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에이징 코리아, 지식사회에서 지혜사회로
게재 일자 : 2021년 01월 07일(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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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로 ‘네오사피엔스’ 탄생… 그들의 모든 것이 고부가가치 산업

▲ 그래픽 = 송재우 기자

■ ② ‘고령친화산업’으로 선진국 도약

韓, 역발상 통해 ‘에이징 테크’ 전초기지로 거듭나야

2050년 전세계 60세이상 인구도 21억명 육박 추산

한국, 신산업 테스트베드 ‘3가지 요건’ 갖춰

유행에 민감·디지털 친화적…국토 좁고 고소득 인구 많아

산업 전반 테스트베드→투자→中企·타산업 성장 ‘선순환’

지난 2001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게임업계의 ‘신’으로 통했던 리처드 게리엇과 로버트 게리엇 형제가 우리나라의 엔씨소프트에 입사해 연구·투자할 것이라는 뉴스였다. 7일 현재 엔씨소프트는 시가총액 21조6000억 원에 이르는 세계적 ‘공룡’ 게임 기업이 됐지만, 당시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조그만 회사였다. 그들은 엔씨소프트 합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온라인 게임 인프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너무 매력적인 시장입니다. 한국에서 성공해야 우리들의 입지가 확고해집니다.”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인프라를 바탕으로 전 세계 디지털산업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했던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늘어나는 고령 인구를 활용, ‘에이징테크’산업(고령친화산업)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고령화를 사회적 부담으로 보는 인식에서 탈피해 경제성장 동력으로 삼는 ‘창의적 역발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구재앙을 자산으로 = 현재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고 있다. 통계청 등에 따르면,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18년(3746만 명) 정점을 찍은 이후 감소하고 있다. 2015년 인구 대비 생산가능인구 비율(73.2%)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았지만, 2067년에는 이 비율이 최하위로 추락할 것으로 분석됐다. 생산할 사람이 없으면 국내총생산(GDP)은 급격하게 쪼그라들고 산업 공동화 현상까지 나타날 수 있다. ‘인구재앙’이 경제에 영향을 줘 내수·재정·연금·사회·경제 전반에 연쇄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사회적 인프라로 활용하는 ‘창의적 역발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핵심은 우리나라가 에이징테크산업의 테스트베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 현재 기존 고령 인구와는 다른 새로운 고령층이 생겨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은퇴를 거부한 채 지속적으로 일을 하며, 소비에 적극적이고, 문화·여가 활동도 활발한 ‘네오사피엔스(신인류)’의 등장이다. 이 인구의 소비를 붙잡기 위해 전 세계 에이징테크산업 시장 규모도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

글로벌노화연맹(GCOA)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세계 60세 이상 인구는 9억6200만 명에 이르고, 2050년에는 2배로 많아져 21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메릴린치는 이들을 바탕으로 한 실버경제 규모가 12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향후 로봇, 3D 프린팅, 인공지능(AI) 등이 활용돼 시장 규모는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테스트베드 기본 요건 갖춘 한국 = 우리나라는 에이징테크산업의 새로운 테스트베드가 될 ‘3대 요건’을 갖췄다는 분석이 많다. 우선 나이에 상관없이 유행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국민의 경향성 자체가 자산이 될 수 있다. 2019년 10월 미국 3대 버거 중 하나인 인앤아웃(IN-N-OUT) 버거의 임시매장(팝업스토어)이 강남역 인근에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오픈했다. 문을 열기 30분 전 이미 350명 넘는 인원이 줄을 섰고, 250인분의 ‘붉은 팔찌’(입장 대기표)는 오픈 1시간 전 동났다. 첫 손님은 오전 5시 30분쯤 도착해 무릎담요를 덮고 쪽잠을 잤다고 했다. 산업계 고위 인사는 “일각에서 안 좋게 얘기하는 국민의 ‘냄비 근성’ 자체가 되레 우리의 핵심 역량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디지털 마니아가 많고 제품을 평가하는 커뮤니티 문화가 발달한 점도 강점이 될 수 있다. 가령, 특정 신제품을 내놓으면, 개발자가 생각지도 못한 단점, 장점 등이 디시인사이드 등 커뮤니티에 일순간에 쏟아지고 이 평가가 카카오톡 등 SNS를 통해 전국에 전파된다. 2000년대 초 HP, MS, 올림푸스, 모토로라 등이 신제품을 우리나라에서 출시하고 시장 반응을 살펴본 이유도 이 같은 특성과 무관치 않다. 이에 더해 시장이 비교적 균일한 점도 매력 포인트다. 우리나라 국토 면적 자체가 상대적으로 좁고 제품을 사줄 고소득 인구가 많은 점이 제품을 테스트하기에 적격이다.

◇네오사피엔스 소비의 발원지 = 이 같은 특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건강·안전 △식품 △패션·뷰티 △의료·보건 △주거 △이동 △금융 △IT 서비스 △여가·교육 등 크게 9대 분야의 에이징테크산업 신시장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뉴욕포스트는 2017년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다면 한국으로 가라”고 하며 한국의 음식 문화를 일찌감치 소개하기도 했다. 장수 관련 산업 자체가 블루오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산업계에서는 기본 요건이 이미 갖춰져 있는 만큼, 글로벌 기업 사이에 “한국 시장에 먹혀들지 않는 에이징테크 상품·서비스는 별 볼 일 없다”는 평가를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각종 규제 해소 등을 통해 정책 여건을 시급히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경우, 단순 테스트베드 역할을 넘어 글로벌 기업과의 공동 제작 및 투자, 연구·개발(R&D)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다. 더불어 국내 에이징테크 관련 중·소, 중견기업이 역량을 갖춰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발판 마련도 가능하다. 이는 에이징테크산업을 넘어 다른 산업에까지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늙어가는 우리 경제 전반에 ‘테스트베드 역할→공동 제작·투자→중·소기업 성장→타 산업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가 발생할 수 있다.

손기은 기자 s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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