본 채색 도본圖本 외에도 목판본木版本으로 인쇄된 판본들이 존재한다.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는 채색 도본이 수량상으로는 목판본보다 훨씬 많지만, 실제로 채색 도본이 더 진본眞本이거나 더 오래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목판본을 바탕으로 복제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총 12종의 목판본만을 대상으로 설명과 분석을 시도했다[5].

[5]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p.3, p.8.

본고에 인용되는 [그림3]과 [그림4]는 같은 판본에서 제작된 목판본 《천하총도天下總圖》의 사례이다.

图3. 天下总图 木版本 32. 5cm×31. 5cm1684 年 李灿藏
그림3. 《천하총도天下總圖》 목판본, 32. 5cm × 31. 5cm, 1684년, 이찬李灿 소장

图4. 天下总图木版本 31. 5cm×32. 4cm韩国国立中央博物馆藏品 5530 号
그림4. 《천하총도天下總圖》 목판본, 31. 5cm × 32. 4cm,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제5530호

이 가운데 [그림3]은 한국의 학자 이찬李灿이 소장한 자료로, 지도 본체의 왼쪽 가장자리 바깥 여백에 “강희 23년갑자근제[康熙二十三年甲子謹制]”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현재 알려진 《천하도》 중에서 유일하게 제작 연대가 명시된 사례로, 바로 1684년에 해당한다. 주목할 점은 이 연대명이 지도 본문 바깥에 위치하며, 글자의 크기와 필체 또한 정식 본문과는 다소 다르고 격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동일한 판본에서 제작된 다른 지도들도 전해지지만, 이와 같은 연대명이 새겨진 예는 이 한 점뿐이며, 이 점에서 이 지도는 특별하다.
한편, 조선왕조는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공식적으로는 청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고 관문이나 외교 문서에서 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사적으로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명나라를 정통 왕조로 받들며 숭정崇禎 연호를 계속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6].

[6] 孙卫国: 《大明旗号与小中华意识—朝鲜王朝尊周思明问题研究》, 商务印书馆, 2007, 第226~255页.

이러한 상황에서 해당 지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강희” 연호가 명시되어 있는 점은 다소 의문스럽다. 그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어찌 되었든,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이와 같은 유형의 지도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천하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연대를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现存文献中, 虽然《朝鲜王朝实录》睿宗元年[1469]即有“《天下图》成”的说法[7], 但是除却一个名称, 没有证据表明, 这里所说的《天下图》与后世的实物相关. 但是, 17世纪确是频繁出现这类表述的年代, 而且其文字描述与地图图像似亦多能相应. 兹举三例.
[1] 李光庭[1552~1629], 《讷隐集》卷十八, 《溪岩金先生行状》: 少日尝裒辑地志. 为天下图. 指点而叹曰: “对此, 教胸襟较豁.” [8] 另, 金坽[1577~1641]《溪岩集》卷六附录权愈[1633~1704]《墓碣铭并序》: 先生尝自为天下图. 喟然曰: “吾观此, 吾胸襟觉恢廓. 其立意窍领之者既远大, 岂肯苟开堂坛而畴其身哉.” [9]

[2] 李明汉[1595~1645], 《白洲集》卷十一, 《戏书天下图》: 我之生也何局促, 一生老此弹丸国. 既未能鞭雷御风历天衢, 又未能鼓枻乘桴环八区. 假令早晩持节觐上帝, 不过辽燕路一带. 三峡三河吴楚间, 大水名山如隔世. 以此发愤欲狂呼, 赤脚蹴踏天下图. [10]

[3] 李沃[1641~1698], 《博泉集》卷十四, 《闻上挂天下图于便殿, 命馆阁主文者赋七言律, 臣屏伏私次, 次其韵》: 曾闻汉帝指舆图, 复挂吾王玉座隅. 镇望星罗天有野, 封疆绣错地分区. 中流砥柱劳神禹, 亘筑长城慑服于. 莫道腥尘中土污, 东周今日在箕都. [11]

현존 문헌 가운데, 《조선왕조실록》 예종 원년[1469] 기록에 “《천하도》 완성”이라는 언급이 있기는 하나[7], 단지 이름만 있을 뿐, 이 문헌 속의 《천하도》가 후대에 전해지는 실물 지도들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7] 《睿宗实录》卷6, 睿宗元年6月21日癸酉, 第15页.

그러나 17세기는 이와 같은 표현이 빈번히 나타나는 시기로, 당대 문헌들의 문자 묘사와 후세 지도의 이미지가 대체로 상응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1] 이광정李光庭[1552–1629], 《눌은집訥隱集》 권18, 〈계암김선생행장溪岩金先生行狀〉: 젊은 시절에 일찍이 지리지를 편찬하여 《천하도》를 만들었다. 지도를 가리키며 감탄하며 말했다: “이것을 대하고 있으면 가슴이 훨씬 넓어지는구나.” [8] 또한 김령金坽[1577–1641]의 《계암집溪岩集》 권6 부록에 실린 권유權愈[1633–1704의 〈묘갈명병서墓碣銘並序〉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선생은 일찍이 친히 《천하도》를 그린 적이 있었고,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내가 이것을 바라보노라면, 내 가슴이 더욱 탁 트이는 듯하다. 그 뜻을 세우고 그 요지를 통달한 이는 이미 원대하니, 어찌 공연히 사사롭게 당을 세우고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겠는가?”[9]

[8]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808年刊本.
[9]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772年刊本.

[2] 이명한李明漢[1595–1645], 《백주집白洲集》 권11, 〈희서천하도戲書天下圖〉: 나는 어찌 이처럼 협소한 곳에서 태어났는가, 일생을 이 작은 나라에서 늙어가고 있다. 번개를 채찍 삼고 바람을 타며 하늘 길을 달리지도 못했고, 노를 저어 뗏목을 타고 팔방을 두루 돌지도 못했다. 설령 일찍이 조정의 사신이 되어 상제를 뵈러 간다 해도, 요·연遼燕 일대의 길이 고작일 것이다. 삼협과 삼하, 오·초의 땅, 큰 강과 명산은 마치 딴 세상 같다. 이리하여 분을 이기지 못해 미친 듯이 소리치고, 맨발로 《천하도》를 짓밟았다. [10]

[10]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孝宗·显宗年间刊本.

[3] 이옥李沃[1641–1698], 《박천집博泉集》 권14, :상께서 편전에 《천하도》를 걸고, 관각의 문사들에게 칠언율시를 명하니, 신이 사사로이 뒤따라 화운하다.: 들으니 한나라 황제가 일찍이 여도輿圖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더니, 이제 우리 임금께서 옥좌 곁에 《천하도》를 다시 걸어 두셨다. 별들이 수놓인 하늘 아래 드넓은 벌을 굽어보시고, 봉경의 경계는 땅 위에 수놓인 듯 구획되어 있다. 중류의 돌기둥에는 하신우夏神禹의 노고가 어려 있고, 만 리 장성長城은 북쪽 오랑캐를 떨게 하도다. 누가 말하랴, 피비린내 나는 먼지 속에 중국이 더럽혀졌다고. 오늘의 동주는 여전히 기자箕子의 고향에 있구나. [11] 이상의 기록들은 17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천하도》를 실제로 제작하거나 감상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정체성과 세계 인식, 그리고 역사에 대한 감정을 형상화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헌적 언급은 단순한 지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 《천하도》의 문화적 위상을 반영한다.

[11]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721年刊本.

第1例, 在李朝文人金坽的行状和墓碣铭中, 都提到了他作《天下图》的事迹. 行状的作者李光庭是壬辰倭乱时的重要功臣, 曾多次往返于明和朝鲜之间, 也是金坽的同时代人; 他在行状中特别提到金坽作《天下图》这件事, 可以想见当时此事发生的影响. 另, 墓碣铭的作者权愈也是曾任过大司谏、艺文馆大提学等要职的重要官员. [12]两处文献均提到, 《天下图》囊括宇宙于方隅之间, 起到“恢廓胸襟”的作用. 这种表述应该源自宋版书《历代地理指掌图》中托名为苏轼的一段话: “指掌上下, 数千百载, 离合分并, 增省废置, 靡不该备. 此由胸中元自有名山大川, 是以直寄笔墨, 如此易也.” [13]现有《天下图》的尺幅均不大, 但表述的世界却极为宏阔, 亦可视为另一种《指掌图》.
第2例, 透过李明汉的古风诗, 可以鲜明地看出被囿限于天下一隅的李朝文人特有的隔绝感和空间意识, 即“弹丸国”[朝鲜]之小与“天衢”[中国]和“八区”[世界]的恢宏无限的对比与冲突, 而这也可以在上述《天下图》的图形语言中见出端倪. 图中的中央大陆上, 最引人注目的正是一条条纵横交错的河流和一座座巍峨的高山[“三峡三河吴楚间, 大水名山如隔世”].
第3例中的最后两句, 则反映了李朝文人继清廷入主中原之后所产生的“小中华意识”, 即认为“中土”现已被“腥尘”所“污染”, 而原先被称为“东夷”的朝鲜, 则因为继承了周朝箕子的文脉和明朝的正朔, 竟成为今天之“东周”[“莫道腥尘中土污, 东周今日在箕都”]. 虽然诗句中, “长城”意象并未出现于现存《天下图》中, 似乎暗示此处的《天下图》, 有可能类似于金寿弘所绘的《天下古今大总便览图》, 其实质是描绘明朝地貌的巨幅中国地图; 但是, 诗句中“汉帝指舆图”[从“指掌图”化出]的用语, 表明这里的《天下图》其尺幅应该不大, 而这却与现存《天下图》暗合. 除此之外, 确实也存在着一类《天下图》或《天地图》[参见下文], 它们正如诗句所言[“镇望星罗天有野, 封疆绣错地分区”], 将地上州郡与天上星座相对应, 说明李沃所描绘的《天下图》, 已接近于今天可见的《天下图》. 当然, 还存在另外一种可能性: 既然《天下图》本身为包含《中国图》在内的一整套地图册, 那么《天下图》的观众在观赏过程中, 将紧跟着《天下图》之后出现的《中国图》中之意象, 叠加在自己关于《天下图》的观赏经验之中, 并非不可想象.

제1 사례에서는 조선 문인 김령金坽의 행장과 묘갈명 모두에서 그가 《천하도》를 제작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행장의 필자인 이광정李光庭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김령과 동시대인이었다. 그런 그가 행장에서 특별히 김령의 《천하도》 제작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당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또 다른 기록인 묘갈명의 저자 권유權愈 역시 대사간,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낸 고위 관료였다[12].

[12] 此处主要参考了韩国学研究院博士候选人李梅女士的意见. 本文在《天下图》图像资料、古代朝鲜文献方面得到了李梅女士的很多帮助, 在此谨致谢忱.
[12] 이 부분은 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생 이매李梅 여사의 의견을 참고했다. 본문에서 사용된 《천하도》 도상 자료 및 고대 조선 문헌과 관련하여 이매 여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두 문헌 모두 《천하도》가 “우주를 모서리에 담는다[囊括宇宙於方隅之間]”는 식으로 표현하며, 그 감상자는 “가슴이 트이고 확장되는 느낌[恢廓胸襟]”을 받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표현은 송대 판본서인 《역대지리지장도歷代地理指掌圖》에서 소식蘇軾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한 문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문구는 다음과 같다: 손바닥 위에서 위아래로 수천 수백 년을 살펴보며, 나라의 흥망과 합병, 증감과 폐치廢置를 모두 다 담고 있다. 이는 마음속에 이미 명산대천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붓을 들어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13]

[13] 参见宋《历代地理指掌图》, 赵茂德序, 明刻本.

현존하는 《천하도》의 실제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세계의 스케일은 대단히 광대하여 일종의 또 다른 형태의 “지장도指掌圖”로 볼 수 있다.

제2 사례에서는 이명한李明漢의 고풍시古風詩를 통해, 조선 지식인이 ‘천하’의 한 귀퉁이에 갇혀 있다는 공간적·심리적 제약감을 생생히 읽어낼 수 있다. “탄환국彈丸國”이라 지칭된 조선의 작음과, “천구天衢” 혹은 “팔구八區”로 대표되는 중국 및 세계의 광대함 사이에서 느끼는 대조와 충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앞서 언급된 《천하도》의 도상에서도 확인된다. 지도 중앙의 대륙에는 다수의 강이 종횡으로 흐르고 고산들이 솟아 있으며, 이는 바로 시구에서 묘사된 “삼협·삼하·오초의 물줄기와 명산들이 마치 딴 세상 같다[三峡三河吴楚间, 大水名山如隔世]”는 표현과 맞닿아 있다.

제3 사례의 마지막 두 구절은, 청조가 중원을 지배한 뒤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된 이른바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을 반영한다. 즉, 지금의 “중토中土”는 이미 피비린내 나는 오랑캐의 먼지로 더럽혀졌고, 오히려 한때 “동이東夷”라 불렸던 조선이 기자箕子의 문맥과 명조의 정통을 계승함으로써 오늘날의 “동주東周”가 되었다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먼지가 중토를 더럽혔다고 말하지 말라, 오늘의 동주는 바로 기자의 고향에 있다[莫道腥尘中土污, 东周今日在箕都].”
다만 이 시에 등장하는 “장성長城” 이미지는 현존하는 《천하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로 보아 이옥李沃이 말한 《천하도》는 김수홍金壽弘이 그렸다고 전하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總便覽圖》처럼, 실제로는 명나라의 지형을 묘사한 거대한 중국 지도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한나라 황제가 여도를 가리켰다[汉帝指舆图]”는 표현은 《지장도》에서 파생된 용법으로, 여기서 말하는 《천하도》가 비교적 소형 지도였음을 암시한다. 이는 오늘날 전해지는 《천하도》의 형식과도 부합한다.
이외에도 확실히 “지상 주현州縣”과 “천상 성좌星座”를 대응시킨 《천하도》 또는 《천지도天地图》 계열 도판들도 존재하며, 이는 이옥이 언급한 시구 “하늘에는 별이 늘어서 있고, 땅에는 자수 놓은 듯한 경계가 그어져 있다[镇望星罗天有野, 封疆绣错地分区]”와 일치한다. 이 점은 이옥이 말한 《천하도》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지도들과 매우 유사한 형상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또 하나의 가능성도 있다. 《천하도》는 단독 지도가 아니라 《중국도》, 《일본도》, 《조선도》 등을 포함한 일종의 “지도첩”의 일부이므로, 그것을 보는 이들은 《천하도》 다음에 나오는 《중국도》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이어서 떠올리며, 그 인상을 《천하도》의 감상 경험 위에 중첩시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이는 지도첩의 연속적 감상이 가지는 심상 작용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라 할 수 있다.

综合以上图例与诗文, 我们把《天下图》出现的上限, 初步确定在17世纪上半叶, 或与上述诗文所作的时间同步. 其作者或许与金坽有关. 康熙款《天下图》的年代表示, 它的形态应该处在此类图的一个相对较早的阶段.
例如, 康熙款《天下图》的外圈大海上可以读到四行文字, 按顺时针排列分别录为: [1]“天地之间相距四亿二千里”; [2]“日月广三千里, 大星广百里, 中星广八十里, 小星广四十里”; [3]“东西南北四方各八万四千国, 其中大国记, 此地外无边大海, 外无地”; [4]“东西南北相距二亿三万五十里”. 这些文字杂糅了各种古典文本, 犹如现代地图中的图例说明, 给出了解读地图的主要条件, 应属早期地图中本有的内容. 其文本出处大致如下: [1]“天地之间相距四亿二千里”, 此语不知所出, 因它与中国传统天文学中所持的天地之间的距离“八万四千里”[道教典籍《玉书录》]或“自地至天一亿一万六千三百五十里”[据《开元占经》为张衡《灵宪》文]均有所不合, 或与某部不知名的佛经有关. [2]“日月广三千里, 大星广百里, 中星广八十里, 小星广四十里”, 第一句出处不详, 第二、三、四句语出佛经《妙法莲华经·马鸣菩萨品第三十》. [3]“东西南北四方各八万四千国, 其中大国记, 此地外无边大海, 外无地”, 其中第一句话“八万四千国”来自佛教常用语, 因为“八万四千”是佛经中形容数量繁多的常用词, 除“八万四千国”外, 还有“八万四千法门”“八万四千烦恼”等, 不一而足; 后面的话是对于地图的说明, 应属地图作者所说. [4]“东西南北相距二亿三万五十里”, 语出《淮南子·坠形训》, 言东西南北四极各相距“二亿三万三千五百里七十五步”. 上述木刻本中的图例说明文字, 在彩绘本中便很少出现了. 就此而言, 彩绘图系列图1、图2, 似属于年代较为晚近的形态.
康熙款《天下图》的年代较早, 还可见于某些文字方面的证据. 例如, 它的中央大陆“朝鲜”之上, 有一座“龟山”, “龟山”之侧有一个“肃慎国”[图5]这两个地名分别见于《山海经》中的《海内北经》和《大荒北经》; 但在彩绘图[图6]中, 这两个地名变成了毫无根据的“肃山”和“竜慎国”显系地图在传抄过程中出现的讹变.

종합적으로 위의 도상 자료와 시문 기록들을 바탕으로 보면, 《천하도》의 출현 상한은 17세기 전반기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앞서 인용된 문헌들의 창작 시기와도 일치한다. 그 제작자는 김령金坽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강희 연호가 명기된 《천하도》는 이러한 지도 유형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형식을 보여주는 예로 간주된다.
예컨대, 강희 연간의 연대를 지닌 《천하도》에서는 외곽의 바다[대해]에 네 줄의 주해註解 문자가 시계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1] 天地之間相距四億二千里: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는 4억 2천 리이다.

[2] 日月廣三千里大星廣百里中星廣八十里小星廣四十里: 해와 달의 너비는 3천 리이고, 큰 별의 너비는 100리, 중간 별의 너비는 80리, 작은 별의 너비는 40리이다.

[3] 東西南北四方各八萬四千國其中大國記此地外無邊大海外無地: 동서남북 네 방위에 각각 8만 4천 개의 나라가 있고, 그 가운데 큰 나라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땅 바깥에는 끝없는 큰 바다가 있고, 그 바깥에는 땅이 없다.

[4] 東西南北相距二億三萬五十里: 동서남북의 거리는 서로 2억 3만 50리이다.

이 네 줄의 글귀는, 지도에 대한 일종의 도해 해설 또는 ‘도례圖例’로서 기능하며, 고대 문헌에서 인용한 천문·지리·불교적인 세계관을 혼합하고 있다. 구체적인 출처는 다음과 같다:

[1] 天地之間相距四億二千里: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는 4억 2천 리이다. 이 문구는 명확한 출전을 찾기 어렵다. 중국 전통 천문학에서는 “천지 간 거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해 왔다: 地至天八萬四千里: 도교 문헌 《옥서록玉書錄》; 自地至天一億一萬六千三百五十里: 《개원점경開元占經》에 인용된 장형張衡의 《영헌靈憲》; 따라서 “사억이천리四億二千里”는 그들과 일치하지 않으며, 불교계 경전, 특히 미확정의 어떤 불경 계열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

[2] 日月廣三千里大星廣百里中星廣八十里小星廣四十里: 해와 달의 너비는 3천 리이고, 큰 별의 너비는 100리, 중간 별의 너비는 80리, 작은 별의 너비는 40리이다. 첫 문장 “일월광삼천리[日月廣三千里]”는 명확한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뒤의 “대성大星소성小星” 관련 문장은 《묘법연화경·마명보살품[妙法蓮華經·馬鳴菩薩品第三十]》에서 유래했다.

[3] 東西南北四方各八萬四千國其中大國記此地外無邊大海外無地: 동서남북 네 방위에 각각 8만 4천 개의 나라가 있고, 그 가운데 큰 나라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땅 바깥에는 끝없는 큰 바다가 있고, 그 바깥에는 땅이 없다. “팔만사천국八萬四千國”은 불교에서 ‘수많은’의 상징적 수사修辭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예: “팔만사천 법문法門”, “팔만사천 번뇌煩惱” 등. 이후 문장은 지도 해설이자 저자의 주석적 설명으로 보인다: 이 지도는 세계의 대국들을 중심으로 간략화되었으며, 바깥에는 무한한 대해가 펼쳐져 있으며, 그 밖에는 더 이상 땅이 없다는 의미이다.

[4] 東西南北相距二億三萬五十里: 동서남북의 거리는 서로 2억 3만 50리이다. 이 문장은 《회남자淮南子·추형훈墜形訓》에서 유래했다: 동서남북 사방은 각각 이억삼만삼천오백리 칠십오보[二億三萬三千五百里七十五步]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 지도 문장은 그것을 간략화한 형태로 보인다.

이러한 도례圖例 문구는 목판본 계열의 《천하도》에서는 명확히 새겨져 있으나, 채색본彩繪本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볼 때, 도례 문구가 온전히 보존된 강희 연호 지도는 형식상 초기형[early form]의 《천하도》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텍스트 변이의 예도 시사점을 준다. 강희 연호가 있는 목판본의 중앙대륙에는 ‘조선’ 위쪽에 ‘구산龜山’과 ‘숙신국肅慎國’이 표기되어 있다. 이는 각각 《산해경》의 《해내북경海內北經》과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하지만 후대 채색본[도해 예: [그림6]]에서는 이 지명이 “숙산肅山”, “용신국竜慎國” 등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으며, 이는 지도 전사轉寫 또는 필사 과정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와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강희 연호 지도가 상대적으로 원형에 가깝고, 후대의 채색본들은 그 복제·변형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具体图像的画法也可以成为年代的证据. 例如在康熙款《天下图》中, 海外大陆上北、东、西三个方位均画有一棵树, 三棵树的画法明显不同. 其中东方的“扶桑树”是一棵树干交叉的连理树; 西方的“盘格松”是一棵直立的松树; 而北方的“千里盘木”则呈现为一棵针叶树. 与之相比, 彩绘图中三棵相应的树已开始画得比较简率, 但仍然能够看出与前者的承继关系.
以上讨论将文字讹变、文字和图像画法的详略与疏密当作年代的依据, 但也存在相反的序列. 如彩绘图中海外“日本国”之侧, 康熙款《天下图》中的“圆袴[山]”[图5], 在彩绘图中则是“圆乔山”[图6]. 事实上, 此处正确的反倒是后者[“圆乔山”来自“员峤”, 海中仙山之一, 出自《列子·汤问》]. 彩绘图在某些地名上较之木刻本更为正确, 这说明木刻本同样不是最初的祖本, 而是与彩绘图一样共同辗转流变于某个未知的原始祖本. 再比如, 彩绘图比木刻图在中央大陆上多出许多地名: 南侧, 在后者用“蕃胡十二国”一笔带过的地方, 前者标注了14个国家的名称; 在西部亦然, 在后者只标出了“西域诸国”的地方, 前者足足增加了31个国名. 黄时鉴据此将《天下图》分成“繁式”和“简式”两类, 此处的逻辑反而是由简而繁而不是由繁而简; 黄时鉴因此而怀疑学者Gari Ledyard将先繁后简当作分期依据的逻辑. [14] 因为真实的历史情境经常是一个双向的过程. 换句话说, 由繁而简和由简而繁, 都是同一个历史过程的不同方面, 应该辩证地加以把握, 而不是将单向过程绝对化. 但总体来说, 康熙款木刻图要早于彩绘图的年代序列应该可以成立.

구체적인 그림의 묘사 방식 또한 시대를 판별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희 연간의 《천하도》에서는, 해외 대륙의 북쪽, 동쪽, 서쪽 세 방향에 각각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는데, 세 그루의 그림 방식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그중 동쪽의 ‘부상수扶桑樹’는 나무줄기가 서로 얽혀 있는 연리지이고, 서쪽의 ‘반격송盤格松’은 곧게 선 소나무이며, 북쪽의 ‘천리반목千里盤木’은 침엽수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에 비해 채색본에서는 이들 세 나무가 비교적 간략하게 그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앞선 도상과의 계승 관계는 알아볼 수 있다.
위 논의는 문자 오탈자, 문자 및 도상 표현의 자세함과 간략함, 밀도 등을 시대 판별의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사례도 존재한다. 예컨대 채색도에서 해외의 ‘일본국’ 옆에 보이는 ‘원교산圓喬山’은, 강희본 《천하도》에서는 ‘원고산圓袴[山]’으로 나타나는데 [그림 5, 그림 6], 실제로 올바른 표기는 후자인 ‘원교산’이다. 이는 《열자列子·탕문湯問》에 나오는 바닷속 신산神山인 ‘원교員嶠’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처럼 채색도는 어떤 지명에서는 목판본보다 오히려 더 정확하며, 이는 목판본 역시 최초의 조본祖本이 아니라, 채색도와 마찬가지로 어떤 알 수 없는 원초적인 조본에서 함께 전사되어 유전되어 온 것임을 보여준다.

图5.《天下总图》[局部]: 肃慎国、龟山、圆袴
그림5. 《천하총도天下總圖》[부분]: 숙신국肅慎國, 구산龜山, 원고圓袴

图6.《天下诸国图》[局部]: 竜慎国、肃山、圆乔山
그림6. 《천하제국도》[부분]: 용신국竜慎國, 숙산肅山, 원교산圓乔山

또 다른 예로, 채색도는 목판도보다 중앙대륙 내에 훨씬 많은 지명을 담고 있다. 남쪽의 경우, 후자는 ‘번호십이국蕃胡十二國’이라 하여 한 문장으로 처리했지만, 전자는 이 지역에 14개국의 명칭을 따로 표기해두었다. 서쪽도 마찬가지로, 후자는 ‘서역제국西域諸國’만을 표시한 데 비해, 전자는 무려 31개의 나라 이름을 추가로 기입했다. 황시감黃時鑑은 이를 근거로 《천하도》를 ‘번식繁式’과 ‘간식簡式’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는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간→번’의 논리가 적용되며, ‘번→간’의 일방적 논리와는 다르다. 황시감은 이 점에서 학자 Gari Ledyard가 제시한 ‘처음에는 복잡하고 이후 단순해진다’는 도식적 분기 기준에 의문을 제기했다.[14]

[14]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载《黄时鉴文集III: 东海西海—东西文化交流史》, 中西书局, 2011, 第247~248页.

왜냐하면, 실제의 역사적 상황은 종종 양방향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복잡에서 단순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의 흐름은 동일한 역사 과정의 서로 다른 국면들이며, 이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해야지 일방적 흐름으로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강희 연간의 목판본 지도가 채색본 지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는 연대 순서는 성립 가능할 것이다.

如果再为这个序列加上第三个指标一幅加上了经纬线的《天下图》[图7], 或许就能够为《天下图》大致排出相对可靠的年代坐标. Gari Ledyard在为《世界地图学史》[History of Cartography]所写的《韩国制图学》一文中, 将另一幅与图7出自同一版本的《天下图》称作“一幅‘退化’的晚期《天下图》”[a late“degenerate”ch’ǒnhado], 其理由即在于: 一方面, 它较此前的《天下诸国图》内容更为简化[如大量减少了国名和在东、西、北方位省略了本来应该有的树]; 另一方面, 却在地图上增添了经纬线、南北二极和子午线等西方现代制图学特征, 旨在“让地图看上去更加现代和‘科学’”. 为此他将地图的年代定在19世纪晚期. [15]正如前述, Gari Ledyard单纯以由繁入简判定年代序列的观点是难以成立的; 其实, 在经纬线包装下的这幅图, 所依据的原型是一幅较繁式图更为古老的地图, 其形态与康熙款图基本相同[包括“肃慎国”“龟山”和“圆袴”等字样], 制图者只是在添加经纬线的过程中, 可能出于图像整体性效果的考虑, 才省略了对树的刻画. 据徐宁对与此图基本同款的中国国家图书馆收藏6338号《天下图》的研究, 大致可把此图年代的上限定在1776年之后[16], 年代的下限应该可以到19世纪晚期. 这样, 关于《天下图》的形态和年代, 我们可以达成几个初步的认识.

[1]《天下图》传世和流行的年代大约在17世纪上半叶到19世纪下半叶之间, 但典型的《天下图》应该出现在明清易代之后, 也就是17世纪下半叶. 之后, 从现存大量《天下图》藏品来看, 这类图在部分细节和画法上有所变异, 但主体基本保持恒定.

[2]早期《天下图》应该有某些图例文字伴随, 这些文字应与古代天文学、星占学、风水学相关[后文还将论述], 但在后世大多被省略.

[3]早期《天下图》中, 东、西、北三个方位的树的画法应该彼此差异, 各有千秋, 而在后世, 这些特征会有所模糊甚至被取消.

[4]某些文字的讹变[如“肃慎国”变成“竜慎国”, “龟山”变成“肃山”]可以看作是年代晚近的表现; 某些文字的增加[如国名], 亦可看作是年代晚近的表现, 须综合起来做具体分析, 不可一概而论.

[5]西方制图学特征[如经纬线、南北极]的增添和传统制图学特征的消减, 亦可看作是《天下图》即将衰亡并被西方制图学所替代之表征.

이 연대표에 세 번째 지표, 즉 경위선이 추가된 《천하도天下圖》 [그림 7]을 더한다면, 《천하도》의 대략적인 연대 좌표를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图7. 天下图32. 5cm×42. 5cm1776 年之后[更可能在 19 世纪] 中国国家图书馆藏 6338 号
그림7. 《천하도》 32. 5cm × 42. 5cm, 1776년 이후[19세기일 가능성 큼], 중국 국가도서관 소장 제6338호

Gari Ledyard는 《세계 지도학사[History of Cartography]》에 기고한 〈한국 제도학〉이라는 글에서, 그림 7과 같은 판본에서 나온 또 다른 《천하도》 한 폭을 “퇴화된 후기 《천하도》”[a late “degenerate” ch’ŏnhado]라 부르면서, 그 근거를 제시했다.
하나는, 이 지도가 이전의 《천하제국도》에 비해 내용이 훨씬 간략화되어 많은 나라 이름이 빠졌고, 동·서·북 방위에 원래 있어야 할 나무들이 생략되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경위선, 남북 양극, 자오선 등 서양 근대 지도학의 특징들이 지도 위에 첨가되어 ‘보다 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게’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그는 이 지도의 제작 시기를 19세기 말로 추정했다. [15]

[15]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The History of Cartography, Vol. II, Book 2: Cartography in the East and Southeast Asian Societie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p.258.

앞서 말했듯이, Gari Ledyard가 제시한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의 변화’를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 견해는 성립하기 어렵다. 사실, 경위선으로 장식된 이 지도는, 오히려 보다 복잡한 도형보다도 더 오래된 고지도를 원형으로 삼고 있으며, 그 형식은 강희본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예컨대 ‘숙신국肅慎國’, ‘귀산龜山’, ‘원고圓袴’ 등의 표기가 그대로 나타난다. 이 지도에서 나무 그림이 생략된 것은, 제도자가 경위선을 삽입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도상 효과를 고려한 결과였을 가능성이 있다.
서녕徐寧이 이 지도와 기본적으로 같은 형식인 중국국가도서관 소장 6338호 《천하도》에 대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 지도의 제작 연대의 상한은 대략 1776년 이후로 잡을 수 있으며 [16], 하한은 19세기 말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16] 徐宁: 《国图所藏李朝朝鲜后期的圆形地图研究》, 《中国历史地理论丛》2002年第4期, 第147页.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천하도》의 형식과 제작 연대에 대해 몇 가지 초기적인 인식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천하도》는 대체로 17세기 전반부터 19세기 후반 사이에 전승되고 유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전형적인 《천하도》의 출현 시점은 명청 교체 이후, 즉 1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후 현존하는 다수의 《천하도》 유물들을 살펴보면, 세부 양상이나 도상 표현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지도 전체의 주체 구조는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2] 초기의 《천하도》에는 일정한 해설성 도례圖例 문구가 첨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문구는 고대의 천문학, 점성술, 풍수학 등과 관련되었을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더 논의될 예정이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도례 문구들은 대체로 생략되었다.

[3] 초기 《천하도》에서는, 동·서·북 세 방위에 그려진 나무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묘사되었으며, 그 도상 표현에는 각기 독특한 의미와 상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후기 지도로 갈수록 이러한 차별성은 흐려지거나 삭제되었다.

[4] 몇몇 지명 표기의 와전訛傳[예를 들어, “숙신국肅慎國” → “용신국竜慎國”, “구산龜山” → “숙산肅山” 등]은 시기가 늦은 지도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국명 수의 증가는 더 늦은 시기의 특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단일한 연대 지표로 단정할 수 없으며, 반드시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5] 경위선, 남북극, 자오선 등의 서구 지도학적 요소의 추가,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전통 지도 도상 요소의 감소는, 《천하도》가 점차 서구식 지도학에 의해 대체되고 소멸되어가는 과정의 징후로 해석될 수 있다.

以下, 我们将相继讨论四个层面的问题.

第一, 我们将通过重新观察和描述此类《天下图》本体的图像特征, 对于已有学术史上主流观点进行重新考察和论证; 这部分的次标题均采用了问号形式.

第二, 在上述讨论基础上, 我们将以自己的方式, 重新厘定《天下图》图形知识的跨文化图像志来源.

第三, 我们将从图形制作的层面, 继续讨论图像设计者如何以中国文化的理想为依据, 对原有图形进行一次又一次的重构, 直至它呈现为现有的样貌和形态.

第四, 通过案例考察《天下图》如何被使用的过程, 我们将揭示出地图的制作者和使用者们在跨文化语境下所隐匿于图像表象背后之既复杂又矛盾的心态、欲望和观念.

이하에서는, 다음 네 가지 층위에서 《천하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첫째, 《천하도》 도상 자체의 특성을 새롭게 관찰하고 묘사함으로써, 지금까지 학계에서 제기되어온 기존 주류 견해들에 대해 재고찰과 반론을 시도할 것이다. 이 부분의 소제목은 모두 의문문 형식으로 구성될 것이다.

둘째,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천하도》의 도형적 지식이 어떠한 다문화적 시각이미지 전통에서 유래했는지를 자체의 방식으로 새롭게 정리할 것이다.

셋째, 도형 제작의 층위에서, 도상 설계자가 중국적 문화 이상을 기준으로 어떻게 기존 도형을 반복적으로 재구성해왔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현재의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넷째, 사례 분석을 통해 《천하도》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지도 제작자와 사용자들이 당시의 다문화적 맥락 속에서 도상 표현을 통해 은밀히 내비친 복합적이고 모순된 심리, 욕망, 사고방식을 밝혀낼 것이다.

2. 观察与论证
2. 관찰과 논증

1. 为什么两个中心、双重五岳?
1. 왜 두 개의 중심과 오악五嶽이 이중으로 존재하는가?

让我们先从《天下图》的中央大陆开始.
正如奎章阁彩绘图[图2]所示, 中央大陆中两处最引人注目的地方, 是以红色平涂的“天地心”与“中国”, 正好构成了中央大陆那张奇怪的男人侧面像的“耳目”, 同时形成中央大陆上“一个天下, 两个中心”的局面. [17]这一点显示了朝鲜《天下图》非同寻常的特点.
在中国文化传统中, “天下”往往与“普天之下, 莫非王土”的观念不可分割. 中国现存第一幅世界地图《华夷图》[图8], 即将中国[“华”]处理成一个山海环绕中的大陆, 将中国之外的世界[“夷”]处理成周边的数百个地名. 在图形表现上, “华”被详细勾勒出了轮廓线; “夷”的部分, 除了朝鲜之外, 所有国家均没有呈现出外形, 仅以文字[国名]标识. “华”与“夷”[中国与世界]的具体关系, 在这里以图形的语言, 表现为一个“有形”与“无形”的差别. 这种关系极力强调了中国作为世界中心的观念, 成为一种图像表现传统并被历代舆图所继承.

《천하도天下圖》의 중앙대륙부터 살펴보자. 규장각 채색본 《천하도》 [그림 2]에서 보이듯, 중앙대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곳은 붉은색으로 칠해진 ‘천지심天地心’과 ‘중국’이다. 이 두 요소는 중앙대륙 위에서 마치 기묘한 남성의 옆얼굴을 형상화한 도상에서 ‘귀와 눈’에 해당하는 부위를 구성하며, 동시에 중앙대륙 위에 ‘하나의 천하, 두 개의 중심’이라는 구도를 형성한다. [17]

[17] 虽然奎章阁彩绘图用红色突出表现“中国”和“天地心”似乎是一个特例, 但这并没有改变几乎所有《天下图》都具有两个中心的性质, 因为这种性质是由文字标识本身来表述的[“中国”和“天地心”都是“中心”之意].
[17] 비록 규장각 채색도에서 “중국中國”과 “천지심天地心”을 붉은색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은 하나의 특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거의 모든 《천하도》가 두 개의 중심을 갖는다는 특성을 바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성은 문자 표기 자체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중국中國”과 “천지심天地心”은 모두 “중심”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점은 조선 《천하도》가 보통과는 다른 특징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문화 전통 속에서 ‘천하天下’는 종종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왕의 땅이다[普天之下,莫非王土]”라는 관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초의 세계지도인 《화이도華夷圖》 [그림 8]에서는, 중국[‘화’]을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하나의 대륙으로 처리하고, 중국 외부 세계[‘이’]는 주변에 배치된 수백 개의 지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图8. 华夷图 墨线图79c m×78cm1136 年 原石藏西安碑林博物馆
그림8. 《화이도》 묵선도, 79cm × 78cm, 1136년, 원석 소장: 서안비림박물관

도상 표현에서 ‘화’는 윤곽선을 세밀하게 그려냈지만, ‘이’의 부분은 조선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형태 없이 단지 문자[국명]만으로 나타나 있다. ‘화’와 ‘이’, 곧 중국과 세계의 구체적 관계는 이 지도에서 도상의 언어를 통해 ‘형태가 있음’과 ‘형태 없음’의 차이로 드러나며, 이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일종의 도상 전통으로 자리 잡아, 이후 여러 시대의 여지도輿地圖에 의해 계승되었다.

明嘉靖年间成书的《地理人子须知》[1564]中, 出现了一幅《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图9]. 该图的新颖之处, 在于它以风水学说即“众山之祖”昆仑山向中国发出的三条龙脉[“干龙”]为依据, 为上述中国中心论提供一种地理合法性说明. 图中, 昆仑山被表现在左上角, 可以清晰地看到从昆仑山发出的北、中、南三条山势走向的脉络, 从西向东贯穿. 但这里, 昆仑山并不是图像表述的中心, 相反, 它处在边缘; 它的西面和北面均未得到表现, 显然, 对于书的作者徐维志、徐维事兄弟而言, 除了中国所在的地方, 其余方位并不重要, 也不必画出[所谓“夷国之山不可考, 亦不足论”]. [18]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간행된 《지리인지수지地理人子須知》[1564]에는 하나의 특별한 도상이 실려 있다. 그것이 바로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干龍總覽之圖》이다[그림9].

图9. 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 徐维志 徐维事 1564 年 出自《地理人子须知》和《三才图会》
그림9.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干龍總覽之圖》 서유지徐維志・서유사徐維事, 1564년, 출전: 《지리인지수지地理人子須知》 및 《삼재도회三才圖會》

이 지도에서 주목할 점은, 풍수학설, 특히 “산맥의 조상은 곤륜산”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 전역에 세 갈래의 ‘간룡干龍’, 즉 주 산맥들이 곤륜산으로부터 출발해 뻗어나간다는 지리적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도에서는 곤륜산이 왼쪽 상단[서북방]에 위치하고, 곤륜산에서 출발한 북·중·남의 세 개 산맥이 서에서 동으로 뻗어 나가는 형세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 지도에서 곤륜산은 비록 “산맥의 조상”이라 불리지만, 도상의 중심은 아니다. 오히려 곤륜산은 그림의 가장자리[왼쪽 상단 모서리]에 놓여 있으며, 그 서쪽과 북쪽은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는 지도 제작자인 서유지徐維志・서유사徐維事 형제의 의도가 명확히 반영된 결과이다. 그들에게 있어 중국 이외의 지역은 중요하지 않으며, 굳이 도상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직접 이렇게 쓰고 있다: “이국의 산은 고찰할 수 없으며, 또한 논할 필요도 없다[夷國之山不可考, 亦不足論].” [18]

[18] 徐维志、徐维事: 《精校地理人子须知》, 人民教育出版社, 2006, 第30页.

이러한 사례는, 중국 중심주의적 지리 사유가 어떻게 도상 표현의 구도와 배치에까지 구체적으로 반영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곤륜산은 개념적으로 ‘시작점’일 수는 있어도, 도상 구성에서의 중심은 오직 중국 본토만이 점유할 수 있었다.

这一传统显然也被朝鲜地图制作者所接受. 韩国国立中央图书馆收藏的《天下之图》地图册中, 一幅《中国地图》彩绘图[图10], 即把昆仑山画在画面的左侧边缘, 并把它处理为黄河的源头. 仔细观察可知, 这里的“中国”与其说是当时朝鲜王朝的实际宗主国清朝, 毋宁说是已被推翻但仍为朝鲜王朝念兹在兹的明朝; 其版图强调的是长城之内的明代两京十三省, 却把清朝的统治者集团相关的建州、女真和蒙古都画在长城之外. 但是这一切又不能明说, 这大概就是为什么地图作者使用了“中国”这样较为笼统的称谓.

이러한 전통은 조선의 지도 제작자들 역시 분명히 수용하고 있었다. 한국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천하지도天下之圖》 지도첩 안에 수록된 한 점의 채색본 《중국지도中國地圖》[그림10]는 이를 잘 보여준다.

图10. 中国地图纸本设色 30cm×18. 8cm18 世纪 韩国国立中央图书馆藏
그림10. 《중국지도中國地圖》 지본 채색, 30cm × 18. 8cm, 18세기, 한국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 지도에서는 곤륜산을 화면 왼쪽 가장자리에 배치하고, 그것을 황하黃河의 발원지로 처리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당시 조선 왕조의 실질적 종주국이었던 청淸나라라기보다는, 이미 멸망했지만 조선이 여전히 그 정통성을 의식하고 있던 명明나라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지도에서 그려진 중국의 영토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명나라 시기의 양경십삼성兩京十三省을 중심으로 한 내지內地가 강조되어 있으며, 장성長城 바깥은 건주建州, 여진女眞, 몽고蒙古 등 청 제국의 지배 계층과 관련된 지역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도상 배치는, 조선 지도 제작자의 사대 관계의 복잡성과 내면적 갈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겉으로는 청을 조공국으로 섬기면서도, 지도 표현에서는 여전히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고수하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태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지도 제작자는 ‘중국’이라는 다소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但是, 在与之配套并同时出现的《天下图》中, 却出现了两个“中心”同时并存的现象其中一个依然是传统的“中国”, 另一个却是传统中位于边缘的“昆仑山”[“天地心”实际上是昆仑山的另类表述, 详见下文]; 在这种意义上, 虽然不能说传统的中国中心观得到了颠覆, 但至少可以说, 它在一定程度上被相对化了. 联系到《天下图》图像中, 昆仑山同样被处理成黄河的源头, 可以把传统中国中心观的“天下图”[例如从《华夷图》经《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到这里的《中国地图》], 看成是被整体挪移到《天下图》中, 成为其中央大陆中的右侧一半, 那么, 另一半又是怎么来的呢?
与之同时的另一种让渡, 发生在“五岳”称谓的微妙变化上. 我们注意到, 传统的“五岳”自从汉武帝时代确立以来, 一直保持着西岳华山、东岳泰山、北岳恒山、南岳衡山和中岳嵩山的称谓. 但在《天下图》中, 五岳仅仅以山的名称出现, 没有一座被冠以“岳”的名义, 其方位也没有得到合乎逻辑的排列[图11]. 然而, 令人匪夷所思的是, “中岳”的称谓却从“嵩山”那儿被挪移到了其侧的“昆仑山”上, 形成“中岳昆仑山”的表述. 就在“昆仑山”的西侧, 我们看到了另一个熟悉的表述是“天地心”, 这意味着“昆仑山”不仅仅是“中岳”, 还是“天地之心”.

그러나 이와 짝을 이루며 동시에 등장하는 《천하도》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공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전통적인 “중국”이며, 다른 하나는 원래 전통 세계관에서는 변방에 위치했던 “곤륜산”이다. 여기서 “천지심天地心”은 실상 곤륜산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논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비록 중국 중심주의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상대화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도》의 도상에서 곤륜산 역시 황하黃河의 발원지로 묘사된 점을 함께 고려하면,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천하도》”, 즉 《화이도華夷圖》,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 《중국지도》 등에서 나타나는 “중화 중심적 세계 질서”는 그대로 《천하도》 속 중앙대륙의 오른쪽 절반으로 이식移植되어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 이에 더해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양讓渡의 사례는 바로 “오악五嶽” 명칭의 변화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시피, 전통적 오악 체계는 한무제 이래로 다음 다섯 산으로 확립되었다: 서악西岳 화산華山, 동악東岳 태산泰山, 북악北岳 항산恒山, 남악南岳 형산衡山, 중악中岳 숭산嵩山.
하지만 《천하도》에서는, 오악 중 어느 산도 “악岳”이라는 공식 호칭을 부여받지 않았고, 각 산의 방위 배열 역시 전통 체계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그림11 참조].

图11. 天下图木刻本 29cm×33cm18世纪下半叶 [李灿断定为 17世纪末]尹炯斗藏品
그림11. 《천하도》 목판본 29cm × 33cm, 18세기 후반[이찬李灿은 17세기 말로 단정], 윤형두尹炯斗 소장품

다만 산 이름만이 고립적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원래 “중악”이었던 숭산嵩山에서 그 명칭이 이탈하고, 그 바로 옆에 위치한 “곤륜산”에 ‘중악’의 호칭이 이양되었다는 점이다.
즉, 지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중악곤륜산中岳崑崙山”. 또한 곤륜산의 서쪽 바로 인접한 곳에는 “천지심天地心”이라는 표기도 함께 등장한다. 이것은 곤륜산이 단지 “중악”으로 재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천지의 중심”, 즉 우주의 중심 위치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천하도》는 전통적인 세계 도식[중국 중심의 오악 질서]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중심 개념을 “곤륜산–천지심”으로 이동 및 재구성함으로써, 동아시아적 우주관에 대한 독자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不仅只有“中岳昆仑山”的表述, 仔细观察还会发现, 在地图中央大陆外围大海中, 东、西、南、北四个方位还有四座岳山“东岳广桑山”“西岳丽农山”“南岳长离山”和“北岳广野山”, 这四座岳山加上“中岳昆仑山”, 正好构成了在传统五岳之外的又一组五岳[图12]. 这双重套叠的“五岳”系统并非偶然, 而是出自一个精密的设计. 一幅《天下图》的图例文字透露了图像设计者的用意所在, 即“泰山、嵩山、华山、恒山、衡山”构成的是“内五岳”, “广野山、丽农山、广桑山、长离山、昆仑山”构成的是“外五岳”[图13]. 日本地图学家海野一隆早就指出, 第二组“五岳”和“天地心”的表述均出自唐杜光庭所著道经《洞天福地岳渎名山记》, 相关描述如下: 东岳广桑山在东海中, 青帝所都. 南岳长离山在南海中, 赤帝所都. 西岳丽农山在西海中, 白帝所都. 北岳广野山在北海中, 黑帝所都. 中岳昆仑山在九海中, 千辰星为天地心. [19]

《중악곤륜산中岳崑崙山》이라는 표현 외에도, 자세히 보면 지도 중앙대륙 외곽의 대해大海 속 동·서·남·북 네 방위에 네 개의 악산岳山이 더 존재한다. 즉, “동악광상산東岳廣桑山”, “서악려농산西岳麗農山”, “남악장리산南岳長離山”, “북악광야산北岳廣野山”이며, 여기에 “중악곤륜산”을 더하면 전통 오악과는 별개의 또 다른 오악 체계가 구성된다[그림12].

图12. 《天下图》细节: 西岳丽农山、北岳广野山、中岳昆仑山、南岳长离山、东岳广桑山
그림12. 《천하도》 세부: 서악려농산西岳麗農山, 북악광야산北岳廣野山, 중악곤륜산中岳崑崙山, 남악장리산南岳長離山, 동악광상산東岳廣桑山

이중으로 중첩된 이 오악 체계는 우연이 아니라 정교한 설계 결과이며, 한 판본의 《천하도》 도례圖例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태산·숭산·화산·항산·형산”은 내오악內五岳, “광야산·려농산·광상산·장리산·곤륜산”은 외오악外五岳[그림13].

图13. 《天下图》 18世纪 韩国国立民俗博物馆[右侧文字: 广野山、丽农山、广桑山、长离山、昆仑山外五岳, 左侧文字: 泰山、嵩山、华山、恒山、衡山内五岳]
그림13. 《천하도》 18세기, 한국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오른쪽 문구: 광야산廣野山, 려농산麗農山, 광상산廣桑山, 장리산長離山, 곤륜산崑崙山: 외오악外五岳. 왼쪽 문구: 태산泰山, 숭산嵩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형산衡山: 내오악內五岳.

일본 지도학자 운노 카즈타카[海野一隆]는 이 외오악과 “천지심天地心” 개념이 모두 당나라 도사 두광정杜光庭의 도경 《동천복지악독명산기洞天福地岳渎名山记》에서 유래했음을 지적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 杜光庭: 《洞天福地岳渎名山记全译》, 王纯五译注, 贵州人民出版社, 1999, 第7页.

值得注意的是, 杜光庭的“五岳”模式尽管显得荒率飘忽, 但其中“青帝”“赤帝”“白帝”“黑帝”的说辞, 说明这套系统与传统的“五岳”模式一样, 仍然以汉武帝时期以来所建构的融宇宙[“五行”]、空间[“五方”]、色彩[“五色”]和政治[“五帝”]为一体的潜在秩序为基础, 只不过在《天下图》的案例中, 这种秩序已经从内[“内五岳”]而外[“外五岳”]扩展到一个更为广大的场域. 这一场域充满着神话般的国名和不可索解的地名, 但正如日本、琉球这样的历史名称与蓬莱、瀛洲、方丈那样的神话仙境比肩而立所示, 尽管这里半明半昧、半文明半野蛮, 仍然不失为一个可以认知、沟通和交往的人间.
需要解释的是外圈的大陆, 即本文开篇所比喻的那个苹果中被虫子所蛀出的“虫道”, 或者那幅侧面肖像的“外框”. 这个大陆上尽管密布着近百个国名和地名, 但其中竟然没有一个历史地名存在!较之文明的中央大陆和半文明的海上世界, 这个地域无疑是一个“大荒世界”.
看上去, 这样一个三重套叠的世界, 非常接近于《山海经》所描绘的山海世界. 那么, 《天下图》是一幅《山海经图》吗? 它真的是要图解一个《山海经》世界吗?

주목할 점은, 두광정杜光庭의 ‘오악五岳’ 체계가 비록 허황하고 뜬구름 같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 등장하는 “청제靑帝” “적제赤帝” “백제白帝” “흑제黑帝” 등의 표현은, 이 체계가 전통적인 오악 개념과 마찬가지로 한무제 이래로 구축된, 우주[오행]・공간[오방]・색채[오색]・정치[오제]를 통합한 잠재 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지 《천하도》의 경우, 이 질서가 내오악內五岳에서 외오악外五岳로까지 확장되며, 보다 넓고 광대한 공간 영역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 외곽 공간은 신화적인 국명과 해독할 수 없는 지명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지만 일본・류큐와 같은 역사적 지명이 봉래蓬萊・영주瀛洲・방장方丈 같은 신화적 선경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반쯤은 밝혀지고 반쯤은 어두운, 반쯤은 문명이고 반쯤은 미개한 공간이지만, 여전히 인식하고 교류하고 소통 가능한 인간 세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지도 외곽의 대륙이다. 이는 본문 서두에서 비유한, “사과 속 벌레가 갉아먹은 훼도虫道” 또는 “남성 측면 초상화의 외곽 틀”에 해당한다. 이 대륙에는 약 100여 개의 국명과 지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지만, 그 중 단 하나의 역사적 지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화된 중앙대륙과 반문명화된 해상 세계에 비해, 이 외곽 대륙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의 ‘대황세계大荒世界’이다.
이처럼 삼중 구조로 중첩된 세계는 《산해경》이 묘사하는 산해의 세계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천하도》는 《산해경도山海經圖》인가?
정말로 《산해경》의 세계를 해석하려 한 것인가?

2. 是《山海经图》, 还是《九九州图》?
2. 《산해경도山海經圖》인가, 《구구주도九九州圖》인가?

《天下图》与作为文本的《山海经》存在关系是毋庸置疑的. 《山海经》共十八篇, 由前五篇《山经》和后十五篇《海经》构成. 无疑, 这样的山、海和山海中的诸国世界, 正好构成了《天下图》所要表达的内容. 此外, 它那由内而外三重套叠[由中央大陆、海上世界和外层大陆组成]的结构, 也与《海经》中的《海内经》《海外经》和《大荒经》的内容恰好吻合. 中村拓曾对一幅《天下图》做过统计, 他发现, 在该图的145个地名中, 有不少于110个地名来自上述《海内经》《海外经》和《大荒经》. [20]
尤其是成书于战国时期的古书《山海经》, 历史上一直传说存在着与经文相配的图, 称作《山海图》. 明代杨慎在《山海经后序》中说: 九鼎之图, 其传固出于终古、孔甲之流也, 谓之曰《山海图》, 其文则谓之《山海经》. 至秦而九鼎亡, 独图与经存. 晋陶潜诗“流观山海图”, 阮氏《七录》有张僧繇《山海图》可证已. 今则经存而图亡. [21]
也就是说, 《山海经》和《山海图》本来都是夏禹所铸的九鼎上的文字和图像; 九鼎消失之后, 只有《山海经》与《山海图》流传下来; 至少在东晋时, 陶渊明还在诗中说他“流观山海图”, 也就是看与《山海经》内容相配的图; 但到了后世, 只有经流传了下来, 图却与九鼎一样亡失了; 同时, 也使得后世的人们把寻找失落了的《山海图》的工作, 提上了议事日程.
据中村拓回忆, 日本著名地理学家小川琢治, 即属于那些相信朝鲜《天下图》为佚失了的《山海图》的人群中之一员. [22]其中当然也包括中国学者. 在2017年出版的《中外交通古地图集》一书中, 编著者即将图12所示的《天下图》, 当作后人补绘的《山海经》地理图之一; 他们还在书中, 将该图的标题和年代特意标注为“传说的山海经地理图[公元前476年后, 后代复原]”[23]. 另外一些学者[如刘宗迪]虽然并不认定《天下图》一定是古代《山海图》的直接遗存, 但同样断言: “这幅朝鲜王国的世界地图就是《山海经》所记述地理知识的形象图示……朝鲜《天下图》从形式到内容, 都是对《山海经》的忠实描摹.” [24]

《천하도》가 《산해경》이라는 텍스트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산해경》은 모두 18편으로, 앞의 다섯 편은 《산경山經》이고, 뒤의 열다섯 편은 《해경海經》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처럼 산과 바다, 그리고 산해山海 속의 제국諸國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바로 《천하도》가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과 정확히 부합한다. 더욱이, 《천하도》가 보여주는 ‘내부에서 외부로의 삼중 중첩 구조’, 곧 중앙대륙 → 해상 세계 → 외층 대륙이라는 형식은 《해경》의 구성인 《해내경海內經》·《해외경海外經》·《대황경大荒經》의 체계와 정확히 들어맞는다. 일본의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는 한 장의 《천하도》를 대상으로 통계를 낸 바 있는데, 그는 해당 지도에 표기된 145개 지명 가운데 적어도 110개 이상이 《해내경》·《해외경》·《대황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냈다[20].

[20]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p.10.

특히 주목할 점은, 《산해경》은 전국시대에 성립된 고서인데, 역사적으로 그 본문에 상응하는 도상이 존재했을 것으로 전해지며, 이를 《산해도山海圖》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명대의 양신楊慎은 《산해경후서山海經後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구정九鼎의 도상은 본래 종고終古, 공갑孔甲의 유파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를 《산해도山海圖》라 일컫고, 그 글자는 《산해경》이라 불렀다. 진秦대에 구정이 없어졌고, 도圖와 경經만이 남아 전해졌다. 진나라 이후에도, 도는 여전히 전해졌고, 경문도 함께 남았다. 진晉대 도잠陶潛의 시에 ‘산해도를 유람한다’는 구절이 있고, 또한 완씨阮氏의 《칠록七錄》에는 장승요張僧繇의 《산해도》라는 작품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경문은 전하고 도상은 사라졌다.” [21]

[21] 转引自朱鉴秋、陈佳荣、钱江、谭广濂: 《中外交通古地图集》, 中西书局, 2017, 第6页.

즉 요약하자면, 《산해경》과 《산해도》는 원래 하우夏禹가 주조한 구정九鼎에 새겨진 글과 그림이었다. 구정이 사라진 이후에도, 경문과 도상 모두가 일정 시기까지는 함께 전해졌고, 동진東晉 시기까지만 해도 도잠陶潛[도연명]이 “산해도를 유람한다”고 시로 썼으며, 장승요張僧繇가 그렸다는 《산해도》의 존재도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경經은 전해지고 도圖는 실전失傳되었다.
이처럼 《산해도》의 실전失傳은 후세 사람들에게 그 상실된 도상을 다시 찾고 복원하려는 시도를 촉발시켰으며, 《천하도》 또한 그러한 탐색의 한 결과물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카무라 히로시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의 저명한 지리학자 오가와 다쿠지[小川琢治] 역시 조선의 《천하도》가 실전된 《산해도山海圖》일 가능성을 믿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22].

[22]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p.12.

이와 같은 입장은 물론 중국 학계 일부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17년에 간행된 《중외교통고지도집中外交通古地圖集》에서는, [그림12]에 해당하는 《천하도》를 곧 후대에 다시 그려낸 《산해경》 지리지도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해당 도록의 편찬자는, 이 지도에 대해 제목과 연대를 다음과 같이 명기했다: “전설의 산해경 지리도[傳說的山海經地理圖] [기원전 476년 이후, 후대 복원]”[23]

[23] 朱鉴秋、陈佳荣、钱江、谭广濂: 《中外交通古地图集》, 中西书局, 2017, 第5页.

또 다른 학자들[예컨대 류종적劉宗迪]은 비록 《천하도》가 고대 《산해도》의 직접적 유산이라고까지는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조선왕국의 세계지도는 곧 《산해경》이 기록한 지리 지식의 도상화 표현이다…… 조선 《천하도》는 형식에서 내용에 이르기까지 《산해경》에 대한 충실한 묘사이다.” [24]

[24] 刘宗迪: 《〈山海经〉与古代朝鲜的世界观》, 《中原文化研究》2016年第6期, 第16~17页.

笔者曾经多次申言, 习惯以文本为依据的历史学者在从事图像研究时, 经常容易犯的错误之一, 在于把图像看成是思想或文本无中介的直接体现; 而实际上, 图像不是透明的, 而是一种具有物性的存在[笔者称之为“图像的物性”], 它会在图像与图像之间[或曰图像传统之中]投下自己的重影. 具体到地图研究中, 笔者将“图像的物性”发展成为“图形作为知识”的方法论诉求, 这种诉求试图不仅将地图的制作看作地理现实或思想的表达, 而且看作制作者“情感与欲望”的表达, 更呈现为一个有关图形形式的知识生成、传递和演变的客观历程. [25]例如在《天下图》的案例上, 地图整体为什么会呈现为圆形? 中央大陆为什么是现有的形状而不是其他任何形状? 昆仑山为什么会变成一个新的五岳系统的中心? 这些都是持论《山海经图》的学者们并不关心, 也难以回答的问题, 却为本文作者所不得不关心和回答.
另一个为《天下图》寻找文本来源的举措, 是把地图中那极为风格化的环形大海环绕“环形大陆”的结构, 看成是受到战国时期思想家邹衍的影响. 其最早应该出于韩国学者金良善[1972], 后来是另一位韩国学者李灿[1998], 二者都提到实学学者魏伯珪[17271798]在著作《寰瀛志》中所引的邹衍的一段话: 中国四方之海, 是号裨海, 其外有大陆环之, 大陆地外又有大瀛海环之, 方是地涯云. [26]

이에 대해 필자는 이전부터 여러 차례 강조해온 바 있다. 곧, 텍스트를 기준으로 사고하기에 익숙한 역사학자들이 도상 연구에 접근할 때 자주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이미지를 사유나 문헌의 ‘중개 없는 직접 표현’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지는 투명한 것이 아니라 ‘물성物性’을 갖는 존재이다. 필자는 이 개념을 “도상의 물성[圖像的物性]”이라 명명했다. 이러한 도상의 물성은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 투사되는 중영重影을 만들어내며, 개별 이미지가 아니라, 도상과 도상의 전통 전체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지도 연구로 확장되어, 필자는 “지식으로서의 도형圖形”이라는 방법론적 주장을 전개해왔다. 이 방법론은, 지도를 단순히 지리 현실이나 사상의 표현으로만 보지 않고, 지도 제작자가 가진 감정과 욕망의 표현, 나아가 도형 형식 자체에 대한 지식 생성, 전달, 변이의 객관적 과정으로 간주하려는 것이다[25].

[25] 李军: 《可视的艺术史—从教堂到博物馆》, 北京大学出版社, 2016, 第22、334页; 《从图像的重影看跨文化艺术史》, 《艺术设计研究》2018年第2期, 第93~104页; 《图形作为知识—十幅世界地图的跨文化旅行》[上], 《美术研究》2018年第2期, 第68页.

예를 들어 《천하도》를 둘러싼 다음과 같은 질문들:

이런 문제들은 《산해경도》로서 《천하도》를 해석하려는 기존 학자들이 다루지 않거나, 다룰 수 없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본 논문의 필자에게는, 오히려 반드시 관심을 갖고 답해야 할 핵심 문제들이다.
《천하도》의 문헌적 배경을 찾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는, 지도에 표현된 환형環形 대해大海가 환형 대륙을 감싼 구조를 전국시대 사상가 추연鄒衍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처음에는 한국 학자 김량선金良善[1972]이 제기했고, 뒤이어 이찬李灿[1998] 역시 동일한 견해를 언급했다. 두 학자는 모두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魏伯珪[1727–1798]의 저서 《환영지寰瀛志》에 인용된 추연의 다음 구절을 근거로 삼는다: “중국 사방의 바다를 비해裨海라 일컫고, 그 바깥에 대륙이 이를 둘러싸며, 대륙의 밖에는 다시 대영해大瀛海가 이를 에워싸니, 그곳이 바로 지구의 끝이라 한다.” [26]

[26]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0; 영남대학교 박물관: 《韩国의옛 地图: 영남대박물관 소장》, 영남대학교박물관, 1998[韩国岭南大学博物馆: 《韩国的古地图: 岭南大学博物馆收藏》, 韩国岭南大学博物馆, 1998].

鉴于邹衍著作已亡佚, 查证司马迁《史记·孟子荀卿列传第十四》, 相关的原话为: 以为儒者所谓中国者, 于天下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 中国名曰赤县神州. 赤县神州内自有九州……中国外如赤县神州者九, 乃所谓九州也. 于是有裨海环之, 人民禽兽莫能相通者, 如一区中者, 乃为一州. 如此者九, 乃有大瀛海环其外, 天地之际焉. [27] 中国学者徐宁认为《史记》的记载与《寰瀛志》中的记载“有很大出入”[28], 似有所不逮. 实际上, 魏伯珪在他的《寰瀛志》初编中收入了一幅自名为“利玛窦天下图”的地图[图14], 他在序中即称其为《利玛窦九九州图》. [29] 鉴于该图实质上即当时流行的《天下图》的一个变体, 换句话说, 当他把这幅90%与《天下图》重合[只是把地图原先的圆形改成了矩形]的地图叫作《九九州图》, 即意味着《天下图》在魏伯珪心目中, 也是一种《九九州图》, 而这显然与《史记》中邹衍的描述一致. 也就是说, 中国可内分为“九州”[小九州], 它本身又是中央大陆上的“九州”[大九州]之一, 被中央大陆外的一个“裨海”所环绕; 然后, 在外围的大陆中, 又存在着相对独立的九部分, 成为另一个“九州”; 全世界一共有类似于中国那样的九州[大九州]八十一个, 中国只占据八十一分之一; 而在这八十一个大九州之外, 才是另一道无边的大海[“大瀛海”]环绕着, 这才是天地之间的边际. 这一描述与前引邹衍的一段话并无矛盾; 换言之, 从内容上说, 魏伯珪引用邹衍的学说来阐释《天下图》并没有问题.
唯一的问题存在于图形上面. 也就是说, 魏伯珪作为18世纪的实学学者, 他可以从文献角度把《天下图》阐释为邹衍意义上的《九九州图》, 但他并没有也不可能发明《天下图》的形式; 这种形式在他之前, 至少在17世纪下半叶即已存在, 故而魏伯珪眼中的《九九州图》, 并不是《天下图》的来源, 仅仅是一种后事之师的巧合而已.

추연鄒衍의 저작이 이미 실전되었기 때문에, 사마천의 《사기史記·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을 조사해 본 결과, 관련된 원문은 다음과 같다. “유가에서 말하는 중국이라는 것은, 온 천하를 81등분으로 나눌 경우 그 가운데 하나에 해당할 뿐이다. 중국의 이름은 적현신주赤縣神州이며, 적현신주 안에는 스스로 9주州가 있다…… 중국 밖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아홉 개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9주九州이다. 그 주위에는 협소한 바다[裨海]가 둘러싸고 있어서, 사람과 새·짐승도 서로 왕래할 수 없으며, 하나의 구역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인데, 그것을 하나의 ‘주州’라고 한다. 이런 것이 9개이고, 그 바깥에는 다시 대영해大瀛海가 둘러싸고 있어서, 이곳이 천지의 경계이다.”[27]

[27] 司马迁: 《史记》第七册, 中华书局, 1959, 第2344页.

중국 학자 서녕徐寧은 《사기》의 기록과 《환영지寰瀛志》에 나오는 기술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며, [28]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28] 徐宁: 《国图所藏李朝朝鲜后期的圆形地图研究》, 第149页.

그러나 실제로 위백규魏伯珪는 자신의 《환영지》 초편에 《리마두[마테오리치]천하도利瑪竇天下圖》라는 이름의 지도를 수록했는데, 서문에서는 그것을 《리마두[마테오리치]구구주도利瑪竇九九州圖》라고 불렀다. [29]

[29] Lim Jongtae, “Matteo Ricci’s World Maps in Late Joseon Dynasty,” The Korean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33, No. 2 [2011]: 294.

图14. 利玛窦天下图魏伯珪 出自《存斋全书》
그림14. 《리마두[마테오리치]천하도利瑪竇天下圖》 위백규魏伯珪 작성, 출전: 《존재전서存齋全書》

이 지도는 실질적으로 당시 유행하던 《천하도天下圖》의 하나의 변형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지도[전체적으로 90%는 《천하도》와 일치하고, 단지 원형이었던 지도를 직사각형으로 바꾼 정도의 차이]를 《구구주도九九州圖》라 부른 것은, 위백규 자신의 인식 속에서 《천하도》 또한 일종의 《구구주도》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사기》에 나오는 추연의 묘사와 일치한다.
즉, 중국은 내부적으로 ‘구주九州'[작은 구주]로 나뉘며, 이 중국 자체는 중앙대륙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구주’[큰 구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중앙대륙은 ‘비해裨海’라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의 대륙에는 다시 서로 독립된 아홉 개의 부분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또 하나의 ‘구주’를 형성한다. 전 세계에는 이와 같은 형식의 ‘구주’[큰 구주]가 모두 여든한 개 있으며, 중국은 그 가운데 겨우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여든한 개의 구주 바깥에야 비로소, 경계가 없는 대영해大瀛海가 존재하고, 그것이 곧 천지 사이의 끝인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앞에서 인용한 추연의 발언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내용 면에서 보아도, 위백규가 《천하도》를 해석하는 데에 추연의 학설을 끌어다 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일한 문제는 도형圖形 자체에 존재한다. 즉, 18세기 실학자였던 위백규魏伯珪는, 문헌적 해석을 통해 《천하도》를 추연鄒衍의 의미에서 말하는 《구구주도九九州圖》로 설명할 수는 있었지만, 그가 《천하도》의 형식을 발명한 것은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천하도》의 이런 형태는 위백규보다 앞선 시기, 적어도 17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백규가 인식한 《구구주도》로서의 《천하도》는 그 도상의 기원이라기보다는, 후대 학자가 도상에 부여한 의미 해석의 결과이며, 그저 우연한 해석상의 수렴收斂에 지나지 않는다.

3. 圆形: 佛教寰宇图?
3. 원형: 불교의 환우도寰宇圖?

为什么所有的《天下图》都采取了圆形的形式? 是因为它们都有一个共同的来源, 而这个来源又恰恰是一个圆形构图吗?
中村拓尽管不同意小川琢治失落了的《山海经图》起源说, 但他仍然相信《天下图》有一个较古老的渊源, 正如他文章的标题《保留在朝鲜人中的古老中国地图》所示; 只不过这次的渊源变成了所谓的中国佛教寰宇图. [30]在他看来, 《天下图》较近的前身是类似于明代章潢《图书编》[15621577]中所载的《四海华夷总图》[图15]那样的图, 它把佛教世界观中的南瞻部洲[人类所生活处]描绘成一个中央大陆, 它的周围围绕着海洋和岛屿; 东西两侧又被大陆包围; 东部的国家有日本和大、小琉球, 西部大陆上则有大秦国. 整个地图的外形呈现为矩形, 但中央大陆则约略呈现为一个牛头形或者一个盾形; 中央大陆的核心是以北海和南海为轴线而对称展开的“五印度”或“五天竺”, 其中“昆仑”位于中天竺偏东的位置上, 并没有处在中心.

왜 모든 《천하도》는 원형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들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출처에서 유래했고, 그 출처 자체가 바로 하나의 원형 구도였기 때문인가? 나카무라 히로시[中村拓]는 비록 오가와 다쿠지[小川琢治]의 ‘실전된 《산해경도山海經圖》 기원설’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천하도》에는 비교적 오래된 연원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이는 그의 논문 제목이 〈조선인들 속에 보존된 고대 중국 지도〉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이번에 그가 제시한 연원은 이른바 ‘중국 불교의 《환우도寰宇圖》’였다. [30]

[30]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pp.13~18.

그가 보기에는 《천하도》의 가까운 전신은 명대 장황章潢의 《도서편圖書編》[1562–1577]에 실린 《사해화이총도四海華夷總圖》와 같은 지도였다[그림 15].

图15. 四海华夷总图1585年 出自章潢《图书编》卷二十九
그림15. 《사해화이총도四海華夷總圖》 1585년, 출전: 장황章潢 《도서편圖書編》 권29

이 지도는 불교 세계관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인 남섬부주南瞻部洲를 하나의 중앙대륙으로 그려내고, 그 주변을 바다와 섬들이 에워싸고 있다. 지도 동쪽과 서쪽 양옆에는 다시 대륙이 있다. 동쪽 대륙에는 일본과 대·소 류큐琉球 등이 있으며, 서쪽 대륙에는 대진국大秦國이 있다. 지도 전체 외형은 직사각형이지만, 중앙대륙은 대략 소의 머리 모양 또는 방패 모양을 이루고 있다. 중앙대륙의 중심부는 북해北海와 남해南海를 축으로 하여 대칭을 이루는 ‘오인도五印度’ 또는 ‘오천축五天竺’이며, 이 가운데 ‘곤륜’은 중천축中天竺의 약간 동쪽에 치우친 곳에 있으며, 중심에 놓여 있지는 않다.

章潢没有给出《四海华夷总图》的确切来源, 只是说它来自“释典……故存之以备考”[31]; 但是, 中央大陆的“盾形”形状和上面的“五天竺”名称, 却把我们的视线引向另一类更为古老的佛教地图《五天竺图》. 图16即一幅现存于日本法隆寺的《五天竺图》, 其年代可以追溯到1364年, 但其原型却可以追溯到7世纪的唐玄奘和他的《大唐西域记》. 关于这类地图的原貌和流传, 黄时鉴做了这样的推断: “以《大唐西域记》为主绘制的《五天竺图》最初出现于中国, 然后经高丽传到了日本, 时间当在唐宋时期. 当时的东亚佛教信徒渴望到天竺去朝圣, 《大唐西域记》是他们随身携带的指引书, 《五天竺图》是他们的路线图.” [32] 从该图的示意图[图17]来看, 虽然图上标出了玄奘在五天竺旅行的部分路线图, 但该图更主要的功能并不在于此, 而在于呈现一个以天竺为中心的理想佛教秩序. 五天竺占据了画面的主要篇幅, 以类似于中国五岳的理想化模式, 按东南西北中的方位沿中轴线展开; 在这个空间里, 欧亚大陆上两个最为强大的世俗王朝中国[震旦]和波斯仅仅处于东部和西部边缘, 更加强烈地反衬出以恒河、中天竺和南天竺为中轴的佛教中心的存在.

장황章潢은 《사해화이총도四海華夷總圖》의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지 않았고, 단지 “불경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보존하여 고증에 대비했다”고만 말했다. [31]

[31] 章潢: 《图书编》卷二十九, 转引自朱鉴秋、陈佳荣、钱江、谭广濂: 《中外交通古地图集》, 第137页.

그러나 중앙대륙의 ‘방패형’ 형태와 그 위에 표기된 ‘오천축五天竺’이라는 명칭은 우리의 시선을 한층 더 오래된 불교 지도, 즉 《오천축도五天竺圖》라는 또 다른 계열로 이끈다.

图16. 五天竺图1364 年 日本奈良法隆寺藏品
그림16. 《오천축도》 1364년, 일본 나라[奈良] 법륭사法隆寺 소장

[그림 16]은 지금도 일본 법륭사法隆寺에 소장되어 있는 《오천축도》 가운데 하나로, 제작 연대는 13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그 원형은 7세기 당나라 현장玄奘과 그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지도의 원형과 전파에 대해서 황시감黃時鑑은 다음과 같은 추정을 내렸다. “《대당서역기》를 바탕으로 그려진 《오천축도》는 최초에 중국에서 제작되었고, 그 뒤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시기는 당송 시대일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 신자들은 천축으로 순례 가기를 열망했고, 《대당서역기》는 그들이 몸에 지니는 인도서였으며, 《오천축도》는 그들의 순례 노선도였다.”[32]

[32]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第253页.

해당 지도의 개요도[그림 17]를 보면, 지도에는 현장이 오천축을 여행한 일부 경로가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이 지도의 주요 기능은 그 자체가 아니다.

图17. 《五天竺图》示意图
그림17. 《오천축도》 도해示意圖

더 중요한 목적은, 천축을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 불교 질서의 공간을 시각화하는 데 있다. 오천축은 화면의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마치 중국의 오악五嶽처럼 이상화된 형식으로 동남서북중의 방위를 따라 중앙 축을 따라 배치된다. 이 공간 속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두 가장 강력한 세속 왕조인 중국[진단震旦]과 페르시아는 단지 동쪽과 서쪽의 가장자리 변두리에 위치해 있으며, 이로써 갠지스강과 중천축中天竺, 남천축南天竺을 중심으로 한 불교 세계의 중심성이 더욱 강조된다.

正是这种理想化的空间秩序设计, 导致这类地图[包括《四海华夷总图》]的中央大陆形状近似于椭圆形[更准确地说, 一个“盾形”]. 但李约瑟等科学史学者, 仍然把这类地图当作“轮形[圆形]地图”来看待, 认为它们不仅仅“起源于印度”, 还像“所有的轮形地图”一样, 可能都起源于一个共同的来源巴比伦. [33] 因为它们并非真正表达历史信息的地图, 而是同属一类李约瑟称之为“宗教寰宇图”的地图; 它们表达宗教理想和秩序的成分, 要远远大于其事实的成分.
与《天下图》基本处于同一时间段的《四海华夷总图》也不例外. 《四海华夷总图》的构图原则, 表现为比《五天竺图》更机械的中轴对称原则如“长脚国”对“无肾国”、“长臂国”对“蒲甘国”、“朝鲜”对“弗懔”、“日本国”对“西女国”, 左右两半的国家、岛屿和半岛, 完全呈现出镜像般的 – 对应. 与之相反, 尽管看上去很相似, 但《天下图》的构图原则在以下两点上却与之截然不同.

第一, 《天下图》中央大陆的形状是不规则的, 它的左右两半并不对称.

第二, 《天下图》的图形是圆形, 并不是椭圆形或“盾形”.

综上所述, 佛教寰宇图并不是《天下图》图形的来源.

实际上, 寻找《天下图》来源的线索不在别处, 反而正在《天下图》本身之中. 显然, 我们忽视了其中的一类《天下图》[图18], 它们有时候也叫《天地图》[图19], 观看它们的重点不在“天下”之“下”[或“地”], 而在于其“天”. 图18是一幅韩国国立中央博物馆收藏的《天下图》, 其具体年代应该在18世纪; 这幅地图最引人注目的地方, 在于它在最外圈本来应该由“大瀛海”占据之处, 安置了众多熠熠生辉的星座. 这些星座是周天的“二十八宿”和“十二次”. 前者包括东方苍龙七宿[角、亢、氐、房、心、尾、箕]; 北方玄武七宿[斗、牛、女、虚、危、室、壁]; 西方白虎七宿[奎、娄、胃、昴、毕、觜、参]; 南方朱雀七宿[井、鬼、柳、星、张、翼、轸]. 后者指十二星次, 由圆周外围的一圈字表示, 包括寿星[辰]、大火[卯]、析木[寅]、星纪[丑]、玄枵[子]、娵訾[亥]、降娄[戌]、大梁[酉]、实沈[申]、鹑首[未]、鹑火[午]、鹑尾[巳]. 根据中国古代的分野星占学, 天上的“二十八宿”“十二次”与地上世界的区域[通常用汉唐时期的十二郡国或九州来表示]存在着对应关系, 故通过天上星象的变动即可预测地上的人事祸福. 图19的形态更接近于传统的分野系统, 它的地上世界以中国疆域为主[同时包括十二郡国和九州], 与天上的“二十八宿”和“十二次”正好 – 呼应. 星象系统的呈现其实更好地显露了这类图设计之初的原始意图, 即一种从空中[“天”]向下[“地”]俯瞰的视角; 根据这种视角, 加上东西地极上“扶桑树”和“盘格松”扮演着提供“日月所出”和“日月所入”的功能, 我们终于恍然大悟, 原来地图的圆形构图不过是天穹之圆和日月周行轨道的表现, 是传统“天圆地方”观念的反映. 一旦意识到地图的圆形其实是天穹的表现, 那么也会相应明白, 被几乎所有学者称作“环形大陆”的外围大陆, 其实根本就不是圆的. 它们在地图中其实或多或少都被表现得近似正方形, 因为大地本来就是“方”的用我们的话来说, 即“一个神圣星空下的矩形大地”. [34]

바로 이러한 이상화된 공간 질서의 설계 방식이, 이러한 지도들[《사해화이총도四海華夷總圖》를 포함하여]에서 중앙대륙의 형태가 타원형[정확히 말하면 ‘방패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리약슬李约瑟를 비롯한 과학사 학자들은 이러한 지도들을 여전히 ‘륜형輪形[원형] 지도’로 간주하면서, 그것들이 단지 “인도에서 기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륜형 지도들”처럼 하나의 공통된 기원[바로 바빌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33]

[33] 李约瑟: 《中国科学技术史》[第五卷《地学》第一分册], 科学出版社, 1976, 第195页.

왜냐하면 이 지도들은 실제 역사지리 정보를 표현한 지도가 아니라, 리약슬이 ‘종교환우도宗教寰宇圖’라 명명한 지도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도들은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보다, 종교적 이상과 질서를 표현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천하도》와 거의 동시대에 제작된 《사해화이총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해화이총도》의 구도 원리는 《오천축도五天竺圖》보다 더 기계적으로 중축 대칭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데, 예를 들면 “장각국長脚國”은 “무신국無腎國”과, “장비국長臂國”은 “포강국蒲甘國”과, “조선朝鮮”은 “불렴弗懔”과, “일본국”은 “서여국西女國”과 각각 대응한다. 이처럼 좌우 양쪽의 나라, 섬, 반도들이 완전히 거울상처럼 일대일 대응의 형태를 보인다.

이에 반해,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천하도》는 구도 원리에서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첫째, 《천하도》의 중앙대륙은 형태가 불규칙하며, 좌우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둘째, 《천하도》의 지도 외형은 원형이지, 타원형이나 방패형이 아니다.

이상의 점들을 종합하면, 불교 환우도는 《천하도》의 도형적 기원이 아니다.

실제로 《천하도》의 기원을 찾을 실마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하도》 자체 속에 숨어 있다. 우리가 분명 간과하고 있는 것은 《천하도》의 한 부류다[그림 18].

图18. 天下图纸本设色 18 世纪 韩国国立中央博物馆藏
그림18. 〈천하도〉 지본 채색, 18세기,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지도들은 때때로 《천지도天地圖》라고도 불리는데[그림 19], 이러한 지도들을 감상할 때의 핵심은 ‘천하天下’의 ‘하下’ 즉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天’에 있다.

图19. 天地图纸本设色 30c m×47. 6c m19 世 纪 韩国首尔历史博物馆藏
그림19. 〈천지도天地图〉 지본 채색, 30cm × 47. 6cm, 19세기, 한국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림 18]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천하도》 한 점으로, 제작 시기는 18세기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원래 지도 바깥쪽 가장자리, 곧 ‘대영해大瀛海’가 있어야 할 자리에 수많은 빛나는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 별자리들은 하늘의 ‘이십팔수二十八宿’와 ‘십이차十二次’이다.

이십팔수는 다음과 같다.

십이차十二次는 원둘레 바깥에 표기된 명칭으로, 다음과 같다.

수성壽星[진辰], 대화大火[묘卯], 석목析木[인寅], 성기星紀[축丑], 현효玄枵[자子], 추자娵訾[해亥], 강루降婁[술戌], 대량大梁[유酉], 실침實沈[신申], 순수鶉首[미未], 순화鶉火[오午], 순미鶉尾[사巳].

중국 고대의 ‘분야성점分野星占’에 따르면, 하늘의 이십팔수와 십이차는 지상의 영역과 각각 대응되며, 보통 한나라나 당나라 시기의 12개 군국 혹은 9개 주와 연결된다. 이 때문에 하늘의 별자리 움직임을 통해 지상에서의 인사人事와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림 19]는 이러한 전통적 분야 체계와 더 가까운 형태를 지닌 지도다. 이 지도는 지상의 세계를 중국 영토를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동시에 12군국과 9주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하늘의 이십팔수 및 십이차와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된다. 별자리 체계의 배치는 이러한 지도가 기획되었을 당시의 본래 의도를 오히려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즉 그것은 하늘[‘천’]로부터 아래의 땅[‘지’]을 내려다보는 일종의 공중 시점이다.
이러한 시점에 따라, 동서의 지극한 끝에 위치한 ‘부상수扶桑樹’와 ‘반격송盤格松’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결국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이 지도의 원형 구도는 단지 하늘의 둥근 천개天蓋와 해·달이 운행하는 궤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며, 곧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유의 반영이었다.
이처럼 지도의 ‘원형’이 사실은 ‘하늘’의 표현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 거의 모든 학자들이 ‘환형 대륙環形大陸’이라 부른 그 바깥 대륙이 실은 전혀 원형이 아님을 또한 깨닫게 된다. 실제로 이들 바깥 대륙은 지도 속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표현되며, 그것은 대지가 본래 ‘방형方形’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신성한 별하늘 아래의 직사각형 대지”였던 셈이다. [34]

[34] 李军: 《图形作为知识》[上], 第68页.

4. 世界图式: 《疆理图》的变体?
4. 세계도식: 《강리도疆理图》의 변형인가?

正如中国现存第一幅世界地图《华夷图》所示, 传统文脉中的世界地图往往呈现为一个以中国为中心的“华夷秩序”. 中国以准方形或矩形形状, 占据绝大部分位置, 周围则散布着零零星星的四夷小国; 二者之间往往被表现为一种典型的有形无形关系, 即有明确形状的中国与无形状、仅仅以国名表示的外国形成鲜明对比. 它所采取的“计里画方”的绘图方式, 与古代空间方位“四方”“八位”“九宫”同源, 进一步将中国与外部世界的关系转化为一种有限无限的关系[其中中国尽管重要, 却不是世界的全部; 外部世界尽管粗略, 却是真实存在的], 只要需要, 也是可以触及的. 这里存在着一种类似于画家王希孟所绘《千里江山图》那样的手卷式横向展开方式物换景移. 相对于中国世界的精确与可测量而言, 外部世界并非子虚乌有, 却有待于精确测量. 一般而言, 这种构图方式并不关注对世界的整体表达, 故很难产生真正意义上世界图景的地图.
中国现存第一幅严格意义上的世界地图, 是绘制于洪武二十二年[1389]的《大明混一图》. 该图不再满足于只用名字暗示外部世界的传统做法, 而是试图真实地展现中国周边国家的具体形状; 除熟悉的朝鲜之外, 它在中国之东第一次画出了日本诸岛, 在中国之西则画出了印度、阿拉伯半岛、非洲大陆和欧洲, 初步形成了一个左中右三元并置的世界图式.
1402年, 随着另一幅著名的东亚世界地图《混一疆理历代国都之图》[图20, 以下简称《疆理图》]在朝鲜问世, 上述左中右三元并置的结构在地图中得到了更加充分和清晰的表达. 朝鲜和日本在中国的东面, 印度洋、非洲和地中海世界则在中国的西面. 这个囊括欧亚非大陆的三元结构, 从图形上看, 非常接近于一个牛头形.

중국에 현존하는 최초의 세계지도인 《화이도華夷圖》가 보여주듯, 전통 문맥 속의 세계지도는 흔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華夷秩序’의 형태로 나타난다. 중국은 정방형 또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형상으로 지도 대부분을 차지하며, 주변에는 사방 오랑캐의 작은 나라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이 둘은 대개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관계로 표현되며, 곧 뚜렷한 형상을 지닌 중국과, 형상이 없이 단지 국명만으로 존재하는 외국 사이의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지도는 “계리화방計里畫方”의 제도 방식[즉 거리를 계산하여 사각형으로 그려 넣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고대 공간 방위 개념인 “사방四方”, “팔위八位”, “구궁九宮” 등과 같은 근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과 외부 세계의 관계를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은 비록 중요하긴 하지만 세계의 전부는 아니며, 외부 세계는 거칠고 조야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며, 필요할 경우 접근 가능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곳에는 마치 화가 왕희맹王希孟이 그린 《천리강산도千里江山圖》처럼 손으로 펼쳐보는 형식의 횡방향 전개 방식, 곧 ‘사물의 변화에 따라 경치가 이동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중국의 세계가 정확하고 측량 가능한 것에 비해, 외부 세계는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아직 정확히 측량되지 않은 세계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구성 방식은 세계 전체를 표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세계상을 담은 지도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초의 엄밀한 의미의 세계지도는 홍무 22년[1389]에 제작된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이다. 이 지도는 외부 세계를 이름으로만 암시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중국 주변 국가들의 구체적인 형상을 실제로 그려내고자 했다. 익숙한 조선 외에도, 중국의 동쪽에 일본 제도를 처음으로 그려 넣었고, 중국의 서쪽에는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 유럽 등을 묘사하여, 초기적인 형태의 좌–중–우 삼원 병치 구조를 형성했다.
1402년, 또 하나의 유명한 동아시아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그림20, 이하 《강리도疆理圖》]가 조선에서 등장하면서, 앞서 말한 좌–중–우 삼원 병치 구조는 지도 위에서 더욱 충실하고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중국의 동쪽에, 인도양과 아프리카, 지중해 세계는 중국의 서쪽에 위치한다. 이렇게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포괄하는 삼원 구조는 도상으로 보면 소 머리 형태에 매우 가까운 모습을 이룬다.

图20. 混一疆理历代国都之图[摹本]164c m×171. 8cm 约 1470 年 日本龙谷大学藏
그림20.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모본] 164cm × 171.8cm, 약 1470년,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学 소장

学界已经澄清了该图在知识和图形上的多重来源, 即它如何在元代李泽民《声教广被图》和清浚《混一疆理图》的基础上, 添加朝鲜本国地图和日本地图, 据以重新拼合而“勒成新图”. [35] 其西部欧、亚、非世界的知识应该来自李泽民的《声教广被图》, 后者与《大明混一图》中的西部世界一样, 可能拥有共同的图形渊源, 反映了元时所受伊斯兰和西方舆图的影响, 体现了令当时中国和东亚人耳目一新的世界图式或“世界观”.
美国学者Gari Ledyard在《韩国制图学》中提出了一个有趣的假说, 他把《天下图》的图形与这幅著名的《疆理图》联系起来, 认为《天下图》是融入了《疆理图》的结果[图21]. [36] 这一观点曾经引起中国学者徐宁的注意, 认为其“给人不少启发”[37]; 黄时鉴则在文章中引用了Gari Ledyard所绘的二者的图形比较, 但同时指出了“从图式来论其渊源”的弊端, 在于“似乎都沾得上边”[38], 故此说的内在逻辑并没有得到他们的肯定, 只是当作聊备一说的参考.
在Gari Ledyard看来, 有两条主要的线索把二者联系在一起. 首先是《天下图》昆仑山下的一个三角形半岛, 位于黑水和洋水两条河流之间, 洋水汇入黑水[有的图画为黑色]后南流入海; Gari Ledyard强调, 这是整个大陆上唯 – 处由水流勾勒出形状的半岛, 以及唯 – 处有支流[洋水]汇入主流[黑水]的河流. [39]另一条线索是中央大陆西北部存在着一个巨大的水面[其实是一个“水滴”状空间笔者按], 它在大部分情况下与地名“疏勒”相伴[也有直接把“疏勒”标注在其中的笔者按]; 作为一个内海, 这也是整个中央大陆上唯一的一处. 然后Gari Ledyard认为, 如果我们在《疆理图》上将阿拉伯海[西印度洋]和红海, 按照黑水和洋水那样的主支流关系做一调整, 那么, 随着非洲部分的放大和阿拉伯半岛的缩小, 《疆理图》相关部分就会转化为《天下图》中这部分的空间配置; 另一方面, 《疆理图》中的地中海和黑海部分, 也会相应地转化为《天下图》中由疏勒标注的唯一内海. [40] 接着, 作者还给出了一个具体的图形演化程序, 以揭示为了适应《天下图》的特殊需要[如表达《山海经》提到的另外几条大河“赤水”“江水”和“河水”], 《疆理图》的世界图式怎样逐步变成了《天下图》中的中央大陆[图21]. 这是一个极富想象力的方案, 尽管Gari Ledyard并非艺术史家, 但他有意识地将图形的生产纳入图形之间存在的客观关系的维度中加以考虑, 意味着他走在正确的道路上, 亦与艺术史的思路不谋而合.
但是, 他的具体研究和结论却是错误的. 他的错误主要体现为两个方面. 第一是战术的错误: 他错误地辨识了地图上的信息; 第二是战略的错误: 他误入歧途, 搞错了自己的研究对象.
首先, Gari Ledyard把《天下图》中经常以“疏勒”标识的那个“水滴状”空间解读为“内海”是没有根据的. 从现存的其他的《天下图》[例如图1、图2]看, 这部分有时候被明确地标注为“沙漠”; 这一标注实际上依据了一个历史悠久的中国地理学与舆图传统. 从汉代张骞凿通西域开始, 西域三十六国[41]的概念即已进入中国人的知识系统中; “疏勒”[今新疆喀什一带]本作为三十六国之一, 在这里被标识为西域各国的主要代表之一[在“简式图”中, 以“疏勒”打头共有七个国家, 下面另有“西域诸国”字样; 在“繁式图”中, “疏勒”等七国之后, “西域诸国”被具现为三十一个国家的名字], 并不是任何湖海的代表. 鉴于其地正好位于丝绸之路北线和南线在西部的汇合点, 以它为标识的“沙漠”, 无疑只能是以塔克拉玛干大沙漠为代表的沙海和戈壁了. 我们从明代罗洪先《广舆图》的《舆地总图》[图22]中, 即可看出在长城和阳关之北, 有一道几乎与长城平行的巨大的“沙漠”横亘东西. 而从明代开始, 鉴于“瀚海”成为另一个表达沙漠的同义词[42], 我们在有的地图上发现的某些水流状线条其标注既可以是“沙漠”, 也可以是“瀚海”事实上都指沙漠[图23]. 或许正是因为“沙漠”与“瀚海”的语义混同, 才导致了明代或李朝朝鲜的地图中, 沙漠有时候被表现为水滴或河流状线条的缘故. 《天下图》中的水滴状空间也不例外, 其显然是沙漠的表现; 这样一来, 它也就根本不可能成为《疆理图》中的地中海和黑海的遗存.

학계는 이미 이 지도에 담긴 지식적, 도상적 복합 기원을 밝혀냈다. 즉, 이 지도는 원대元代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教廣被圖》와 청준清浚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바탕으로, 조선 자국 지도와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새롭게 “각색‧재편[勒成]”한 것이라는 점이다[35].

[35] 李军: 《图形作为知识》[上], 第73页.

서쪽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에 대한 지식은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이 도상은 《대명혼일도》 속의 서방 세계와도 상당히 유사한 구도를 갖는다. 이는 모두 원나라 시기 이슬람과 서방 지리학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며, 당시 중국과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새롭고 충격적인 세계 도식圖式 혹은 세계관을 제공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학자 Gari Ledyard는 《한국 제도학[Korean Cartography]》이라는 글에서 흥미로운 하나의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천하도》의 도형이 《강리도》에서 유래한 것이라 보고, 《천하도》는 《강리도》가 융합되어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그림21][36].

[36]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6.

图21 美国学者 Gari Ledyard 对从《疆理图》到《天下图》的中央大陆可能经历的图形轮廓演变所作的解析图
그림 21. 미국 학자 Gari Ledyard가 《강리도》에서 《천하도》에 이르기까지 중앙대륙이 겪었을 가능성이 있는 도형 윤곽의 변화 과정을 분석한 그림이다.

이 가설은 중국 학자 서녕徐寧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는 “상당한 영감을 주는 견해”라고 평가한 바 있다[37].

[37] 徐宁: 《国图所藏李朝朝鲜后期的圆形地图研究》, 第148页.

또한 황시감黃時鑒 역시 자신의 논문에서 Ledyard가 직접 그린 도상 비교도를 인용했으나, 동시에 “도식圖式에서 기원을 논하는 방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곧 “그럴듯하게 연결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38].

[38]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第248页.

따라서 이 설의 내적 논리는 학계의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했고, 단지 참고용 가설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Gari Ledyard가 보기에, 《강리도》와 《천하도》를 연결하는 두 가지 주요한 도상상의 단서가 존재한다.

첫째는 《천하도》에서 곤륜산 아래에 위치한 하나의 삼각형 반도로, 검은색으로 그려진 경우도 있는 흑수黑水와 양수洋水라는 두 강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양수가 흑수로 합류한 후 남쪽으로 바다로 흘러간다. Gari Ledyard는 이 반도가 지도 전체에서 유일하게 하천 흐름에 의해 형성된 반도이자, 양수洋水가 흑수黑水에 합류하는 유일한 예라는 점에 주목했다[39].

[39] 此处要看具体情况: 确实有部分《天下图》把洋水画成支流流入黑水[黑色标注]; 但也有把洋水和黑水[黑色]都画成支流, 然后汇成同一条河流[不再是黑色], 此类情况不一而足.
[39] 이 부분은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 달라진다. 실제로 일부 《천하도》에서는 양수洋水를 지류처럼 그려 흑수黑水[검은색으로 표기]로 흘러들게 한 것도 있다. 그러나 양수와 흑수[검은색] 둘 다를 지류로 그리고, 그 후 하나의 강으로 합류시켜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닌 색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으며, 이러한 유형은 적지 않다.

둘째는 중앙대륙의 북서부에 위치한 하나의 거대한 수면 공간으로, 이는 사실상 물방울 모양의 공간이며, 대부분 경우 ‘소륵疏勒’이라는 지명과 함께 나타난다. 일부 지도에서는 소륵이 이 공간 내부에 직접 표기되기도 한다.
Gari Ledyard는 여기서, 만약 우리가 《강리도》에 나오는 아라비아해[서인도양]와 홍해를 《천하도》의 흑수와 양수처럼 본류–지류 관계로 재구성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비중을 확대하고 아라비아 반도의 비중을 축소하면, 《강리도》의 해당 부분이 《천하도》의 해당 공간 배치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강리도》의 지중해와 흑해 부분은 《천하도》의 유일한 내해인 ‘소륵’이 표시된 수역 공간으로 변환된다고 주장했다[40].

[40]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6.

이어 그는 《천하도》 안에서 《산해경》에 언급된 또 다른 대하大河인 “적수赤水”, “강수江水”, “하수河水” 등을 표현하기 위한 도상적 필요에 따라 《강리도》의 세계 도식이 어떻게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천하도》의 중앙대륙으로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도형 진화 과정도를 제시했다[그림21].
이는 매우 상상력이 풍부한 구성으로, 비록 Gari Ledyard는 예술사 연구자는 아니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도형 간의 관계, 즉 하나의 도상이 다른 도상에 미치는 영향과 변화를 탐색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도상학과 예술사적 접근법과도 맥이 닿아 있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구체적 분석과 결론은 잘못되었다. 그의 오류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드러난다.

첫째는 전술적 오류로, 그는 지도의 정보를 오인했다.

둘째는 전략적 오류로, 그는 연구 대상을 잘못 설정했다.

무엇보다, Gari Ledyard가 《천하도》에서 흔히 ‘소륵疏勒’이라 표기된 물방울 모양 공간을 “내해內海”로 해석한 것은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다른 《천하도》들[예: [그림1], [그림2]]을 보면, 이 부분은 때때로 ‘사막沙漠’으로 명확히 표기되며, 이는 중국 지리학과 지도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나라 장건張騫이 서역을 개척한 이래, 서역 삼십육국[41]의 개념이 중국인의 지식 체계에 편입되었고, ‘소륵疏勒’[오늘날 신장 카슈가르 지역]은 삼십육국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었다.

[41] “西域三十六国”是一个统称, 并非实数. 《汉书·西域传》云: “西域以孝武时始通, 本三十六国, 其后稍分至五十余, 皆在匈奴之西, 乌孙之南.” 班固: 《汉书》第十二册, 颜师古注, 中华书局, 1962, 第3871页.
[41] “서역 36국西域三十六國”은 총칭일 뿐 실제 숫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서漢書·서역전西域傳》에 이르기를: “서역은 효무제孝武帝 때 비로소 통했으며, 본래 36국이었으나, 그 뒤 점차 나뉘어 50여 개에 이르렀고, 모두 흉노匈奴의 서쪽, 오손烏孫의 남쪽에 있다”고 했다. 반고班固, 《한서漢書》 제12책, 안사고顏師古 주, 중화서국中華書局, 1962년, 제3871쪽.

《천하도》에서 ‘소륵’은 서역을 대표하는 주요 국가로 표기되며, ‘간략본’에서는 소륵을 시작으로 7개 국가가 나열되고, 그 아래에 “서역제국西域諸國”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상세본’에서는 소륵을 포함한 7개국 뒤에 31개 국가의 이름이 따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지역은 실크로드 북로와 남로가 합류하는 지점이므로, 이 지역에 표기된 “사막”은 분명히 타클라마칸 대사막과 고비를 대표하는 ‘사해沙海’로 해석되어야 한다.
명대 나주인 나홍선羅洪先의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여지총도輿地總圖》[그림22]를 보면, 장성과 양관의 북쪽에 거대한 “사막”이 동서로 장벽처럼 펼쳐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图22. 舆地总图罗洪先 约 1541 年 出自《广舆图》
그림 22. 《여지총도輿地總圖》, 나홍선羅洪先이 약 1541년에 제작, 출전: 《광여도廣輿圖》

또한, 명대 이후 “한해瀚海”는 “사막”을 가리키는 동의어로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에[42], 일부 지도에서는 강처럼 표현된 선형 도상이 “사막” 또는 “한해”로 표기되어 있다[그림23].

[42] 江韵: 《“翰海”、“瀚海“词义考辨》, 《文教资料》2013年第35期, 第175页.

图23. 中原兼朝鲜图 纸本设色 约 18世纪下半叶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
그림23. 〈중원겸조선도中原兼朝鮮圖〉 지본 채색, 약 18세기 후반, 한국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러한 “사막”과 “한해”의 의미 혼동이 있었기에, 명대 또는 조선의 지도에서 사막이 때로는 물방울 모양 또는 하천 모양 선으로 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천하도》의 물방울 형태 공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히 사막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공간을 《강리도》 속 지중해와 흑해의 잔존물로 간주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Gari Ledyard的第二个错误, 是把《天下图》中两河夹峙下的三角形空间[有的图中有“天地心”字样], 误释成《疆理图》中非洲、红海、阿拉伯半岛和阿拉伯海之表达. 表面上看来, 二者之间确实存在很大的相似度. Gari Ledyard尝试找到《天下图》的图形依据, 这本无可厚非; 但Gari Ledyard的问题在于, 他根本找错了方向: 《天下图》所依据的图形来源, 实际上与《疆理图》毫无关联.
在正式展开我自己的论证之前, 有一个问题需要在这里稍稍提及: 《疆理图》和《天下图》之间的年代差异问题.
Gari Ledyard引用的《疆理图》版本是日本天理大学图书馆所藏的“天理本”, 其年代据日本学者的研究, 应该是1568年[43], 这是《疆理图》[最早绘制于1402年]现存年代最晚的版本. 而现存《天下图》最早的版本, 只能追溯到康熙二十三年[1684], 二者之间有超过一个多世纪的间隔. 为了证明《疆理图》有可能对《天下图》产生影响, Gari Ledyard不得不把《天下图》出现的时间上限提前到16世纪[44], 而这一点事实上得不到任何文献和实物的支撑. 前文的研究证明, 《天下图》的年代出现在17世纪, 典型的《天下图》更可能出现在17世纪下半叶. 种种迹象表明, 《天下图》及其承载的大量历史信息, 都与16世纪末和17世纪之后在中国与东亚发生的政治、艺术与文化尤其在制图学上的巨变有关, 而与《疆理图》所在的时代1516世纪基本无关.

Gari Ledyard의 두 번째 오류는 《천하도》에서 두 강 사이에 끼인 삼각형 공간을[일부 지도에서는 “천지심天地心”이라는 글자가 있다] 《강리도》에서 나타난 아프리카, 홍해, 아라비아 반도 및 아라비아해의 표현으로 오해한 점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두 도상 사이에는 분명히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Gari Ledyard가 《천하도》의 도상적 근거를 찾고자 한 것은 비난받을 일은 아니며, 자연스러운 시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데에 있다. 즉, 《천하도》가 참고한 도상적 기원은 《강리도》와 아무 관련이 없다. 내가 본격적으로 나 자신의 논증을 전개하기에 앞서, 이 자리에서 간단히 언급해야 할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강리도》와 《천하도》 사이의 연대 차이에 관한 것이다. Gari Ledyard가 인용한 《강리도》의 판본은 일본 천리天理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으로, 이른바 “천리본天理本”이라 불리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판본의 제작 시기는 1568년으로 추정된다[43].

[43]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6.

이는 1402년에 최초로 제작된 《강리도》 중 현존하는 가장 늦은 시기의 판본이다. 한편, 현존하는 《천하도》의 가장 이른 시기 판본은 강희 23년[1684]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뿐이다. 즉, 양자 사이에는 100년 이상에 이르는 시간 간격이 존재한다. 따라서 《강리도》가 《천하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Gari Ledyard는 《천하도》의 제작 시점을 16세기까지 앞당기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44].

[44]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6.

그러나 이러한 연대 조정은 어떠한 문헌적·실물 자료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의 연구에서 증명했듯이, 《천하도》의 연대는 17세기에 등장하며, 전형적인 《천하도》는 17세기 후반에 출현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여러 정황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가리킨다. 《천하도》와 그 안에 담긴 풍부한 역사적 정보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이후 중국 및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정치적・예술적・문화적 격변, 특히 제도학製圖學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강리도》가 속한 15~16세기의 시대적 배경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는 점이다.

3. 图形作为知识: 从利玛窦《山海舆地全图》开始
3. 도형으로서의 지식: 마테오 리치의 《산해여지전도》에서 시작

但这里还是需要从1516世纪开始叙述. 1488年, 葡萄牙人迪亚士率船第一次越过非洲南端的好望角; 十年之后, 达·伽马率船队横穿印度洋, 到达了印度西岸的卡利卡特; 1511年, 葡萄牙占领了控制东西方贸易的黄金水道国家马六甲; 1513年, 葡萄牙船队出现在中国海域; 1557年, 葡萄牙人获得了在澳门的居住权. 从此, 一个中西文化大交流的时代开始了.
耶稣会正是沿着葡萄牙船队的轨迹接踵而至. 1552年, 当第一代耶稣会士方济各·沙勿略[Francis Xavier, 15061552]在广州附近的上川岛赍志而殁时, 他依然未能进入这个令他魂牵梦绕却可望而不可即的神秘国度. 但同年10月6日, 一个诞生在意大利马切拉塔省的男孩, 却在三十年之后, 帮助他实现了这个理想. 1583年, 利玛窦[Matteo Ricci]与另一位耶稣会传教士罗明坚[Michele Ruggieri]第一次跨入中国国门, 并最终于1601年到达了都城. 尽管耶稣会士们意在传播宗教, 但他们在事实上更多地传播了西方的文化和科学[如机械表的制作、记忆术、数学、天文学和地图制作], 而地图制作正是当时最先进的西方科学成果之一. 利玛窦后来向万历皇帝进献的礼物中, 就有一幅他所绘制的《坤舆万国全图》[图24].

그러나 여기서의 논의는 다시 15세기~16세기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1488년, 포르투갈인 디아스[Bartolomeu Dias]가 이끄는 선단이 최초로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넘어 항해에 성공했다. 10년 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는 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횡단, 인도 서안의 칼리컷[Calicut]에 도달했다. 1511년, 포르투갈은 동서 무역의 황금 수로국인 말라카[馬六甲]를 점령했고, 1513년, 포르투갈 함대는 중국 해역에 출현했으며, 1557년, 마카오에서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이로써, 중서 문화 대교류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예수회耶穌會는 바로 이 포르투갈 선단의 항로를 따라 뒤이어 들어오게 된다. 1552년, 제1세대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는 중국 광저우 인근 상천도上川島에서 이상理想을 품은 채 운명했으며, 그는 끝내 자신이 평생 갈망해온 중국이라는 신비한 나라에 입국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인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 마체라타[Macerata 지방에서 태어난 한 소년은 약 30년 뒤,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게 된다. 1583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또 다른 예수회 선교사인 로명견羅明堅[Michele Ruggieri]과 함께 최초로 중국의 국문國門을 넘어서 입국하게 되었고, 결국 1601년에는 경사京師[도성]에 이르렀다. 비록 예수회 선교사들의 최종 목적은 종교 전파였지만, 그들이 실제로 중국에 전파한 것은 종교보다 오히려 서양의 문화와 과학이었다. 예컨대 기계식 시계 제작, 기억술, 수학, 천문학, 지도 제작 기술 등이 그러했으며, 그 중에서도 지도 제작술은 당시 서양 과학의 최첨단 성과 중 하나였다. 마테오 리치가 후일 만력제萬曆帝에게 진상한 선물 가운데는, 그가 직접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림24].

图24. 坤舆万国全图[日本彩色摹绘本]168. 7cm×380. 2cm 利玛窦 原图1602 年
그림24. 〈곤여만국전도〉 [일본 채색 모화본] 168.7cm × 380.2cm, 마테오 리치 원도 제작: 1602년

《坤舆万国全图》是利玛窦依据比利时制图家奥特里乌斯[Abraham Ortelius, 1527~1598]的《寰宇大观》[Theatrum Orbis Terrarum, 1570], 以及麦卡托[Mercator, 1512~1594]、普兰修斯[Plancius, 1552~1622]、鲁瑟利[Ruscelli, 1518~1566]等人之图, 再糅入明代罗洪先的《广舆图》等中国地图综合而成, 在当时的条件下, 可谓“一次在中西语境下重要的文化创造, 堪称当时整个东、西方唯 – 件内容较之以往最为完备的世界地图”[45], 是“13~16世纪中西跨文化交流在地图学上面的一次集大成”[46].
例如, 1584年版的奥特里乌斯《寰宇大观》地图集错误地把中国的形状表现为一个类似于竖琴的三角形; 而中国的形状, 在中国自己的舆图传统中, 从来都被表现为一个矩形或准方形[即所谓“神圣星空下的矩形大地”]. 这一错误就被利玛窦根据罗洪先《广舆图》[其中的《舆地总图》]做了修正, 使中国部分浑化无迹地融入整幅世界地图中. 从地图这部分的细节[图25]来看, 诸如“山东半岛”、“朝鲜”、“黄河”、黄河之源、“星宿海”、“昆仑”, 以及那一道横亘中国塞外北方的大“沙漠”[包括其尾端“大流沙”], 都与我们所熟知的中国同时期地图如出一辙.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가 벨기에 지도 제작자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1527~1598]의 《환우대관寰宇大觀》 [Theatrum Orbis Terrarum, 1570], 그리고 메르카토 [Mercator, 1512~1594], 플란시우스 [Plancius, 1552~1622], 루셀리 [Ruscelli, 1518~1566] 등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고, 명대 나홍선羅洪先의 《광여도廣輿圖》 등 중국 지도를 함께 융합하여 종합한 것이다. 당시의 조건을 고려할 때, 이는 “한 차례 중서中西 언어문화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문화 창조이며, 당시 동서양 전체를 통틀어 기존보다 내용이 가장 완비된 유일한 세계지도”로 평가되었다 [45].

[45] 王绵厚: 《论利玛窦坤舆万国全图和两仪玄览图赏的序跋题识》, 载曹婉如、郑锡煌等编《中国古代地图集·明代》, 文物出版社, 1994, 第111页.

또한 “13~16세기 중서 간의 문화 교류가 지도학에서 이룬 총체적 결실”이었다 [46].

[46] 李军: 《图形作为知识—十幅世界地图的跨文化旅行》[下], 《美术研究》2018年第3期, 第30页.

예를 들어, 1584년판 오르텔리우스의 《환우대관》 지도집에서는 중국의 형태를 하프처럼 생긴 삼각형으로 잘못 표현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형상은, 중국 자체의 전통 지도에서는 항상 직사각형 혹은 준정방형 [즉 소위 ‘신성한 별하늘 아래의 직사각형 대지’]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러한 오류는 마테오 리치가 나홍선의 《광여도》 [그 중 《여지총도輿地總圖》]에 근거하여 수정하였고, 그 결과 중국 지역이 전체 세계지도 속에 아무런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 지도 이 부분의 세부 [그림25]를 보면, “산동반도”, “조선”, “황하”, 황하의 발원지, “성숙해星宿海”, “곤륜”, 그리고 중국 변경 북부에 길게 걸쳐 있는 거대한 “사막” [그 끝자락의 “대류사大流沙” 포함]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시기 중국 지도들과 거의 똑같이 표현되어 있다.

图25.《坤舆万国全图》局部: 中国部分
그림25. 《곤여만국전도》 국부: 중국 부분

唯一令人意外的, 是在利玛窦的地图中, “昆仑”的地位发生了巨大的变化. 与传统地图如徐维志、徐维事的《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相比, “昆仑”在中国风水学说之中的重要意义已消失殆尽, 如今被挤压在黄河之源[“星宿海”]和长江之源[地图上标注“松潘”]之间, 较之于西侧区分中国与印度之间的山系“大葱岭”, 显得微不足道. 《坤舆万国全图》并非利玛窦唯一制作的世界地图. 事实上从1584年至1608年, 利玛窦尝试制作不下于12个版本的中文世界地图. [47]其中除了《坤舆万国全图》和《两仪玄览图》[1603]之外, 其余各版的原本均已佚失, 只能依据明人《图书编》《方舆胜略》《月令广义》《三才图会》诸书的转载和收录, 方可窥其影像. 其中章潢《图书编》收录的《舆地山海全图》[图26], 应为利玛窦于广东肇庆绘制的第一幅世界地图《山海舆地全图》[1584]的摹刻本. 章潢与利玛窦相识于南昌, 故该图摹刻的年代应在1584年之后或在南昌时期[15951598]. 图的底本应该源自奥特里乌斯1570年版本的《寰宇大观》, 因为图中南美洲底部的图形往东有一个三角形的突出[黄时鉴称为“一个大弯角”], 这是奥氏图第一版中的特征; 而在奥氏1587年之后的诸版中, 这个三角形被取消了[48], 南美洲的图形显现为一个火腿状渐次缩小的形态; 而这个特点也反映在现存的《坤舆万国全图》和《两仪玄览图》中, 说明后两幅图都依据了奥氏1587年之后的版本, 与《舆地山海全图》不属于一个系统.

가장 의외의 점은, 마테오 리치의 지도에서 “곤륜”의 위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지도, 예컨대 서유지徐維志・서유사徐維事의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干龍總覽之圖》와 비교해 보면, 풍수 이론 속에서 “곤륜”이 지녔던 중심적 의미는 거의 사라졌고, 지금은 황하의 발원지[“성숙해星宿海”]와 장강의 발원지[지도에서는 “송반松潘”으로 표기] 사이에 끼어 있어, 중국과 인도를 구분하는 산계인 “대총령大蔥嶺”에 비하면 그 존재감은 미미해 보인다.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유일한 세계지도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1584년부터 1608년까지 무려 12종 이상의 중국어 세계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47].

[47] 洪业: 《考利玛窦的世界地图》, 载刘梦溪主编《中国现代学术经典·洪业 杨联升集》, 河北教育出版社, 1996, 第435页.

이 가운데 《곤여만국전도》와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1603]을 제외한 나머지 판본들은 원본이 전해지지 않으며, 《도서편圖書編》, 《방여승략方輿勝略》, 《월령광의月令廣義》, 《삼재도회》 등 명나라 문헌에 수록된 도판을 통해서만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장황章潢의 《도서편》에 수록된 《여지산해전도輿地山海全圖》 [그림26]는, 마테오 리치가 광동廣東 조경肇慶에서 제작한 첫 번째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1584]의 모각본으로 추정된다.

图26. 舆地山海全图 约 1585 年 出自章潢《图书编》卷二十九
그림. 26 《여지산해전도輿地山海全圖》 약 1585년, 출전: 장황章潢, 《도서편圖書編》 권29

장황은 남창南昌에서 마테오 리치와 교류한 인물로, 따라서 이 지도의 모각 시점은 1584년 이후 혹은 남창 체류기[1595–1598]로 여겨진다. 이 지도[《여지산해전도》]의 원도는 오르텔리우스[Ortelius]의 1570년판 《환우대관寰宇大觀》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도 속 남아메리카 남단이 동쪽으로 삼각형처럼 돌출되어 있는데, 황시감黃時鑒은 이를 “큰 만곡부[彎角]”라 부른다. 이것은 오르텔리우스 1570년 초판의 특징이다. 하지만 1587년 이후의 판본들에서는 이 삼각 돌출부가 삭제되어, [48] 남아메리카는 햄 모양처럼 점점 좁아지는 형태로 바뀌었고, 이러한 특징은 현존하는 《곤여만국전도》 및 《양의현람도》에도 뚜렷이 나타나므로, 후자의 두 지도는 오르텔리우스 1587년 이후의 판본을 기반으로 한 것이며, 《여지산해전도》와는 같은 계통이 아님을 보여준다.

[48] 黄时鉴: 《利玛窦世界地图探源鳞爪》, 载《黄时鉴文集III: 东海西海—东西文化交流史》, 中西书局, 2011, 第233页.

在1602年前, 与《坤舆万国全图》和《两仪玄览图》属于同一个系统, 同时图形和内容最接近于后者的, 只有另一幅《山海舆地全图》[图27]. 与1584年的同名地图不同, 该图的原本是利玛窦于万历二十八年[1600]在南京时所绘, 据说有南京吏部主事吴中明刻本, 但现已不传. 幸运的是, 这个原本被相继摹刻在冯应京刊刻的《月令广义》[1602]和王圻的《三才图会》[1609]中, 尤其随着《三才图会》的广泛传播而影响深远.

1602년 이전, 《곤여만국전도》 및 《양의현람도》와 같은 계통에 속하고, 도형과 내용 면에서 가장 유사한 지도는 바로 또 하나의 《산해여지전도》 [그림27]이다.

图27. 山海舆地全图1609 年 出自《三才图会》
그림27. 《산해여지전도》 1609년, 출전: 《삼재도회》

1584년에 제작된 동명의 지도와 달리, 이 지도는 1600년[만력 28년]에 마테오 리치가 남경南京에 머무르던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당시 남경 이부주사吏部主事였던 오중명吳中明이 간행한 목판본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행히도, 이 원본은 곧이어 풍응경馮應京이 간행한 《월령광의月令廣義》 [1602]와 왕기王圻의 《삼재도회》 [1609]에 각각 모각되어 실려 있으며, 특히 《삼재도회》의 광범위한 보급을 통해 이 지도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与《舆地山海全图》的椭圆形相比, 该图只是略呈椭圆形, 更接近于圆形. 图四角上有题识如下: “外三圈天球定天度昼夜长短影候”“内一圈地球分天地五州区境之略”“图中横竖三十六方每方中各十度”“地球横竖经纬界线别方隅稽度数”. 从题识看, 现有的图取消了原图中所有的“外三圈天球”和“经纬线”, 所以是原图的一个简化版. 但是, 原图的基本面貌, 应该说都得到了保留. 这些部分在两年后利玛窦于北京所绘的《坤舆万国全图》中, 都能找到对应之处, 包括我们前面提到的“火腿状”的南美洲下部.
正是这个《三才图会》本《山海舆地全图》, 才是包括Gari Ledyard在内的众多学者苦苦寻找的《天下图》中的秘密所在, 是后者图形知识的主要来源. [49]
第一, 让我们从地图西部并横跨中线的欧亚非[地图中的欧罗巴、亚细亚和利未亚]大陆开始. 这个大陆现有的中线并不是西方地图[如其原型奥特里乌斯《寰宇大观》]中的零度经线, 而是利玛窦为了适应中国读者的需要, 将之从福岛[加纳利群岛]所在的本初子午线, 搬移了将近180°[实为170°], 挪至现有位置的结果. 这一挪移表面上看来, 把原本位于东部边缘的中国搬到了地图靠近中心的位置, 似有谄媚中国之嫌; 但究其实质并不尽然. 正如我们在《三才图会》本所见的那样, 原本位于绝对中心的中国[“大明国”], 在这样的世界地图中, 其位置反而是相对化了[位于其中心偏左处, 而且所占面积也不大]. 那么, 如果要恢复中国原有的中心位置, 第一件需要做的事, 无疑要使这个大陆继续往中心移动, 使其成为一个中央大陆.
第二, 当我们把这个中央大陆与《天下图》中央大陆[图28]做比对时即可发现, 其中的名称居然都存在准确的对应和对位关系, 如“高丽”~“朝鲜”、“大明国”~“中国”、“日本”~“日本国”、“琉球”~“琉球国”、“安南”~“安南国”、“沙漠”~“沙漠”、“昆仑”~“昆仑”.

《여지산해전도輿地山海全圖》의 타원형 도상에 비해, 《삼재도회》본 《산해여지전도》는 약간의 타원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보다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지도 네 귀퉁이에는 다음과 같은 제문題文이 적혀 있다:

이 제문에 따르면, 현존하는 지도에서는 원본에 있던 ‘외삼환의 천구天球’와 ‘경위선經緯線’을 생략한 상태이므로, 이는 원본의 간략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원본의 기본적인 틀과 도상 구성은 대부분 보존되어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2년 뒤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제작한 《곤여만국전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앞서 언급했던 ‘햄 모양’의 남아메리카 남부 형태도 그 중 하나다.
바로 이 《삼재도회》본 《산해여지전도》야말로, Gari Ledyard를 포함한 수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천하도》의 핵심 비밀이자, 그 도상 지식의 주요 원천이라 할 수 있다 [49].

[49] 韩国学者林宗台指出, 已有很多学者把圆形的《天下图》视作“朝鲜知识分子对于入侵的利玛窦地图的回应”. 如日本学者海野一隆认为, 该地图的制作者企图援引古老的道教资源来反抗利玛窦地图带来的世界观冲击; 另一位韩国学者裴佑晟则把地图的圆形甚至大陆的形状, 看成是受耶稣会地图影响的结果. 而在林宗台看来, 圆形地图应被视为“在耶稣会地图灵感的刺激下, 而对散见于各处的东亚地理传统加以凝聚的一个过程”. 参见Lim Jongtae, “Matteo Ricci’s World Maps in Late Joseon Dynasty,” p.293. 但这几位学者都只满足于泛泛之谈, 没有任何一位试图从图形绘制和生产的角度, 具体讨论这种影响得以形成的过程、步骤和程序.
[49] 한국 학자 임종태林宗台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원형 《천하도》를 “침입해온 마테오 리치 지도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대응”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일본 학자 우미노 가즈타카[海野一隆]는, 이 지도 제작자가 고대 도교 자원을 원용하여 마테오 리치의 지도가 불러온 세계관 충격에 저항하려 했다고 보았으며, 또 다른 한국 학자인 배우성裴佑晟은 지도 전체의 원형 구조와 대륙 형태 자체를 예수회 지도에 영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했다. 그러나 임종태는, 이 원형 지도는 “예수회 지도가 준 영감의 자극 속에서, 산재한 동아시아 지리 전통을 하나로 응축하려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련 내용은 Lim Jongtae, “Matteo Ricci’s World Maps in Late Joseon Dynasty,” p.293 참조. 다만 이들 학자 모두 대체로 일반적인 논의에 그쳤을 뿐, 도형의 실제 작성과 제작의 관점에서 이러한 영향이 형성된 과정·단계·절차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사람은 없다.

첫째, 지도의 서쪽에서 지도 중앙선을 가로지르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지도에서는 “구라파歐羅巴”, “아세아亞細亞”, “리비아利未亞”] 대륙을 살펴보면, 이 대륙에 적용된 중앙선은 서양 지도 [예: 오르텔리우스의 《환우대관寰宇大觀》]의 영도 자오선이 아니며, 마테오 리치는 중국 독자를 고려해, 카나리아 제도[福島] 부근에 위치한 서양의 본초 자오선을 무려 180도 가까이[실제로는 약 170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원래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던 중국이 지도상 중심에 가까운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중국에 아첨하는 구성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삼재도회》본을 보면, 원래 중심에 있어야 할 중국[“대명국”]은 이와 같은 세계지도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졌고 [지도 중심에서 왼쪽으로 치우쳐 있고 면적도 작다], 중심성 또한 희석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본래 중심 위치를 회복하려면 이 대륙 전체를 더 중심 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며, 결국 하나의 ‘중앙대륙’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이렇게 재편된 중앙대륙을 《천하도》의 중앙대륙 [그림28]과 비교해 보면, 두 지도 사이의 지명들 사이에 정확한 대응 관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려” ~ “조선”, “대명국” ~ “중국”, “일본” ~ “일본국”, “류큐” ~ “류큐국”, “안남” ~ “안남국”, “사막” ~ “사막”, “곤륜” ~ “곤륜”. 이러한 일대일의 지명 대응 구조는, 《천하도》의 도상 지식이 《산해여지전도》로부터 직접 유전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图28. 《天下总图》局部: 中央大陆
그림28. 《천하총도天下總圖》 부분 확대: 중앙대륙

第三, 把这个中央大陆的方位做个调整, 让它按逆时针方向转动45°, 再聚焦到中央大陆, 即可发现, 它开始变得令人眼熟起来一个如同半月形的侧面“人脸”, 开始浮现出来[图29]. 再把这张“人脸”的下半部分与《天下图》示意图[图30]中的同样位置做一比较, 我们在两边同样看到了一个三角形空间一个两水夹峙的半岛, 然后很容易地辨识出一组新的对位关系: “太海”~“洋水”、“地中海”~“黑水”、“欧罗巴”~“西域诸国”、“利未亚”~“蕃胡十二国”.

셋째, 이 중앙대륙의 방향을 조정해보자. 전체 도상을 반시계 방향으로 약 45도 회전시킨 후, 다시 중앙대륙에 집중하면, 그 형상이 점차 익숙한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치 초승달 모양의 측면 인물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림29].

图29. 《山海舆地全图》局部: 经逆时针扭转 45°的中央大陆
그림29. 《산해여지전도》 부분 확대: 반시계 방향으로 45도 회전된 중앙대륙

이제 이 “인물의 얼굴” 아래쪽 절반을, 《천하도》의 선묘線描 중앙대륙 구조를 간략화한 도해도 [그림30]의 해당 위치와 비교해보면, 양측에서 공통적으로 삼각형 형태의 공간, 즉 두 강 사이에 낀 하나의 반도가 등장한다.

图30. 《天下图》中央大陆线描示意图
그림30. 《천하도》 중앙대륙 선묘 도해도

그러고 나면, 우리는 아래와 같은 새로운 1:1 대응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태해太海” ~ “양수洋水” “지중해地中海” ~ “흑수黑水” “구라파歐羅巴” ~ “서역제국西域諸國” “리비아利未亞” ~ “번호십이국蕃胡十二國”. 이러한 공간 구조의 대응은, 《산해여지전도》의 중앙대륙이 《천하도》 중심 도상의 핵심 형성과정에 직접적인 기원을 제공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준다.

第四, 当我们把“利未亚”[即非洲]定位在“蕃胡十二国”所在的位置, 那么, 那条南流入海的“赤水”, 顺理成章地, 当然就是“西红海”[红海]了值得指出的是, 这一部分精确得甚至连色彩都相符.
第五, 再加上“中国”部分的两条河流“河水”和“江水”, 即“黄河”与“长江”, 《天下图》中央大陆中几乎所有的信息, 都得到了 – 辨识. 它所展现的, 居然是利玛窦时代所能了解的全部欧亚非世界.
换句话说, 从利玛窦《山海舆地全图》到朝鲜《天下图》的过程, 犹如同一张脸经历了一次成功的整容手术, 但经过仔细辨认, 仍然能发现, 这是同一个人.
经过中央大陆的辨识, 再来处理外围的大陆, 整个事就会变得易如反掌. 因为正如前面所言, 外围的大陆在《天下图》中所起的作用, 是为中央大陆上的那个人脸肖像提供一副镜框, 它其实正是由《山海舆地全图》中位于外围的一系列破碎而并不连贯的陆地南北美洲[南北亚墨利加州]、南极洲[墨瓦腊尼加州], 加上北极和格陵兰[卧兰的亚大州]连缀起来而形成的.
种种迹象表明, 《天下图》的前身即利玛窦所绘, 但经《三才图会》转绘的《山海舆地全图》. 朝鲜士人李睟光[1563~1628], 于1614年作、1634年刊行的《芝峰类说》的《诸国部》中, 即已提到《三才图会》[50], 说明至少在1614年前, 该书已传入朝鲜. 这就把《天下图》产生的绝对年代确定在1614年之后.

넷째, 우리가 “리비아[利未亞]”[즉, 아프리카]를 《천하도》 속 “번호십이국蕃胡十二國”의 위치에 대응시켜 보면, 남쪽으로 흐르며 바다로 유입되는 “적수赤水”는 자연스럽게 서홍해西紅海, 즉 홍해紅海에 해당하게 된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이 부분은 심지어 색감까지도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다섯째, “중국”에 해당하는 영역에는 두 개의 강이 그려져 있는데 “하수河水”와 “강수江水”, 즉 황하와 장강長江을 가리킨다.

이처럼 정리해보면, 《천하도》의 중앙대륙에 표시된 거의 모든 정보가 일대일로 확인된다. 즉, 그 대륙은 다름 아닌 마테오 리치 시기 당대의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모든 지식이 시각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산해여지전도》에서 《천하도》로 이어지는 과정은, 같은 얼굴이 성공적으로 성형 수술을 받은 과정과 같으며,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여전히 동일한 얼굴임을 알아볼 수 있다.
중앙대륙의 정체가 밝혀졌다면, 이제 그 외곽의 대륙을 해석하는 일은 아주 쉬워진다. 앞서 말했듯, 《천하도》에서 외곽 대륙의 역할은 중앙대륙에 그려진 측면 인물 초상을 위한 액자額子[프레임]와 같다. 이 외곽은 《산해여지전도》에서 주변부에 흩어져 있던 불완전하고 단절된 대륙들: 남북아메리카[남북亞墨利加州], 남극[墨瓦邏尼加州], 북극 및 그린란드[卧蘭的亞大州] 등을 연결하여 구성된 것이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천하도》의 직접적인 전신前身은 마테오 리치가 그린 《산해여지전도》이며, 그 도상은 《삼재도회》를 통해 재전사再轉寫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조선의 사대부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1614년에 저술하고 1634년에 간행한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제국부諸國部〉에서 《삼재도회》를 직접 언급하였다 [50].

[50] 李睟光: 《芝峰类说·诸国部》, 1534年刊本, 韩国高丽大学图书馆藏.

이로 보아 《삼재도회》는 적어도 1614년 이전에 조선에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하도》의 제작 시점은 최소한 1614년 이후로 하한선이 명확히 설정된다.

4. 图形知识的重构: 以《五岳真形图》为视野
4. 도형 지식의 재구성: 《오악진형도五岳真形圖》의 시각에서

在澄清了《天下图》“是什么”[也就是它的图形来源]问题之后, 我们的任务只完成了一半. 如今需要解决的是“为什么”[也就是图的意蕴]的问题. 即, 为什么要把《山海舆地全图》改造或重构成为《天下图》? 或者说, 从《山海舆地全图》出发, 《天下图》究竟要走到哪儿去? 去干什么? 对这些问题的回答, 构成了本文后半部分的任务.

지금까지 《천하도》가 무엇인지 [즉 그 도형적 기원]을 확인했다면, 이제부터는 《천하도》가 왜 그려졌는가 [즉 그 의미와 의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왜 《산해여지전도》를 굳이 《천하도》라는 형식으로 개조하고 재구성했는가? 그리고 그 방향과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명이 바로 이 논문 후반부의 핵심 과제가 된다.

从方法论的角度, 上述两部分的任务或许可以借助艺术史家E. 贡布里希的两条著名术语来概括. 第一条是“先制作后匹配, 先创造后指称”[making will come before matching, creation before reference][51], 意为摆弄雪团的行为要永远早于赋予手中的雪团以某些特征并将其称作某人的行径; 从这种意义上来说, 《天下图》的制作缘由或许仅仅出自制作者想要画出一张不同于《山海舆地全图》的地图, 就像有一天一位突然不满意于自己那张脸的女人, 拿起化妆品为自己画了另一张脸当然, 她不能随心所欲地化妆, 而是必须顺应自己五官和面容的条件, 所以她妆容下的那张脸总是可以被辨识出来的.

방법론적으로, 이 두 단계는 예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E. H. Gombrich]의 두 가지 유명한 개념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제작이 먼저, 대응은 나중[making will come before matching, creation before reference]”이다 [51].

[51] E. H. 贡布里希: 《艺术与错觉—图像再现的心理学研究》, 林夕、李本正、范景中译, 湖南科学技术出版社, 2000, 第71页.

즉,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가 언제나 그것을 어떤 것으로 명명하는 것보다 앞선다는 뜻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천하도》의 제작 이유는 그저 《산해여지전도》와 다른 지도를 그리고 싶었던 욕망에서 출발했을 수 있다. 예컨대, 자기 얼굴에 만족하지 못한 여성이 화장품을 들고 새로운 얼굴을 그리는 것처럼. 물론, 그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그릴 수는 없다. 기존의 얼굴 구조를 따를 수밖에 없기에, 화장 아래 그 얼굴은 결국 식별 가능하다.

第二条术语是“图式和修正”[schema and correction][52], 其原意为艺术家总是从某种现成的图式[惯例或艺术传统]出发, 不断通过种种“修正”的行为, 使笔下的形象最终与现实世界匹配[matching]. 正如贡布里希所用的“修正”[correction]一词所暗示的, 如若我们去除贡氏观念中根深蒂固的写实主义理想, 而代之以任何一种“理想”[既可以是写实主义, 也可以是非写实主义或任何主义的“理想”], 那么, 这两套术语均可毫无违和地用于本文的场合.

둘째는 “도식과 수정[schema and correction]”이다 [52].

[52] E. H. 贡布里希: 《艺术与错觉—图像再现的心理学研究》, 林夕、李本正、范景中译, 湖南科学技术出版社, 2000, 第71页.

그 본래 의미는, 예술가는 언제나 어떤 기존의 도식[관례 혹은 예술 전통]에서 출발하여, 끊임없는 “수정[correction]”의 행위를 통해 결국 자신이 그리는 형상이 현실 세계와 일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곰브리치[Gombrich]가 사용한 “수정[correction]”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만약 우리가 그의 사유 속에 깊이 뿌리내린 사실주의적 이상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어떤 종류의 ‘이상理想’[그것이 사실주의적이든, 비사실주의적이든, 혹은 그 밖의 어떤 ‘주의主義’의 이상이든]을 대입한다면, 이 두 개념의 용어 체계는 본문의 논의 맥락에도 아무런 위화감 없이 적용될 수 있다.

那么, 什么是在制作过程中, 《天下图》所欲匹配的“理想”?
我们还是从中央大陆出发. 《山海舆地全图》中支离破碎的大陆, 为什么要整合成《天下图》中那略呈矩形、有山海河岳交错流峙的形状?
1910年, 日本地理学家小川琢治将一幅日本所藏17世纪版《五岳真形图》中的《东岳真形图》, 与实地考察用等高线绘制的泰山地形图做了比较分析, 从而得出一个惊人的发现, 即《五岳真形图》貌似杂乱的线条, 其实是用类似于现代等高线制图法的地图绘制思想而绘制的[图31]. 这一发现后来被李约瑟的《中国科学技术史》第五卷《地学》所引用, 后者盛赞“这幅图中所用勾画山形的方法完全不逊于近代所用的方法”[53]. 1987年, 中国地图学者曹婉如、郑锡煌发表了《试论道教的五岳真形图》一文, 将小川所引图[图32为其原图]与明正统十年[1445]重辑的《正统道藏洞玄部灵图类》中的《东岳真形图》[图33]做了比较, 发现它们“虽有一定差别, 但仍可以看出山体逶迤之处, 二者大致相同”[54]. 更为重要的是, 两位学者在这些图后还发现了一段文字: “黑者山形, 赤者水源, 黄点者洞穴口也. 画小则丘陵微, 画大则陇岫状. 葛洪谓高下随形, 长短取象……”这段文字中所描绘的内容完全可以在上述彩图中得到印证. 尤其是文中提到的葛洪之言“高下随形, 长短取象”, 与一部托名为葛洪的晋代文献《汉武帝内传》中的描述, 如出一辙:
帝又见王母巾笈中, 有卷子小书, 盛以紫锦之囊. 帝问: “此书是仙灵之方邪? 不审其目, 可得瞻眄否?”王母出以示之曰: “此《五岳真形图》也. 昨青城诸仙就我求请, 今当过以付之. 乃三天太上所出, 其文秘禁极重, 岂女秽质所宜佩乎? 今且与汝《灵光生经》, 可以通神劝志也.” 帝下地叩头, 固请不已. 王母曰: “昔上皇清虚元年, 三天太上道君下观六合, 瞻河海之短长, 察邱岳之高卑, 立天柱而安于地理, 植五岳而拟诸镇辅, 贵昆陵以舍灵仙, 尊蓬邱以馆真人, 安水神乎极阴之源, 栖太帝于扶桑之墟. 于是方丈之阜, 为理命之室; 沧浪海岛, 养九老之堂. 祖瀛元炎, 长元流生, 凤麟聚窟, 各为洲名. 并在沧流大海元津之中, 水则碧黑俱流, 波则振荡群精. 诸仙玉女, 聚于沧溟, 其名难测, 其实分明. 乃因川源之规矩, 睹河岳之盘曲. 陵回阜转, 山高陇长, 周旋委蛇, 形似书字. 是故因象制名, 定实之号. 画形秘于元台, 而出为灵真之信. 诸仙佩之, 皆如传章, 道士执之, 经行山川. 百神群灵, 尊奉亲迎. 女虽不正, 然数访山泽, 叩求之志, 不忘于道. 欣子有心, 今以相与, 当深奉慎, 如事君父, 泄示凡夫, 必致祸及也.” [55]

그렇다면, 《천하도》가 제작 과정에서 “대응하고자 한 이상[ideal]”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다시 중앙대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산해여지전도》에서 조각조각 나 있던 대륙이 왜 《천하도》에서는 산과 강, 바다와 오악五岳이 교차하는 방형 대지로 통합되었는가?
이에 대한 단서로 1910년 일본의 지리학자 오가와 다쿠지[小川琢治]가 한 가지 중요한 비교를 시도했다. 그는 일본에 전해지는 17세기판 《오악진형도五岳真形圖》 가운데 《동악진형도東岳真形圖》를 현대 지형도[등고선 포함]의 태산泰山 지도와 비교한 결과, 이 복잡해 보이는 도형이 실제로는 일종의 등고선 지도법을 따른 것이라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렀다 [그림31].

图31. 上: 东岳真形图出自 17 世纪日本汉籍; 下: 东岳泰山的现代等高线图 小川琢治 1910 年
그림 31. 위: 《동악진형도東岳真形圖》는 17세기 일본에서 간행된 한적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 동악 태산東岳 泰山의 현대 등고선도, 오가와 다쿠지[小川琢治], 1910년.

이 발견은 후에 리약슬李約瑟의 《중국과학기술사中國科學技術史》 제5권 《지학地學》에 인용되었으며, 그는 이를 두고 “이 도형은 현대 지도 제작법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53].

[53] 李约瑟: 《中国科学技术史》第五卷《地学》第一分册, 科学出版社, 1976, 第129页.

1987년에는 중국 지도학자 조완여曹婉如, 정석황鄭錫煌이 《도교의 오악진형도에 대한 시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들은 오가와가 소개한 그림[그림32]과 《정통도장正統道藏》 동현부洞玄部 영도류靈圖類에 수록된 1445년 중간본 《동악진형도》 [그림33]를 비교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산의 굴곡이 대체로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54].

[54] 曹婉如、郑锡煌: 《试论道教的五岳真形图》, 《自然科学史研究》1987年第1期, 第55页.

图32. 东岳真形图 日本平添笃胤原藏卷子本《灵宝五岳真形图》彩绘图
그림32. 《동악진형도》 일본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소장 권자본 《영보오악진형도靈寶五岳真形圖》 채색도

图33. 东岳真形图1445 年 出自《正统道藏洞玄部灵图类》
그림33. 《동악진형도》 1445년, 《정통도장正統道藏》 동현부洞玄部 영도류靈圖類 수록본

중요한 것은, 이 도형들 뒷부분에 다음과 같은 해설 문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검은 선은 산의 형상, 붉은 선은 수원의 위치, 노란 점은 동혈洞穴의 입구이다. 작게 그리면 구릉이 희미하고, 크게 그리면 능선과 봉우리가 분명히 나타난다. 갈홍葛洪은 이르기를, ‘높낮이는 형세에 따르고, 길고 짧음은 형상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문장은 위에서 소개한 도형들 속에 나타난 도상적 원칙과 완전히 부합하며, 특히 갈홍의 말은 진나라 시기의 문헌인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 속 묘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55].

[55] 《汉武帝内传》, 载刘歆等: 《西京杂记[外五种]》, 王林根校点, 上海古籍出版社, 2012, 第78页.

故事说西王母与汉武帝在延灵之台相会, 王母所赋予汉武帝的《五岳真形图》, 即来自太上道君某一日在天上“下观六合, 瞻河海之长短, 察丘岳之高卑”的结果. 太上道君把五岳按照中央四方的方式布置停当, 并把昆仑山放置在最尊贵的地方, 让诸仙居住; 然后观察山川河流曲直的走向、高低起伏的样态, 它们那回旋盘曲的线条, 就像是书写的文字那样. 也就是说, 《五岳真形图》那形如文字的图画, 并不是向壁虚构的产物, 而是道士们借助于神仙[太上道君和西王母]俯察一切的眼光, 所看到的宇宙真相[山川河流的“真形”].
事实上, 《天下图》也是类似眼光的产物. 只不过《天下图》依据的“真形”, 首先是利玛窦《山海舆地全图》, 其次是该地图所综合的当时最先进的世界地理知识而已. 正是借助于“真形图”眼光, 《天下图》的作者犹如前文中提到的那位创世英雄太上道君, 迈出了他“重整河山”的第一步: 将《山海舆地全图》中支离破碎的河山, 初步改造成《天下图》中那个略近方形、有河海山川流峙的大陆.

서왕모가 한무제와 연령지대延靈之台에서 만났다는 이야기 속에서, 서왕모가 한무제에게 전해준 《오악진형도五岳真形圖》는 태상도군太上道君이 어느 날 하늘에서 육합六合을 내려다보며, 강과 바다의 길이, 산과 언덕의 높고 낮음을 관찰한 결과물이었다.
태상도군은 오악을 중앙과 사방의 질서에 따라 배치하고, 곤륜산을 가장 존귀한 위치에 두어 신선들이 거처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산천과 하천의 곡직과 형세, 즉 구불구불한 선의 형태를 서체처럼 보이도록 정리하였다.
말하자면, 《오악진형도》의 글씨 같은 형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니라, 도사들이 신선[태상도군과 서왕모]의 시선을 빌려 우주의 진실한 모습, 즉 산천하천의 ‘진형真形’을 본 것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천하도》 또한 이와 같은 신적 시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천하도》가 근거로 삼은 “진형”은 먼저는 마테오 리치의 《산해여지전도》이고, 다음으로는 그 지도가 종합한 당시 최신의 세계지리 지식일 뿐이다.
이러한 “진형도”的 시선을 통해, 《천하도》의 제작자는 앞서 언급한 태상도군과 같은 창세적 존재가 되어, 《산해여지전도》의 산산이 흩어진 세계를 처음으로 하나의 대륙, 즉 방형에 가깝고, 산과 강, 바다와 오악이 어우러진 형태로 정돈하게 된다.

第二步, 他重新安排了“五岳”的位置. 这里的“五岳”其实要按照前文提及的“外五岳”[“广野山、丽农山、广桑山、长离山、昆仑山”]而不是“内五岳”[“泰山、嵩山、华山、恒山、衡山”]来理解, 但其契机却仍然根植于作者所欲超越的《山海舆地全图》中. 后者的图例文字有云“内一圈地球分天地五州区境之略”, 这里的“五州”无疑指地图上已有所表现的“亚细亚”“欧罗巴”“利未亚”“南北亚墨利加”和“墨瓦腊尼加”; 如此这般的“五州”信息未必会对《天下图》的作者产生意义, 但它们很有可能对后者起到了提示与刺激的作用, 促使后者在制图时以自己更熟悉的方式取而代之. 本来, 正如我们在《坤舆万国全图》中看到的那样, 原先传统中国地图中起特殊作用的“昆仑”, 已经在利玛窦拼合西方地图的过程中被相对化了, 变得渺不足论; 但在木版化过程[例如镌刻为《山海舆地全图》]中, 尽管地图必须适应一定程度上的简化, 或许是木刻图作者的传统文化心理使然, 但或者仅仅出自偶然的原因, “昆仑”一词仍被选中而成为地图上为数不多的地名之一, 这居然成就了它从遗忘中被拯救的命运, 并进一步成为《天下图》作者在想象中构筑的世界中心之一. 而在这一过程中, 上述《五岳真形图》中的“昆仑”特殊性眼光[“植五岳而拟诸镇辅, 贵昆陵以舍灵仙”], 同样促使图像作者将其与道教杜光庭的“外五岳”思想结合, 将《山海舆地全图》中原先的“五州”, 整合为《天下图》中的另一个“五岳”系统.
值得关注的是, 事实上当时还存在一种现成的图像资源以帮助图像作者达成目的. 章潢的《图书编》和高濂的《遵生八笺》中, 都记录有一种《五岳真形图》, 它们将符箓化的五岳“真形”, 排列成一种五瓣梅花的形状[图34]; 而《古今图书集成》中收录的一幅《唐五岳真形鉴图》, 更是将五岳排列成十字形状[图35], 从而为《天下图》的作者按现有方式排列五岳, 提供了直接的图像依据.

두 번째 단계로, 그는 오악의 위치를 새롭게 재배치했다. 여기서 말하는 “오악”은 앞서 언급한 “외오악外五岳”, 즉 광야산, 이농산, 광상산, 장리산, 곤륜산을 뜻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상은 여전히,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산해여지전도》의 도상에서 비롯되었다. 《산해여지전도》의 주석에는 “내일환지구분천지오주구경지략[内一圈地球分天地五州区境之略]”라는 문구가 있다.
이 “오주五州”는 지도에 이미 표시된 다섯 대륙: 아세아, 유로파, 리비아, 남북 아메리카, 모와라니가[남극]를 지칭한다. 이러한 “오주”의 개념이 《천하도》의 제작자에게 직접적 의미는 없었을지라도, 분명 제작 의도에 자극과 단서를 제공했을 것이다.
《곤여만국전도》에서 보았듯, 전통 중국 지도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곤륜”은 마테오 리치가 서양 지도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상대화되어 존재감이 희미해졌지만, 이후 이를 목판화한 과정[예: 《산해여지전도》]에서는 지도의 단순화를 위해 많은 요소가 생략됨에도 불구하고 “곤륜”이란 이름만큼은 유일하게 남게 되었으며, 이는 아마도 목각 제작자나 화가의 전통적 문화 심성에 기인한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로 인해 곤륜은 망각 속에서 구출되었고, 더 나아가 《천하도》 속 상상의 세계 중심으로 부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악진형도》에 보이는 “곤륜”의 특수한 위상, 즉 “오악을 세워 보좌로 삼고, 곤륜을 귀하게 여겨 신선의 거처로 삼는다”는 도교 사상[두광정杜光庭의 외오악 체계]은 제작자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산해여지전도》에서의 “오주五州” 체계를 《천하도》의 새로운 “오악 체계”로 치환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이 당시 이미 존재하던 도상 자료들이 이 구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장황章潢의 《도서편圖書編》과 고렴高濂의 《준생팔잠遵生八箋》에는 각각 “부적화된 오악의 진형”을 오판매五瓣梅 형태로 배열한 《오악진형도》 도상이 등장한다 [그림34].

图34. 五岳真形图1585 年 出自章潢《图书编》卷五十九
그림34. 《오악진형도五岳真形圖》 1585년, 출처: 장황章潢 《도서편圖書編》 권59

또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는 《당오악진형감도唐五岳真形鑑圖》라 불리는 그림이 실려 있으며, 이 도상은 오악을 십자형十字形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림35].

图35. 唐五岳真形鉴图 出自《古今图书集成·经济汇编·考工典》第二百二十五卷
그림35. 《당오악진형감도唐五岳真形鑑圖》 출처: 《고금도서집성·경제휘편·고공전[古今圖書集成·經濟彙編·考工典]》 권225

이러한 기존 도상들은 《천하도》의 제작자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오악을 배치하는 데 직접적인 시각적 근거를 제공했음이 틀림없다.

现在, 《天下图》作者要着手完成他匹配图像的第三个步骤: 将外围大陆进一步纳入文化的理想. 这回他所依据的文化资源, 是具有独特地理空间的《山海经》系统; 本来, 从《山海舆地全图》出发去援引《山海经》的文本资源, 是顺理成章的事. 这使得图像作者于中央大陆和海外五岳之外, 可以轻而易举地将外围大陆阐释成《山海经》中的大荒世界[那些难以索解的音译地名和国家, 无不昭示着这一点]; 并最终将作者改造《山海舆地全图》而成的三重套叠结构, 完整地纳入《山海经》“海内~海外~大荒”的意义框架.
当然, 也不能排除将其纳入邹衍“九九州”意义系统的可能性. 现存利玛窦《坤舆万国全图》和《两仪玄览图》中, 均有南京吏部主事吴中明的序, 明确提到“邹子称中国外如中国者九, 稗海环之, 其语似闳大不经”, 并以之与中国传统的“齐州之见”做对比, 嘲笑后者之“东南不逾海, 西不逾昆仑, 北不逾沙漠, 于以穷天地之际, 不亦难乎”. [56]
吴中明同时也是南京刻本《山海舆地全图》[现已佚, 即《三才图会》中《山海舆地全图》的原型]的主事者. 不过笔者以为, 作为基督徒的吴中明序文中引用邹衍, 意在惊赞利玛窦图中世界之浩瀚无穷; 这种在《天下图》作者眼中看来, 在长他人志气的情绪, 正是其重整河山时所欲针对和征服的情绪, 故较之《山海经》世界, 其征引之可能性并不大.
最后, 只剩下地图最外圈的圆形需要阐释. 利玛窦《坤舆万国全图》的椭圆形, 并不是地球的形状, 而是根据当时欧洲最先进的椭圆形等积投影画法, 对地球两半球的同时平面展开. 《山海舆地全图》将其从椭圆形改绘成略近圆形的形状, 将地球的五大洲都集中在一个球形上, 如果不是出于纯粹的误读, 就只有通过仅仅是版面设计的原因来解释. 但《天下图》的作者却继承或积极利用了这种误读, 一方面把圆形按照传统的“天圆地方”的宇宙观和分野星占学来理解; 另一方面, 更把它放入道家神话和“五岳真形图”的系统, 最终形成一种以“背负青天朝下看”的俯瞰视角所看到的世界景观[一个名副其实的“天下”].
《天下图》就是这样炼成的.

이제 《천하도》의 제작자는 도상 구성의 세 번째 단계에 착수한다. 그것은 바로 외부 대륙을 더욱 문화적 이상 속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이번에 그가 참고한 문화 자원은 독특한 지리적 공간 체계를 지닌 《산해경》 체계였다. 본래 《산해여지전도》에서 출발하여 《산해경》의 문헌 자원을 인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로 인해 도상 제작자는 중앙대륙과 해외 오악五岳 이외에, 외부 대륙을 《산해경》 속의 대황大荒 세계로 쉽게 해석할 수 있었고[해독이 어려운 음역 지명과 나라 이름들이 이를 명확히 드러낸다], 마침내 자신이 《산해여지전도》를 개작하여 만든 삼중 중첩 구조를 《산해경》의 ‘해내海內~해외海外~대황大荒’이라는 의미 구조 속에 완전하게 포섭하게 된다.
물론, 이것을 추자鄒子 곧 추연鄒衍의 ‘구구주九九州’ 의미 체계 속에 포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와 《양의현람도》에는 모두 남경南京 이부吏部 주사 우중명吳中明의 서문이 실려 있으며, 이 서문에는 “추자가 말하길, 중국 바깥에도 중국과 같은 곳이 아홉 있으며, 엇비슷한 바다들이 이를 에워쌌다고 했다. 그 말은 광대하고 괴이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는 중국 전통의 ‘제주齊州의 견해’와 이를 비교하면서 “동남은 바다를 넘지 못하고, 서쪽은 곤륜을 넘지 못하며, 북쪽은 사막을 넘지 못하니, 이것으로 천지의 끝을 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라며 조소했다. [56]

[56] 吴中明: 《两仪玄览图·吴中明序》, 见辽宁省博物馆藏《两仪玄览图》原图.

우중명은 동시에 《산해여지전도》의 남경 각본[현재는 실전되었고, 《삼재도회》에 실린 《산해여지전도》의 원형이다] 제작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는, 기독교 신자였던 우중명이 서문에서 추연을 인용한 것은 마테오 리치의 지도 속에 펼쳐진 세계의 광활무변함에 대한 감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는 《천하도》 제작자의 시각에서 보자면 타인의 기세에 눌리는 감정이며, 바로 이러한 감정이야말로 그가 산천을 새로 정돈하려는 과정에서 대응하고자 했던 정서이기에, 오히려 《산해경》 세계를 인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지도 가장 바깥 원형의 해석이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에 등장하는 타원형은 지구의 실제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라,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앞선 타원형 등적 투영 도법을 사용하여 지구 양반구를 동시에 평면에 펼쳐 그린 것이었다. 《산해여지전도》는 이것을 타원형에서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바꾸어, 지구의 오대주를 하나의 구형 위에 집중시켰는데, 이것이 단순한 오독이 아니었다면 단지 지면 디자인상의 이유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천하도》의 제작자는 이와 같은 오독을 계승했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편으로는 이 원형을 전통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우주관과 분야성점학分野星占學의 틀 안에서 해석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가道家 신화와 《오악진형도五岳真形圖》 체계 속에 그것을 위치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아래를 굽어보는’ 조감의 시점에서 본 세계 풍경[말 그대로의 “천하”]를 형성한 것이다.

《천하도》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5. 昆仑山与长白山: 风水学说背后的观念
5. 곤륜산과 장백산: 풍수학설 뒤에 숨은 관념

那么, 《天下图》中央大陆究竟是谁的肖像? 《天下图》的作者究竟是谁? 为什么《天下图》有两个中心、两组五岳? 这究竟表达了他的什么情怀, 什么意愿, 什么思想?
让我们重新回到本文开头引用的图像[图4]中的一个细节. 与康熙二十三年款《天下图》同款的这幅《天下图》[图36], 与前者一样有一个八边形的外框. 黄时鉴很早就指出这个外框与“道家常用的八卦有联系”[57], 但没有说出为什么, 现在我们可以根据这个材料做出肯定的回答. 图4的外框上, 从西北方位开始有三行奇怪的字, 用墨书题写在外框内侧的边缘. 西北方向往下墨书三行: 第一, 乾亥龙亥首亥坐向巳破; 第二, 乾亥龙亥坐向丁艮得丙破; 第三, 乾亥龙亥首亥坐巳向, 丁艮得丙破. 关于这三行字和它们的意思, 笔者请教了相关堪舆学专业人士. 幸承中国文物学会会员许力先生转致台湾道教天一宗陈恭至宗主的意见, 谨录如下:
图中墨书三行, 自上而下依次, 其一“乾亥龙亥首亥坐向巳破”; 其二“乾亥龙亥坐向丁艮得丙破”; 其三“乾亥龙亥首亥坐巳向, 丁艮得丙破”.
此三行皆堪舆学的语言. 大意是: 如果风水中的龙脉[龙亥]与八卦的位置[乾亥]对应重叠, 那么所求的人才与运势, 都将在某一个特定方位[丁艮得]应验. 而对应的弱点[巳破、丙破]也会显现.

그렇다면 《천하도》의 중앙대륙은 도대체 누구의 초상인가? 《천하도》의 제작자는 과연 누구인가? 왜 《천하도》에는 두 개의 중심, 두 세트의 오악五岳이 있는가? 그것은 과연 어떤 감정, 어떤 의지, 어떤 사상을 표현한 것인가?
이제 글 서두에 인용했던 도상[그림 4]의 한 세부로 다시 돌아가 보자. 강희 23년[1684]년 간기를 가진 《천하도》와 동일한 판본에 속하는 이 《천하도》[그림 36]는 앞선 것과 마찬가지로 팔각형 외곽 틀을 갖추고 있다. 황시감黃時鑒은 이 외곽 틀이 “도가道家에서 자주 사용하는 팔괘八卦와 관련이 있다”고 일찍이 지적했지만,[57]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57]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第249页.

이제 우리는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림 4]의 외곽 틀에는, 북서 방위에서 시작하여 세 줄의 기이한 문자가 먹으로 써져 외곽의 안쪽 모서리에 기록되어 있다. 북서 방향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쓴 먹서墨書 세 줄은 다음과 같다:

이 세 줄과 그 의미에 대해 필자는 풍수학堪輿學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중국문물학회中國文物學會 회원 허력許力 선생을 통해 대만 도교 천일종天一宗 종주인 진공지陳恭至 선생의 해석을 전해받았기에, 이에 따라 해설을 덧붙인다.
그림 속 세 줄의 먹서 내용은 위에서 아래 순으로, 다음과 같다:

이 세 문장은 모두 풍수학적 용어로 이루어진 말이다. 대략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만약 풍수상에서 말하는 용맥龍脈[용해龍亥]와 팔괘八卦의 방위인 건해乾亥가 서로 겹쳐지게 된다면,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인재와 운세는 일정한 특정 방향[정간득丁艮得]에서 실현되며, 동시에 해당 위치의 취약점[사파巳破, 병파丙破]도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图36. 《天下总图》细节: 中国、朝鲜、昆仑与安南所在位置
그림 36. 《천하총도天下總圖》 세부: 중국, 조선, 곤륜, 안남의 위치 표시.

笔者结合八卦形堪舆罗盘示意图[图37], 对该《天下图》的图像做了重新解读, 发现了该图在当时被使用的蛛丝马迹, 认为这种使用的背后, 极可能隐匿着某些重大的历史情势与信息. 根据后天八卦的方位, “乾”为西北, 这一位置正好与中央大陆上的“昆仑”重叠; 而“艮”在东北, 该方位与“朝鲜”位置重合; 第三个方位“巳”在东南, 与之同位的国家正好是“安南”. 结合墨书和图像, 出现在《天下图》上的这些话, 其大概意思很可能是说: 风水中的“龙亥”[龙脉]和八卦的位置“乾亥”都重叠在西北“昆仑”之位上, 因而所求的人才与运势, 都会在“丁”尤其在“艮”[即“朝鲜”]的方位上, 而相应的弱点, 也就是可能破坏运势的位置, 则在“巳”和“丙”位[基本上都指“安南”]. 这是为什么?

필자는 《팔괘형감여나침반도해도八卦形堪舆罗盘示意图》[그림37]을 바탕으로, 《천하도》의 그림을 다시 해석했다. 그 결과 이 그림이 당시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흔적을 발견했으며, 이러한 사용의 배경에는 어떤 중대한 역사적 정세와 정보가 은밀히 숨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후천팔괘의 방위에 따르면, “건乾”은 서북에 해당하고, 이 위치는 중앙대륙 상의 “곤륜”과 정확히 겹친다. 반면, “간艮”은 동북이며, 이 방향은 “조선”의 위치와 일치한다. 세 번째 방향인 “사巳”는 동남이며, 이와 같은 방위에 놓인 국가는 바로 “안남”이다.
묵서墨書와 도상을 함께 살펴볼 때, 《천하도》에 나타난 이 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풍수에서 말하는 “용해龍亥”[용맥龍脈]과 팔괘의 위치인 “건해乾亥”가 모두 서북의 “곤륜” 위치에 중첩되므로, 인재와 운세를 얻으려면 “정丁”, 특히 “간艮”[즉 “조선”] 방향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이에 대응하는 약점, 즉 운세를 해칠 수 있는 방향은 “사巳”와 “병丙” 방위에 있다는 것이다[이는 기본적으로 모두 “안남”을 가리킨다].
왜 이런 해석이 가능한가?

图37. 后天八卦堪舆罗盘示意图
그림37. 팔괘형감여나침반도해도八卦形堪舆罗盘示意图

为了能够更好地解决上述问题, 我们有必要诉诸那个时代的风水学说. 当时最著名的风水著述, 无疑是成书于明嘉靖年间的徐维志、徐维事兄弟所著《地理人子须知》. 该书第一篇《总论中国之山》, 讲述中国山水大势及其与昆仑的关系:
朱子曰: “河图言昆仑为地之中.” 中国至于阗二万里. 于阗贡使自言西去四千三百余里即昆仑. 今中国在昆仑东南, 而天下之山祖于昆仑, 惟派三干以入中国. 其入夷国之山无可考, 亦不足论. 今以中国言之, 其河北诸山, 则自北寰武、岚宪诸州, 乘高而来, 山脊以西之水, 流入龙门西河, 脊东之水, 流于幽冀, 入于东海. 其西一支为湖口泰岳. 次一支包汾晋之原而南出, 以为析城、王屋, 而又西折为雷首. 又一支为恒山, 又一支为太行山. 太行山一千里, 其山高甚. 上党在山脊, 河东河北诸州在山支. 其最长一支为燕山, 尽于平梁. 大河以南诸山, 则关中之山, 皆自蜀汉而来. 一支至长安而尽. 关中一支生下函谷. 以至嵩、少, 东尽泰山. 一支嶓冢、汉水之北生下, 尽扬州江南诸山, 皆祖于岷江, 出岷山. 岷山夹江两岸而行, 那边一支, 去为江北许多去处. 这边一支, 分散为湖南、闽、广, 尽于两浙、建康. 其一支为衡山, 而尽于洞庭、九江之西. 其一支度桂岭, 则包湘源, 而北经袁筠之地, 以尽于庐阜. 其一支自南而东, 则包彭蠡之原, 度歙黄山, 以尽于建康. 又自天目山分一支, 尽于浙江西之山, 皆自五岭赣上来, 自南而北. 闽广之山, 自北而南. 一支则又包浙江之原, 北首以尽会稽, 南尾以尽闽粤. 此中国诸山祖宗支派之大纲也. [58]
结合书中所附的《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图38], 即可理出中国山水的脉络如下: 昆仑为“众山之祖”, 去中国约二万五千里之遥; 中国位于昆仑之东南; 从昆仑出发, 向中国发出三条龙脉[干龙]. 北龙是黄河之北众山的大势走向, 经山西而往幽燕, 太行山、北岳恒山和燕山都是它的支脉, 然后向“东北渡辽海以入于海”; 中龙为黄河以南、长江以北的山势走向, 从关中、蜀汉而来, 往陕西、河南而去, 经西岳华山、中岳嵩山到东岳泰山而尽; 南龙是长江以南众山的大势走向, 从岷江、岷山出发, 经过南岳衡山, 分散为湖南、福建、广东, 以及浙江、江苏的众山. 鉴于该书的很多篇章[包括此处的《总论中国之山》和《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 与前述《山海舆地全图》一样, 均被收入王圻的类书《三才图会》地理编之中, 而后者作为明代最为著名的图文类书, 于明万历三十七年[1609]出版后, 一时风行海内外, 洛阳为之纸贵; 对于17~18世纪的朝鲜来说, 该书是不难获得的资源.

이상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시대의 풍수학설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당시 가장 유명한 풍수 저술은, 의심할 바 없이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성립된 서유지徐維志, 서유사徐維事 형제가 함께 저술한 《지리인지수지地理人子須知》였다. 이 책의 첫 번째 편인 〈중국의 산에 대한 총론[總論中國之山]〉에서는 중국 산수의 큰 흐름과 그것이 곤륜과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도河圖에서 말하기를, 곤륜은 대지의 중심이라 했다. 중국은 우전于闐에까지 이르고, 우전의 공헌 사신의 말에 따르면 서쪽으로 4,300여 리를 가면 곤륜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 중국은 곤륜의 동남에 있으며, 천하의 모든 산은 곤륜을 조상으로 삼고, 오직 세 갈래의 줄기가 중국으로 들어온다. 이 중 이국夷國으로 들어간 산은 고증할 수 없어 논할 가치가 없다. 지금 중국만을 기준으로 말하면, 하북河北의 여러 산은, 북환北寰 무武, 남헌嵐憲 등의 여러 주에서부터 높은 지세를 타고 흘러오며, 산등성이 서쪽의 물은 용문龍門의 서하西河로 흘러가고, 동쪽의 물은 유기幽冀로 흘러가 동해로 들어간다. 서쪽의 한 줄기는 호구湖口 태악泰岳이 되고, 그 다음 한 줄기는 분汾·진晉의 원야原野를 감싸 남쪽으로 흘러 석성析城과 왕옥王屋이 되며, 다시 서쪽으로 꺾여 뇌수雷首가 된다. 또 하나의 줄기는 항산恒山이 되며, 또 하나는 태행산太行山이 된다. 태행산은 1,000리에 이르며, 산세가 매우 높다. 상당上黨은 산등성이에 있고, 하동河東과 하북河北의 여러 주는 그 산의 가지에 있다. 그 중 가장 긴 한 줄기는 연산燕山이며, 평량平梁까지 뻗어 있다. 황하 남쪽의 여러 산은 관중關中의 산이며, 모두 촉한蜀漢에서 시작된다. 한 줄기는 장안長安에서 끝나고, 관중의 또 다른 줄기는 하곡관函谷關 아래에서 시작되어 숭산嵩山·소산少山을 지나 동쪽으로 태산泰山까지 이른다. 한 줄기는 파총嶓冢과 한수漢水 북쪽에서 시작되어 양주揚州, 강남江南의 여러 산에 이르고, 이들은 모두 민강岷江, 민산岷山을 조상으로 삼는다. 민산은 강 양안을 끼고 흐르는데, 저편의 한 줄기는 강북의 여러 지역으로 뻗고, 이쪽의 한 줄기는 호남湖南·민閩·광廣으로 흩어져 절강浙江·건강建康까지 이른다. 그 중 하나는 형산衡山이 되어 동정호洞庭湖와 구강九江 서쪽에서 끝난다. 하나는 계령桂嶺을 넘어 상원湘源을 감싸고 북쪽으로 원균袁筠의 지역을 지나 노부廬阜에서 끝난다. 또 하나는 남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팽려彭蠡의 원야를 감싸고 습주歙州와 황산黃山을 지나 건강에서 끝난다. 다시 천목산天目山에서 한 줄기가 나뉘어 절강 서쪽의 산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모두 오령五嶺과 감상贛上에서 출발하여 남에서 북으로 향한다. 민·광의 산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한 줄기는 다시 절강의 원야를 감싸 북쪽은 회계會稽에서 끝나고, 남쪽은 민월閩粵에서 끝난다. 이것이 중국의 여러 산맥이 조상으로 삼는 산과 그 계통을 이루는 대강大綱이다. [58]

[58] 徐维志、徐维事: 《精校地理人子须知》, 第30页.

책에 수록된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干龍總覽之圖》[그림38]를 함께 살펴보면, 중국 산수의 맥락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곤륜은 “온 산의 조상”으로, 중국에서 약 25,000리 떨어져 있다. 중국은 곤륜의 동남에 위치하며, 곤륜에서 출발한 세 갈래의 용맥龍脈[간룡干龍]이 중국을 향해 뻗는다.
북룡北龍은 황하 북쪽의 여러 산이 형성한 지세의 흐름으로, 산서山西를 거쳐 유연幽燕으로 향하며, 태행산太行山, 북악北岳 항산恒山, 연산燕山이 모두 그 지맥이며, 이어서 “동북으로 요해遼海를 건너 바다로 들어간다.”
중룡中龍은 황하 이남, 장강 이북의 산세 흐름으로, 관중關中·촉한蜀漢에서 시작되어 섬서陝西, 하남河南을 지나며, 서악화산西岳華山, 중악숭산中岳嵩山, 동악태산東岳泰山을 거쳐 끝난다.
남룡南龍은 장강 이남의 여러 산이 형성한 지세로, 민강岷江·민산岷山에서 출발해 남악형산南岳衡山을 거쳐, 호남湖南, 복건福建, 광동廣東 및 절강浙江, 강소江蘇의 여러 산으로 흩어진다.
위 책의 여러 장절들[이곳의 〈중국의 산에 대한 총론〉과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干龍總覽之圖》를 포함하여], 앞서 논한 《산해여지전도》와 마찬가지로 모두 왕기王圻의 유서 《삼재도회》의 지리편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삼재도회》는 명대 가장 유명한 도해류 유서로서, 만력萬曆 37년[1609]에 간행된 이후 국내외에 널리 유행했고, 낙양洛陽에서 이 책을 사려는 사람들로 종이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의 조선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은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자료였다고 할 수 있다.

图38. 《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图形分析: 从昆仑出发的三大干龙走向
그림38.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干龍總覽之圖》의 도형 분석: 곤륜에서 출발한 세 갈래 간룡干龍의 흐름

对本文而言, 上述信息中最重要的两条: 第一, 五岳尽在三大干龙之中; 第二, 从西北[昆仑]到东北[辽海], 是北龙的走向. 但是, 《地理人子须知》中的风水理论, 持“三干之龙, 中干为最尊, 次北干, 又次南干”的看法; 既然最尊贵的是中干之龙, 故徐氏兄弟仍将明朝兴起的国运, 放在“中龙”的脉络之上[“中干之旺气乃萃于四州凤阳, 我皇朝熙祖、仁祖二陵在焉”[59]]. “北龙”虽然提及, 但并不占据特殊的地位. 同时代另一位地理学家王士性[1547~1599]另立新说, 将《地理人子须知》的“干龙”学说, 进一步发展成一种动态的历史哲学. 在后者看来, 龙脉并非始终如一, 而是存在着从中往北再往南的动态转移, 即从“中龙”转向“北龙”再转向“南龙”; 从而, 中国历史从三皇五帝、周秦汉唐[所谓“中龙先发”], 经匈奴、突厥和辽金元的入主中原[“北龙次之”], 到宋朝的南渡和明太祖的中兴[“南龙王方始”]的演变, 其背后则是“天运循环, 地脉移动, 彼此乘除之理”的风水运程和规律. [60]这种理论显然旨在为“南龙”张目, 以证明明朝统治的合法性. 但是, 颇为吊诡地, 它却为后世新的“北龙”学说的再生, 以及历史哲学的再一次改弦更张, 提供了理论基础.
康熙四十八年[1709], 康熙皇帝“发表”了一篇宏论, 对于发生在中国的天命转移背后的风水原理, 做出了破天荒的新阐释:
泰山山脉自长白山来古今论九州山脉, 但言华山为虎, 泰山为龙, 地理家亦仅云泰山特起东方, 张左右翼为障, 总未根究泰山之龙于何处发脉. 朕细考形势, 深究地络, 遣人航海测量, 知泰山实发龙于长白山也. 长白绵亘乌喇之南, 山之四围百泉奔注, 为松花、鸭绿、土门三大江之源. 其南麓分为二干, 一干……东至鸭绿, 西至通加, 大抵高丽诸山, 皆其支裔也. 其一干自西而北, 至纳禄、窝集, 复分二支: 北支至盛京, 为天柱、隆业山, 折西为医巫闾山; 西支入兴京门, 为开运山, 蜿蜒而南, 磅礴起顿, 峦岭重叠, 至金州旅顺口之铁山, 而龙脊时伏时现海中, 皇成、鼋矶诸岛, 皆其发露处也. 接而为山东登州之福山、丹崖山, 海中伏龙于是乎陆起, 西南行八百余里, 结而为泰山, 穹崇盘屈, 为五岳首. 此论虽古人所未及, 而形理有确然可据者. 或以界海为疑, 夫山势联属而喻之曰龙, 以其形气无不到也. 班固曰: 形与气为首尾. 今风水家有过峡, 有界水, 渤海者, 泰山之大过峡耳. 宋魏校《地理说》曰: 傅乎江, 放乎海. 则长白山之龙, 放海而为泰山也固宜. 且以泰山体位证之, 面西北而背东南, 若云自函谷而尽泰山, 岂有龙从西来而面反西向乎, 是又理之明白易晓者也[61].
康熙宏论的目的无疑也在论证满族入主中原的历史合法性, 本质上与论证明朝合法性的风水理论并无二致. 但其“理论创新”之处在于, 他一方面虚化了传统风水理论中的“昆仑”中心论, 另一方面则凸显了新的“长白山”中心论. 泰山在中国传统政治学说中有着重要意义, 它不仅是五岳之一, 更是五岳之首, 是历代帝王封禅并取得天命的场所. 康熙建构的“泰山山脉自长白山来”的“长白山”中心论, 也意味着将所有的中原正统论及其背后的风水学说一扫而空, 确立了以圣山崇拜为基础的北方的神圣性, 为清朝南下进入并统治中原, 提供了貌似天经地义的理由.

본고의 입장에서 볼 때, 위 정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악五岳은 모두 삼대간룡三大干龍의 계통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 둘째, 서북[곤륜]에서 동북[요해遼海]로의 방향이 바로 북룡北龍의 흐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지리인지수지地理人子須知》에서 제시된 풍수 이론은 “삼간의 용맥 중 중간룡中干龍이 가장 존귀하며, 다음이 북간룡北干龍, 그 다음이 남간룡南干龍”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가장 존귀한 것이 중간룡이므로, 서씨 형제는 명나라의 국운 흥기를 “중룡中龍”의 맥락 위에 두었다. [“중간의 왕기旺氣는 네 주[四州] 봉양鳳陽에 모였으며, 우리 황조皇朝의 희조熙祖와 인조仁祖의 능이 그곳에 있다”[59].]

[59] 徐维志、徐维事: 《精校地理人子须知》, 第30页.

비록 “북룡北龍”도 언급되지만,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같은 시대의 또 다른 지리학자인 왕사성王士性[1547–1599]은 새로운 설을 세우고, 《지리인지수지地理人子須知》의 “간룡干龍” 이론을 더 나아가 일종의 동태적 역사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용맥은 항상 동일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북으로, 다시 남으로 옮겨가는 동적인 전이가 존재한다. 즉, “중룡”에서 “북룡”으로, 다시 “남룡”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 역사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주周·진秦·한漢·당唐[이른바 “중룡이 먼저 나타난 시기”]을 지나, 흉노匈奴·돌궐突厥·요遼·금金·원元이 중원을 점유한 시기[“북룡이 다음으로 나타난 시기”], 다시 송나라의 남도南渡와 명태조明太祖의 중흥[“남룡이 비로소 왕기王氣를 얻은 시기”]로 전개되는데, 그 이면에는 “천운이 순환하고, 지맥이 이동하며, 서로 오르고 지는 이치”라는 풍수의 운세와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60].

[60] 王士性: 《广游志》, 载《王士性地理书三种》, 周振鹤编校, 上海古籍出版社, 1993, 第210~211页.

이러한 이론은 명백히 “남룡”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명나라 통치의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매우 역설적인 것은, 이 이론이 후세에 새롭게 등장하는 “북룡” 학설과 또 한 차례의 역사철학적 전환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강희 48년[1709], 강희제康熙帝는 “대론大論”이라 부를 만한 글을 발표하고, 중국에서 발생한 천명天命의 전이에 숨겨진 풍수 원리를 전례 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다: 태산泰山 산맥은 장백산에서 비롯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구주九州의 산맥을 논함에 있어, 다만 화산華山을 호랑이에, 태산泰山을 용에 비유하며, 지리가는 또한 단지 태산이 동방에서 우뚝 솟고 좌우 날개를 벌려 장애물 역할을 한다고만 말할 뿐, 태산의 용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근원적으로 따지지 않았다. 짐이 지세를 면밀히 고찰하고, 지맥을 깊이 연구했으며, 사람을 보내 바다를 건너 측량하게 한 결과, 태산은 실로 장백산에서 용맥이 발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장백산은 오랍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으며, 그 산의 사방에서는 수많은 샘이 흘러나와 송화강松花, 압록강鴨綠, 토문강土門 등 세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기슭에서 두 개의 줄기로 나뉘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通加에 이른다. 대체로 고려高麗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의 갈래이다. 또 한 줄기는 서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다가 나륙納祿·와집窩集에 이르러 다시 두 갈래로 나뉘니, 북쪽 지맥은 성경盛京에 이르고, 천주산天柱山·융업산隆業山을 거쳐 서쪽으로 꺾여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며, 서쪽 지맥은 흥경문興京門으로 들어가 개운산開運山을 이루고, 남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며 중첩된 산릉을 이루어 금주金州 여순구旅順口의 철산鐵山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용맥은 바다 속에 잠겼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황성도皇成島·원기鼋磯 등의 섬들이 바로 그 드러난 부분들이다. 이어서 산동山東 등주登州의 복산福山·단애산丹崖山을 거쳐, 바다 속에 잠긴 용이 여기서 육지로 올라오고, 서남으로 800여 리를 달려 태산泰山이 되고, 높고 크며 구불구불한 형세로 오악의 으뜸이 된다. 이 이론은 비록 고인이 미치지 못한 바이나, 형세와 이치에는 명확하게 근거가 있다. 혹자는 바다로 경계된다는 점을 의심할지 모르나, 산세는 연결되어 ‘용’으로 비유되고, 그 형기形氣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반고班固는 말하기를 “형과 기는 머리와 꼬리”라 했다. 지금의 풍수가들은 험한 산길[過峽], 물 경계[界水]를 말하는데, 발해渤海는 곧 태산이 넘는 큰 물줄기일 뿐이다. 송나라 위교魏校의 《지리설地理說》에는 “강에 뻗고 바다에 펼쳐진다”고 했으니, 장백산의 용이 바다를 건너 태산이 되는 것은 마땅하다. 또한 태산의 체위體位를 보건대, 서북을 향하고 동남을 등지고 있으니, 만일 하곡관函谷關에서 시작되어 태산에 이른 것이라면 어찌 용이 서쪽에서 와서 다시 서쪽을 향해 등을 돌릴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이치상 명백하고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61].

[61] 《清圣祖仁皇帝御制文》 第四集卷二十七. 转引自《吉林通志》卷六《天章志》, 吉林文史出版社, 1986, 第99页.

강희의 이 “대론”의 목적 역시,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온 역사적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데 있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본질적으로 명나라의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기존의 풍수 이론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혁신”은 전통 풍수 이론 속의 “곤륜 중심설”을 희석시키는 한편, 새로운 “장백산 중심설”을 부각시켰다는 데에 있다.
태산은 중국 전통 정치학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단지 오악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오악의 으뜸이며, 역대 제왕이 봉선封禪하여 천명을 획득한 장소이다. 강희가 구축한 “태산의 산맥은 장백산에서 비롯되었다”는 “장백산 중심설”은, 모든 중원 정통론과 그 이면의 풍수 이론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성산聖山 숭배를 기반으로 한 북방의 신성성을 확립하며, 청조가 남하하여 중원을 장악하게 된 것에 대해 일견 천경지의天經地義처럼 보이는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었다.

事实上, 这种新风水理论是康熙朝一系列政治操作与实践的合乎逻辑的终点. 康熙十六年[1677], 康熙派人前往长白山拜谒, 谕曰: “长白山发祥重地, 奇迹甚多, 山灵宜加封号, 永着祀典, 以昭国家茂膺神贶之意.” 翌年, 康熙册封长白山为“长白山之神”, 并定其与中原五岳同等的祀典规格, 以及每年春秋两次的常例致祭、庆典临时告祭的祭祀制度[62], 将其地位由金代的“王”和“帝”, 提高到至高无上的“神”, 促使长白山逐渐从一座地方性名山, 演化成一座为中原龙脉提供合法性的“圣山”.
有意思的是, 清朝皇帝对于长白山“圣山”形象的建构, 随即也在长白山以南的朝鲜王朝那里引发了同样的“造圣”运动. 根据李花子的研究, 本来在李朝朝鲜之初, “长白山”[朝鲜称为“白头山”]被视为域外之山, 朝鲜君臣更愿意将其当作一座“胡地”之山, 属于女真“野人部落”的山. 当时朝鲜王朝崇奉的四岳分别是东岳三角山、南岳智异山、西岳松岳山和北岳鼻白山, 根本就没有“白头山”. 到康熙五十一年[1712]穆克登勘边、中朝定界, “长白山”成为中朝的界山之后, 因为它的一部分成为朝鲜之山, 它才开始映入朝鲜人的眼帘, 此后的朝鲜地图开始清晰标出鸭绿江、图们江和长白山天池. 只有到了朝鲜英祖时期[1724~1776年], 才开始长白山国家祀典化的阶段. 经过英祖三十七年[1760]和四十三年[1766]两次御前论辩, 朝鲜确定了以长白山取代鼻白山成为北岳, 并施以望祀之礼的制度. “这样一来, 长白山作为兴王肇基之所, 在清朝和朝鲜都得到了尊崇, 清朝是在五岳之外祭祀‘长白山之神’, 祀典如五岳; 朝鲜则定长白山为四岳之一的北岳”. [63]
李花子等学者正确地指出了在崇奉长白山问题上, 清朝与朝鲜之间的连带关系, 但似乎并未给出这种连带关系的内在理由. 在笔者看来, 其间的关键因素仍在于我们前述的新风水理论, 即康熙宏论中所说, 从长白山南麓出发, 发出了两条干龙, 一条“东至鸭绿, 西至通加, 大抵高丽诸山, 皆其支裔也”; 另一条通向清朝的龙兴之地, 再渡海到达泰山. 换句话说, 朝鲜与清朝其实共享着同一条发源于长白山的龙脉, 可谓真正的长白山“命运共同体”. 进一步讲, 朝鲜同样是清朝正朔的奉系者, 也是它的受益者. 这一点, 与人们长期以来形成的朝鲜始终奉明为正朔的传统观念, 似乎十分不同.

사실상, 이러한 새로운 풍수 이론은 강희조康熙朝의 일련의 정치적 조작과 실천이 논리적으로 도달한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 강희 16년[1677], 강희는 사람을 장백산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칙명을 내렸다. “장백산은 발상지로서 중대한 땅이며, 기이한 기적이 매우 많다. 산령山靈에게 마땅히 봉호封號를 내려, 영구히 제사의 전례에 포함시켜, 우리 나라가 신령의 은혜를 성대히 받은 바를 드러내야 한다.”
이듬해, 강희는 장백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책봉하고, 그것이 중원의 오악五岳과 동등한 제사 의례를 갖추도록 정했으며, 매년 춘추春秋 두 차례의 정례 제사와 경사나 특수 상황에 따른 임시 고제告祭의 제도까지 마련했다[62].

[62] 陈慧: 《长白山崇拜考》, 《社会科学战线》2011年第3期, 第107页.

이렇게 하여 장백산의 지위는 금대金代에 “왕”이나 “제”라 불리던 것에서 최고존엄의 “신神”으로 격상되었고, 점차 한 지방 명산에서 중원의 용맥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성산聖山”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청조清朝 황제가 장백산의 “성산” 이미지를 구축하자, 곧 그 남쪽에 위치한 조선왕조에서도 이와 유사한 “성산 만들기” 운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화자李花子의 연구에 따르면, 본래 조선왕조 초기에 “장백산”長白山은 조선에서 “백두산”이라 불렸지만, 국외의 산으로 간주되었고, 조선의 군신들은 이 산을 여진女眞 “야인부락野人部落”의 산, 즉 오랑캐 땅의 산으로 여기기를 더 선호했다.
당시 조선왕조가 숭배하던 사악四岳은 각각 동악 삼각산三角山, 남악 지리산智異山, 서악 송악산松岳山, 북악 비백산鼻白山이었고, “백두산”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강희 51년[1712]에 목극등穆克登이 변경을 측량하고, 중조中朝 간의 경계가 설정되면서 “장백산”은 중조의 경계 산이 되었고, 그 일부가 조선의 산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조선인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의 지도에는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장백산 천지天池 등이 명확히 표시되기 시작했다.
백두산의 국가 제사화는 조선 영조英祖 시기[1724–1776]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영조 37년[1760]과 43년[1766]의 두 차례 어전 논의 끝에, 조선은 장백산[백두산]을 기존의 북악 비백산鼻白山을 대신하여 북악으로 확정하고, 망제望祭의 예를 시행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장백산은 왕조의 기운이 발흥한 근원지로서, 청조와 조선 모두에게 숭배를 받게 되었다. 청조는 오악 이외의 특별한 제사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을 제사 지냈으며, 그 제도는 오악과 같았고, 조선은 장백산을 사악 중 하나인 북악으로 정하였다.”[63]

[63] 李花子: 《朝鲜王朝的长白山认识》, 《中国边疆史地研究》2007年第2期, 第128、133页.

이화자 등의 학자는 장백산 숭배 문제에서 청조와 조선 사이의 연계 관계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러나 이 연계 관계의 내적 논리를 제시하지는 않은 듯하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 핵심 요인은 여전히 우리가 앞서 언급한 새로운 풍수 이론에 있다고 본다. 즉, 강희의 대론에서 언급된 것처럼, 장백산 남쪽 기슭에서 두 갈래의 간룡干龍이 발원하였고, 그 중 한 갈래는 “동쪽으로 압록강에, 서쪽으로 통가通加에 이르며, 대체로 고려의 여러 산은 모두 그 지맥의 지류이다”; 또 한 갈래는 청조의 용이 발흥한 지역으로 향하다가 바다를 건너 태산泰山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청조는 사실상 동일한 장백산에서 발원한 용맥을 공유하는 셈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장백산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말하면, 조선 역시 청조 정통正朔의 봉계자奉系者였고, 그 수혜자이기도 했다. 이는 조선이 줄곧 명나라를 정통으로 섬겼다는 기존의 통념과는 꽤나 다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然而, 这种关系的另一面正是奉明为正朔的思想意识. 这在英祖朝应该说表现得更加充分. 肃宗三十年[1704], 在明亡整整一个甲子的时候, 朝鲜在宫中建成大报坛, 为了报答明神宗在朝鲜遭受日本丰臣秀吉侵略之际毅然出兵援救、“再造邦国”之恩. 在英祖二十五年[1748]之前, 大报坛一直“独祀神宗”; 到了这一年, 在英祖的力主之下, 经过几次讨论, 终于导致在大报坛将神宗、崇祯与明太祖“三皇并祀”的局面. 正如孙卫国所言, “其崇祀对象由一帝而成三帝, 虽然报恩之意仍在, 但更主要的在于表明朝鲜与整个明朝的关系, 而并非只是局限于报恩”, “这样大报坛就不只是三位皇帝的祭坛, 而是代表整个明朝, 是朝鲜强化正统的重要场所”. [64]这同时意味着朝鲜已成为明朝正朔的完整继承者. 由英祖一人而完成的上述事业, 看上去十分矛盾, 却是朝鲜左右逢源的全身之道: 一方面通过大报坛表达尊周思明的情感和皇明香火尽在于斯的正统意识; 另一方面又借助于与清朝共同的“圣山”, 以分享统治的合法性, 以及朝鲜山川作为“北龙”之一的自豪感.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또 다른 면은 바로 명나라를 정통으로 받드는 사상적 의식이었다. 이는 영조조英祖朝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숙종肅宗 30년[1704], 명나라가 멸망한 지 정확히 한 갑자[60년]가 되는 해에, 조선은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했다. 이는 조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침략을 당했을 때 명신종明神宗이 결단력 있게 출병하여 조선을 구제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었다.
영조英祖 25년[1748] 이전까지 대보단에서는 줄곧 “신종만을 단독으로 제사” 지냈다. 그러나 이 해에 이르러 영조가 강력히 주장하고,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친 끝에, 마침내 대보단에서는 신종神宗, 숭정제崇禎, 명태조明太祖 등 “삼황三皇을 함께 제사”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손위국孫衛國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숭배 대상이 한 명의 황제에서 세 명의 황제로 확대된 것은 비록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조선이 명나라 전체와 맺은 관계를 표명하려는 것이었으며, 단순한 보은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로써 대보단은 단순히 세 명의 황제를 모시는 제단이 아니라, 명나라 전체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고, 조선이 정통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64]

[64] 孙卫国: 《大明旗号与小中华意识—朝鲜王朝尊周思明问题研究》, 商务印书馆, 2007, 第138页.

이는 동시에 조선이 명나라 정통正朔의 완전한 계승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업이 영조 한 사람에 의해 완결되었다는 점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조선이 좌우 양면에서 이익을 취하며 몸을 보존하려 한 방식이었다. 한편으로는 대보단을 통해 존주숭명尊周崇明의 감정과 “황명皇明의 향화는 이곳에 있다”는 정통 의식을 드러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조清朝와 함께 공유하는 “성산聖山”의 이미지를 빌려, 통치의 정당성을 함께 나누며, 동시에 조선의 산천이 “북룡北龍”의 일부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

这种矛盾意识同样体现在《天下图》中. 为什么地图上除了昆仑山和五岳, 在东北方位朝鲜的上方, 还有一个“肃慎国”和一座“龟山”?
“肃慎国”的文献出处有二.
第一, 《山海经·大荒北经》: “大荒之中, 有山名曰不咸. 有肃慎氏之国.”
第二, 《山海经·海外西经》: “肃慎之国在白民北. 有树名曰雄常, 先入伐帝, 于此取之.”

考此处“肃慎国”, 其所处位置在中央大陆, 应在“海内”, 故与两处文字所及之“大荒”和“海外西”均不合. 但“肃慎”是历史民族的民称. 《竹书纪年·五帝纪》记: “息慎氏来朝, 贡弓矢.” 《左传》鲁昭公九年载, 周天子在列举其疆土四至时称: “肃慎、燕、亳, 吾北土也.” 《国语·鲁语下》则记“肃慎氏贡楛矢石砮, 其长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之致远也, 以示后人, 使永监焉, 故铭其楛曰‘肃慎氏之贡矢’”[65], 说明肃慎人是一个擅长弓矢的民族. 《山海经》提到的“肃慎氏之国”, 旁边“有山名曰不咸”, 二者亦与《晋书·四夷传》所记“肃慎氏, 一名挹娄, 在不咸山北”相合. 今天多数学者认为“不咸山”即今长白山, 而“肃慎国”作为东北最早被记录的历史民族, 即为女真和今满族人的前身. [66]
而“龟山”则出自《山海经·海内北经》: “海内西北陬以东者. 蛇巫之山, 上有人操柸而东向立. 一曰龟山.”
这里的“龟山”除了所处的地理位置在“海内北”[或“海内西北陬以东者”], 与其所在地图的位置相合之外, 并没有太多的信息; 也不清楚这个“龟山”与“蛇巫之山”有什么关系.
有意思的是, 在同属《山海经·海内北经》的经文中, 恰好记载有“盖国在燕南, 倭北. 倭属燕. 朝鲜在列阳东, 海北山南. 列阳属燕. 列姑射在海河州中”. 这暗示此处的“龟山”应与东方的“朝鲜”不太远. 经文中还提到“朝鲜”在“海北山南”, 尽管没有提是哪座山的南面, 但从《天下图》看, 朝鲜的位置恰在“龟山”之南, 是千真万确的.
综合以上信息及相关讨论, 笔者倾向于得出如下结论.

이러한 모순된 의식은 《천하도》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왜 지도에는 곤륜산과 오악五岳 외에도, 동북 방위의 조선 위쪽에 “숙신국肅慎國”과 “귀산龜山”이라는 이름이 존재하는가?
“숙신국肅慎國”의 문헌적 출처는 두 곳이다.
첫째, 《산해경·대황북경大荒北經》: “대황大荒의 가운데, ‘불함不咸’이라 불리는 산이 있으며, 그곳에 숙신씨肅慎氏의 나라가 있다.”
둘째, 《산해경·해외서경海外西經》: “숙신국肅慎國은 백민白民의 북쪽에 있으며, ‘웅상雄常’이라 불리는 나무가 있는데, 먼저 들어가 황제를 공격할 때 그곳에서 그것을 취하였다.”
이 지도에서 “숙신국”이 위치한 곳은 중앙대륙, 즉 “해내海內”에 있어야 하므로, 위 두 문헌에서 말한 “대황大荒”이나 “해외서海外西”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숙신肅慎”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민족 이름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오제기五帝紀》에는 “식신씨息慎氏가 조회하러 와서 활과 화살을 조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전左傳》 노소공魯昭公 9년에는 주천자周天子가 영토의 사방 경계를 열거하며 말하기를, “숙신肅慎, 연燕, 박亳은 우리 북방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또 《국어國語·노어하魯語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숙신씨肅慎氏가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조공했는데, 그 길이는 자尺 하나에 치咫 하나였다. 선왕은 그 훌륭한 덕이 먼 곳까지 미쳤음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후세에 경계로 삼게 하고자 하여, 그 호시楛矢에 ‘숙신씨의 조공 화살’이라 명문을 새겼다.”[65]

[65] 傅朗云: 《〈肃慎国记〉丛考》, 《图书馆学研究》1983年第3期, 第124~127页.

이는 숙신인이 활과 화살을 잘 다루는 민족임을 보여준다.
《산해경》에서 말한 “숙신씨의 나라” 옆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는 《진서晉書·사이전四夷傳》의 다음 기록과 일치한다. “숙신씨는 다른 이름으로 읍루挹婁라고도 하며, 불함산 북쪽에 있다.”
오늘날 다수의 학자들은 “불함산”이 곧 지금의 장백산이라 보며, “숙신국”은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역사 민족으로, 여진女眞 및 오늘날의 만주족滿族의 전신이라고 본다.[66]

[66] 苗威: 《“长白山”丛考》, 《中国边境史地研究》2009年第4期, 第109~111页.

한편 “귀산龜山”이라는 명칭은 《산해경·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 비롯되었다. “해내 서북구의 동쪽 지역에, 사무지산蛇巫之山이 있는데, 그 위에 잔을 들고 동쪽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귀산龜山이라 부른다.”
이 “귀산”이라는 이름은 지리적 위치가 “해내북海內北” 혹은 “해내서북구의 동쪽[海內西北陬以東者]”에 있다는 점에서, 지도상의 실제 위치와 일치하긴 하지만, 이 외에 특별한 정보는 없으며, 또한 “귀산”이 “사무지산”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산해경·해내북경》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개국蓋國은 연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는 연에 속한다.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 해북海北 산남山南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 열고사列姑射는 해하주海河州 가운데 있다.”
이로 보건대, 이 “귀산”은 동방의 “조선”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본문에서는 “조선”이 “해북 산남”에 있다고 되어 있으나, 어느 산의 남쪽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도》를 보면, 조선의 위치는 분명히 “귀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위의 정보들과 관련 논의를 종합하면,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第一, 在《天下图》作者的心目中, 位于“朝鲜”和“肃慎国”之间的“龟山”, 是北方的一座重要的、与二者皆有渊源的山.
第二, 此处的“肃慎国”, 其信息不应该按照《大荒经》或《海外经》中的神话模式, 而应该按照《左传》《国语》和《晋书》中的历史模式来理解; 它的实际位置就在它该出现的地方. 既然肃慎旁边的山叫“不咸”, 那么“不咸”与“龟山”就应该是同一座山长白山.
第三, 中国部分一共出现了七座山, 其中的五座即五岳[内五岳], 如果第六座山真如我们所论证的是长白山, 那么, 第七座山也绝不可能是一座平凡的山. 那么, 为什么出现在南方的第七座山是“天台山”呢?
第四, 如果七座山的出现不是偶然的, 那么它们的排列也不会是偶然的. 按照《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 从昆仑向中国出发的山脉分成北、中、南三大干龙, 若把《天下图》中的七座山按同样的方式连接一下, 我们得到的其实是一幅简化的《中国三大干龙总览之图》其中连接恒山和龟山[长白山]的是北龙; 连接华山、嵩山和泰山的是中龙; 连接衡山和“天台山”的就是南龙. [67]
第五, 再把它与前图的细节做一比对, 即可恍然大悟: 正如“龟山”对应着“朝鲜”和“女真”之上、鸭绿江之侧的那座无名之山[参见图38, 其实质即“长白山”], “天台山”对应着的其实是靠近南龙尽头的那座“天目山”因为籍籍无名的“天目山”对于朝鲜观众的意义, 显然不如已在朝鲜本土开宗立派的佛教“天台宗”, 也就成为它被后者所在之山置换的可能性. 联系到整幅《天下图》, 那么, 我们可以说, 至少它的意蕴之一, 与朝鲜以自己的方式重新阐释北龙的意图有关.

첫째, 《천하도》 제작자의 인식 속에서, “조선”과 “숙신국肅慎國” 사이에 위치한 “귀산龜山”은 북방에 존재하는 하나의 중요한 산으로서, 양자 모두와 연원을 공유한 산이었다.

둘째, 이곳에 표기된 “숙신국肅慎國”은 그 정보를 《대황경大荒經》이나 《해외경海外經》에 나오는 신화적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좌전左傳》, 《국어國語》, 《진서晉書》에 기재된 역사적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 실질적 위치는 바로 지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곳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숙신肅慎” 곁의 산이 “불함不咸”이라고 명명되어 있다면, “불함”과 “귀산龜山”은 실질적으로 동일한 산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곧 장백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셋째, 중국 지역에 나타난 산은 총 7개이며, 이 가운데 5개는 오악五岳[내오악內五岳]이다. 만일 여섯 번째 산이 우리가 앞서 논증한 대로 장백산이라면, 일곱 번째 산 또한 평범한 산일 리 없다. 그렇다면 왜 남방에 위치한 일곱 번째 산이 바로 “천태산天台山”인 것인가?

넷째, 만일 이 7개의 산의 등장이 우연이 아니라면, 그 배열 또한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干龍總覽之圖》에 따르면, 곤륜에서 중국으로 뻗어나간 산맥은 북·중·남의 3대 간룡干龍으로 나뉘며, 만일 《천하도》에 나타난 7개 산을 동일한 방식으로 연결한다면, 우리는 실상 하나의 축약된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를 얻게 된다. 즉, 항산恒山과 귀산龜山[=장백산]을 연결하는 것은 ‘북룡北龍’, 화산華山·숭산嵩山·태산泰山을 연결하는 것은 ‘중룡中龍’, 형산衡山과 “천태산天台山”을 연결하는 것은 곧 ‘남룡南龍’이다[67].

[67] 李朝晚期文人李圭景[主要活动于1835~1849] 所著《五洲衍文长笺散稿》中《白头山辩证说》即云: “天下有三大干龙, 皆始于昆仑, 分派三条, 以入中国: 北条出河海, 流为冀、燕之分, 余气为白头山, 自白头散为朝鲜诸山. 溯其在古之名, 则《山海经》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 有肃慎国.” 见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9世纪写本.
[67] 조선 말기 문인 이규경李圭景[주요 활동 시기: 1835~1849]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백두산변증설白頭山辯證說〉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천하에는 세 갈래의 큰 줄기의 용맥干龍이 있는데, 모두 곤륜에서 비롯되어 세 갈래로 나뉘어 중국으로 들어온다. 북쪽 갈래는 하해河海에서 나와 기冀, 연燕 지역으로 흘러들고, 남은 기운이 백두산을 이루며, 백두산에서 갈라져 조선의 여러 산으로 퍼진다. 그 고대 명칭을 거슬러 올라가면, 《산해경》 대황大荒 가운데에 불함不咸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고, 숙신국肅慎國이 있다.” 이 내용은 현재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19세기 필사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이것을 앞서 제시된 도해의 세부와 비교해 보면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즉, “귀산龜山”은 “조선”과 “여진女眞”의 북쪽, 압록강鴨綠江 인근에 있는 이름 없는 산과 대응하는데[그림38 참조], 그 실질은 곧 장백산이다. 마찬가지로 “천태산天台山”이 대응하는 것은 ‘남룡’의 끝에 위치한 “천목산天目山”이라는 무명지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명성 없던 “천목산”은 조선인들에게 의미가 크지 않지만, 이미 조선 본토에서 종파를 개창한 불교 “천태종天台宗”은 매우 상징적인 산 이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가 전자의 자리를 대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을 《천하도》 전체에 연관시켜 보면, 적어도 이 지도에 담긴 의미 가운데 하나는, 조선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북룡을 재해석하고자 한 의도를 표현한 것과 깊이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有了以上风水学说的讨论和铺垫, 我们最后再回头来处理本文和本节开头都曾经讨论的那件八卦形《天下图》: 上面的墨书题款究竟隐藏着什么奥秘? 为什么风水中的“龙亥”[龙脉]和八卦的位置“乾亥”, 都重叠在西北“昆仑”之位上? 为什么所求的人才与运势, 在“丁”尤其在“艮”[即“朝鲜”]的方位上? 为什么可能破坏运势的位置, 在“巳”和“丙”位[基本上都指“安南”]?
我们无法确定, 这次明显结合《天下图》而测的风水运程究竟发生在什么时候, 也无法确知所测的程序和事项究竟为何, 但我们确实拥有几个信息如果我们的推测不错即这个故事可能涉及四个主角: 八卦形《天下图》的中心位置“嵩山”这个位置显然指“中国”[实际上是“清朝”]; “艮”位所指的“朝鲜”[可能也包括“龟山”, 即长白山]; “巳”和“丙”位所在的“安南”; 以及“龙亥”“乾亥”所在的“昆仑”.
以下简略的分析仅仅是出自本文作者的推断但故事的情节、主角和背景完全是真实的.
这四个主角同时在场, 而且符合上述位置与评价的机缘, 极有可能是在1790年的承德避暑山庄. 那一年乾隆皇帝八十大寿, 也是他登基以来统治天下的第五十五个年头; 那时他的威望和权力都达到了极致, “统御中外, 万国输诚, 是以荒服炎徼, 莫不倾心向化, 效悃来庭”, 文治武功都超迈前代. 庆典从承德避暑山庄开始, 中经圆明园, 最后在北京的紫禁城落幕, 长达数十天. 参加庆典的除了清朝的满汉文武百官、蒙古王公, 还有安南、朝鲜、琉球、南掌、缅甸, 以及四川与甘肃土司、台湾生番、哈萨克等使团, 万方辐辏, 盛况空前. 在盛典的过程中, 曾经发生了这么一件事:
这一年旧历七月十六日, 朝鲜人徐浩修[1736~1799]作为副使, 随朝鲜使团渡过大凌河, 经朝阳、建昌、杨树沟、平泉、凤凰岭、红石岭, 风尘仆仆地赶到承德, 祝贺乾隆皇帝八十寿辰. 在避暑山庄, 他们与同样来贺寿的安南国使团不期而遇. 这次, 安南国使团由新国王阮光平亲自率领, 不仅规格高而且人数多, 受到乾隆皇帝特别隆重和热情的欢迎. 不过, 在朝鲜使者眼中, 这次的安南国使团有一些异样, 因为通常来朝觐的安南使者, 服饰与清朝不同, 却与朝鲜大体相同, “束发垂后, 戴乌纱帽, 被阔袖红袍, 拖饰金玳瑁带, 穿黑皮靴”. 但稍后徐浩修却发现, 这一次来的安南君臣居然在一个最为隆重的场合, 改穿了满族服装. 一直坚持大明衣冠就是文化正统的朝鲜士人很诧异, 便找了机会故意问道: “贵国冠服本与满洲同乎?”回答说: “皇上嘉我寡君亲朝, 特赐车服, 且及于陪臣等然. 又奉上谕, 在京参朝祭用本服, 归国返本服……”[68]
朝鲜、安南、琉球等国本来都是以明朝为中心的朝贡体制的成员, 长期以来一直奉明朝为正朔. 1636年朝鲜被迫与清朝签订城下之盟, 同意“去明国之年号, 绝明国之交往”, 改奉清朝之正朔; 但实际上并不真正实行. 明清易代之后, 尽管朝鲜官方文书使用清朝正朔, 但私下始终使用崇祯年号. 英祖在大报坛中建成三皇并祀之后更是如此, 自觉已成为明朝香火和文化的继承者; 而明代的冠冕衣裳, 便成为这种文化认同和文化优越感的双重标志. 安南国王阮光平则因为新近获得权力, 渴望获得清朝的册封和肯定, 所以主动提出要改换清朝衣冠, 以博取乾隆的欢心. 这就是朝鲜使节在看到安南国王改服易色之后, 大为吃惊的原因; 但是另一方面, 清朝的强大和文化乃至科技的发达, 又迫使朝鲜不得不采取现实主义的态度, 以燕行使的身份每年两次驱策于中朝两地, 朝鲜早已习惯和适应了新的朝贡体系, 并从这一体制中获得好处和利益. 这种极为矛盾的心理, 长期以来也一直让朝鲜处于某种矛盾的状态《天下图》上一方面镌刻康熙年号, 另一方面又保留明代两京十三省的区划即是如此.
八卦形《天下图》上墨书文字透露出来的四方格局, 实际上正是朝鲜的真正写照. 一方面, “昆仑”代表着朝鲜尊周思明的文化理想, 是传统中华文化价值的核心; 另一方面, “中国”代表着现实中作为武力、威权和利益中心的“清朝”. 朝鲜自己的立场, 实际上也由地图上“朝鲜”和“安南”这两个位置[“丁艮得丙破”]所代表. 是像往常一样实行不切实际的文化理想主义, 还是遵奉趋炎附势的现实主义和事大主义? 尤其是, 八卦显示, 对获得人才或运程至关重要的“艮”位, 正好与朝鲜背后的“龟山”, 以及所隐藏的“长白山”风水中心论重叠在一起, 更是惹人深思, 让人难以取舍, 欲罢不能.

앞서 살펴본 풍수 이론에 대한 논의와 기초 위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가, 본문과 이 절의 서두에서 다뤘던 팔괘형 《천하도》의 문제로 되짚어 보자. 그 위에 쓰인 묵서墨書 제관題款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가? 왜 풍수에서 말하는 “용해龍亥”[용맥龍脈]과 팔괘의 방위인 “건해乾亥”가 모두 서북 방향, 곧 “곤륜”의 위치와 겹치는가? 왜 인재와 운세가 모이는 위치는 “정丁”, 특히 “간艮”[즉 “조선”]의 방위로 지시되는가? 왜 운세를 해칠 수 있는 위험한 방위는 “사巳”와 “병丙”[기본적으로 “안남”을 가리킴]에 자리하는가?
우리는 이 팔괘형 《천하도》를 기반으로 한 풍수 운세의 측정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이뤄졌는지를 단정할 수 없고, 측정의 구체적인 절차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이 이야기는 아마도 네 명의 주인공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네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팔괘형 《천하도》의 중심에 위치한 “숭산嵩山”, 이 위치는 명백히 “중국”, 실제로는 “청조清朝”를 상징한다;
둘째, “간艮” 방위에 자리한 “조선”[그리고, 그 뒤에 있는 “귀산龜山”, 즉 “장백산”도 포함];
셋째, “사巳”와 “병丙” 방위에 해당하는 “안남”;
넷째, “용해龍亥”와 “건해乾亥”의 위치인 “곤륜”.

이후에 제시되는 간단한 분석은 전적으로 본문 필자의 추정에 기반한 것이지만, 이야기의 등장인물, 배경, 정세는 모두 역사적으로 실재한 것이다.
이 네 인물이 모두 등장하고, 위에서 언급한 공간적 배치 및 평가가 성립하는 상황이 실제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간과 장소는 바로 1790년, 승덕承德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였다. 이 해는 건륭제乾隆帝의 팔순을 맞이하는 해였고, 그가 즉위한 이후로 천하를 다스린 지 55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건륭제는 권위와 권력이 모두 절정에 달해 있었고, “중화의 안팎을 다스리고, 모든 나라가 충성을 바치니, 변방의 오랑캐들까지도 감복하여 교화에 귀의하고, 충심을 다해 조회에 나아왔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문무 양면에서 전대에 비할 바 없이 출중한 성취를 이뤘다.
이 축전은 승덕의 피서산장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원명원圓明園을 거쳐, 마지막으로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에서 막을 내렸으며, 전체 기간은 수십 일에 걸쳐 이어졌다. 이 성대한 경축 행사에는 청조의 만·한 문무 백관과 몽골의 왕공뿐 아니라, 안남, 조선, 류큐琉球, 남장南掌, 미얀마[緬甸], 사천四川과 감숙甘肅의 토사土司, 대만臺灣의 생번生番, 카자흐족[哈薩克] 등의 사절단도 참가하여, 천하의 여러 방면에서 경축 사절이 운집하였고, 그 성대함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 대규모 행사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해 음력 7월 16일, 조선의 서호수徐浩修[1736–1799]는 부사副使의 신분으로 조선 사절단을 따라 대릉하大凌河를 건너고, 조양朝陽, 건창建昌, 양수구楊樹溝, 평천平泉, 봉황령鳳凰嶺, 홍석령紅石嶺을 경유하며, 먼 길을 달려 승덕 피서산장에 도착하여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했다. 피서산장에서 그들은 마침 그곳에 도착해 있던 안남국 사절단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번 안남 사절단은 새로 즉위한 국왕 완광평阮光平이 직접 이끌고 왔으며, 그 격식은 매우 높았고 인원도 많았다. 건륭제는 이 사절단을 특히 성대하고 열렬히 환대했다.
그러나 조선의 시선에서 보면, 이번 안남 사절단은 다소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평소 안남 사신들은 청조와는 다른 복식을 하고, 오히려 조선과 거의 유사한 복장을 입고 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머리를 묶어 뒤로 늘어뜨리고, 흑사모를 쓰며, 넓은 소매의 붉은 포袍를 입고, 금장과 대모玳瑁로 꾸민 띠를 두르고, 흑피 장화를 신는다”고 묘사되곤 했다.
그런데 서호수는 이내 알게 되었다. 이번에 온 안남 왕과 신하들은 가장 성대한 행사에서, 놀랍게도 만주족의 복식으로 갈아입은 것이었다. 늘 대명大明의 관복을 문화 정통의 상징으로 여겨왔던 조선의 사대부 입장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기회를 봐서 물었다. “귀국의 관복은 본래 만주와 같은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이랬다. “황상께서 우리 과군의 친조親朝를 칭찬하시며 특별히 수레와 관복을 하사하셨습니다. 또한 황상의 분부에 따라, 북경에 머무는 동안 조회 및 제사에 참가할 때는 하사받은 복장을 착용하고, 귀국하면 본래 복장을 복구하라 하셨습니다……”[68]

[68] 葛兆光: 《想象异域: 读李朝朝鲜汉文燕行文献札记》, 中华书局, 2014, 第229页.

조선·안남·류큐 등의 국가는 본래 명조明朝를 중심으로 한 조공 체제의 구성원이었으며, 오랫동안 명나라를 정통으로 받들었다.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 치욕적인 화의를 맺으며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와의 왕래를 끊을 것”에 동의하며 명백히 청나라 정통을 따르겠다고 서약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전면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명·청 교체 이후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 연호를 따랐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숭정崇禎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특히 영조가 대보단大報壇에 삼황三皇을 병사並祀한 이후에는 조선 스스로가 명나라의 향화와 문화의 계승자라는 인식을 더욱 공고히 했다. 명대의 관복은 이러한 문화 정체성과 문화적 우월감의 이중 상징이 되었다.
반면, 안남 국왕 완광평은 정권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청조로부터 책봉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컸고, 이에 따라 스스로 청나라의 복식으로 갈아입기를 청함으로써 건륭제의 호감을 사려 했다. 이것이 조선 사절들이 안남 국왕의 복장 전환을 보고 크게 놀란 이유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청조의 국력이 강대하고, 문화와 기술 역시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년 두 차례 연행사의 신분으로 중·조 양국을 오가는 외교 관계 속에서, 조선은 이미 새로운 조공 체제에 익숙해졌고, 그 속에서 이익과 실리를 얻어 왔다. 이러한 깊은 내면의 모순된 심리야말로, 조선을 끊임없이 ‘이중 태도’ 속에 놓이게 한 근본 요인이었다. 《천하도》에서 한쪽에는 강희의 연호가 새겨져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는 명대의 양경兩京과 십삼성十三省 구획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팔괘형 《천하도》의 묵서 문자가 보여주는 사방 구도는, 실로 조선의 복합적 현실을 상징한다. 한편으로, “곤륜”은 조선이 존주숭명尊周崇明했던 문화적 이상이며, 전통 중화문화 가치의 중심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현실에서 무력과 권위, 이익의 중심지였던 “청조清朝”를 가리킨다. 조선의 자리는, 결국 지도상 “조선”과 “안남”이라는 두 지점[즉 “정丁”·“간艮”이 길得, “병丙”·“사巳”가 흉破]이 상징하는 좌표로 갈라진다.
즉, 과거처럼 비현실적인 문화 이상주의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시세에 따라 현실주의 혹은 사대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특히 팔괘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인재 확보나 운세 형성에 결정적인 “간艮” 방위는, 바로 조선의 배후에 놓인 “귀산龜山”과, 그 속에 숨겨진 “장백산” 중심의 풍수 이론과 정확히 겹쳐 있다. 이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결단하기 어렵고 떨치기 힘든 딜레마를 상징한다.

尾声: 诗人的眼光

让我们再次回到本文开头引用的三例李朝文人的文献.
第一例文献提到, 生活于1577~1641年间的金坽“尝自作《天下图》”并因此而使自己“胸襟觉恢廓”. 既然前文已把《天下图》出现的绝对年代, 确定在1614年[即《三才图会》引入朝鲜]之后, 那么我们可以把《天下图》开阔“胸襟”的作用, 看作是早期《天下图》的功能之一. 尤其是, 当我们将这种“胸襟”与当时朝鲜文人实际境遇之“隔世”相结合的时候, 这种功能更加明显.
第二例文献中李明汉的诗极为形象地强化了他自己所处的“弹丸国”与他所知道的宇宙“天衢”和“八区”之恢宏[“既未能鞭雷御风历天衢, 又未能鼓枻乘桴环八区”]之间的巨大反差和矛盾, 以至于他所采取的方式, 只能借助于强烈的激情[“以此发愤欲狂呼”], 对于这个宇宙进行想象性的占有[“赤脚蹴踏天下图”]. 鉴于他自己去世之际[1645]明清易代[1644]才刚刚发生, 故作为著名的“反清派”大臣, 此处他所谓的“上帝”[“早晚持节觐上帝”], 只能指朝鲜的宗主国明朝的崇祯皇帝. 此时, 朝鲜文人尚与中国共享同样的文化意识形态, 故诗人此时的眼光和情怀尽管仍属于典型的朝鲜式, 但其中并无明确的政治意识; 这里的“天下”, 所对应的依然是金坽所谓的“胸襟”, 最多是后者的一个放大版.
到了第三例文献中的诗人李沃的时代, 他成长和生活于明清易代之后的新世界, 历经孝宗[1649~1659年在位]、显宗[1659~1674年在位]和肃宗[1674~1720年在位]三朝, 恰好经历了朝鲜王朝在对清问题上重大的政策转向, 即从孝宗意欲策划反清复明的实质性“北伐”, 转向肃宗于明亡一甲子之后[1704]建成大报坛, 强化朝鲜王朝与已亡之大明在精神性上的联系. 李沃的诗句首联从一开始即借“汉帝指舆图”[喻指《天下图》]重新挂在“吾王玉座舆”的情节, 强调了这一“精神”的转向. 这里的“天下”, 已不再局限于文人士大夫的抱负与“胸襟”, 而是与真正的“天下”帝王眼中的疆域或江山交织在一起. 从年代和诗句来看, 这里的“天下图”应与现存最早的八卦形《天下图》近似, 尽管不一定有八卦形的外框. 诗中还写道, 这幅《天下图》在天上有二十八宿分野、在地上有九州或十二国分布[颔联“镇望星罗天有野, 封疆绣错地分区”], 这样就更加为上述“精神”的转移, 增加了“天命”的必然性. 接下来的颈联极言“夷夏大防”的春秋大义, 把创立华夏文明的“神禹”, 与长城外的匈奴“服于”[即“单于”, 为王莽时的另称笔者按]对立起来, 从而为尾联的最后点题做了铺垫: “莫道腥尘中土污, 东周今日在箕都.” 这里的“东周”并非历史概念的“东周”, 而是诗人在想象中, 将作为周武王时代的“箕子”和大明旗号双重继承者的朝鲜, 与偏于“东国”一隅的朝鲜相融合的结果意为“中土”已然沦陷, 但文明的“天下”[“周”]并未沦丧, 它在, 而且就是现在东方的朝鲜.
正是在这层意义上, 借助于诗人的上述眼光, 我们来阐释《天下图》中的最后一个细节: 中央大陆昆仑山南部中国之外的地方有一座叫“三天子章山”的山[图39]. 中央大陆除昆仑外一共有八座山, 前文已经对其中位于中国的七座[五岳, 加“龟山”和“天台山”]做了充分的讨论, 视它们为从昆仑山发源的“三大干龙”的不同表现; 那么, 第八座山有没有类似的含义?

맺음말: 시인의 눈

이제 다시, 본문 서두에서 인용한 조선 문인 세 사람의 문헌으로 되돌아가 보자.

첫 번째 문헌에서는 1577년부터 1641년까지 생존했던 김령金坽이 “일찍이 스스로 《천하도》를 그린 적이 있다”고 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가슴이 확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앞서 이미 《천하도》의 절대 연대를 1614년[즉 《삼재도회》가 조선에 유입된 시점] 이후로 확정한 바 있으므로, 《천하도》가 사람의 ‘가슴’을 넓히는 기능을 가졌다는 사실은, 초기 《천하도》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슴의 확장’이라는 감각을, 그 시기 조선 문인의 실제 현실이 마치 다른 세상처럼 단절된 ‘격세’ 상태와 결합시켜 본다면, 그 기능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두 번째 문헌에서 이명한李明漢의 시는 자신이 살고 있는 ‘탄환국彈丸國’[작은 나라]과,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우주의 장대함[‘천구天衢’와 ‘팔구八區’] 사이의 극단적 대비와 모순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시 속에서 “나는 천구를 달리고 팔구를 두루 돌지도 못하였으며, 그 대신 격렬한 분노로 미칠 듯이 소리치며[‘이차발분욕광호以此發憤欲狂呼’], 맨발로 《천하도》를 밟아뛰며 이 우주를 상상적으로 점유하려 한다”고 노래했다. 그가 죽은 시점은 1645년으로, 명·청 교체[1644] 직후였고, 그는 조선의 대표적인 ‘반청파反清派’ 대신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가 시 속에서 말하는 “상제上帝”[“조속지절기상제早晚持節覲上帝”]는, 당시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명조의 숭정제崇禎帝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조선 문인은 중국과 동일한 문화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인의 시선과 감정은 여전히 전형적인 조선적 감각이었지만, 여기에는 아직 뚜렷한 정치적 의식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천하天下’란, 여전히 김령金坽이 말한 바와 같은 ‘가슴의 확장’, 혹은 그것의 확대판에 해당하였다.

세 번째 문헌의 시인 이옥李沃이 살던 시대에 이르면, 그는 명·청 교체 이후의 새로운 세계 속에서 성장하고 살았다. 그는 조선 효종孝宗[재위 1649–1659], 현종顯宗[1659–1674], 숙종肅宗[1674–1720]의 세 시기를 거쳤는데, 이 시기는 조선이 대청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한 시기이기도 하다. 곧 효종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실제로 꾀한 ‘북벌’의 시도에서, 숙종이 명조 멸망 60주기[1704]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 명나라와의 정신적 연결을 강화한 시기로 전환된 것이다.
이옥의 시에서, 수련首聯은 처음부터 “한나라 황제가 《천하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을 빌려와, 이를 다시 “우리 임금님의 옥좌 위 지도”와 결합시켰다. 이로써 그는 바로 이 ‘정신적 전환’을 시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이 시기의 “천하”는 더 이상 문사文士 개인의 포부와 “가슴의 확장”에 국한되지 않고, 진정한 ‘천하’, 곧 제왕의 눈으로 본 강역과 강산의 의미와 교차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대와 시구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에 묘사된 《천하도》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팔괘형 《천하도》와 매우 유사한 도상일 것이며, 비록 팔괘형 외곽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거의 그 계열에 속하는 지도였을 것이다.
이 시의 암련頷聯에서는, 하늘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별자리들이 점점이 박혀 있고, 땅에는 구주九州 혹은 십이국十二國의 경계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고 하였다[“진망성라천유야鎮望星羅天有野, 봉강수차지분구封疆繡錯地分區”]. 이는 위에서 말한 ‘정신적 전이’가 이제 ‘천명天命’의 필연성까지 갖추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뒤이어 나오는 경련頸聯은 “이이대방夷夏大防”의 전통적 대의를 강하게 천명한다. 곧, 중국 문명의 창시자인 신우神禹와, 장성長城 밖의 오랑캐 흉노의 선우單于를 대립시켜, 시의 마지막인 미련尾聯의 주제를 이끌어내는 장치로 삼는다. “모도성진중토오莫道腥塵中土污, 동주금일재기도東周今日在箕都”라는 이 결구에서, “동주東周”는 단순한 역사적 ‘동주’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 속에서 주 무왕周武王 시대의 기자箕子와, 명나라의 정신을 계승한 조선이 서로 겹쳐진 개념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적통을 이은 존재로서의 조선을,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에 치우쳐 있지만 여전히 문명의 중심을 유지하는 ‘동방 조선’을 상징한다. 즉, 중원은 이미 오랑캐에 더럽혀졌지만, 문명의 ‘천하’[즉 ‘주周’]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것은 지금 바로 조선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위 시인의 시선을 빌려 우리는 《천하도》 속 마지막 디테일 하나를 해석해보고자 한다. 중앙대륙의 곤륜산 남쪽, 중국 영역 밖의 위치에 “삼천자장산三天子章山”이라는 산이 존재한다[그림39]. 중앙대륙에는 곤륜 외에 총 여덟 개의 산이 있으며, 앞서 우리는 그 중 중국 영역에 위치한 일곱 개 산들[오악五岳과 “귀산龜山”, “천태산天台山”]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였고, 그것들을 곤륜산에서 갈라진 ‘삼대간룡三大干龍’의 다양한 표현으로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이 여덟 번째 산은, 이들과 유사한 상징을 품고 있는 것일까?

图39. 《天下总图》局部: 洋水、黑水、赤水、三天子章山
그림39. 《천하총도天下總圖》의 일부: 양수洋水, 흑수黑水, 적수赤水, 삼천자장산三天子章山

《山海经·海内南经》说“三天子鄣山在闽西海北. 一曰在海中”. 另外, 《海内东经》还有“三天子都”“天子鄣”的说法, 这些表述除了表示地名之外, 似乎没有任何实质含义[69], 只有其地望是在“海内”与《天下图》合. 至于《山海经》, 它对于“昆仑”的描述比比皆是, 遍及“海内”“海外”和“大荒”诸经, 但与《天下图》最接近的, 无疑是出于《海内西经》的那段. [70]其中的“昆仑”不但位于海内, 而且附近的“赤水”“河水”“洋水”和“黑水”诸河, 均与《天下图》合, 但《海内西经》中无一处提到“三天子鄣山”, 故从表面上看, “三天子鄣山”与“昆仑”之间不存在任何关系, 它们在《天下图》中的现状, 似乎纯属偶然.
正是李沃的诗篇让笔者意识到, 关于二者的联系, 也许存在着不同于《山海经》的文本来源. 如果“东周今日在箕都”是真的, 这岂不意味着, “吾王”同时拥有了“周王”的身份? 而“周王”中, 确实有一位[至少在文献中]曾经到达过“昆仑”, 那就是《穆天子传》中的“周穆王”. 约成书于战国年间的《穆天子传》, 是一部记载周穆王[西周的第五代天子]率领七萃之士, 驾八匹骏马从宗周[洛阳]出发西巡天下的故事, 最远与西王母会于瑶池. 有意思的是, 我们会发现, 原先以为仅仅来自《山海经》的描述, 实际上都是“穆天子”的行迹所至: 大致须先“宿昆仑之阿, 赤水之阳”, 然后经过“洋水”和“黑水”, 最后到达西王母之邦. [71]如果我们的推断不错[《天下图》的作者在此引用的其实是《穆天子传》中的情节], 那么, 位于“赤水”与“黑水”之间的“三天子鄣山”的意义就有了着落: 它即一座指示着“穆天子”行迹的山, 一座铭刻周穆王或者其他“天子们”丰功伟绩的纪念碑. 而从宗周到西王母之邦的旅途, 在《天下图》作者至少诗人李沃们的视野中, 就幻化为一次从东方的“箕都”到西方的“昆仑”的想象性神游.
到了朝鲜借助于八卦形《天下图》进行堪舆博运的时代, 也就是乾隆五十五年[1790], 投向《天下图》的眼光又增添了新的内容. 一个最大的变化是, 随着朝鲜参与了清朝对于长白山造“圣”运动以来, 清朝的长白山[地图上的“龟山”]愈益被解读为朝鲜的“白头山”. 与人们通常的想象非常不同, “长白山”和“白头山”尽管在物理上是一座山, 但在中国人和朝鲜人的观念和心理中, 它们曾经是截然不同的两座山. 例如在明代罗洪先《广舆图》[约1541]的《朔漠图》中, 便将靠近平壤, 作为松花江、混同江和寒龙江以及一条南流江之源头的山中大渊, 与更靠北的“长白山”做了区别[图40]. 这一点, 利玛窦的《坤舆万国全图》也没有不同, 他也同样将作为鸭绿江和一条东向入海的江[疑为图们江]的源头的一座大山[未标出名字], 与另一座居北的“长白山”做了区分[图41]. 明显将两座山分别画出并冠以两个不同名字的是朝鲜人金寿弘[1602~1681], 在他所绘的《天下古今大总便览图》[图42]中, “长白山”位于上方, 成为松花江、混同江的源头, 而另一座“白头山”则是“鸭绿江”和“豆满江”[图们江]的源头. 金寿弘的地图中还可以看到, 在两座山之间写有“古肃慎”“女真”字样, 说明上面的“长白山”与这两个历史民族更为相关. 把同一座山看成两座山, 在明代中国, 恐为该地当时实际控制于女真人之手, 故在地理信息上不甚精确所致; 至于朝鲜人, 应与前述朝鲜长期以来视该山为“胡地”之山的观念有关后者要在1766年, 随着英祖将此山拔高为“北岳”之后, 才会彻底改观. 将一座山一分为二, 反映了当事人心理上对此的疏远和不在乎.

《산해경·해내남경海內南經》에는 “삼천자장산三天子鄣山은 민閩의 서쪽, 바다 북쪽에 있다. 또는 말하길 바다 가운데 있다”고 했다. 또 《해내동경海內東經》에는 “삼천자도三天子都”와 “천자장天子鄣”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들은 지명 외에 아무런 실질적 의미도 담고 있지 않으며[69], 다만 위치상으로만 “해내海內”에 속한다는 점에서 《천하도》와 일치할 뿐이다.

[69] 《山海经》, 郭璞注, 毕沅校, 上海古籍出版社, 1989, 第90、98页. 清代毕沅注“三天子鄣山”为“今在新安歙县东”. 将一座可能是江南的山挪移到昆仑山下, 显示《天下图》作者可能有特殊的用意.
[69] 《산해경》, 곽박郭璞 주, 필원畢沅 교정,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1989년, 제90·98쪽. 청대 필원은 “삼천자장산三天子鄣山”을 “지금의 신안新安 삽현歙縣 동쪽”이라고 주석했다. 이는 남방 강남 지역에 있을 법한 산을 곤륜산 아래로 옮겨 배치한 것으로, 《천하도》 제작자가 여기에 특별한 의도를 담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산해경》은 “곤륜”에 대한 기술이 빈번하게 등장하며, 그 위치는 《해내海內》·《해외海外》·《대황大荒》의 여러 경문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천하도》와 가장 유사한 묘사는 단연 《해내서경海內西經》에 나타난 기술이다[70].

[70] 《山海经·海内西经》载: “海内昆仑之墟, 在西北, 帝之下都. 昆仑之墟, 方八百里, 高万仞. 上有木禾, 长五寻, 大五围. 面有九井, 以玉为槛. 面有九门, 门有开明兽守之, 百神之所在. 在八隅之岩, 赤水之际, 非仁羿莫能上冈之岩. 赤水出东南隅, 以行其东北. 西南流注南海厌火东. 河水出东北隅, 以行其北, 西南又入渤海, 又出海外, 即西而北, 入禹所导积石山. 洋水、黑水出西北隅, 以东, 东行, 又东北, 南入海, 羽民南. 弱水、青水出西南隅, 以东, 又北, 又西南, 过毕方鸟东.” 又《大荒西经》载: “西海之南, 流沙之滨, 赤水之后, 黑水之前, 有大山, 名曰昆仑之丘. 有神, 人面虎身, 有文有尾, 皆白, 处之. 其下有弱水之渊环之, 其外有炎火之山, 投物辄然. 有人戴胜, 虎齿, 有豹尾, 穴处, 名曰西王母. 此山万物尽有.” 《山海经》, 上海古籍出版社, 1989, 第93、112页.
[70] 《산해경·해내서경海內西經》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해내 곤륜의 허[昆侖之墟]는 서북에 있으며, 제帝의 하도下都이다. 곤륜의 허는 사방 800리이고, 높이는 만 인仞에 이른다. 위에는 목화木禾가 있어, 길이 다섯 길, 둘레 또한 다섯이다. 면에는 아홉 개의 우물井이 있으며, 옥으로 난간을 둘렀다. 면에는 아홉 개의 문이 있고, 문에는 개명수開明獸가 지킨다. 백신百神의 소재지이다. 팔방의 벼랑, 적수赤水의 경계에 있으며, 어진 예仁羿가 아니면 그 벼랑에 올라갈 수 없다. 적수는 동남쪽 모서리에서 흘러 나와 동북으로 흐른다. 서남으로 흘러 남해 염화厭火의 동쪽으로 들어간다. 하수河水는 동북 모서리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고, 서남으로 돌아 발해渤海로 들어가며, 다시 해외로 나갔다가 곧장 서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들어가서 우禹가 인도한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간다. 양수洋水·흑수黑水는 서북 모서리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간 뒤 동북으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우민羽民은 그 남쪽에 있다. 약수弱水·청수青水는 서남 모서리에서 나와 동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다시 서남으로 흘러 비방조畢方鳥의 동쪽을 지난다.” 또한 《대황서경大荒西經》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해의 남쪽, 유사流沙의 가장자리, 적수赤水의 뒤, 흑수黑水의 앞에 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곤륜의 구[昆侖之丘]라 한다. 이곳에는 신이 있으니, 사람 얼굴에 호랑이 몸이며, 무늬가 있고 꼬리가 있으며, 모두 희고, 그곳에 거처한다. 그 아래에는 약수弱水의 깊은 못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바깥에는 염화炎火의 산이 있어, 물건을 던지면 곧 불탄다. 어떤 이는 대승戴勝을 머리에 이고, 호랑이 이빨을 지니며, 표범 꼬리를 갖고 굴 속에 거처하는데, 이름하여 서왕모西王母라 한다. 이 산에는 만물이 모두 존재한다.” 출전: 《산해경》,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1989년, 제93·112쪽.

이 경문에서 “곤륜”은 해내에 위치할 뿐 아니라, 주변에 “적수赤水” “하수河水” “양수洋水” “흑수黑水” 등의 강이 있어 《천하도》에 나타난 지도적 배치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해내서경》 어디에도 “삼천자장산三天子鄣山”이라는 산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만 보면 “삼천자장산”과 “곤륜”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며, 그것들이 《천하도》에서 나란히 배치된 것은 순전히 우연인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 이옥李沃의 시구가 결정적인 통찰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면, 그 연원은 《산해경》이 아닌 다른 문헌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동주 오늘날 기도에 있다[東周今日在箕都]”라는 표현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곧 “우리 임금[吾王]”이 “주왕周王”의 자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역사적으로 실제로 “곤륜”에 도달한 적이 있다고 전해지는 “주왕周王” 가운데 한 명이 존재한다. 그 인물은 바로 《목천자전穆天子傳》에 등장하는 주 목왕周穆王이다.
전국시대에 성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천자전》은 서주西周의 제5대 천자인 목왕穆王이 칠췌지사七萃之士를 이끌고 팔준마八駿馬를 몰아 종주宗周[낙양]를 출발하여 서방 세계를 순행하고, 끝내 요지瑤池에서 서왕모西王母와 조우하는 여정을 기록한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산해경》에만 등장한다고 생각했던 주요 지명들이 사실 모두 이 《목천자전》에 등장하는 목왕의 순행 경로와 정확히 겹친다는 점이다. 대략 그는 먼저 “곤륜 언덕[昆崙之阿]”과 “적수의 남쪽[赤水之陽]”에 숙영한 다음, “양수洋水”와 “흑수黑水”를 거쳐 마지막으로 서왕모의 나라에 도달한다[71].

[71] 《穆天子传》, 载张华等撰: 《博物志[外七种]》, 王根林等校点, 上海古籍出版社, 2012, 第52~55页. 本文原刊于《美术大观》2020年第12期, 经作者授权转载.

만약 이 가설이 옳다면, 즉 《천하도》의 저자가 여기서 원용한 것이 실제로는 《목천자전》 속의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적수”와 “흑수” 사이에 위치한 “삼천자장산三天子鄣山”은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그것은 바로 “목천자”의 자취를 가리키는 표식이며, 주목왕周穆王 혹은 여타 ‘천자天子’들의 공적을 기념한 일종의 기념비적 산이라는 것이다.
종주에서 서왕모의 나라까지 이르는 여정은, 《천하도》의 저자혹은 최소한 이옥 같은 시인의 시선 속에서는동방의 “기도箕都”로부터 서방의 “곤륜”으로 나아가는 상상적 정신여행, 즉 상징적 신유神遊로 환치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상력은, 조선이 팔괘형 《천하도》를 통해 감여堪輿와 복운博運을 시도하던 시기로 이행하면서, 즉 건륭乾隆 55년[1790] 무렵에, 다시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조선이 청조의 장백산을 성산聖山으로 승격시키는 제의에 동참한 이후, 점점 장백산이 조선인의 “백두산”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보통의 인식과는 달리, “장백산”과 “백두산”은 비록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산이지만, 중국인과 조선인의 심리와 개념 속에서는 오랫동안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산으로 존재해 왔다.
예컨대 명대 나홍선羅洪先의 《광여도廣輿圖》[약 1541년 제작]에 실린 《삭막도朔漠圖》에서는 평양에 가까운 위치에, 송화강松花江·혼동강混同江·한랑강寒狼江, 그리고 남쪽으로 흐르는 어떤 강의 근원으로 삼은 산이 하나 그려져 있고, 이 산은 북쪽에 있는 “장백산”과는 구분되어 있다[그림40].

图40. 朔漠图[长白山与白头山局部] 罗洪先 约 1541年 出自《广舆图》
그림40. 《삭막도朔漠圖》[장백산과 백두산 국부] 나홍선羅洪先, 약 1541년, 《광여도廣輿圖》 출처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 또한 동일하게 구분을 취한다. 이 지도에서도 압록강鴨綠江과 동쪽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어떤 강[아마도 도문강으로 추정]의 발원지를 이룬 산이 따로 그려져 있으며, 그 위쪽에는 또 하나의 “장백산”이 존재한다[그림41].

图41. 《坤舆万国全图》局部: 长白山与白头山
그림41. 《곤여만국전도》 국부: 장백산과 백두산

이 두 산을 명확히 분리하여 그리고, 각각 다른 명칭을 부여한 지도는 조선인 김수홍金壽弘[1602–1681]의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의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總便覽圖》[그림42]를 보면, “장백산”은 위쪽에 자리하면서 송화강과 혼동강의 발원지로 설정되고, 또 하나의 “백두산”은 압록강과 두만강豆滿江의 발원지로 명확히 표기되어 있다.

图42. 天下古今大总便览图[摹本局部: 长白山与白头山] 彩绘本110c m×77. 5c m 金 寿 弘 1666年 李灿藏品
그림42.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總便覽圖》[모사본 국부: 장백산과 백두산], 채색본 110×77.5cm, 김수홍金壽弘, 1666년, 이찬李燦 소장품

김수홍의 지도에서는 두 산 사이에 “고숙신古肅慎”과 “여진女真”이라는 글자도 함께 적혀 있는데, 이는 위쪽의 “장백산”이 이 두 역사 민족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의 산을 두 개로 인식하는 이러한 시각은, 명대 중국에서 해당 지역이 실제로 여진인의 실질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지리 정보의 정확성이 떨어졌던 데에 기인했을 수 있다. 반면 조선의 경우, 오랫동안 이 산을 “호지胡地”의 산으로 간주해 왔다는 인식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각은 1766년, 영조가 이 산을 ‘북악北岳’으로 격상시키면서 비로소 크게 전환되었다.
한 산을 둘로 나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해당 산을 멀리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태도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但1790年的情况已完全不同. 在《天下图》使用者眼里, 此处“龟山”的含义应该早已不是原先意义上的“龟山”, 也不仅仅是清朝的“长白山”, 而是朝鲜人自己的“圣山”龙脉所在的“白头山”. 例如同时代一套出自同一画家之手的《舆地图册》, 其《中国地图》[图43]中, 朝鲜上方画出了唯一的一座“白头山”; 没有人会怀疑, 这座“白头山”与同图册《天下图》中的“龟山”[图44]是同一座山.

그러나 1790년 당시의 상황은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천하도》의 사용자의 눈에 비친 이곳의 “귀산龜山”은, 더 이상 원래 의미의 “귀산”도 아니며, 단순히 청조清朝의 “장백산”만도 아닌, 조선인이 인식한 자신들의 “성산聖山”, 즉 용맥이 깃든 “백두산”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동시대 동일한 화가의 손에서 제작된 《여지도책輿地圖冊》 가운데, 그 속의 《중국지도中國地圖》[그림43]에는 조선의 북쪽 위쪽에 단 하나의 “백두산”이 그려져 있다. 그 누구도 이 “백두산”이 같은 도책 속의 《천하도》[그림44]에 등장하는 “귀산龜山”과 동일한 산이라는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图43. 中国地图[朝鲜国与白头山局部]18 世纪 韩国国立中央博物馆藏
그림43. 《중국지도中國地圖》[조선국 및 백두산 국부], 18세기,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图44. 天下图[朝鲜国与龟山局部]18 世纪 韩国国立中央博物馆藏
그림44. 《천하도》[조선국 및 귀산 국부], 18세기,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注释:

[1] Maurice Courant, Bibliographie corenne . Tableau littraire de la Core. Contenant la nomenclature des ouvrages publis dans ce pays jusqu’en 1890 ainsi que la description et l’analyse dtailles des principaux d’entre ces ouvrages, Tome II [Paris: E. Leroux, 1895, No. 2187].

[2] 关于“宗教寰宇图”和“T-O图”的相关情况, 参见李军: 《图形作为知识—十幅世界地图的跨文化旅行》[上], 《美术研究》2018年第2期, 第74~76页.

[3] Yi Ik-Seup, “A Map of the World,” in The Korean Repository, vol. I [Seoul: The Trilingual Press, 1892], p.336.

[4]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in Imago Mundi, Vol. 4[1947], p.3.

[5]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p.3, p.8.

[6] 孙卫国: 《大明旗号与小中华意识—朝鲜王朝尊周思明问题研究》, 商务印书馆, 2007, 第226~255页.

[7] 《睿宗实录》卷6, 睿宗元年6月21日癸酉, 第15页.

[8]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808年刊本.

[9]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772年刊本.

[10]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孝宗·显宗年间刊本.

[11] 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721年刊本.

[12] 此处主要参考了韩国学研究院博士候选人李梅女士的意见. 本文在《天下图》图像资料、古代朝鲜文献方面得到了李梅女士的很多帮助, 在此谨致谢忱.

[13] 参见宋《历代地理指掌图》, 赵茂德序, 明刻本.

[14]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载《黄时鉴文集III: 东海西海—东西文化交流史》, 中西书局, 2011, 第247~248页.

[15]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The History of Cartography, Vol. II, Book 2: Cartography in the East and Southeast Asian Societie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p.258.

[16] 徐宁: 《国图所藏李朝朝鲜后期的圆形地图研究》, 《中国历史地理论丛》2002年第4期, 第147页.

[17] 虽然奎章阁彩绘图用红色突出表现“中国”和“天地心”似乎是一个特例, 但这并没有改变几乎所有《天下图》都具有两个中心的性质, 因为这种性质是由文字标识本身来表述的[“中国”和“天地心”都是“中心”之意].

[18] 徐维志、徐维事: 《精校地理人子须知》, 人民教育出版社, 2006, 第30页.

[19] 杜光庭: 《洞天福地岳渎名山记全译》, 王纯五译注, 贵州人民出版社, 1999, 第7页.

[20]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p.10.

[21] 转引自朱鉴秋、陈佳荣、钱江、谭广濂: 《中外交通古地图集》, 中西书局, 2017, 第6页.

[22]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p.12.

[23] 朱鉴秋、陈佳荣、钱江、谭广濂: 《中外交通古地图集》, 中西书局, 2017, 第5页.

[24] 刘宗迪: 《〈山海经〉与古代朝鲜的世界观》, 《中原文化研究》2016年第6期, 第16~17页.

[25] 李军: 《可视的艺术史—从教堂到博物馆》, 北京大学出版社, 2016, 第22、334页; 《从图像的重影看跨文化艺术史》, 《艺术设计研究》2018年第2期, 第93~104页; 《图形作为知识—十幅世界地图的跨文化旅行》[上], 《美术研究》2018年第2期, 第68页.

[26]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0; 영남대학교 박물관: 《韩国의옛 地图: 영남대박물관 소장》, 영남대학교박물관, 1998[韩国岭南大学博物馆: 《韩国的古地图: 岭南大学博物馆收藏》, 韩国岭南大学博物馆, 1998].

[27] 司马迁: 《史记》第七册, 中华书局, 1959, 第2344页.

[28] 徐宁: 《国图所藏李朝朝鲜后期的圆形地图研究》, 第149页.

[29] Lim Jongtae, “Matteo Ricci’s World Maps in Late Joseon Dynasty,” The Korean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33, No. 2 [2011]: 294.

[30] Hirosi Nakamura, “Old Chinese Maps Preserved by the Koreans,” , pp.13~18.

[31] 章潢: 《图书编》卷二十九, 转引自朱鉴秋、陈佳荣、钱江、谭广濂: 《中外交通古地图集》, 第137页.

[32]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第253页.

[33] 李约瑟: 《中国科学技术史》[第五卷《地学》第一分册], 科学出版社, 1976, 第195页.

[34] 李军: 《图形作为知识》[上], 第68页.

[35] 同上文, 第73页.

[36]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6.

[37] 徐宁: 《国图所藏李朝朝鲜后期的圆形地图研究》, 第148页.

[38]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第248页.

[39] 此处要看具体情况: 确实有部分《天下图》把洋水画成支流流入黑水[黑色标注]; 但也有把洋水和黑水[黑色]都画成支流, 然后汇成同一条河流[不再是黑色], 此类情况不一而足.

[40]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6.

[41] “西域三十六国”是一个统称, 并非实数. 《汉书·西域传》云: “西域以孝武时始通, 本三十六国, 其后稍分至五十余, 皆在匈奴之西, 乌孙之南.” 班固: 《汉书》第十二册, 颜师古注, 中华书局, 1962, 第3871页.

[42] 江韵: 《“翰海”、“瀚海“词义考辨》, 《文教资料》2013年第35期, 第175页.

[43] Gari Ledyard, “Cartography in Korea,” p.266.

[44] 同上.

[45] 王绵厚: 《论利玛窦坤舆万国全图和两仪玄览图赏的序跋题识》, 载曹婉如、郑锡煌等编《中国古代地图集·明代》, 文物出版社, 1994, 第111页.

[46] 李军: 《图形作为知识—十幅世界地图的跨文化旅行》[下], 《美术研究》2018年第3期, 第30页.

[47] 洪业: 《考利玛窦的世界地图》, 载刘梦溪主编《中国现代学术经典·洪业 杨联升集》, 河北教育出版社, 1996, 第435页.

[48] 黄时鉴: 《利玛窦世界地图探源鳞爪》, 载《黄时鉴文集III: 东海西海—东西文化交流史》, 中西书局, 2011, 第233页.

[49] 韩国学者林宗台指出, 已有很多学者把圆形的《天下图》视作“朝鲜知识分子对于入侵的利玛窦地图的回应”. 如日本学者海野一隆认为, 该地图的制作者企图援引古老的道教资源来反抗利玛窦地图带来的世界观冲击; 另一位韩国学者裴佑晟则把地图的圆形甚至大陆的形状, 看成是受耶稣会地图影响的结果. 而在林宗台看来, 圆形地图应被视为“在耶稣会地图灵感的刺激下, 而对散见于各处的东亚地理传统加以凝聚的一个过程”. 参见Lim Jongtae, “Matteo Ricci’s World Maps in Late Joseon Dynasty,” p.293. 但这几位学者都只满足于泛泛之谈, 没有任何一位试图从图形绘制和生产的角度, 具体讨论这种影响得以形成的过程、步骤和程序.

[50] 李睟光: 《芝峰类说·诸国部》, 1534年刊本, 韩国高丽大学图书馆藏.

[51] E. H. 贡布里希: 《艺术与错觉—图像再现的心理学研究》, 林夕、李本正、范景中译, 湖南科学技术出版社, 2000, 第71页.

[52] 同上书, 第51页.

[53] 李约瑟: 《中国科学技术史》第五卷《地学》第一分册, 科学出版社, 1976, 第129页.

[54] 曹婉如、郑锡煌: 《试论道教的五岳真形图》, 《自然科学史研究》1987年第1期, 第55页.

[55] 《汉武帝内传》, 载刘歆等: 《西京杂记[外五种]》, 王林根校点, 上海古籍出版社, 2012, 第78页.

[56] 吴中明: 《两仪玄览图·吴中明序》, 见辽宁省博物馆藏《两仪玄览图》原图.

[57] 黄时鉴: 《从地图看历史上中韩日“世界”观念的差异》, 第249页.

[58] 徐维志、徐维事: 《精校地理人子须知》, 第30页.

[59] 同上书, 第35页.

[60] 王士性: 《广游志》, 载《王士性地理书三种》, 周振鹤编校, 上海古籍出版社, 1993, 第210~211页.

[61] 《清圣祖仁皇帝御制文》 第四集卷二十七. 转引自《吉林通志》卷六《天章志》, 吉林文史出版社, 1986, 第99页.

[62] 陈慧: 《长白山崇拜考》, 《社会科学战线》2011年第3期, 第107页.

[63] 李花子: 《朝鲜王朝的长白山认识》, 《中国边疆史地研究》2007年第2期, 第128、133页.

[64] 孙卫国: 《大明旗号与小中华意识—朝鲜王朝尊周思明问题研究》, 商务印书馆, 2007, 第138页.

[65] 傅朗云: 《〈肃慎国记〉丛考》, 《图书馆学研究》1983年第3期, 第124~127页.

[66] 苗威: 《“长白山”丛考》, 《中国边境史地研究》2009年第4期, 第109~111页.

[67] 李朝晚期文人李圭景[主要活动于1835~1849] 所著《五洲衍文长笺散稿》中《白头山辩证说》即云: “天下有三大干龙, 皆始于昆仑, 分派三条, 以入中国: 北条出河海, 流为冀、燕之分, 余气为白头山, 自白头散为朝鲜诸山. 溯其在古之名, 则《山海经》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 有肃慎国.” 见韩国首尔大学奎章阁韩国学研究院藏19世纪写本.

[68] 葛兆光: 《想象异域: 读李朝朝鲜汉文燕行文献札记》, 中华书局, 2014, 第229页.

[69] 《山海经》, 郭璞注, 毕沅校, 上海古籍出版社, 1989, 第90、98页. 清代毕沅注“三天子鄣山”为“今在新安歙县东”. 将一座可能是江南的山挪移到昆仑山下, 显示《天下图》作者可能有特殊的用意.

[70] 《山海经·海内西经》载: “海内昆仑之墟, 在西北, 帝之下都. 昆仑之墟, 方八百里, 高万仞. 上有木禾, 长五寻, 大五围. 面有九井, 以玉为槛. 面有九门, 门有开明兽守之, 百神之所在. 在八隅之岩, 赤水之际, 非仁羿莫能上冈之岩. 赤水出东南隅, 以行其东北. 西南流注南海厌火东. 河水出东北隅, 以行其北, 西南又入渤海, 又出海外, 即西而北, 入禹所导积石山. 洋水、黑水出西北隅, 以东, 东行, 又东北, 南入海, 羽民南. 弱水、青水出西南隅, 以东, 又北, 又西南, 过毕方鸟东.” 又《大荒西经》载: “西海之南, 流沙之滨, 赤水之后, 黑水之前, 有大山, 名曰昆仑之丘. 有神, 人面虎身, 有文有尾, 皆白, 处之. 其下有弱水之渊环之, 其外有炎火之山, 投物辄然. 有人戴胜, 虎齿, 有豹尾, 穴处, 名曰西王母. 此山万物尽有.” 《山海经》, 上海古籍出版社, 1989, 第93、112页.

[71] 《穆天子传》, 载张华等撰: 《博物志[外七种]》, 王根林等校点, 上海古籍出版社, 2012, 第52~55页. 本文原刊于《美术大观》2020年第12期, 经作者授权转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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