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統一 韓國과 滿洲의 運命

▲ 檀君

▲ 朝鮮의 由來

△ 古代 國家의 國號에 대한 誤解와 眞實

△ 朝鮮

▲ 濊貊

▲ 東夷

▲ 扶餘

▲ 百濟

▲ 구다라

▲ 百濟는 국제적인 해상왕국이었다

▲ 한국 金씨의 유래

▲ 고조선 侯國들의 西方 진출과 게르만족 대이동

▲ 터키(=突厥)와 한국

▲ 黃海

▲ 영어권에서는 숫자 1~12의 이름이 왜 제 각각일까


國家에도 歷史가 있고, 家門, 個人에게도 歷史가 있습니다. 歷史란 무엇일까요. 고리타분하게 現在의 일도 複雜多岐한데 閑暇하게 옛날이야기나 하고 있는 것이 可當키나 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고, 아비 없는 자식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中國 사람들은 歷史를 鑑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유리표면에 水銀 칠을 한 거울이 없었고, 靑銅 그릇에 물을 담아 얼굴을 비춰보았습니다. 그런 거울을 鑑이라고 했습니다. 왼쪽에 쇠 金변이 들어가는 것은 원료인 靑銅을 나타내고, 오른쪽 아래 皿은 그릇을 意味합니다. 歷史란 過去를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생각에서 거울 鑑자를 쓴 것입니다.

따라서 通鑑이라고 하면 通史나 같은 意味입니다. 中國 宋나라 司馬光이 지은 《資治通鑑》, 朝鮮朝 成宗 때 大提學 徐居正이 完修한 《東國通鑑》이 ‘鑑’자가 들어간 有名한 歷史書입니다.

좋든 싫든 中國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특히 自國의 歷史를 重視하고, 이를 넘어서서 潤色하기로 有名합니다. 孔子는 金文이나 甲骨文으로 쓰인 《書經=尙書》같은 歷史書를 비롯한 四書三經을 漢文으로 再整理한 人物입니다.

그는 周나라 武王의 아우 周公 旦이 分封받은 魯나라(현재의 山東省 南部) 사람입니다. 그는 魯나라 역사책 《春秋》를 執筆하면서, 所謂 春秋筆法이라고 하여 秋霜같은 客觀性을 維持하려고 했다고 하나, 나쁜 짓을 한 임금, 諸侯, 관리를 批判하는 말 몇 마디를 보탰을 뿐입니다. 一說에는 그의 祖上이 東夷가 세운 殷(=商)나라의 後裔, 宋나라(10세기의 宋이 아니라,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 마지막 왕 紂의 庶兄 微子에게 分封한 諸侯國) 出身이라는 점을 들어 東夷族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은 事實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는 蝌蚪文으로 된 中國의 古代 歷史를 漢文으로 옮기면서 中國에 불리한 歷史的 事實은 大部分 削除한 典型的인 中華主義者입니다.

中國은 現在도 자신들이 始祖로 삼는 黃帝는 말할 것 없고, 黃帝에게 王位를 빼앗긴 東夷系의 首長인 炎帝 神農씨와, 黃帝가 잡아 四肢를 찢어 죽였다고 자랑해온 句麗(=九夷, 高麗)의 君長 蚩尤까지 받들어 ‘三祖’로 삼는 소위 ‘三祖工程’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理由가 물론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4대 文明의 하나로 꼽히는 黃河文明을 創始한 文化民族이라고 自負해왔습니다. 그러나 最近 들어 옛 朝鮮(歷史에선 便宜上 近世朝鮮과 區別하기 위해 古朝鮮이라고 합니다)의 遺址로 中國 스스로도 認定할 수 밖에 없는 中國 遼西地方의 北西쪽 內蒙古자치구 赤峰(=紅山) 附近에서 黃河文明보다 1,000~2,000년 앞선 文明(炭素同位元素에 의한 年代測定 結果)이 發見됐습니다. 紅山文明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東夷族 固有의 琵琶형 銅劍과 빗살무늬 土器, 東夷族 特性을 보이는 人骨(頭頂에서 下顎까지가 길고, 얼굴과 뒤통수 사이가 얇음), 東夷族이 토템(=圖騰)으로 받드는 곰의 土俑 등이 發掘됐습니다. 林惠祥이나, 徐亮之같은 近世 中國의 良心的인 歷史學者들은 中國 上古史의 主役이 東夷族이라는 事實을 認定하고, 이를 證言하는 글을 쓰고 冊子로 發刊하기도 했습니다. 臺灣의 良心 林語堂은 韓國의 初代 文敎部長官 安浩相 博士를 만난 자리에서 『漢字가 紀元前 수천 년 전, 東夷族이 만든 글자』라고 公言하여 安박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中國은 紅山文明를 古朝鮮 文明이라고 認定하기 싫은 나머지, 소위 ‘東北工程’이라는 것을 始作한 것입니다. ‘東北工程’은 一見 高句麗나 渤海를 中國의 地方政權이라고 하여 中國 歷史에 編入하려는 試圖로 알기 쉬우나, 그것은 一部分에 不過하고, 眞正한 뜻은 古朝鮮의 歷史를 통째로 中國 歷史에 包含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日本도 例外가 아닙니다. 日帝는 韓半島 侵略을 正當化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한 줄 아십니까? 시라토리 구라기치(白鳥庫吉), 간 세이유(管政宇), 오쿠라 신뻬이(小倉進平), 쓰다 사이기치(津田左右吉) 등 東京大 敎授를 비롯한 官邊 御用學者들을 動員하여 「朝鮮史編修會」라는 組織을 만들었습니다. 韓國의 講壇史學者들 사이에 歷史學의 始祖로 섬김을 받는 李丙燾는 朝鮮史編修會의 ‘囑託’이라는 이름으로 왜놈들의 官撰 歷史編纂에 參與했습니다.

日帝는 朝鮮史編修會를 통해 三國時代 以前의 우리 歷史 2,000 여년을 깎아 없애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네 歷史는 神話時代까지 包含하여 아무리 늘려봐야 도저히 2,5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를 쓰고 檀君을 우리 歷史에서 지우려 노력한 것입니다. 그들은 朝鮮 歷史를 編纂한다는 구실로 전국에 흩어진 우리 古代 歷史書를 모조리 蒐集하여 일부만 日本 皇室 專用 倉庫인 나라(奈良)현 正倉院에 保管하고, 나머지 수십만 권을 불살라버리는 蠻行을 저질렀습니다. 歷史가 오랜 日本이 朝鮮을 支配하는 것이 妥當하다는 理由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美國도 마찬가지입니다. 美國은 西部 開拓時代에 國土를 넓히기 위해 본래의 땅 주인이던 인디언 수백만 명(일설에는 수천만 명)을 銃으로 虐殺했습니다. 그러나 西部 開拓映畵를 보면 겨우 활을 가진 인디언은 惡이고, 銃을 찬 백인은 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歷史도 자기네 나라, 民族에 有利하게 記述한다는 점은 大同小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大部分 日帝시대, 日本 學者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우리나라 講壇史學者들은 證據가 없으면, 證據가 없다는 理由로, 證據가 있으면 證據를 믿지 못하겠다는 理由로, 우리 歷史를 認定하지 않는 境遇가 많습니다.

한 가지 例를 들겠습니다. 朝鮮朝 11대왕 中宗 때 文臣인 李陌(1455~1528년)이 쓴 《太白逸史》라는 역사책이 있습니다. 檀君을 除外한, 桓因, 桓雄시대부터 高麗시대까지 歷代 임금과 在位年代, 年號를 記錄한 책입니다. 이맥은 高麗 末, 名相으로 檀君朝鮮 歷代 檀君들의 年代記 《檀君世記》를 지은 杏村 李嵒(1297~1364년)선생의 玄孫입니다.

아무튼 《太白逸史》에 大震國(=渤海) 3대왕 文王(大欽武 ․ 재위 737~793년)의 年號가 ‘大興’이라고 記錄돼 있습니다. 그러나 講壇史學者들은 《太白逸史》가 그들이 僞書라고 主張하는 《桓檀古記》에 包含돼 있다는 理由로 이 記錄을 認定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 10월 中國 吉林省 和龍縣 龍水鄕 龍海村 서쪽 龍頭山에서 文王의 넷째 딸인 貞孝公主의 무덤이 發掘됐습니다. 무덤 칸의 壁面에는 12명의 人物이 그려져 있고, 무덤 안길에서 花崗巖으로 만든 墓碑가 發見되었습니다. 墓碑에는 728字의 墓誌가 새겨져 있습니다. 墓誌에 따르면 정효공주는 大興 22년(757년)에 태어나 大興 56년(792년) 6월19일에 죽은 뒤 12월28일 이곳에 묻혔다고 記錄되어 있습니다. 그 以前인 1949년에도 中國 吉林省 敦化에 있는 六頂山에서 밭을 갈던 農夫에 의해 偶然히 古墳 하나가 發見했고, 거기서도 墓碑가 나왔습니다. 墓碑에는 文王의 둘째딸 貞惠公主(737~777년)가 大興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에 死亡했다고 記錄돼 있습니다. 文王은 卽位부터 774년까지 大興이라는 年號를 쓰다가 寶歷으로 바꿔 7년간 使用한 후, 다시 大興으로 돌아갔습니다. 渤海의 임금이 中國의 皇帝들과 마찬가지로 年號를 쓴 皇帝였다는 事實을 아무리 否認하고 싶어도 否認할 수 없이 證明해주는 明白한 考古學的 證據입니다.

講壇史學者들은 그럼에도 《太白逸史》를 歷史書로 認定치 않고 있습니다. 名分은 渤海王이 唐나라로부터 ‘渤海郡公(大祚榮이 받은 책봉 명)’ 또는 ‘渤海國王(大欽武가 받은 책봉 명)’이라는 冊封을 받았는데, 어떻게 皇帝나 쓸 수 있는 年號를 使用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當時 國家와 國家 間에 이루어지는 冊封의 意味를 잘 理解하지 못했거나 일부러 曲解해서 나온 잘못입니다. 國內에서 이루어지는 冊封이 아니라, 國家 間에 이루어지는 冊封은 오늘날 유엔에 加入하거나, 國家 間에 外交官을 交換하는 行爲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參考로 말씀드리면 渤海라는 國名은 中國의 冊封 名에서 由來한 것입니다. 698년 大祚榮이 나라를 세우면서, 스스로 大震國이라 宣言했습니다. 震은 周易에서 東方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震國은 東國과 같은 意味입니다. 東國이 朝鮮임은 알고계시겠지요?

그러나 墓地 發掘로 渤海가 ‘大興’이라는 年號를 使用했음이 事實로 確認됐음에도 不拘하고 如前히 講壇史學者들은 그 《太白逸事》를 歷史書로 認定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행히 우리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漢字를 빌어다 記錄을 해야 했고, 그나마 不足할 뿐 아니라, 있는 것조차 亡失된 境遇가 많습니다. 겨우 있다는 것이 大部分 中國의 記錄입니다. 그것조차 中國의 漢, 唐 등 특히 統一王朝를 거치면서 국민통합을 노린 中國 爲政者들에 의해 改作, 僞造, 變造된 境遇가 殆半입니다. 中國에 不利한 內容은 아예 깎아 없애버리기도 했습니다.

改作, 變造했다는 證據 한 가지만 들어봅니다. 唐나라 때 編纂된 《隋史》는 中國 史官들의 조심성이 不足해 失手를 하나 했습니다. 高句麗 편에 나오는 〈位宮玄孫之子曰昭烈帝〉라는 대목이 그 것입니다. 位宮은 高句麗 11대왕 東川王(재위 209~248년)의 이름입니다. 玄孫은 고손자니까 玄孫之子는 5대손입니다. 그러면 16대 故國原王 斯由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昭烈帝’라는 얘기입니다. 帝라는 칭호는 中國 황제에게만 붙이는 尊稱이고, 나머지는 모두 中國의 皇帝가 冊封하는 諸侯라면서 高句麗 임금을 모두 王이라고 고쳐 적었으나, 그만 失手하여 실제 그대로 ‘帝’라고 써버리고 만 것입니다.

故國原王은 美川王의 아들로, 百濟의 近肖古王과 그의 아들 餘須(훗날 近仇首王)가 平壤城에 쳐들어왔을 때, 餘須의 화살에 맞아 戰死한 임금입니다. 그의 아들이 佛敎를 처음 받아들인 小獸林王이고, 小獸林王의 동생이 故國壤王, 故國壤王의 아들이 有名한 廣開土大王입니다. 이름을 談德이라고 하는 廣開土大王은 만주 集安縣 通溝에 巨大한 碑石을 남겨 그의 諡號가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임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太王은 高句麗 때 稱하던 임금의 呼稱입니다. 百濟는 大王이라고 했습니다. 生前에 그는 永樂이라는 年號를 붙여 永樂帝로 불렸다고 합니다. 同 時代에 鮮卑族이 建國한 中國 後燕의 記錄에도 廣開土大王을 「談德帝」라고 했다고 합니다. 談德은 廣開土大王의 이름입니다.

이처럼 高句麗나 百濟의 統治者는 中國 皇帝와 마찬가지로 ‘陛下’로 불렸으며, 統治者의 이름은 大王, 太王, 또는 帝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임금의 呼稱과 統治者 名은 918년 建國한 高麗 初까지 持續되다가, 當時 高麗보다 늦게 建國된 中國 宋(960~1279년)과의 國交 關係를 考慮하여 對外的으로 王으로 낮춘 것입니다.

그러나 中國의 歷代 王朝는 歷史를 編纂하면서, 우리나라 역대 왕들을 자신들이 冊封한 諸侯인 것처럼 記述했으며, 우리나라 歷代 王朝 統治者의 이름을 모두 王으로 格下시키는 變造를 恣行했습니다.

게다가 代表的 事大 慕華주의자인 儒學者 金富軾(1075~1151년)은 1145년 《三國史記》를 지으면서 徹底하게 中國記錄에 따랐습니다. 金富軾의 잘못은 新羅의 역사책 《國史》를 비롯, 高句麗의 역사책 《留記》나 《新集》, 百濟의 《書記》등 지금은 이름만 남아 있고, 實體는 없어져버린 모든 史書를 當時에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記述의 基準을 中國에 맞춘 점, 그리고 新羅와 南北朝時代를 이룬 渤海를 우리 歷史에서 除外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三國의 임금 呼稱을 모두 中國이 記述한대로 王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歷史學이라면 學問인만큼 文獻과 考古學的 證據, 즉 遺物, 遺跡 등이 뒷받침돼야 科學的으로 認定받을 수 있음은 事實입니다. 그러나 歷史는 國民을 敎育하고 啓導하는 技能도 갖습니다. 國民들의 自負心과 自尊心도 높이도록 해야 합니다. 僞造, 變造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歷史에는 創造的 想像力까지 必要한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古代로 올라갈수록 없어지고, 모자라고, 조각난 史料투성이 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推論이 必要할 때도 많습니다. 史料가 豐富한 近 ․ 現代史조차 視角을 달리 할 때, 어떤 結果가 나타나는지 얼마 전의 敎科書 事態를 包含한 요즘 世態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한 가지 分明한 事實은 우리 歷史가 결코 남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랑해도 된다고 믿습니다. 수천 년 동안, 中國이라는 거대한 도가니(=Melting Pot) 바로 곁에서 살아왔지만, 8,000만 명이라는 韓國人 Identity를 가진 集團으로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엇을 意味하겠습니까. 中國 歷史에 記錄된 中國 주변 수백 종의 種族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몽골과 韓國뿐입니다. 그나마 國家로서의 몽골은 인구가 400여 만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文化의 힘 때문입니다. 文化가 貧弱하거나 없는 民族은 모두 中國에 同化되고 말았습니다. 韓國, 韓國人만이 갖고 있는, 中國과 差別化된 文化의 힘 때문에 오늘날 韓國이 存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디를 보며 살아가야할 지를 가리켜주는 重要한 方向舵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統一 韓國과 滿洲의 運命

제가 21세기 오늘날, 수천 년~1천 수백여 년 전, 古朝鮮, 濊貊, 扶餘, 高句麗, 百濟 이야기를 하니까, 대부분 『고리타분하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과거가 밥 먹여 주냐』는 反應을 보입니다. 저도 바보가 아닌데, 왜 뜨거운 밥 먹고, 식은 소리를 하고 싶겠습니까. 將次 이 나라의 앞날, 우리 後孫이 잊지 않고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할 重要한 意識을 심어주고 싶어서입니다.

이 나라가 앞으로도 繼續 南北 分斷 狀態로 가겠습니까? 언젠가는, 아니 10~20년 후엔 남쪽의 主導로 統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現代版 ‘노스트라다무스’라 일컬어지는 美國의 조지 프리드먼 博士(코넬대 정치학 박사 ․ 전 루이지애나 주립대 敎授)의 豫言은 우리에게 示唆하는 바가 많습니다. 프리드먼 博士는 2009년, 美國이 앞으로도 100년 동안 世界를 支配한다는 內容을 骨子로 하는 《Next One Hundred Years》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碩學입니다. 제가 2010년 10월호 月刊朝鮮에 諸他龍 前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인터뷰를 실었는데, 거기서도 그의 理論을 引用한 바 있습니다.

그가 朝鮮日報 記者를 만나 韓國, 中國, 日本의에 將來에 대해 言及한 內容이 2011년 5월28일자 週末 版에 실려 있습니다. 간단히 紹介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韓國 10~20統一, 日本의 가시(thorn)된다”

―앞으로 韓國은?

“(世界地圖를 가리키며) 韓半島는 中國 · 日本 · 러시아에 둘러싸인 爆彈 같은 存在다. 衰退하는 中國이 5년 후에도 北韓을 支持할 수 있을까. 統一은 10~20년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 韓國人들이 원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韓國은 北韓 問題를 다룰 때 美國의 도움을 必要할 것이다. 統一 후 金融 問題가 닥칠 때 더욱 그럴 것이다.”

―統一 韓國을 周邊國은 반길까?

“美國은 다른 代案이 없으니 歡迎할 것이다. 日本은 反對하지 않겠지만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中國은 北韓에 대한 統制力을 잃는 狀態에서 反對할 理由를 찾기 어렵다.”

―韓國엔 北韓 崩壞가 그동안 이룬 經濟 成果를 무너뜨릴 것이란 恐怖가 있다.

“韓國은 力動的인 國力을 保有하고 있다. 북쪽에 무슨 일이 發生하든 國力은 維持될 것이다. 統一 後 10년은 苦痛스럽겠지만 길게 보라. 北韓의 땅과 資源, 값싼 勞動力에 南韓의 技術 · 資本 · 리더십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가 發生한다.

〈난 늘 韓國이 統一됐을 때 滿洲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中國은 內部를 統制하기에 汲汲할 것이다. 러시아도 極東아시아에서 影響力이 弱化되고 있다. 日本은 거리가 너무 멀다. 韓國이 統一되면 滿洲 地域에서 큰 期會가 열릴 것이다.〉

統一이 되면 韓國은 强大國이 될 것이고 日本에 가시(thorn) 같은 存在가 될 것이다. 죽일 程度는 아니지만, 充分한 威脅이 된다는 뜻이다.”

―向後 10년간 西太平洋 地域에서 韓國은 美國의 가장 强力한 協力國이 될 것이라고 展望했는데.

“歷史的 背景 때문에 韓國은 日本을 輕視하며 中國을 不信한다. 그렇다고 美國과 便安한 關係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日本이 강해지고 中國이 약해질 때 韓國은 美國을 必要로 할 것이다. 美國도 日本과 中國의 均衡을 맞추기 위해 韓國을 利用할 것이다. 韓國은 相當한 規模의 技術 中心地가 됐다. 中國은 (危機를 克服하기 위해) 韓國의 技術을 渴望할 것이다. 美國은 技術 移轉에 대한 部分的 統制權을 確保함으로써 中國에 대한 影響力을 增加시키려 할 것이다.”

 

“中國 10명이 極貧層…爆發할 머지않아”

―中國을 어떻게 評價하나?

“浮上이 아닌 崩壞를 생각해야 한다. 中國은 잘해왔지만 同時에 많은 問題를 안게 됐다. 核心은 가난이다. 6억 명이 家口當 하루 3달러 未滿의 벌이로 산다. 4억4000만 명은 6달러 未滿으로 산다. 13억 명 중 10억 명 以上이 아프리카처럼 가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6,000만 명의 다른 中國이 있다. 연간 2만 달러를 버는. 하지만 이것은 中國의 5% 미만이다. 眞正한 中國이 아니다.”

―眞正한 中國은?

“中國은 內部經濟(internal economy)가 없는 나라다. 유럽과 美國이 製品을 사주지 않으면 存立하지 못 한다. 그래서 中國은 外部 世界의 人質이나 마찬가지다. 階層 사이에는 상당한 緊張이 造成되고 있다. 빠르게 成長하고 있을 때는 이 問題를 다루기 쉽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못 한다. 賃金이 전처럼 싸지 않기 때문에 收益性을 받쳐주지 못한다. 高附加價値 産業으로 移動하려고 하지만 美國 · 獨逸 · 日本 · 韓國과 같은 쟁쟁한 나라가 버티고 있다.”

―지금 中國의 位置는?

“1989년 日本과 같다. 日本은 눈부신 成長 뒤에서 金融 시스템이 崩壞하고 있었다. 지금 中國처럼 日本은 外國 資産을 사들였다. 中國의 成長 사이클이 막바지에 달했다는 信號다. 國家마다 다른 解法을 찾는다. 日本은 成長率을 낮췄다.”

―中國의 解法은?

“中國은 失業을 忍耐할 餘力이 없다. 일자리를 찾아 都市로 移動한 農民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社會를 不安定하게 한다. 이들의 怨望을 가라앉히기 위해 中國은 6,000만 명에게 稅金을 거둬 分配해야 할 것이다. 거둬들인 돈으로 軍隊의 忠誠은 維持할 수 있겠지만. 中國의 解法은 國民들을 抑壓하는 것뿐이다.”

―10년, 그 이후의 中國은?

“10년 동안 中國은 長期的인 觀點에서 解答을 구해야 한다. 葛藤을 解決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한 것처럼 나라를 閉鎖시킬 것인가? 아니면 20세기 中半처럼 地域主義와 不安定 패턴에 따를 것인가?”

 

日本의 무서운 團結力, 아시아 最强 復歸할 것”

―日本을 높게 評價했는데.

“經濟의 볼륨에서 中國과 對等하다. 國防力이 强하고 貧困層이 적다. 日本은 무엇이 問題인지 알고 解決할 能力이 있다. 單一國이다. (大地震에 나타났듯) 놀라운 團結力과 紐帶感을 갖고 있다. 韓國도 그렇게 못 한다. 日本에는 外部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강한 非公式的 社會 統制가 存在하는 高度의 凝集 社會다. 經濟가 크고, 敎育 水準이 높고, 政府를 따르는 國民이 있는 나라가 왜 衰退하겠는가?”

―低成長, 高齡化 등 많은 問題를 안고 있다.

“日本 經濟가 停滯된 20년을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日本의 目標에 대한 誤解다. 日本的 價値에 西洋的 觀點을 適用한 것이다. 日本은 企業의 利潤을 犧牲하면서 社會的 核心 價値인 雇用을 維持했다. 20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價値를 保全한 것이다.”

―持續 可能한가?

“日本도 더 이상 빚을 쌓아가며 價値를 保護할 수 없다. 日本 亦是 經濟와 社會 構造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日本엔 壓倒的으로 有利한 條件이 있다. 中國처럼 貧困 속에서 살고 있는 10억 人口가 없다는 것이다. 社會 不安 없이 緊縮을 견딜 수 있는 나라가 바로 日本이다.”

―大地震 收拾 過程에서 리더십의 問題가 露出됐는데.

“2차 大戰 때에 日本 리더는 ‘어떤 戰略으로 반드시 勝利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리더가 力量을 發揮하지 못하는 期間에도) 革命을 일으키지 않은 唯一한 國民이다. 리더십이 形成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나라다.”

―그러면서 日本의 危險性을 指摘한 理由는?

“日本의 根本的인 弱點은 天然資源이 없다는 것이다. 日本은 海上 交通에 接近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호르무스 海峽, 말라카 海峽, 南中國海 모두가 日本의 生命線이다. 그래서 日本은 늘 걱정을 안고 있다. (生命線에서) 危機가 發生했을 때 解決策을 찾지 못하면 다시 攻擊的으로 변할 餘地가 있다. 日本은 힘을 回復하면 必然的으로 海軍力을 增强시킬 것이다. 攻擊的인 日本에 對處할 戰略을 開發해야 한다.”

以上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統一 後, 滿洲의 運命에 관한 것입니다. 滿洲는 1949년 中國이 共産化되기 以前까지, 中國의 領土였던 적이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滿洲는 古朝鮮, 扶餘, 高句麗, 渤海의 舊址입니다. 그래서 中國의 歷代 王朝는 大部分 萬里長城을 國境線으로 看做했던 것입니다. 14세기 明나라에 와서 그 東北方 限界線을 조금 더 올려 잡았지만, 滿洲는 事實上 放置됐습니다. 그런 緣由로 15세기 世宗大王이 金宗瑞와 崔潤德을 시켜 豆滿江 流域에 6鎭을, 鴨綠江 流域에 4郡을 設置, 오늘날 韓國의 國境線을 劃定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義州~咸興라인이 國境線이었고, 그 북쪽엔 女眞族이 群居하고 있었습니다.

最後로 滿洲의 主人이던 女眞族은 17세기 초, 淸나라를 세운 후, 執權層이 北京으로 옮겨가면서 滿洲를 「封禁의 땅」으로 指定했습니다. 숫자가 많은 漢族이 滿洲로 들어올 수 없도록 法으로 막은 것입니다. 純粹한 女眞의 血統과 風習을 保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將來 中國이 天下大亂에 처해 진다고 해도, 統一韓國이 滿洲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보진 않습니다. 가장 可能한 接近法은 韓半島와 滿洲의 「經濟共同體」 構想일 것입니다. 여기에 高麗人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의 沿海州를 參與시켜도 좋겠지요. 이런 일은 最小限 100年 앞을 내다보고, 서서히 우리의 內部 力量을 蓄積해야만 어떤 狀況이 到來했을 때, 論議라도 해 볼 수 있는 至難한 作業입니다. 機會가 주어져서 우리 땅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런 天福이 다시없겠지요. 間島問題는 그 다음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故 崔鍾賢 SK그룹 會長은 企業人의 範疇를 넘어서서 깊은 洞察力과 歷史的 慧眼을 가진 偉人입니다. 그는 平素 中國에 投資하는 일은 100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고 主張했던 분입니다.

50년 후가 될지, 100년 후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當代의 韓國 사람들 大部分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滿洲, 沿海州와 經濟共同體를 構成해야 하느냐고 自問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닥다리 같아 보이지만, 우리의 過去를 알아야 하고, 2世, 3世에게 歷史를 가르쳐야 하는 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後代의 韓國人들이 그런 일을 當然視하고, 어떤 犧牲과 費用이 들더라도 試圖라도 해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 檀君

우리 民族이 始祖로 받드는 檀君할아버지는 實存 人物일까요, 아닐까요. 講壇史學者들은 檀君의 實體를 否認합니다. 神話라는 것이죠. 이들이 말하는 檀君은 高麗時代 蒙古 侵入을 당한 이후, 百姓들의 愛國心을 鼓吹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國家的 象徵物이었다는 것입니다. 스님 一然이 쓴 《三國遺事》에 처음 나오는 檀君 神話는 그런 背景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들은 主張 합니다. 그래선지 요즘은 敎科書에서 檀君을 가르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檀君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存在일까요? 우리나라 最初의 建國神話, 國祖傳說은 原始時代부터 오랫동안 口碑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文字로 가장 오래된 記錄은 13世紀 末 《三國遺事》의 제1권 古朝鮮 조에 실려 있습니다. 中國 역사책 《魏書》를 인용, 檀君 임금이 阿斯達에 都邑하고 朝鮮이라는 國號를 썼으니 中國의 堯임금과 같은 시기(기원전 2333년)라고 되어 있습니다. 古記에 의하면, 桓因(=하느님)의 庶子(=큰 아들이 아닌 아들) 桓雄이 人間 世上을 구하고자 할 때, 桓因이 그 뜻을 알고 三危太白을 보아 弘益人間(=널리 人間을 이롭게 한다)할만하다 생각하여 그들에게 天府印 3개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桓雄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太白山(=白頭山) 마루 神檀樹 아래 내려와 神市를 열고 세상을 다스립니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여 桓雄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참을성 많은 곰만이 100일을 견뎌내 사람이 되었고(=熊女), 桓雄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檀君입니다. 檀君이 平壤에 都邑하여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고, 뒤에 阿斯達에 遷都하여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단군신화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당시의 朝鮮族보다 월등히 뛰어난 文明과 金屬技術을 가진 先進 文明集團이 어떤 理由가 있어서 그 文明國을 떠나야 했던 桓雄이라는 指導者를 따라 東進하여 朝鮮族이 사는 나라에 到着했습니다. 이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表現한 것입니다. 移住民은 곰족과 범족으로 構成된 現地 住民과 融合하기 위해 婚姻同盟을 맺는데, 婚姻의 對象이 곰족이었습니다. 桓雄이 곰족 指導者의 딸과 婚姻하여 낳은 아들이 檀君이고, 그가 새 指導者가 된 것입니다. 移住民들은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地方의 古代 文明國家인 수메르人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世紀 中半 英國 및 프랑스 學者에 의해 발굴된 메소포타미아지방 수메르 文明(B.C. 6000~B.C 5000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考古學者 P. E. Botta가 1842년 아시리아의 首都였던 코르사바드를, 이어 英國人 學者 A. H. Layard 등이 또 다른 아시리아의 首都 니네베 등지(모두 현재의 이라크 모술 지방 부근)를 發掘, 글이 쓰여 있는 수십만 장의 粘土板을 發掘했습니다. 粘土版에 쓰여 있는 글자는 쐐기文字의 一種으로 많은 學者들의 努力에 의해 現代語로 解讀되었습니다.

英國 學者에 의하면 수메르의 楔形文字로 된 粘土板에 最高 統治者의 이름이 Duncan으로 表記돼 있다고 합니다. 쐐기文字를 硏究한 西洋 考古學者들은 수메르語는 韓國語와 마찬가지로 膠着語로서, 어머니를 UMMA, 아버지를 ABBA, 달(月)을 DAL, 머리(대가리)를 DEGAL, 칼을 KAR, 밝(明)은 BAR, 독(그릇)은 DUG, 한(큰)은 AN(수메르 최고神의 이름)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種族의 特徵은 머리털이 검고 直線이며, 작은 體軀에 扁平한 뒷머리를 하고 있었답니다. 頭蓋骨도 韓國人과 똑같이 頭頂에서 下顎骨까지 길이가 길고, 얼굴에서 뒤통수까지 길이가 얇다고 합니다. 얼굴이 납작하고 두뇌의 높이가 높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民族의 特徵과 똑같은지 신기할 程度입니다. 土器를 머리에 인 채, 샅바를 잡고 경상도式으로 왼 씨름하는 彫刻像의 香爐가 수메르 遺跡地에서 發掘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벌써 그들은 우리가 朝鮮朝末까지 使用했던 太陰曆을 만들어 썼습니다.

그 種族 몇몇이 어떤 理由에선지 수메르를 떠나 몽골 草原에 이르는 河西回廊을 따라 東進하여 朝鮮族이 살던 곳에 定着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檀君神話에서는 하늘에서 3,000명의 무리가 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고 表現한 것입니다. 3,000명은 많다는 뜻입니다. 三千宮女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나라 最古의 國名이자 族名인 朝鮮을 中國人들은 時代에 따라 자기들이 들을 때마다 이를 달리 表記했습니다. 朝鮮, 肅愼, 息愼, 珠申, 女眞 등이 그것입니다. 中國人들을 쥬신, 또는 주선이라는 發音을 듣고 그 때마다 다르게 써왔지만, 사실은 다 같은 地域, 같은 種族을 다르게 表記했을 뿐입니다.

檀君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곳에서만 쓴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使用했습니다. 그렇다면 漢字 發音인 檀君의 순수한 우리말과 그 뜻은 무엇일지 類推해보는 것도 意味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中國人들이 匈奴라고 불렀던 北方 遊牧民族 首長의 명칭인 單于(선우라고 읽음)를 參考할 만합니다. 선우는 北方 騎馬民族들이 5세기 이후, 그들의 首長을 干, 또는 可汗(=칸)이라고 부르기 전에 使用했다는 것이 定說입니다.

東胡에서는 5세기 이전부터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칸, 또는 한을 썼습니다. 中國人들은 동북쪽에 사는 異민족을 통상 山戎 또는 東胡라 했습니다. 東夷의 別稱입니다. 東胡의 中國發音 ‘뚱후’를 17세기 러시아 학자가 듣고 ‘퉁그스’라고 作名했고, 그 말이 西洋으로 건너갔습니다. 오늘날 西洋人들이 우리를 ‘퉁그스族’의 한 갈래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由來한 것입니다.

淸나라 乾隆帝때 편찬된 《欽定滿洲源流考》는 三韓(=마한 진한 변한)을 우리가 歷史에서 배운 것처럼 韓半島 남쪽에 위치한 地名으로 보지 않고, 渤海灣 周圍에 자리 잡은 東夷系統 나라의 지도자(韓 또는 汗)로 解釋하고 있습니다. 新羅의 居西干, 麻立干, 角干 등이 다 같은 系統의 單語입니다. 高句麗 때는 全國을 三京(國內城 丸都城 平壤城)으로 나누고 각 京마다 汗 또는 干(예 : 丸都城干 朱利)이라는 責任者를 두었다고 합니다. 百濟도 祭司長을 干이나 汗이라고 했습니다.

獨立運動가로 有名한 民族史學者 申采浩 先生은 이를 參考삼아 《朝鮮史硏究抄》를 쓸 때, 三朝鮮을 一般 史學者들처럼 檀君朝鮮, 箕子朝鮮, 衛滿朝鮮으로 보지 않고 말조선, 발조선, 신조선으로 想定했습니다. 마리칸, 바리칸, 쇠블칸이 통치하던 마리조선, 바리조선, 쇠블조선이라는 것입니다.

‘바리’란 遊牧社會의 祭司長(=무당)을 일컫는 말로, 불(火), 밝음(明)에서 由來했습니다. 중앙아시아 발하슈湖에서 시작하여 바이칼湖, 渤海로 그 足跡을 남기고 있으며, 扶餘, 弁韓이란 이름으로 歷史書에 登場합니다.

‘마리’란 部族의 政治的 우두머리로 말(馬), 머리(首 또는 天), 마루(宗)의 意味를 갖고 있습니다. 新羅 智證王 代까지는 王을 마립간이라 했는데, 마립간은 마리와 칸의 合成語입니다. 馬韓은 여기서 由來한 이름입니다.

‘쇠블’은 강력한 힘의 所有者이자 軍事的 리더를 말합니다. 漢字로 金, 太, 角을 의미로 借用하고, 발음으로는 新(=大), 辰(=大)자를 빌었습니다. 예컨대 어떤 무리의 우두머리인 대두목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신크마림’이라고 하는 예입니다. 大와 같은 의미인 辰은 辰國, 辰(眞)韓, 大震國(=渤海), 摩震(=마한+진한, 弓裔가 세운 泰封의 初名)과 같이 古代國家 이름으로 繼續 登場합니다.

다시 선우로 돌아갑니다. 선우는 中國 측에서 줄여 부르는 이름이며, 본딧말은 ‘撑犁弧塗單于’입니다. 탱리의 본 발음인 ‘텡그리(tengri)’는 北方 遊牧民族에게 두루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튀르크(Turk ․ 영어 u위에 우무나우트, 오늘날의 터키)語로 ‘하늘’이란 말이며, 한자로는 ‘撑犁’로 表記됩니다. 몽골말로는 騰格哩(=tngri)라 했습니다. ‘탱리호도선우’는 音借와 表意를 동시에 나타낸 말입니다. ‘호도(오도르)’는 ‘아들’의 原型이며, 日本語에 현재 ‘오도(男)꼬(子)’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탱리호도’란 하늘의 아들, 즉 天子를 意味합니다.

中國도 最高統治者를 公式으로는 王 또는 皇帝로 불렀지만, 俗稱 天子라고도 했는데, 匈奴도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中國의 統治者처럼 世襲이 아니라, 形式的일망정 ‘쿠릴타이(新羅의 和白과 비슷한 존재)’라고 하는 貴族會議에서 選出됐습니다.

單于는 珠申이나 女眞처럼 分明한 뜻은 없습니다. 아마도 ‘흉노’의 中國 발음인 ‘숭누’를 表記하다 本來의 ‘단간(單干 또는 檀干=檀君)’을 誤記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단간’이라고 해야 의미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單은 단, 탄, 찬으로 發音됩니다. 탱그리, 당그리, 당기르, 단구르, 칭기르가 다 같이 天이란 뜻입니다. 天은 舊韓末까지도 ‘텬’이라고 發音했습니다. 칭기즈칸도 텡기르칸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單于는 선우라기보다 단간, 탕칸, 텐칸이라야 맞다는 얘기입니다.

발칸半島에 있는 불가리아의 단어 ‘탕구르(Tangur)’에는 天神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고유명사로서 중국 서북 끝에 한텡그리산(大天山)이 있습니다. 현 몽골의 올란바토르를 수도로 하는 돌궐 제2제국(684~734년)의 칸 가운데 서기 734년에 즉위한 登利可汗의 ‘등리’도 텡그리의 한자 音譯입니다.

이야기가 좀 벗어나지만, 天神이라는 뜻으로 ‘탕구르’라는 단어를 쓰는 발칸반도의 불가리아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3~4세기 무렵, 河西回廊을 따라 서쪽으로 간 扶餘족의 일파가 수세기 후에 세운 나라가 바로 불가리아라는 것이 愼鏞廈 前 서울대교수의 해석입니다. 불가리아는 불(火 ․ 부루, 부여의 준말)族의 가(加=大人)가 세운 리아(또는 니아=land)라는 것입니다. 부여족이 세운 국가에서는 馬加, 牛加, 狗加, 豬加라는 동서남북 4부의 귀족(=이를 四出道라 했는데, 지금 우리나라 행정구역 명칭인 道의 유래임)이 중부의 王을 받들고 정치를 했습니다. 扶餘족의 一派인 高句麗와 百濟도 5部制 國家였음은 周知의 事實입니다. 6村으로 構成된 新羅도 5部에 北方에서 別途로 내려온 1개 種族이 합하여 6部가 되었을 것으로 推定됩니다. 近世朝鮮의 首都 漢城도 5部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불가리아의 首都 소피아는 泗沘 또는 소비의 變音이고 소피아의 鎭山 발칸산은 ‘밝은산(白山=白頭山)’의 現地式 發音이라는 것입니다. 옛 불가리아 帝國의 貴族이름은 ‘보야’(부여의 변음)라고 하며, 지금도 갓난아이 엉덩이에 몽골반점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엔 발칸 산에 모셔져있는 탕구르의 神殿에 祭祀를 지내는 것이 불가리아의 傳統이라고 불가리아에 派遣된 東로마제국의 連絡將校가 記錄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이 愼교수의 말입니다. 이 部分은 후에 詳述하겠습니다.

結論的으로 말해서 檀君은 當然히 存在했습니다. 特定人의 이름이 아니라, 最高統治權者, 또는 그와 맞먹는 權力을 가졌던 祭政일치시대의 神官을 일컬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古代 朝鮮에서는 이를 당골, 단골, 또는 당구르 라고 했고, 中國人들이 이 소리를 듣고 漢字로 檀君이라 表記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始祖로 받드는 檀君은 이름을 王儉(=壬儉의 잘못된 漢字 音譯)이라고 하는 檀君이었습니다. 그 이후, 歷代 韓民族이 세운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 이름을 임금이라 한 것은 檀君의 이름 壬儉(몽골에서는 최고통치자를 ‘옹군’이라 했음)에서 由來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簡單합니다. 檀君의 存在를 否認할 必要도 없고, 否認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韓민족 뿐이 아니라, 廣義의 匈奴로 불렸던 北方 遊牧民族에게 共通的으로 君臨했던 存在였으니까 말입니다.

朝鮮朝시대까지만 해도 全國 곳곳에 國祖 檀君을 모시는 祠堂이 存在했습니다. 가장 큰 곳이 平壤에 있었고,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에 별도의 祭堂이 있었습니다. 平壤의 祠堂을 崇寧殿이라 했으며, 文化의 祭堂은 三聖祠라 했습니다. 平壤엔 古朝鮮의 首都라고 생각해서, 구월산을 관장하는 문화면엔 檀君이 王位를 물려주고 들어가서 山神이 되었다는 傳說에 따라 그리 한 것입니다.

檀君의 存在는 여러 곳에서 確認됩니다. 壬辰倭亂 때, 日本에 잡혀간 인물 17명은 合意해서 日本 땅에 祠堂을 만들어 檀君을 모십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玉山神宮입니다. 玉山神宮 由來記에는 玉山神宮이 檀君의 묘이며, 조상대대로 檀君을 始祖로 섬겨온 데 따른 것이라는 內容이 있다고 합니다. 韓國에도 여러 번 온 적이 있는 日本의 유명 도예가로, 朝鮮人 後裔인 14세 沈壽官은 지금도 檀君을 열렬히 섬기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수백 년 전, 日本에 붙잡혀간 朝鮮사람들이 檀君을 섬겼고, 그 後孫들이 지금까지 檀君을 모시고 있을까요. 그것은 檀君이 확실히 實存했던 우리의 祖上이며, 그들이 붙잡혀 가기 전에도 檀君을 알고 있었고, 代代로 섬겼다는 反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은 《朝鮮王朝實錄》에 나오는 檀君에 관한 기사입니다. 世宗實錄을 보면 世宗 10년 6월 淸白吏로 이름난 政丞 柳寬이, 世宗 18년 12월에는 柳寬의 조카인 漢城府使 柳思訥이 檀君에 관해 上疏를 올립니다.

柳寬은 『황해도 (신천군) 文化(면)에서 父老들의 말을 들으니 九月山은 문화고을의 주산인데, 그 산허리에 檀君 사당 三聖祠가 있고, 그 밑에 聖堂里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檀君이 박달나무(=神檀樹)에 내려와 후대에 문화의 동쪽 藏唐京에 도읍을 정했으며, 中國의 堯 임금과 같은 해에 건국했고, 건국한지 1,000여 년 만에 아사달에 들어가 神으로 화했다(=별세했다)고 합니다.』

柳思訥은 『〈歲年歌〉를 보니, 檀君은 朝鮮의 시조이며 그 나라가 누린 역사는 매우 깁니다. 전에 그 사당을 지으라고 有司에게 명하실 때는 有司가 잘 몰라서 평양에 세우고저 하였으나, 신의 숙부, 寬이 잘못임을 논하여 사업을 아직 시행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歲年歌〉에 의하면 檀君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 白岳으로 도읍을 옮기고, 殷나라 武丁 8년(※기원전 1243년)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고려왕조에서도 구월산 밑에 사당을 세웠는데 그 집과 位版(=위패)이 지금도 있어서 〈歲年歌〉와 서로 합치합니다. 그러니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 세운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檀君 祠堂을 세우려고 조사하던 世宗이 平壤이 아니라, 구월산 아래 문화고을에 세우도록 裁可하고 禮曹에 下命했다는 記錄입니다. 世宗大王까지도 檀君의 존재를 중시했고, 〈歲年歌〉라는 노래를 통해 그 사적이 口傳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화나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면 檀君을 이처럼 王朝에서 朝議에 의하여 받들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대대로 檀君을 國祖로 모시고 最高의 祖上神으로서 祭祀를 받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전국 여러 곳에 檀君의 제단 遺蹟이 남아 있고 또 그 祭床의 陳設圖와 〈歲年歌〉가 口傳되어왔습니다. 그것이 끊어진 것은 日帝 强占期 때입니다. 日帝는 숭녕전과 삼성사를 헐어서 없애버리고 檀君에 대한 祭祀를 지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日帝가 檀君을 抹殺한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日本의 論理를 그대로 踏襲, 檀君을 神話 속에 가둬놓고 있는 것입니다.

〈歲年歌〉는 朝鮮 中宗때 문신 柳希齡(1480~1522년)이 編纂한 《標題音註東國史略》에 그 內容이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은 日帝가 불태워 없앤 史書 가운데 하나인데, 最近 臺灣 國立博物館에서 發見됨으로써 〈歲年歌〉의 實體가 確認됐습니다. 노래의 내용은 檀君, 箕子, 衛滿의 古朝鮮에서 三國을 거쳐 高麗때까지 있었던 主要 事件의 要旨를 標題로 내세웠으며, 固有名詞의 音을 밝힌 것이 特徵입니다. 三國을 각기 獨立하여 敍述했을 뿐 아니라, 新羅 中心이 아닌 高句麗 中心의 歷史體系를 세웠습니다.

그밖에도 地域마다 사람들이 작은 神堂에 檀君의 肖像이나 位牌를 모시고 所願을 빌곤 했습니다. 檀君의 肖像을 ‘天眞’이라고 합니다. 대개 地名에 하늘 ‘天’자나 社, 祠, 堂자가 들어가면 檀君과 關聯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단군의 ‘檀’은 ‘天’과 같은 意味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天眞’이라는 地名 중에서 특히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의 天眞庵은 유명합니다. 天主敎의 聖地인데, 지금 百年聖堂을 짓는 곳입니다. 그러나 천진암은 본래 ‘檀君의 肖像을 모시는 암자’라는 뜻입니다. 御眞은 임금의 초상, 寫眞은 얼굴을 그대로 그린다는 말이니까 ‘眞’은 얼굴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日本이 韓國에 대한 支配權을 確保하면서, 檀君의 痕迹을 지우기 위해 地方에 있는 많은 神堂을 없애버리거나, 喪輿를 保管하는 場所로 轉落시켰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이런 상여집들이 동네 마다 하나씩 있었는데, 이를 ‘당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단군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地名 가운데 堂山洞, 舍堂洞 하는 것처럼 堂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지명은 檀君과 관련이 있거나, 檀君을 제사지내는 집(祭堂)이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檀君의 임금 君자는 ‘제사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윗부분의 尹자는 본래는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中國 春秋時代 宰相의 이름이 令尹이었습니다. 朝鮮朝 때 漢城을 다스리는 관리의 이름이 判尹이었고, 지금의 大都市를 의미하는 府의 最高 官吏는 府尹이었습니다. 아래 부분 口는 제사상을 象徵합니다. 兄은 祖上의 제삿상(口)를 主管하는 어진사람(儿 ․ 어진 사람 인)이라는 글자의 合成語입니다. 옛날엔 조상님과 天神에게 祭祀를 드리는 일이 重大事였습니다. 그런 제사상을 主管하는 사람이 頭領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 朝鮮의 由來

△ 古代 國家의 國號에 대한 誤解와 眞實

미리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우리나라의 古代 國家의 이름에 대한 一般的 誤解에 관한 것입니다. 朝鮮, 濊貊, 扶餘, 沃沮, 高句麗, 百濟, 新羅가 본시 그런 이름을 스스로 내세워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中國 사람들이 漢字로 表記한 것에 不過한 것입니다. 高麗, (近世)朝鮮처럼 出發點부터 國號를 宣言하고 外國(=中國)으로부터 外交的으로 承認받는 節次를 거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朝鮮은 朝鮮 외에도 숙신, 주신 식신, 제신처럼 비슷한 發音의 다른 漢字가 登場하는 것입니다. 濊도, 魏, 倭로, 貊은 貉, 莫, 白, 毫(박)으로, 扶餘는 扶婁, 不與, 鳧庾로, 沃沮는 窩地(=山林), 高句麗는 高麗, 句麗, 槀離, 索離, 嘉宇里로, 百濟는 伯濟로, 新羅는 徐羅伐, 斯盧, 斯羅, 新盧 등으로 表記됐습니다.

中國은 BC 2233년 夏나라를 세운 禹王 때부터 아들에게 王位를 물려주는 傳子制가 定着됐습니다. 農業國家의 特性上, 1년 내내 사람들이 協業으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일찍이 中央集權的 國家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民族은 본래 遊牧을 生計手段으로 삼는 騎馬民族이었습니다. 이들은 가족, 씨족 중심이었고, 잘 해 봐야가 부족제가 고작이었습니다. 말달리며 牧畜을 하던 사람들은 戰爭이 일어나면 部族長의 指示에 따라 差出돼 戰士로 突變했습니다. 그리고 戰爭이 끝나면 다시 牧者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國家라는 槪念이 생기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나의 例를 들어봅니다. 高句麗는 얼핏 强力한 中央集權制 國家였을 것으로 알기 쉽지만, 事實은 典型的인 部族聯合體였습니다. 消奴, 絶奴, 順奴, 灌奴, 桂婁部라는 5部族의 聯合體였습니다. 漢字로 表記하긴 했지만,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아마도 東 西 南 北 中을 가리킨 것으로 보입니다. 高句麗 末期에 나라를 좌지우지한 淵蓋蘇文을 東部大人이라고 한데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高句麗에 앞서 部族聯合을 이룬 扶餘, 高句麗와 마찬가지로 扶餘系인 百濟도 나라를 5部로 나눠 統治했습니다. 扶餘는 5加(馬加 牛加 狗加 豬加와 王), 百濟는 東, 西, 前, 後, 中部였습니다.

아무튼 高句麗의 경우, 시조인 朱蒙(혹은 鄒牟)부터 유리, 대무신, 민중, 모본왕까지 5代는 소노부 출신이 왕이 되었고, 6代 太祖왕부터 계루부에서 왕을 輩出했습니다. 太祖는 어느 나라, 어느 王朝를 보더라도 보통 創業者를 意味합니다. 아마도 王統이 解씨에서 高씨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高句麗, 百濟, 新羅 三國이 正式으로 國號를 정하고 外部에 宣言한 것은 中國의 五胡十六國 시대인 4~5세기경입니다. 高句麗는 4세기 초, 百濟는 4세기 중간, 新羅는 가장 늦어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에 律令을 頒布하고, 統治者를 王이라 했으며, 正式으로 國號를 宣言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실질적인 傳子制가 定着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兄弟간에, 혹은 叔姪간에 王位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다음 왕위를 형의 아들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 朝鮮

朝鮮은 中國(人)이 우리나라를 漢字로 表記한 가장 오래된 이름입니다. 朝鮮이나 肅愼이라는 말의 語源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硏究해왔지만, 속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分明히 오래 전부터 우리 民族이 使用한 말임에 틀림없으나, 中國人들이 漢字로 表記하다 보니까 時代에 따라, 쓰는 사람에 따라 위 題目에서 보이듯 여러 가지로 使用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本來의 우리 發音이 무엇이었는지 不分明한 것입니다.

朝鮮은 中國 사람들이 ‘차오센’, 또는 ‘쭈썬’이라고 發音합니다. 肅愼은 ‘쑤썬’이라고 합니다. 女眞도 우리 發音은 ‘여진’이지만, 當事者인 滿洲族의 發音은 ‘주신’입니다. ‘조선’과 비슷합니다.

獨立鬪士인 民族史學者인 丹齋 申采浩(1880~1936년) 先生은 朝鮮의 語源을 肅愼에서 찾습니다. 淸(1616~1911년)의 乾隆帝(재위 1735~1795년)가 펴낸 《欽定滿洲源流考)》에는 肅愼의 옛 이름은 ‘珠申’ 또는 ‘朱里眞’이며 ‘管境’을 의미하는 滿洲語라고 나옵니다. 丹齋 先生은 이 책을 土臺로 朝鮮의 원래 발음은 ‘주신’이고, 뜻은 ‘주신이 관장하는 땅’, 즉 ‘영토’라 解釋했습니다.

歷史에 밝았던 陽明學의 巨頭 爲堂 鄭寅普(1892~1950년) 先生은 中國의 殷, 周시대부터 登場한 ‘肅愼’이 息愼, 稷愼, 珠申 등으로 表記되었음을 根據로 ‘朝鮮’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으로 推論했습니다. 朝鮮의 起源을 오랫동안 硏究했던 러시아의 韓國語 學者 레프 콘체비치 또한 1970년 모스크바에서 펴낸 《한국의 역사적 명칭》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主張을 폈습니다. 史料에 나타나는 古代 朝鮮族과 肅愼族의 人口 分布가 地理的으로 서로 一致하고 있다는 점, 史料上으로 모두 ‘東夷’에 속한다는 점, 種族 形成過程이 類似하고 새(=鳥)라는 共同의 토템을 가지고 있다는 점, 두 民族 모두 檀君을 祖上으로 삼고 있으며, 白頭山을 民族 發祥地로 보고 神聖視한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初代 文敎部長官을 지낸 安浩相 博士(1902~1999년)는 ‘아사달’에서 由來한 ‘아시밝’(첫 빛=태양이 처음 떠오르는 장소)을 中國語로 表記한 것이 朝鮮이라고 主張합니다. ‘아시’는 ‘먼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本格的으로 일을 하기 전에 임시로, 혹은 대충 먼저 일을 할 때, ‘아시로 한다’고 表現합니다. ‘아시밝’, ‘아사달(阿斯達)’, ‘아사타라’, ‘아이신(金)’ 등으로 表記되던 地域이나 그 地域에 사는 사람들이 ‘朝鮮’이라는 名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肅愼이 朝鮮에서 나왔다는 見解도 만만치 않습니다. 朝鮮이 肅愼보다 훨씬 그 이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三國遺事》는 中國의 史書 《魏書》를 인용하여 〈往二千載 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 2,000년 전, 檀君 王儉이 있어 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이름을 ‘朝鮮’이라 했으니, 中國의 ‘高(=堯)’와 같은 시기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따르면 西紀前 24世紀에 朝鮮이라는 이름이 登場했다는 것입니다.

中國 夏나라 禹王때 발간 돼 가장 오래된 古書로 認定받는 《山海經》에 ‘朝鮮’이라는 이름이 처음 登場합니다. 《山海經》 四海內經에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이라는 대목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漢(B.C. 202~A.D. 220년)나라 때 再編輯됐다는 점을 들어 年代에 대해 疑問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紀元前 7세기 人物인 中國 春秋시대 齊나라의 宰相 管仲에 대한 책 《管子》에 (發朝鮮 文皮 ․ 밝조선에서 생산되는 범 가죽)라는 이름으로 ‘朝鮮’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朝鮮’이라는 單語가 獨立的으로 쓰이지 않고 ‘발조선’으로 표현된 것은 나름대로 意味가 있습니다. 지금 解釋하면 발조선은 番朝鮮, 卞朝鮮 또는 弁朝鮮과 같이 ‘밝(은)’이라는 우리말을 漢字로 音譯한 것입니다. 후의 三韓 가운데 변한도 비슷한 用例입니다. 朝鮮은 번조선과 함께 眞朝鮮, 眞番朝鮮, 濊貊朝鮮 등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朝鮮이 있었다는 反證입니다. ‘발조선’은 朝鮮의 일부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肅愼은 紀元前 5世紀에 쓰인 《尙書(=書經)》의 『武王 伐東夷 肅愼來賀(무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이 와서 이를 하례했다)』에서 처음 나옵니다.

言論人이자, 史學者인 千寬宇(1925~1991년)先生은 滿洲族의 祖上이라고 보는 肅愼과 韓國人의 祖上으로 보는 濊貊 모두가 共通의 祖上神으로 檀君을 崇拜하는 事實을 例로 들며 둘이 하나이며, 하나가 둘이라는 見解를 밝히고 있습니다.

漢나라 때, 大戴禮가 편찬한 《大戴禮記》에는 ‘발조선’이라는 말 대신, ‘發息愼’이 나옵니다. 《史記》 五帝本紀에도 『北 山戎發息愼 謂之東北夷(북쪽에는 산융과 발식신이 있는데 이를 東北夷라 일컫는다)』고 했습니다. ‘東北夷’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韓族, 만주족을 총칭하는 ‘東夷’라는 말과 같습니다.

‘朝鮮’이라는 말에서, 朝는 무엇이고, 鮮은 무엇일까요. 의미 없이 쓰이진 않았을 것이고, 무언가 특별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民族의 固有思想인 天孫思想의 表現 및 太陽의 崇拜와 靑銅器, 鐵器 등 金屬 製鍊技術과 關聯된 말일 可能性이 높습니다. 알타이山脈을 中心으로 하여 몽골 草原地域이나 滿洲地域까지 居住했던 우리 겨레들이 自身들이 사는 地域이나 都邑을 烏孫(요서지역), 오논(몽골 지역), 아이신(만주 지역) 등으로 불렀는데, 알타이 전문가인 박시인 선생의 著書 《알타이 신화》에서 이 말은 모두 알타이어인 ‘阿史那(=해뜨는 곳)’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金을 의미하는 아이신, 알티, 알타이, 알탄 등과도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손, 오논, 아이신, 아사나 등은 ‘해가 뜨는 아침’ 또는 ‘밝게 빛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漢字로 아침을 뜻하는 ‘朝’와, 金, 銀, 鐵, 銅같은 금속을 머금은 山(鮮卑의 烏丸山, 遼西의 赤山, 몽골의 부르한산)에서 鮮이 나와 ‘朝鮮’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山이 鮮으로 代置된 증거를 찾아보면, 中國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해설서 《爾雅》에 『東北之美者 斥山之文皮(동북(중국에서 볼 때 東北은 요서, 요동, 만주지방을 가리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척산의 범가죽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管子》에서는 ‘發朝鮮’이라고 했던 자리에 ‘斥山’이 대신 들어가 있습니다. 이 척산의 中國 발음이 ‘츠샨’입니다. 그래서 ‘조선’이 이 ‘척산’에서 왔다고 하는 學者도 있습니다. 또 琵琶型 銅劍 등 古朝鮮 遺物이 지금도 發掘되는 遼西地方 赤山도 發音이 ‘츠샨’으로 斥山과 똑같습니다.

朝鮮의 由來는 이렇듯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中國人들이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또는 우리민족을 부른 이름이고, 후에 오는 濊貊, 東夷, 西戎, 南蠻, 北狄, 匈奴, 蒙兀, 身毒(=인도), 鮮卑처럼 나쁜 뜻이 들어가지 않은 거의 유일한 외국(인)명이라는 사실입니다.

朝鮮이 공식 국호로 처음 사용되고, 외교적으로 승인받은 것은 1392년 태조 李成桂가 高麗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운 이후입니다.

《朝鮮王朝實錄》 태조실록에 나오는 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太祖壬申元年九月二十八日丙午 遣藝文館學士韓相質 如京使以朝鮮和寧請更國號 至二年(明洪武二十六年) 癸酉二月十五日庚寅 明帝更朝鮮東夷之稱號 美其來遠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永昌後嗣…乃以二月十五日昧爽以後 爲更國號朝鮮之始=태조 원년 9월28일, 예문관학사 韓相質을 (明나라에) 보내 朝鮮과 和寧(咸興의 옛 이름으로 李成桂의 고향) 2개의 이름 중에서 국호를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 태조2년(명 홍무26년) 2월15일 (韓相質이 돌아와) 명나라 황제(=朱元璋)는 東夷의 국호로는 朝鮮이라는 칭호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을 만하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 대대로 영구히 번성케 하라고 했다. 2월15일 아침부터 국호를 고쳤는데, 그것이 朝鮮의 시작이다.〉

 

▲ 濊貊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紹介할 말이 있습니다. 濊貊은 본래 歲百이라는 것이 民族史學者 沈伯綱 先生의 解釋입니다. 沈先生은 忠南大에서 漢文學을 專攻한 學者로서, 淸 乾隆帝가 歷代 中國의 모든 史書를 集大成한 四庫全書(현대식으로 컴퓨터에 archiving 돼 있음)를 모두 涉獵함으로써 새로운 歷史的 事實을 많이 찾아낸 主體性 있고, 實力 있는 분입니다. 歲는 새(鳥, 新, 東, 日), 쇠(鐵)를, 百은 發, 밝(白)을 借字한 것이랍니다. 우리 民族이 좋아한 새 토템과 太陽의 상징인 白을 勘案하면 상당히 根據 있는 推論입니다. 이것을 中國人들이 周邊 種族을 蔑視하는 뜻으로 歲에 삼수변 氵를 붙여 더러울 濊로 바꾸고, 百 앞에 벌레 치자 豸를 붙여 貊자로 變造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見解에 積極 同意합니다.

中國 사람들은 朝鮮을 다른 말로 濊貊이라고도 불렀습니다. 濊와 貊을 따로 부르기도 했고, 합쳐서 하나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특히 扶餘는 濊의 땅에서 살았다고 해서 濊族이라 했고, 百濟는 扶餘의 後裔라서 스스로 濊族이라 했습니다. 貊(우리 古語로 ‘고마’)은 高句麗를 가리킨 경우가 많습니다. 貊은 본래 철이나 구리를 먹고산다는 傳說 속의 動物이지만, 사실은 몽골 쪽에 살던 古朝鮮 사람 일부가 사냥으로 生計를 꾸려가며 짐승 가죽을 옷으로 만들어 입은 데서 由來합니다. 몽골에서는 이들을 코리(Kohri=고려)族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나중에 高句麗 建國의 主流가 됩니다.

지금도 日本에서는 貊이나 高句麗를 똑같이 ‘고마’라고 읽습니다. 우리말로 곰이라는 말이죠. 아마도 貊은 檀君신화에서 사람이 되는 곰(熊族)의 後裔이고, 濊는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虎族)의 後裔가 아닌가 합니다. 사람이 됐다, 되지 못했다는 것은 政權, 또는 그 社會의 主流가 되었다, 못되었다는 뜻으로 解釋됩니다. 高句麗는 雄(=곰)族의 後裔로 古朝鮮 5部 가운데 中部를 차지하고 산 主流였을 것으로 봅니다. 高句麗를 中國 사람들은 ‘까우리’, 또는 ‘가우리’라고 發音하는데, ‘가우’는 ‘한가위(一年의 한 가운데)’에서 알 수 있듯이 中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울’, ‘울타리’ 등에서 짐작되듯이 境界線을 意味합니다. 따라서 ‘가우리’는 中部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熊族은 古朝鮮의 主流를 이루며 살아갔고, 非主流인 虎族 가운데 一部는 中國으로 흘러들어가 주로 中國의 東北部와 東海岸을 따라 居住한 것으로 보입니다.

貊은 中國 책 《尙書》에 「華夏蠻貊」이라고 하여 中國人(=華夏族)과 區別하는 對象이 됩니다. 《周禮》에도 『四夷 八蠻 七閩 九貊 五戎 六狄之民』이라고 하여, 『사방에 오랑캐가 있는데, 8종의 만족, 7종의 민족 (주로 광동, 복건성 등 남중국 지역민), 9종의 貊족, 5종의 융족, 6종의 적족을 말한다』고 합니다. 貊족이 9종으로 가장 範圍가 넓습니다.

《漢書》 高祖(=劉邦)기엔 『貉(貊)在東北方 三韓之屬 皆貉類也 音莫客反이라고 나옵니다. 『맥은 (중국의) 동북방에 있으며 삼한에 속한 것은 모두 맥족으로서 「맥」으로 읽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부분 音莫客反은 『발음은 막객의 반절이다』는 뜻인데, 貊을 읽을 때, 莫에서 ‘ㅁ’을 따고, 客에서 ‘액’을 취해 읽으라는 意味입니다.

여기엔 說明이 必要할 것 같습니다. 약 6만5천여자가 收錄되어 있는 中國 玉篇을 보면 글자 하나하나에 發音記號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學’자를 찾아보면 中國人은 ‘轄覺切’로 發音을 表示하고 있습니다. 後漢때 사람 許愼(30~124년)이 지은 《說文解字》(한자 9천 여자가 수록돼 있음)이래 지금까지의 傳統입니다. 여기서 ‘切’은 反切, 즉, ‘轄覺切’이 ‘學’의 發音記號라는 것을 意味합니다. 첫 글자 할에서는 ‘ㅎ’만 취하고 두 번째 글자 각에서는 ‘’을 취해 읽으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학’입니다. 동녘 東자는 ‘德紅切’이라고 發音記號가 정해져 있습니다. 東자의 發音은 덕에서 초성 ㄷ을 따고, 홍에서 중성, 종성을 따서 합해 읽으라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동’입니다. 지금 중국 사람들은 學을 ‘쉐이’로, 東을 ‘뚱’으로 發音합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 漢字를 본래 音價대로 發音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일부에서는 貊을 固麻(=곰), 蓋馬의 다른 表記라고도 합니다. 日本은 韓國의 韓과 高(句)麗을 훈독할 때, ‘고마(貊)’라고 하고, 특별히 韓은 ‘가라’라고도 발음합니다. 일본어 가미(=神), 구마(=熊)도 본래 고마에서 왔다고 합니다. 南규슈 미야자키(宮崎)현에 ‘가라구니다케’라고 읽는 산도 있습니다. 漢字로 쓰면 韓國岳입니다. 加羅國의 山이라고 解釋할 수도 있습니다. 現在 우리말에는 동물 ‘곰(bear)’과 ‘장군 감’, ‘옷 감’이라고 할 때의 ‘감’ 정도로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튼 中國人이 濊貊으로 表記한 本來의 原音은 무엇이었을까요. 貊은 中國 發音으로 ‘하오’ ‘허’ ‘모’ 등으로 發音되는데, 듣기에 濊의 발음 ‘훠’ ‘휘’ ‘웨이’와 類似합니다. 알타이語에서는 ㅎ과 ㅅ이 交換됩니다. ‘兄’이 ‘성’, ‘향기롭다’가 ‘상기롭다’가 되는 것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예나 맥이나 모두 ‘쉬’ ‘쇠이’ ‘쇠’ ‘서’ 등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ㅣ, 쇠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금속, 즉 구리나 쇠(鐵), 金 등 △하늘을 나는 새(鳥) △해뜨는 東쪽(샛바람, 샛별, 새벽) △ㅣ(해), 히(해), 즉 太陽입니다. ‘해(태양)’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새’라고 發音했습니다. 고려 가요 청산별곡의 ‘가는 새 본다’는 대목은 ‘지는 해 본다’는 뜻입니다.

貊의 發音 가운데 ‘하오’, ‘허’ 등을 주목해 보면 일단 쇠(鐵), 또는 해와 關係가 있는 것으로 推定할 수 있습니다. 우리 民族의 天孫思想, 太陽崇拜思想, 새 토템을 비추어 봤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管子》에서는 貊을 ‘뵈’(毫 박 ․ bo, 영어 o위에 우무나우트)라고 하고 있고, 《春秋》, 《左傳》, 《史記》 등에는  또는 밝(發 ․ bak 또는 fa)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밝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태양)의 밝음을 의미하고 불(=火), 鳧庾, 不與, 扶餘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傳說的 우리 祖上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蚩尤는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로 되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書經》 孔傳에 『九黎(=九夷 句麗 高麗의 원음) 임금의 호가 蚩尤이다』라고 되어 있고, 司馬遷도 《史記》에서 蚩尤를 東夷 일파인 句麗의 君長이라고 쓰고 있습니다(※현재 중국 남부 지방 귀주성, 광서성, 운남성 등지에 사는 苗族은 蚩尤를 시조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특징은 中國人이 「銅頭鐵額」이라고 쓴데서 잘 나타납니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있는 그는 모래와 쇳가루를 먹고산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청동기로 만든 투구를 쓴 모습을 描寫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注目되는 것은 구리와 쇠입니다. 쇠는 濊貊의 濊나 貊과 發音이 비슷하고, 구리는 高句麗를 의미하는 句麗와 비슷합니다.

평생을 알타이 연구에 바쳐온 박시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高句麗의 高는 태양, 구리는 고을(골), 또는 銅이다. 鮮卑族의 後裔인 契丹의 의미인 쇠(=賓鐵), 쇠 金자를 쓰는 金나라의 金, 몽골의 원이름인 蒙兀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銀도 쇠의 일종으로, 모두 새 아침의 새(新), 날아다니는 새(鳥)를 상징한다.〉

말하자면 해(태양)에서 쇠(금, 철, 은, 구리, 새=鳥)와 불(火 ․ 부여)이 나오고, 또 그 해에서 아침(朝)이나 東쪽, 밝음(=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음 濊를 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옛날’이라는 단어는 ‘예의 날’의 준말입니다. ‘濊의 시대’라는 뜻이니까, 얼마나 오래 전의 이야기겠습니까. 濊의 본음은 ‘훠(숴)’, ‘휘(쉬)’, ‘웨이’로 貊보다 더 ‘쇠(서)’에 가까운 소리가 납니다. 전문가들은 ‘웨이’보다는 ‘훠’, ‘휘’가 古代 발음에 가깝다(유 엠 부찐 著 《古朝鮮》 1990년 소나무출판사)고 합니다. 濊는 ‘쇠’ 또는 구리, 은, 금 같은 금속이나 ‘새(해 뜨는 곳=東)’이라는 뜻으로 要約될 수 있습니다.

‘濊’와 ‘쇠’, 그리고 ‘東’이 같다는 증거가 《朝鮮王朝實錄》에 나옵니다. 世宗實錄 지리지에 『江陵은 본래 濊의 나라(國)로 鐵國이라고도 한다』고 했습니다. 鐵의 훈이 ‘쇠’ 또는 ‘서’이으므로 濊 또한 ‘쇠’나 ‘서’라고 發音한 證據입니다. 같은 책 鐵原조에 『철원은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인데, 고려 태조(王建)가 東州라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鐵原(=쇠벌)이 東州로 바뀐 것은 쇠(鐵)와 日, 東이 구별 없이 동시에 사용된 예입니다.

中國 宋나라 역사책《宋書》 高麗전에도 王建이 〈新羅를 東州 樂浪府로 삼아 東京이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새벌(서라벌)’이 ‘동쪽의 고을’이라는 뜻이니까, 東州라고 한 것입니다. ‘벌’에 대해서는 후에 ‘扶餘’편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濊도 쇠 또는 새로, 동쪽, 해가 뜨는 곳, 아사달, 아사다라, 아사나, 서라벌(새벌), 日本(해 뜨는 나라), 朝鮮과 같은 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檀君이 朝鮮의 도읍으로 삼았다는 ‘아사달’은 몽골어, 거란어로 확 트인 밝은 벌판이나 장소(나라)를 뜻하는 ‘아사다라’와 유사합니다. 이것도 결국은 ‘부여(=불, 벌)’입니다.

倭도 오늘날 日本이 아니라, 濊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倭는 본래 중국 遼寧省 서쪽 渤海와 沿接해 있는 綬中縣 六州河 변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이 中國 記錄입니다. 魏라고도 한 倭는 濊의 다른 音譯이라고 判斷됩니다. 그 理由는 中國의 古代書籍인 《山海經》에 〈倭는 燕에 속한다〉고 나와 있고, 《漢書》지리지에 〈樂浪의 바다(=발해) 가운데 倭가 있다〉는 記錄이 있기 때문입니다. 燕은 지금의 北京(옛 이름 燕京)을 包含한 遼西, 遼東에 있던 나라 이름이기도 하고 이 地域을 總稱하던 말입니다.

鮮卑族의 英主 檀石槐가 西紀 155년 河北省 長北地方을 根據地로 삼아 大帝國을 세운 후, 동쪽지방으로 쳐들어가 倭人에게 자맥질을 시켜 생선을 잡아다 進上토록 했다는 記錄이 있습니다. 倭가 지금의 日本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不可能한 일입니다.

倭라고도 하는 일단의 濊人(=虎族)들이 古朝鮮時代, 政治의 主流에서 밀려 中國 遼東半島 海岸, 山東半島 海岸으로 왔다가, 韓半島 西海岸과 남쪽을 거쳐 日本列島로 옮겨간 것으로 보입니다. 遼寧省 서쪽(=遼西)은 한때 百濟가 經略하여 차지했던 곳으로, 이곳에 살던 倭人(=濊人)들이 日本列島로 移住한 후에도, 三國 중 유독 百濟와 수백 년 간 좋은 關係를 維持한 것은 옛날에 같은 地域에 살던, 共通 言語를 가진 同族意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百濟가 스스로 ‘濊族’이라고 한 것을 想起해보면 더욱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이 部分은 百濟편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2011년 5월6일자 朝鮮日報에 이를 뒷받침하는 재미있는 記事가 하나 실렸습니다.

〈현대 일본어가 2200년 전, 한반도 등 아시아 지역 이주민들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공개됐다고 AFP가 5일 보도했다.

東京大 하세가와 도시카즈(長谷川壽一) 교수는 영국왕립학회보B(The Journal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에 실은 논문을 통해 이 같이 주장했다. 연구진은 日本語 가운데 오랜 기간 거의 변화가 없던 動詞, 數詞, 名詞 등 단어 210개를 뽑은 뒤 59개 방언과 비교하는 방법으로 日本語의 기원을 추적한 결과, 日本語는 韓半島에서 日本列島로 대대적인 이주가 이뤄진 기원전 200년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韓半島 출신 이주민들이 日本 原住民의 언어를 상당수 代替했다는 「일본 열도 외부 유입설」이라는 학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최근 고고학과 유전학적 조사를 통해서도 기원전 200년 전후로 韓半島 등에서 새로운 農業 기술과 도구를 갖고 건너온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의 농업 등 각종 생활뿐만 아니라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日本語가 韓半島 이주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7세기 중반) 멸망한 百濟의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갔을 때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 東夷

지금까지 ‘東夷’라는 말이 여러 번 登場했습니다. 東夷란 무엇이고, 어디서 由來한 것일까요. 廣義의 朝鮮 또는 朝鮮 민족을 意味하는 東夷는 辭典的 意味처럼 ‘동쪽 오랑캐’라는 뜻일까요?

後漢의 許愼은 그의 편저인 《說文解字》에서 『夷는 동방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글자의 형상이 바로 큼(大)과 활(弓)이 합쳐진 것이다』라고 풀었습니다.

孔子는 자신의 著書인 《禮記》에서 夷에 대해 다음과 같이 說明했습니다. 『東方曰夷 夷者抵也 言仁而好生 萬物抵也而出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동방(사람)을 夷라 한다. 夷는 뿌리이다. (그들은) 말이 어질고 호생지덕이 있다. 만물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천성이 유순하기 때문에 쉽게 道로써 다스려진다. 그래서 ‘군자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나라’라는 말이 있기에 이른 것이다.)』

五行은 순서대로 쓰면 水火木金土. 편의상 木金火水土로 바꾸면 방향으로는 東西南北中이며, 색으로는 靑白赤黑黃, 성질로는 仁義禮智信입니다. 朝鮮의 개국공신 鄭道傳이 漢陽에 定都한 뒤, 건립하고 이름 붙인 興仁之門, 敦義門, 崇禮門, 弘智門, 普信閣의 예에서처럼 동쪽(東夷, 東國)은 仁을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夷는 본래 仁과 같이 ‘어질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18세기 초 淸나라의 康熙帝 때 刊行된 《字典》이나 19세기 중반 發刊된 《說文通訓定聲》이란 文字硏究書는 모두 夷를 ‘어질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記錄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中國人들은 一般的으로 東夷를 北狄, 西戎, 南蠻과 함께 中國을 둘러싸고 있는 四方의 野蠻族 가운데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고 解釋해 왔습니다. 이 時期의 東夷족에는 濊, 貊, 韓系統의 우리 民族과 靺鞨(=女眞), 倭가 여기에 속했습니다. 現在 中國은 東夷를 야만스러운 오랑캐라는 뜻으로만 訓합니다. 獨立的으로는 ‘뚱이’라고 發音하고 ‘도둑’이라는 意味로 씁니다. 우리가 中國(人)을 뜻하는 漢을 惡漢, 怪漢, 痴漢, 無賴漢 등 大部分 나쁜 意味로 使用하는 것과 같은 理致랄까요.

‘東夷’라는 表記가 처음 登場한 것은 《後漢書》 ‘東夷’列傳’입니다. 《後漢書》는 南宋시대(424~478년) 范曄이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後漢書》는 우리 民族에 대해 가장 歪曲된 表現이 많은 역사책입니다. 그 전까지는 우리를 東國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東方君子之國, 또는 東方禮義之國의 略字입니다.

孔子의 예에서 보듯 기원 누백 년 전부터 中國은 우리나라를 ‘군자가 끊이지 않고 배출되는 나라(君子不死之國)’, ‘예의가 살아있는 나라’라고 칭송했습니다. 《論語》 子罕편을 보면 春秋時代를 살던 孔子는 臣下가 君主를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해치는 禮의 紊亂함을 恨歎하며, 『欲居九夷(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했고, 『乘桴浮于海(뗏목이라도 타고 (구이가 있는) 바다로 떠나고 싶다)』라고도 했습니다. 당시 孔子가 말하던 九夷는 물론 韓半島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東夷族들이 群居하던 山東半島를 비롯한 中國 동해안 일대를 일컬었습니다. 九夷는 畎 方 于 黃 白 赤 玄 風 陽夷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孔子같은 聖人이 夷를 그토록 尊崇했을까요. 우리 民族은 예로부터 활(=貊弓이라 함)을 잘 만들었고, 잘 쏘았습니다. 歷代 中國의 王朝에서는 東夷의 활솜씨를 두려워했으며, 활 제작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貊弓의 일종인 쇠뇌 만드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책에 실려 있습니다. 기술자가 唐나라에 붙잡혀가 기술을 전수하도록 강요받았으나 이에 불응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사실을 《三國史記》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文武王九年冬 唐使到傳詔 與弩師仇珍川沙湌廻 命造木弩 放箭三十步 帝問曰聞在爾國 造弩射一千步 今纔三十步何也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本國則可以作之 天子降使求之 卽遣福漢大奈麻獻木 乃命改造射之六十步 問其故 答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 天子疑其故不爲 劫之以重罪而 終不盡呈其能〉

唐나라 高宗 李治는 新羅와 손을 잡고 660년 百濟, 668년 高句麗를 멸망시킨 다음, 韓半島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 新羅와 一戰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羅唐결전 1년 전인 669년 東夷의 활 제조법을 배우려고 新羅의 技術者를 强制로 데려갔으나 쇠뇌를 만드는 技術을 傳受받는데 失敗했다는 內容입니다.

그렇다면 활의 歷史를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우리나라 上古시대엔 사람이 죽으면 긴 띠 풀로 屍身을 싸고 묶어 들판에 버렸습니다. 이를 草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草葬을 치르고 肉脫이 된 후, 遺骨만 따로 모아 무덤에 묻었습니다. 지금도 쓰이는 장사지낼 ‘葬’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死자를 풀(=艸)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屍身을 들판에 버리면 썩기 전에 짐승들이 와서 뜯어먹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보다 못한 어떤 孝子가 나뭇가지에 줄을 메고 싸릿대 화살(=楛矢)을 만들어 屍身을 지켰습니다. 죽은 사람을 弔問한다는 弔자는 활에 화살을 메기고 있는 形狀의 글자입니다. 우리 祖上들은 사람이 죽으면 맨 먼저 활과 화살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中國 사람들은 弔자 대신, 吊(적, 조)자를 使用합니다. 弔問한다는 弔자를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아무튼 이런 孝道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회로부터 尊敬받았을 것입니다. 맨 처음 활을 만들어 父母의 屍身을 지킨 사람의 사람이 東夷족의 大씨였다는 것이 中國의 記錄입니다. 大씨가 활(弓)을 든 形狀을 그린 것이 夷자라는 것입니다. 孝란 어진 마음이 없어서는 지킬 수 없는 법입니다. 夷가 왜 ‘어질다’는 의미인지 설명이 됐으리라 믿습니다.

大씨의 原始祖上에 大庭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아들이 大款인데, 처음으로 埋葬法을 施行했다고 합니다. 大款의 아들이 孔子가 높이 評價한 大連과 小連 兄弟입니다. 이들은 父母喪을 잘 치러 稱讚이 藉藉했고 그들이 행한 삼년상, 시묘살이 등 喪禮法이 最近世까지 전해 내려왔습니다. 渤海를 세운 大祚榮은 이 大씨의 遠孫이라고 합니다. 현재 韓國에 살고 있는 太씨가 바로 大씨의 變姓입니다.

孔子는 《禮記》에서 『孔子曰 大連小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朞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라고 했습니다.

 

▲ 扶餘

扶餘는 본래 불(火)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의 長音이 夫婁, 扶餘, 鳧庾, 不與, 卑離, 夫里, 沸流 등으로 表記됐습니다. 불에서 나온 扶餘는 벌판에서의 ‘벌’이며, 미추홀(仁川의 옛 이름), 매홀(水原의 옛 이름)에서처럼 ‘홀’입니다. (나라를 세울 만한) 넓은 평야지대(=아사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扶餘’는 곧 ‘나라(=國)’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보다 작은 規模가 골, 고을이며 그 아래 규모가 마실, 마을로, 日本에는 ‘마치(町=우리나라의 洞에 해당)’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中國 記錄에 登場하는 扶餘는 《山海經》의 不與, 《逸周書》의 符婁, 《史記》의 夫餘, 《論語》 注疎의 鳧庾 등 입니다. 당시 古代 漢字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共通發音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입니다. 「부르」는 더 길게 「부유」로 發音됩니다. 불의 象徵은 해(=太陽)입니다. 해모수나 해부루 등에서 보듯 해는 姓씨라기보다 太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太陽과 가까운 해못, 햇불이라는 뜻입니다. 高句麗의 始祖 朱蒙의 성씨인 解, 百濟의 8大 姓씨(眞 沙 解 國 木 燕 協 苗)의 하나로 꼽히는 解씨도 漢字로 빌려 表記한 것일 뿐, 모두 太陽(의 자손=天孫族)이라는 뜻으로 使用한 것입니다. 나라이름 渤海도 지금의 中國 東南部나, 黃海 北部海域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밝(은) 해」라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나라 이름으로서의 扶餘는 朝鮮 못지않게 오래된 이름입니다. 陳壽(233~297년)가 지은 《三國志》 魏志 扶餘傳 따르면 古朝鮮 때부터 그 이름이 나오며 5세기말, 高句麗에 完全 滅亡당할 때까지 1,000년 가까이 持續되어온 古代 朝鮮族 국가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부여는 중국 만리장성 북쪽에, 현토로부터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가 있고,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에 닿아 있다. 북쪽엔 신선들이 산다는 흑룡강이 있다. 땅 넓이는 2,000 여리요, 인구는 8만戶인데 본래 濊 땅이다. 사람들은 유달리 크며 성품이 용감, 근엄하고 후덕하다. 임금이 4부(馬加 牛加 豬加 狗加) 귀족의 도움을 받아 정치를 한다. 정월에는 祭天의식을 행하는데, 그 이름을 迎鼓(=맞이굿)라 했다. 흰 빛(=햇빛)을 숭상해서 흰 베로 만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임금이 가진 보물 가운데 印章이 있는데, 「濊王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扶餘라는 말의 由來가 오래됐다는 것은 檀君이 아들 이름을 扶餘로 지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一然이 지은 《三國遺事》의 高句麗편 檀君記에 〈檀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 要親有産子 名解扶婁〉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高句麗의 시조 朱蒙이 河伯의 딸 柳花부인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神話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요. 百濟 建國神話도 扶餘, 高句麗 建國神話와 大同小異합니다. 사람이름만 조금 다를 뿐, 똑같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西河’라는 單語는 本來 ‘華夏’ 以前, 中國을 意味하는 ‘西夏’와 같은 發音이어서 示唆하는 바가 있습니다. 朴成洙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檀君은 扶婁에 이어 扶蘇, 扶虞, 扶餘 등 세 아들을 더 낳았다고 합니다.

몽골, 돌궐, 동이 등 中國이 匈奴라고 指稱한 東北方 騎馬民族들은 指導者의 出自를 重視했습니다. 반드시 天孫이거나, 하늘과 關聯이 있는 사람의 血統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몽골은 (黃)金씨(칭기즈칸도 (黃)金씨), 돌궐은 阿史那씨, 女眞은 金씨(金의 시조 아골타, 後金의 시조 누루하치는 모두 金씨)가 아니면 單于나 可汗이 될 수 없었습니다.

東夷의 경우는 하느님의 直系 子孫이거나, 하늘과 관련이 있는 새(=하늘과 인간의 매개체)의 알에서 태어나야만 王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建國 始祖 가운데 檀君은 하느님(=桓因)의 아들, 桓雄의 아들이니까, 하느님의 孫子이고, 高句麗의 始祖 朱蒙, 新羅의 始祖 朴赫居世, 昔脫解, 金閼智, 伽倻의 시조 金首露왕 등은 (새의)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東夷족이 세운 것으로 公認되고 있는 中國 殷(=商)나라의 始祖도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淮南子》 墮形訓 注書에 〈天使玄鳥上郊 簡狄呑之以卵生契 是爲玄王 殷之祖也〉라고 했습니다. 契는 자라서 禹를 도와 治水에 힘쓴 功勞로 司徒(오늘날 교육부 장관)에 任命받고 商이라는 封土와 함께 子씨를 賜姓받았으니, 그의 14世孫이 殷을 建國한 湯이라고 《史記》 殷 本紀는 밝히고 있습니다. 中國, 東南亞에도 卵生說話가 있으나 그 알은 우리와 달리, 뱀의 알입니다. 中國 建國神話에 새의 알에서 나온 유일한 예가 殷 시조 說話입니다. 殷이 東夷족이라는 證據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史記》의 著者 司馬遷은 『殷曰夷 周曰華』라고 했던 것입니다.

廣開土大王碑에 따르면 『옛적 시조 鄒牟(=朱蒙)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부여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었다』고 했고, 《三國史記》도 朱蒙이 天帝(=檀君)의 아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朱蒙이 天孫이니, 朱蒙의 아들인 百濟의 시조 溫祚는 당연히 天孫입니다.

百濟는 왜 王姓을 扶餘라 했고, 한 때 나라이름을 南扶餘라고 했을까요. 百濟의 王姓은 初期엔 解씨로 쓰다가 나중에 扶餘(또는 餘)로 바꾸었습니다.

史書상 扶餘, 또는 餘를 처음 姓으로 쓴 임금은 13대 近肖古王(재위 346~375년)입니다. 《晋書》를 포함한 中國 역사책에 近肖古王은 성명이 餘句로 나옵니다. 이때부터 百濟가 强力한 中央集權 國家로 發展했다든가, 對外的으로 國家로 認定받았다든가, 또는 以前과 다른 새로운 王統이 誕生했다는 象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近肖古王의 아들인 14대 近仇首왕은 餘須, 16대 辰斯왕은 餘暉, 17대 阿莘왕은 餘修, 18대 腆支왕은 餘映, 20대 毘有왕은 餘毘, 21대 蓋鹵왕은 餘慶, 24대 東城왕은 餘太(또는 牟大), 25대 武靈왕은 餘隆, 26대 성왕은 餘明, 27대 威德왕은 餘昌, 29대 법왕은 餘宣이라고 표기하다가, 《隋書》, 《唐書》때부터 위덕왕의 아들(손자라는 설도 있음)인 30대 武왕을 扶餘璋으로 하여 扶자를 하나 덧붙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왕 (扶餘)義慈의 아들 이름이 역사에 扶餘隆, 扶餘豊, 扶餘勇으로 나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래의 姓은 扶餘 또는 夫餘인데, 中國人들이 높임말을 의미하는 夫(孔子를 높여 孔夫子라고 함)를 빼고 餘만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百濟는 扶餘를 이었고, 扶餘는 檀君朝鮮을 이었다고 했으니, 百濟는 檀君朝鮮을 繼承한 셈입니다. 扶餘라는 나라에서 나온 扶餘씨가 세웠으니 國名을 扶餘라고 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당시는 지금 같은 큰 나라가 아니라, 도시국가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국명이 곧 도읍지 이름이요, 도읍지 이름이 곧 국명이었을 것입니다.

본래 ‘濊의 땅’이라 했던 扶餘는 만주 송화강가에 있는 하르빈(현재 黑龍江省의 省都 하얼빈=홀본의 우리 발음. 흔히 졸본부여라고 하는데, 졸본이 아니라 홀본임)을 중심으로 한 나라였습니다. 朱蒙이 扶餘에서 떨어져나가며, 高句麗(=홀본부여)와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끝내는 高句麗의 손에 滅亡당하고 맙니다.

百濟는 高句麗에서 떨어져 나왔으면서도 高句麗가 아니라, 扶餘의 後裔를 自處했습니다. 高句麗에 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始祖 溫祚가 朱蒙의 아들이 아니라는 反證일 수도 있습니다. 扶餘에서 高句麗를 거쳐 수 천리 떨어진 中國 東海岸, 韓半島 서남쪽까지 밀려온 百濟 사람들은 母國 扶餘를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檀君의 아들 이름이었던 扶餘를 王姓으로 삼았으며, 26代 聖王이 公州에서 扶餘로 遷都하며 國名을 한 때나마 南扶餘라고 한 것입니다. 그 수도(=소부리=솝울=서울) 이름이 오늘날 扶餘인 것은 어쩌면 當然한 歸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百濟인들은 이마저 성에 차지 않아 북쪽을 가로막아 扶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산의 이름마저 檀君의 둘째아들 이름을 따 扶蘇산이라 했습니다. 扶蘇산은 100여m 밖에 되지 않는 丘陵에 不過하지만, 지금도 그렇듯이 그 옛날 扶餘國의 아사달처럼 소나무가 우거진 산입니다.

소나무는 우리 民族과 密接한 關係가 있습니다. 옛 扶餘국의 中心을 흐르는 솔꽃강(松花江)은 白頭山 天池에서 發源하여 북서쪽으로 약 1,960km를 흐르다 黑龍江과 合流, 東海로 빠집니다. 流域에는 江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소나무를 비롯한 森林이 茂盛합니다. 高麗의 首都 開城에는 松嶽山이 있습니다. 소나무는 추위에 잘 견디고 材質이 단단해 木材와 장작, 棺槨으로도 쓸 수 있는 보배입니다. 가축으로 말하면 소(牛)에 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나무라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말 학자 행촌 이암이 지었다는 《檀君世紀》에 따르면 檀君이 建國한지 50년만인 西紀前 2284년 송화강이 氾濫해 큰 洪水가 났다고 합니다. 이때 檀君의 長男 扶婁는 治山治水의 공을 세워 農民을 定着시켰습니다. 扶婁는 中國 임금 禹가 王이 되기 전, 이때 攄得한 治水法을 傳受했다는 記錄이 있습니다. 《世宗實錄地理志》의 평양부조, 朝鮮朝末 魚允迪이 편찬한 《東史年表》 단군67년조, 중국 책 《淮南子》 元道訓편에 <禹王 自扶婁 受金簡玉牒 禹會諸侯塗山也>라고 했습니다. 〈금간옥첩〉에는 治水法과 洪水豫防法 등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檀君의 차남 扶蘇는 불을 지펴 洪水로 浸水된 땅을 말리고, 農地를 開墾하는 方法을 考案해 낸 것으로 전해집니다. 『부소는 마른 쑥에 다쇠와 돌을 쳐서 불을 만들었다(以乾丈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고 朝鮮 숙종 때 사람, 北涯子가 지은 《揆園史話》는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불을 붙이는 도구에는 扶蘇라는 이름을 붙여 쇠를 부싯쇠(扶蘇鐵), 돌을 부싯돌(扶蘇石), 쑥을 부싯깃(扶蘇羽)라고 부름으로써 扶蘇의 공을 기리고 있습니다.

高句麗는 물론 扶餘와 密接한 關係가 있습니다. 위에서 밝혔듯 廣開土大王碑는 確實하게 始祖 鄒牟가 扶餘 出身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三國史記》 백제본기 蓋鹵王(재위 455~475년)편을 보면 473년 北魏의 皇帝에게 國書를 보내면서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라고 했습니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百濟의 王室은 高句麗와 함께 扶餘에서 나왔으므로 姓을 解씨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檀君 아들들의 이름 첫머리가 解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三國史記》에는 高句麗의 始祖 朱蒙이 성을 高씨로 했다고 하지만, 高는 大韓國의 大처럼 「위대한」이라는 접두 雅語이고 姓은 解씨인 것입니다. 朱蒙이 天帝(천제=檀君)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天帝인 그 아버지가 解慕漱 아닙니까. 실제 姓을 高씨로 쓰기 시작한 왕은 6대인 太祖王때부터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高句麗도 百濟를 한 핏줄로 보고 있습니다. 광개토왕비에 百濟를 ‘殘’이라고 표현한 것은 高句麗가 멸망시킨 「(부여의) 잔당」이라는 뜻입니다. 드러내놓고 扶餘를 표기하지 않은 것은 高句麗도 扶餘를 뿌리로 하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新羅는 어떨까요. 新羅인이 秦의 망명인(=秦之亡人)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일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대부분은 朝鮮의 유민, 다시 말하면 扶餘族입니다. 《三國史記》에 『신라인은 조선의 유민』이라고 나옵니다. 新羅의 異稱이며 수도의 이름인 서라벌은 ‘새벌’을 漢字로 표기한 吏讀語입니다. 새는 東쪽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벌은 火, 喙(훼 ․ 새의 부리), 發, 卑離, 夫里라는 漢字로 표기됐고, 벌판(野 또는 原)이라는 뜻입니다. 日本語 하라(탁음은 바라 ․ 原)도 같은 어원을 갖습니다.

참고로 방향을 나타내는 순수한 우리말을 보면, 西는 「한」, 南은 「마」, 北은 「노」입니다. 西風, 南風, 北風을 하늬바람, 마파람, 높새바람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東風은 당연히 샛바람입니다. 새벽 동쪽 하늘에 떠 있는 金星을 샛별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새벽도 마찬가지입니다.

扶餘가 불(火), 벌(原)의 長音이니까 새벌(=서라벌)은 東扶餘와 동의어입니다. 古朝鮮이 멸망한 후, 유민들이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두 갈래로 갈라져 서남쪽으로 간 사람들은 馬韓을, 동쪽으로 간 사람들은 새벌(=東扶餘)을 세운 것입니다.

앞의 濊貊편에서 말씀드렸지만, 中國 宋나라 역사책《宋書》 高麗전에도 王建이 〈新羅를 東州 樂浪府로 삼아 東京이라고 불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새벌(서라벌)’이 ‘동쪽의 고을’이라는 뜻이니까, 동녘東, 고을 州를 써서 東州라고 한 것입니다. 州는 고을, 벌판, 벌, 불, 부여를 뜻하니까 東州는 東扶餘와 같은 말이 됩니다.

三國의 뿌리가 같다는 중요한 증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말이 서로 통했다는 점입니다. 新羅의 金春秋가 642년 高句麗로 淵蓋蘇文을 만나러 潛行했을 때, 통역을 데리고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통일신라 시절, 渤海의 사절이 日本을 자주 찾았는데, 渤海의 사신과 日本 조정 사이에서 통역을 맡은 사람은 (통일)신라의 유학생이었다는 《日本書記》의 기록이 있습니다. 高句麗를 계승한 渤海의 말과 新羅의 말이 다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언어가 分化하기 전인만큼 지금의 함경도 방언과 경북 방언보다 오히려 더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百濟와 新羅는 薯童謠를 서라벌에 퍼뜨려 眞平王의 딸 선화공주와 혼인했다는 무왕설화에서 알 수 있듯, 言語 疏通에 문제가 없었다고 보입니다.

唐나라 때, 李延壽라는 사람이 編纂한 《南史》는 中國 魏晋남북조시대(420~589년), 南朝의 宋, 南齊, 梁, 陳 등 네 王朝의 歷史를 記錄한 책입니다. 거기에 法興王(재위 514~540년) 時代의 新羅를 說明하는 部分이 있습니다.

〈其拜及行 與高麗相類〉와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입니다. 윗부분은 〈절을 하는 모습과 살아가는 행태가 고구려와 비슷하다〉, 아랫부분은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새김으로써 서로의 신표를 삼았고, 말은 백제가 통역을 해줘야 통했다〉는 뜻입니다. 新羅와 高句麗가 풍속과 예절이 같았다는 것은 같은 종족이라는 뜻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특히 百濟人은 新羅人의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中國語로 통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百濟와 高句麗가 서로 말이 통했다는 자료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 역사책 《梁書에 〈語言衣服各同高麗 (언어와 의복은 각각 고구려와 같다〉는 대목입니다. 이 자료는 三國의 말이 서로 통했다는 客觀的 證據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高句麗, 百濟, 新羅 三國이 모두 古朝鮮의 遺民이고, 古朝鮮을 이은 扶餘사람들이 세운 나라였으니 말이 통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 百濟

오늘날 扶餘가 象徵하는 나라는 百濟입니다. 저는 百濟를 좋아합니다. 三國統一을 完成한 新羅도 위대한 나라지만, 저는 文化大國으로서 百濟를 사랑합니다.

敗戰國이라서 徹底히 破壞돼 오늘날 남은 文化遺産이 거의 없고 歷史書마저 徹底히 忘失돼 오늘날 그 眞面目을 알기가 힘듭니다. 겨우 新羅史 中心으로 쓰인 金富軾의 《三國史記)》와 각자 자기들 입장에서 쓴 中國이나 日本의 일부 史書를 依存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단 몇 가지만으로도 百濟는 偉大한 나라였다는 證據를 分明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1971년 忠南 公州에서 偶然히 發見된 武寧王陵입니다. 武寧王陵의 價値는 想像을 超越합니다. 慶州 隣近, 그리고 옛 高句麗 땅에서 그 많은 王陵이 發掘됐지만, 正確히 누구의 무덤이라고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武寧王陵에서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은 百濟의 斯麻王(사후 廟號는 武寧王 ․ 재위 501~523년)이 묻혔다고 정확하게 기록된 墓誌石이 나왔습니다. 誌石에는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 壬辰 崩, 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 甲申 安曆登冠大墓〉라는 銘文이 구어서 만든 네모난 자기판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7일 붕어하셨다.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이르러 (3년상을 마치고) 안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영동대장군이라는 직함은 中國 南朝 가운데 하나인 梁나라(502~557년)의 역사책 《梁書》에 梁나라 창업자 武帝가 餘隆(武寧王을 중국에서 부른 이름)에게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武寧王陵은 한반도를 포함, 과거 東夷족의 나라였던 곳에서 발굴된 王陵가운데 王名이 밝혀진 唯一한 例라는 側面에서도 重要하지만, 그 외에 대단한 端緖를 提供하고 있습니다. 바로 墓誌石에서 나온 「崩」이라는 表現입니다.

孔子가 지은 《禮記》에는 죽음에 대한 呼稱이 身分에 따라 明記되어 있습니다. 〈天子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입니다. 崩은 天子가 죽었을 때만 쓸 수 있었고, 封土를 가진 公, 侯, 伯, 子, 男爵은 薨, 벼슬아치는 卒, 선비는 不祿, 평민은 死라고 했습니다. 이는 上代 律令社會에서 누구도 어길 수 없는 嚴格한 規律이었습니다.

그런데 武寧王의 죽음을 「崩」이라고 表記했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당시 百濟에는 中央인 泗沘에서 全國을 統治하는 統治者 以外에 地域別로 여러 명의 王과 侯가 있었습니다. 日本 사카모토 오시타네(坂元義種) 교수의 「5세기의 百濟大王과 그 王侯」라는 論文에는 『옛날 百濟에는 弗斯侯, 八中侯, 都漢王, 阿錯王, 邁廬王, 避中王 등 지명을 곁들인 王侯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南齊書》라는 中國 역사책의 百濟國傳에 더 상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武帝 永明 8년(490년)에 東城王이 臣下들의 論功行賞을 한 內容의 表文를 올려 『寧朔將軍 面中王 姐瑾을 冠軍將軍 都將軍 都漢王에, 建威將軍 八中侯 餘古는 寧朔將軍 阿錯王에, 建威將軍 餘歷은 龍驤將軍 邁廬王, 廣武將軍 餘固는 建威將軍 弗斯侯에 임명했다』고 했고, 495년에는 침략한 (鮮卑族의) 魏軍을 무찌른 공로로, 『沙法名을 行征虜將軍 邁羅王에, 贊首流를 行安國將軍 辟中王에, 解禮昆을 行武威將軍 弗中侯에, 木干那는 行廣威將軍 面中侯에 임명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王은 면중왕, 도한왕, 아착왕, 매려왕, 매라왕, 벽중왕, 侯는 팔중후, 불사후, 불중후, 면중후입니다. 百濟의 최고 통치자가 王과 侯를 임명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百濟는 韓半島 西南部 뿐 아니라, 中國의 東部 海岸, 倭 등을 統治하는 大洋帝國이었다는 中國 南朝時代의 記錄 등을 살펴볼 때, 百濟는 大王 또는 皇帝가 다스린 나라였을 可能性이 매우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월간조선이 운영하는 pub.chosun.com에 쓴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2014년 10월24일자 조선일보(朝鮮日報) A2면에 백제(百濟)와 관련된 기사가 전면을 장식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금동신발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신발이 전남 나주시 다시(多侍)면 복암(伏岩)리 부근 정촌 고분에서 출토됐다. 지난해부터 정촌 고분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올해 이곳 돌방무덤 3기에 대한 내부 발굴 조사에서 백제 금동신발을 비롯해 금제 귀걸이와 금제 장신구, 마구(馬具), 화살통 장식, 화살촉, 옥, 석침(石枕=돌베개)과 각종 토기류가 쏟아져 나왔다며 10월 23일 유물을 공개했다. 백제 금동신발로는 17번째 출토품이다.

금동신발은 길이 32㎝, 높이 9㎝, 너비 9.5㎝의 크기로, 발등 끝 부분에 용머리 장식이 올려졌는데, 이런 장식의 신발 출토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신라를 통틀어 처음이다. 용머리 장식은 대롱처럼 연결돼 탈 ․ 부착할 수 있게 했는데, 한 짝은 용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한 짝엔 온전히 남아 있다. 발목 부분에는 금동판으로 된 덮개를 부착했고 바닥에는 스파이크 모양의 징 23개를 붙였다. 바닥 한복판에는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한 연꽃무늬가 있고 연꽃 중앙에는 꽃술을 새겼다. 연꽃의 앞뒤에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용 얼굴 2개가 정면으로 묘사돼 있는데 용의 머리에 난 뿔과 귀, 코, 이빨까지 보인다.

무덤 주인공은 당시 영산강 유역의 유력한 지방세력이었던 걸로 보인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백제 중앙에서 제작해 내려준 장례 하사품으로 보인다”며 “용머리 등 화려한 장식을 보면 소유자의 특별한 지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결론은 이번의 전남 나주를 비롯하여 과거 충남 서산, 전북 익산, 전북 고창 등지에서 발굴된 금동신발은 기사에서처럼 중앙에 군림하는 百濟의 대왕이 하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왕이 임명한 지방의 王(또는 侯)이 직접 만들어 신던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무튼 武寧王陵에서 나온 遺物은 108종 2,900여점에 이르며, 王과 王妃의 金冠 및 金製 冠裝飾, 金製 귀걸이, 목걸이, 청동거울, 배게, 足枕 등 國寶로 指定된 것만 12점이나 됩니다. 벽돌을 구어서 만든 塼돌 무덤은 新羅나 日本이 技術者 派遣을 要請했다는 歷史的 記錄과 符合할 만큼 百濟시대의 높은 建築 水準, 藝術的 感覺을 생생하게 雄辯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다른 國寶를 壓倒하는 百濟 遺物은 「百濟金銅大香爐(국보287호)」입니다. 1993년 12월 扶餘의 羅城밖 陵山里 古墳群 遺蹟地에서 工房터를 發掘하던 扶餘博物館 申光燮(전 국립민속박물관장 ․ 역사발물관 준비단장)관장은 水曹 웅덩이에 겹겹이 쌓인 기와조각 더미 밑에서 香爐 하나를 發見했습니다. 엄청난 寶物임을 直感한 申 관장은 香爐를 품에 안고 扶餘博物館으로 달려갔습니다. 報告를 받은 鄭良謨 당시 국립박물관장 등 專門家들이 즉시 扶餘에 내려왔습니다. 香爐를 確認한 이들은 한결같이 『생김새는 中國 漢나라 때 流行한 博山香爐와 비슷하지만, 細部的인 技術과 藝術性에서 典型的인 百濟의 作品이며, 크기나 製作技法에 있어 完璧한 아름다움을 지닌 國寶 중 國寶』라고 評價했습니다.

鄭良謨 국립박물관장은 『1971년 武寧王陵 발굴 이후, 百濟 考古學이 거둔 最大의 成果로 우리나라 古代史의 硏究는 물론 동아시아의 고대문화 硏究에 劃期的 資料』라고 讚嘆했습니다. 일부 人士들은 百濟와 文化交流가 많았던 中國 梁 나라 輸入品일 것이라고 貶毁하는 發言을 하기도 했지만, 中國 學界에서조차 이 香爐는 中國의 작품이 아니라고 否認했습니다.

보통의 향로는 높이가 20cm 내외인데 비해, 이 향로는 60cm가 넘는 대형인데다, 향로의 뚜껑에는 東夷의 상징 새인 鳳凰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고, 74개의 산봉우리와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새겨져 있으며, 말을 타고 사냥하는 등의 인물 16명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鳳凰 외에도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종의 동물들, 6개의 나무, 12개의 바위, 시냇물, 폭포, 호수 등 사람과 동물, 자연이 어우러진 신비한 풍경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몸통에는 연꽃잎이 3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고, 그 사이에는 물고기, 사슴, 鶴 등 26마리의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닥에는 中國의 상징인 龍이 조각되어 깔려 있습니다. 우리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이 향로는 밀가루나 진흙을 손으로 반죽하듯 만든, 정말 뛰어난 걸작입니다.

그렇다면 향로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가격을 정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으나 간접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수치로 보험산정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國寶가 움직일 때 보험료가 매겨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반 國寶는 보험산정액이 50억~10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향로는 450억~500억 원이나 된다는 것이 국립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보통 國寶보다 보험료를 5~10배 이상 내야 외출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향로는 始價가 500억 원 정도일 것이며, 終價가 얼마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 가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향로의 뚜껑에 턱 하니 버티고 서 있는 鳳凰에 대해서는 별도의 소론이 필요합니다.

李明博 대통령 취임 초의 일입니다. 대통령의 鳳凰 문장이 너무 화려하다며 鳳凰을 없앤다는 말을 듣고 李 대통령의 측근에게 鳳凰의 역사적 유래를 알려주고 존치여부를 함부로 결정하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충고가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다행히 그 뒤로는 鳳凰을 없앤다는 말이 쑥 들어갔습니다.

다음은 제가 鳳凰의 유래에 대해 朝鮮日報 OB들이 만드는 《朝友會報》에 쓴 글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文章은 鳳凰이다. 봉황 한 쌍과 무궁화가 대통령의 문장으로 채택된 것은 1967년 朴正熙 대통령이 재선되던 해다. 무궁화는 1963년 국가 문장으로 제정된 것이고, 여기에 봉황을 더해 대통령의 문장으로 만든 것이다. 봉황을 대통령의 상징으로 쓰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봉황은 龍과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새로서, 고대 東夷족들이 일찍부터 숭배해온 神鳥이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찾아가보자. 古代史 연구가인 文定昌(1899~1980년)씨는 1969년에 발간한 「漢民族 形成에 관한 硏究」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中國 민족인 西夏족이 시조로 꼽고 있는 黃帝 軒轅씨는 東夷족인 炎帝 神農씨와 神農씨의 뒤를 이어 東夷족의 수장이 된 치우를 물리친 후, 東夷족을 끌어안는 화합정책을 취해 부락연맹을 결성했다. 東夷족의 대표는 봉황을 토템으로 삼은 少皥 金天씨요, 西夏족의 대표는 용을 토템으로 하는 黃帝씨였다. 兩 부족은 봉과 용을 한 폭에 마주보게 그려낸 기치를 만들었으니, 중국 고대사 연구가인 대만의 徐亮之 교수는 그의 저서 《中國史前史話》에서 이를 용봉 圖騰(=토템)이라 했다.

徐亮之 교수의 《中國史前史話》의 原文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黃帝時代 乃一南北戰爭結束 東西聯盟開始的時代, 聯盟的主體 東方是鳳圖騰的東夷, 西方是龍圖騰的西夏, 東夷以掌握最高圖騰氏的少皥爲代表, 西夏以掌握最高圖謄黃龍氏的黃帝爲代表

中國 사람조차 鳳凰이 東夷족의 상징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鳳凰은 특히 9개의 東夷(九夷=句黎, 句麗, 高麗의 原語) 가운데 한 갈래인 風夷족의 상징이었다. 鳳凰은 바람의 새, 혹은 음악과 가무의 새로 불렸다. 甲骨文의 봉새 「鳳」자와 바람 「風」자는 같은 글자였다. 풍이족은 봉황을 하늘의 사자인 神鳥로 받들어 숭상했다. 그 때문에 中國 책 《說文》에도 「鳳은 神鳥인데 東方 君子의 나라(=東方君子之國=東國)에서만 나온다」고 했다. 봉의 암컷을 凰이라고 하는데 모계사회였던 風夷족은 수령의 이름을 凰에서 几를 벗겨낸 皇으로 일컬었다. 훗날 皇이 皇帝라는 단어에서 보듯 군장의 호칭이 된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새는 新이고, 鳥이자, 해(日)이며, 태양이 떠오르는 東쪽을 의미한다. 扶餘, 高句麗, 百濟, 新羅, 駕洛의 시조들은 새 알(=해의 알)과 관련돼 있다. 우리를 東夷족이라고 하고 그 중에서도 「새족」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太陽)는 高麗 때까지만 해도 새라고 발음했다. 高麗의 가곡 〈청산별곡〉에 「가는 새 본다. 가는 새 본다. 물아래 가는 새 본다」는 지는 해를 본다는 뜻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해를 숭상하고 스스로 해의 자손이라고 여긴 고대 東夷족들은 해가 뜨기 전에 우는 수탉을 일종의 태양 새로 여겨 숭배했다. 태양 새로서 鳳凰의 관념은 古代 東夷족의 태양 숭배와 새(鳥)토템 사상이 융합되어 발전된 결과로 보인다.

鳳凰은 우리 역사에서 한순간도 단절됨 없이 지속적으로 표현돼 왔다. 高句麗 고분벽화의 三足烏, 百濟 금동대향로의 뚜껑에 떡하니 버티고 선 鳳凰, 新羅 瑞鳳塚 출토 금관의 새 무늬 장식, 高麗의 봉황문 銅鏡과 석관 상부에 표현된 鳳凰, 朝鮮 궁궐의 正殿 앞 층단 중앙 踏道의 봉황문과 정전 천장에 장식된 鳳凰 등이 그 대표적인 보기다. 오늘날에는 대통령의 문장 및 국새 장식의 鳳凰 등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東夷족이 세운 殷(=商)나라의 갑골문에는 鳳凰이 上帝(=하느님)의 使者임을 나타내는 卜辭가 있다. 『상제께서 봉황을 내려 보내셨다(=帝史鳳)』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史는 使와 같은 글자다. 봉황이 나타나면 세상이 크게 평안해진다는 傳承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鳳凰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말이다. 鳳이라는 단어는 中國 사람들조차 東夷족의 책으로 인정하는 《山海經》에 처음 나온다. 이 책은 朝鮮, 肅愼, 貊國, 蓋國 등 고대 韓민족의 나라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古書다.

高句麗 등 韓國의 上古史를 中國 歷史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中國의 東北工程을 고려할 때, 中國人의 상징인 龍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鳳凰 같은 상징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鳳凰을 大統領의 文章으로 삼은 것은 아무 근거 없이 허무맹랑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

百濟의 걸작 가운데, 마지막으로 2009년 1월 하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전북 익산시 금마면 彌勒寺趾 발굴 현장에서 찾아낸 505점의 유물들을 들 수 있습니다. 金版 舍利奉安記, 金製 舍利壺, 銀製 舍利盒, 銀製 冠飾 등은 武寧王陵, 금동대향로에 이은 百濟문화의 精髓로서, 절정에 이른 百濟의 금속공예 기술 수준을 가늠할 척도가 된다 하겠습니다.

문화재청이 공개한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 莊嚴俱(=사리호와 사리봉안기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는 金製 사리壺(=항아리)의 공예 수준이 높고, 사리봉안기를 통해 彌勒寺 창건 내력이 처음 밝혀졌다는 점에서 武寧王陵과 백제금동대향로 발견에 필적할 만한 성과로 평가됩니다.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李健茂 박사는 금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 또한 『국보 중의 국보』라고 평가했습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유물이 발견된 彌勒寺趾 석탑 1단의 舍利孔(사리 장엄구를 넣는 공간)과 윗부분 석탑 副材 사이에 회를 발라 밀봉했기 때문에 국보급 유물이 1370년간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리 공 중앙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높이 13cm, 어깨 폭 7.7cm의 금제 사리호 내부에는 X선 촬영 결과, 또 다른 내합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금제 사리호는 寶珠 형태의 뚜껑을 덮었으며 몸체를 위아래로 따로 제작한 이중구조였습니다. 저도 현지에 가서 직접 보았지만, 크기는 자그마하나 사리함 겉의 문양이나, 함의 형체 등이 너무 귀엽고 아름다워 찬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은 『세밀하고 정교한 당초무늬가 百濟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639년 創建 당시의 내역을 밝힌 금판 사리봉안기는 의미가 큽니다. 탑신이 있는 1층 心柱石에서 나온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에 漢字로 적힌 194자의 봉안기는 《三國史記》에도 기록이 없는 百濟 최대의 석탑, 彌勒寺塔의 모든 미스터리를 시원하게 풀어주는 열쇠입니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순금(순도 95%)판에 글자를 음각하고 朱漆을 했습니다. 앞면과 뒷면에 창건 내력을 기록했습니다. 이곳에 새겨진 창건 연대(639년)는 百濟 武王(재위 600∼641) 때 彌勒寺가 창건됐다는 《三國遺事》의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新羅 眞平王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연모한 薯童(=百濟 武王)은 밤마다 선화공주가 서동 방을 드나든다는 ‘서동요’를 퍼뜨려 선화공주와 혼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三國遺事》의 彌勒寺 創建 설화는 武王이 王后와 함께 龍華(=彌勒)산 못가를 걷고 있을 때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자, 王后가 큰 사찰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을 武王이 들어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彌勒寺를 창건한 百濟 武王의 王后는 百濟 8대 姓씨 중 하나로 有力 귀족 가문인 沙宅(沙씨에서 分化한 씨족)씨 출신으로 드러났습니다. 盧重國 계명대 교수(백제사 전공)는 『沙宅씨는 聖王이 웅진(=공주)에서 사비(= 부여)로 천도할 때 지지했던 핵심 귀족이며 좌평은 百濟의 최고 관등이었다』며 『武王이 사택적덕의 딸 외에 여러 명과 혼인했을 가능성도 있어 (선화공주에 대한) 《三國遺事》의 기록이 잘못됐는지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武王을 「大王」으로, 존칭을 중국 황제에게나 쓰는 「陛下」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武寧王陵에서 大王이 「崩」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百濟가 황제국(또는 대왕국) 체제를 유지했으며 武王의 왕권이 매우 강력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리봉안기 全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면)

〈竊 以法王出世 隨機赴感應 物現身 如水中月是 以託生王宮 示滅雙樹 遺形八斛 利益三千 遂使光曜 五色行遶七遍 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 佐平沙宅積德女 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 撫育萬民 棟梁三寶 故能謹捨淨財 造立伽藍 以己亥

(후면)

年 正月二十九日 奉迎舍利 願 使世世供養 劫劫無盡 用此善根 仰資‘大王陛下’ 年壽如山岳 齊固寶曆 共天地同久 上弘正法 下化蒼生 又願 王后卽身心 同水鏡照法界 而恒明身 若金剛等 虛空而不滅 七世久遠 竝蒙福利 凡是有心 俱成佛道

미국의 저명한 여성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0~1996년)박사는 일찍이 彌勒寺塔을 주목하라는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日本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20년간 캘리포니아 주립대, 하와이 주립대 교수로 재직 중, 日本에 건너와 일본문화를 연구하던 그녀는 日本 곳곳에 묻어있는 구다라(=百濟)의 냄새를 지울 수 없어 3개월 예정으로 한국에 건너왔다가 9년 동안 체류하며 한국의 문화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익산 彌勒寺塔을 찾아가 세밀하게 살펴본 다음, 그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며 『彌勒寺塔의 비밀을 주목하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 수수께끼가 13년에 풀린 것일까요?

 

▲ 구다라

앞의 「百濟」편에서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日本 전문가 존 카터 코벨 박사가 日本 곳곳에서 풍기는 「구다라」의 냄새를 알기위해 한국에 왔다고요.

「구다라」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百濟입니다.

日本人은 百濟를 「구다라」라고 訓讀합니다. 新羅는 「시라기」, 高句麗는 고마(=熊, 貊, 高麗) 또는 코리, 고쿠리라고 읽는 것과 구별됩니다. 같은 독법으로 읽는다면 「햐쿠사이」라든가 中國처럼 「바이지」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지금도 日本에서는 『구다라 나이』라는 말은 『가치가 없다』, 『시시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百濟는 가치가 있다, 중요하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舊韓末에 日本을 비롯한 선진 서양에서 수입된 물품을 舶來(=하꾸라이)품이라고 했습니다. 배를 타고 온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는 「좋은 제품」이라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옛날 日本에서는 선진국인 「구다라」에서 건너온 물건이라야 좋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왜 百濟를 「구다라」라고 했는지 日本人들조차 잘 모른다고 합니다. 日本의 《國史辭典》은 三國 중 왜 百濟만을 따로 「구다라」 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이를 「謎(=수수께끼)라는 말로 糊塗하고 있습니다. 日本人들은 잘 모르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알아도 차마 밝힐 수 없는 일을 이 謎라는 말로 비켜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다라」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일부는 「大王」에서 찾습니다. 앞의 「百濟」편에서 말씀드렸지만, 百濟는 大王國이었습니다.

「구」는 「구렁이(큰 뱀)」, 「구들(큰 돌 또는 구은 돌)」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크다(大)」는 뜻의 古語입니다. 「구」에 소유를 나타내는 촉음 ㄷ과 王을 일컫는 於羅遐를 붙여 부르면 「굳어라하」가 되고 이를 빨리 읽으면 「구다라」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中國 역사책 《周書》 百濟편에는 〈百濟왕의 성씨는 扶餘씨인데, 王을 부를 때, 지배족은 「於羅遐」, 백성들은 「腱吉支」라고 하며, 王妃는 於陸이라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전통설화인 〈바리공주〉이야기에서 나오는 바리공주의 짝이 되는 남자 이름이 「어라하」입니다. 이 말은 유목민족인 흉노, 돌궐 계통語라고 합니다. 將軍神이자, 開國 영웅이 된 그를 「어라하」라 했는데, 흉노계 수장을 뜻한다고 합니다.

민요 〈성주풀이〉의 「어라(하) 萬壽, 어라(하) 大神이야」라는 대목, 통영 〈공심무가〉의 「어라하 만수, 어라하 대신이여, 왕이여 만수를 누리고」라는 대목을 보면 어라하가 大神이거나 왕을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왕비를 뜻하는 於陸은 반절입니다. 陸에서는 ㄱ음만 땄습니다. 따라서 발음은 ‘억’, 또는 ‘옥’으로서, 지금 일본인이 쓰는 ‘奧(오=남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옥상)’의 원형으로 추측됩니다.

또 하나, 「구다라」가 「구」에 촉음 ㄷ과 「나라」를 붙여 읽어 「굳나라」라고 했으며, 훗날 「구다라」로 轉音되었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大國또는 本國이라는 뜻입니다. 日本人들이 百濟를 大國 또는 本國이라는 뜻으로 「구다라」를 쓰다가 百濟를 의미하게 되는 말로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日本 역사책에도 百濟를 本國이라는 뜻으로 쓴 대목이 있습니다. 660년 百濟가 패망한 후, 《日本書記》 齊明天皇편에 〈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라고 했으며, 3년 후, 百濟 부흥운동까지 실패로 끝나고 周留城이 함락되자, 天智천황 2년조에 〈州流降矣 事无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라고 슬퍼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조상의 무덤(=丘墓之所)을 모신 곳이 고향이고 本國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구다라」가 옛 百濟의 지명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扶餘 부소산 서쪽 기슭에 있는 白馬江의 나루터 「구드래」에서 나왔다는 설입니다. 「구드래」의 현 행정구역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번지입니다. 나루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武王 원년(600년)에 세운 王興寺가 있고, 白馬江 兩岸을 따라 호함리 절터, 부소산성, 부여 나성을 비롯한 옛 유적이 많이 분포돼 있습니다. 「구드래」는 옛날 百濟와 倭, 중국 南朝의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지금의 항구 역할을 하는 큰 나루였습니다.

옛날 百濟의 사비성에서 온 지식인들이 日本에 가서 「구드래」라는 말을 자주 쓰니까, 일본사람들은 「구드래」가 곧 百濟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외국에 간 사람들이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받으면 부산사람이든, 서울사람이든 모두, 한국에서 왔다는 뜻으로 『서울에서 왔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히 百濟가 멸망한 후, 百濟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제는 「구드래」로 돌아갈 길이 막혔구나』하며 서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日本人이 듣기에 百濟는 곧 泗沘(=소부리=서울)요, 「구드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는 얘기입니다. 일리가 있는 견해입니다.

 

▲ 百濟는 국제적인 해상왕국이었다

KBS에 〈百濟의 英雄 近肖古王〉이라는 주말 드라마가 방영된 바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小說家 李文烈이 지은 小說 《大陸의 恨》을 底本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자막이 나옵니다.

줄거리는 百濟 12代 契王에게 쫓겨 百濟 소유의 中國 요서지방에서 힘을 기른 11대 比流王의 아들 餘句(=近肖古王)가 한성으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후, 54개 小國으로 이루어진 馬韓을 一統하고 高句麗로 쳐들어가 왕 斯由(=故國原王)를 죽인다는 내용입니다.

百濟는 高句麗보다는 늦게 국가 체제가 들어서지만, 大王이 다스리는 나라, 즉 「大王國」으로서 中國 동부 지역과 여러 附庸國(=속국)을 거느린 해상 강국이었다는 것은 中國 史料에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史料가 《梁職貢圖》입니다. 「職貢」은 貢物을 바치러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使臣과 같습니다. 《梁職貢島》는 梁나라의 창시자인 武帝(재위 502~549년)때 재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일곱째 아들 簫繹(후에 元帝가 됨)이 荊州(지금 호북성 강릉현)刺史(=우리나라의 도지사)로 봉직할 때(526~536년), 梁나라를 찾아온 외국 사신들의 용모와 의복을 직접 그리고, 그 나라의 내력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해설까지 첨부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百濟 사신이 확실하게 그려있고, 7행 160여자로 된 百濟에 대한 소개가 곁들여 있는 것입니다. 지금 中國 남경박물관이 소장한 《梁職貢圖》는 1961년 서울대 고고학과 金元龍 교수(1922~1993년)가 처음 학계에 소개했고, 《國史大事典》의 저자인 李弘稙 고려대 교수(1909~1970년)가 1970년 논문 《梁職貢圖論考》를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명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百濟舊萊夷 馬韓之屬 晋末駒麗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晋平縣 自晋已來 常修藩貢 義熙中其王餘腆 宋元嘉中其王餘毘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 除征東將軍 尋爲高句麗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 遣使奉表云 累破高麗 號所治城曰固麻 爲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等附之 語言衣服各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裙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내이(箂夷는 九夷의 하나로 지금 중국의 山東省 지방에 살던 동이족을 가리킨다)로서 마한에 속한다. 진말 구려(고구려)는 요동을 경략하여 소유하였고, 낙랑(=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소유했다. 진(265~420년)의 건국 이래, 항상 수교를 하고 제후국으로서 조공을 했다. 의희(동진의 연호 405~418년)연간에 그 왕 餘腆, 宋의 원가(文帝의 연호) 연간(424~453년)에 그 왕 餘毘(비유왕), 제 영명(高祖의 연호 479~493년) 연간에 그 왕 餘太(동성왕) 등이 모두 중국에서 관작을 받았다. 梁나라 초기 동성왕이 고구려를 공파한 공로로 정동장군을 제수받았으며, 보통(梁 高祖의 연호) 2년(521년) 그 왕 餘隆(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기를 고구려를 여러 번 무찔렀다고 했다. (백제는) 치소(=수도)를 고마라 하고 읍을 첨로(혹은 담로)라 했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 22개의 첨로에는 (왕의)자제와 종족을 분봉했다. 방소국(=속국)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이다. 언어, 의복은 고구려와 같다. 걸을 때는 두 팔을 벌리지 않고, 다리를 굽힌 채 절한다. 모자를 관이라 하고 저고리를 복진이라 하며, 바지는 군이라 한다. 언어에는 중국말이 섞여있으니, 진한의 습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遼西百濟에 대한 것은 前述한 바와 같이 유튜브에 들어가 심백강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 상당부분 이해가 갈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部分이 있습니다. 〈晋末駒麗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晋平縣〉입니다. 《梁職貢圖》를 기초로 편찬한 梁나라 역사책 《梁書》의 百濟전에 〈百濟亦據有 遼西晋平二郡地矣 自治百濟郡 (백제 역시 요서의 진평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여 다스렸다)〉고 되어 있고, 《宋書》百濟전 에 〈高句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治所謂之晋平郡晋平縣 (고구려는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했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했다. 백제의 치소는 진평군 진평현이다)〉로 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는데, 《梁職貢圖》에는 百濟라고 쓰여야할 부분에 樂浪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랑=백제라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역사 상식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부분을 따져 들어가 봅니다.

《史記》 註釋書인 《集解》의 太康地理誌에 〈樂浪綬成縣 有碣石山 長城所起(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거기서 시작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갈석산이 있는 수성현(오늘날의 하북성 창려현)이 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 지역이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뜻입니다. 樂浪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사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은 日帝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樂浪이 평안남도 평양에 설치됐던 것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倭에 관한 中國 기록을 보면 樂浪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평양 근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百濟가 관장하고 있던 中國 요서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倭人은 본래 遼寧省 서쪽 발해와 연접해 있는 綬中縣 六州河변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 中國 기록입니다. 中國의 古代 서적인 《山海經》에 〈倭는 燕에 속한다〉고 나와 있고, 《漢書》지리지에 〈낙랑의 바다(=발해) 가운데 왜가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비족의 영주 檀石槐가 서기 155년 하북성 長北지방을 근거지로 삼아 대제국을 세운 후, 동쪽지방으로 쳐들어가 倭人에게 자맥질을 시켜 생선을 잡아다 진상토록 했다고 합니다. 倭가 지금의 日本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倭는 결론적으로 오늘날 日本이 아니라, 朝鮮의 다른 이름으로 통했던 濊貊의 濊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魏라고도 했던 倭는, 濊의 다른 음역인 것입니다.

倭라고도 하던 일단의 濊人들이 산동반도 해안, 요동반도 해안, 한반도 서해안과 남쪽을 거쳐 日本列島로 옮겨간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때 百濟가 경략하여 차지했던 요서지방에 살던 濊인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한 후에도, 三國 중 유독 百濟와 수백 년 간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옛날에 같은 지역에 살던, 공통 언어를 가진 동족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扶餘의 한 갈래인 百濟는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나라를 세우기 전, 高句麗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여 倭라고도 하고, 魏라고도 하던 中國 대륙의 낙랑지방을 거쳐 中國 산동반도, 한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韓半島에 있던 百濟가 中國 요서지방을 경략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수백 년간 中國 요서지방에 근거를 잡고 살던 백제인들이 中國의 후한 말, 강력해진 曹操의 魏나라를 피해 백성 일부만 남겨놓고 지도부는 한반도로 들어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近肖古王 27년(372년), 百濟의 사신이 중국 三國(위, 촉한, 오)시대를 통일한 晋에 入朝했을 때, 晋 皇帝는 近肖古王에게 「鎭東將軍 領‘樂浪’太守 百濟王」이라는 ‘樂浪’이 들어간 직위를 除授한 것으로 보입니다.

百濟는 遼西를 잠시 점령한 것이 아니라, 5세기를 거쳐 본국 百濟가 멸망한 7세기까지 존속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南齊書》 百濟傳은 490년(혹은 488년) 百濟와 魏(曹操의 魏가 아님)가 국경지대에서 큰 싸움을 벌여 위군을 대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是歲 魏虜又發 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당시 위군이 다시 도발하여 수십만 기병을 동원, 백제를 공격하여 경내로 들어오니 牟大(동성왕의 이름)가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장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군을 습격케 하여 대파했다.)〉

中國 기록에 충실하고 우리 역사를 깎아내리기로 이름난 《三國史記》조차도 百濟本紀 東城王 10년(488년) 기사에서 〈魏遣兵來我 爲我所敗 (위가 군대를 파견해 우리에게 (쳐들어)왔다. 우리는 (그들을)패하게 만들었다)〉고 하여 百濟의 요서 영유를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801년 唐나라 때 杜佑가 편찬한 《通典》에는 663년 百濟가 완전 멸망할 때, 요서지역 百濟郡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後漸寡弱 散投突厥及躩駕 其王扶餘崇 竟不敢還舊國 扶餘氏君長墜滅 ((백제군은) 후에 점차 쇠약해져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 투항했으며, 그 왕 부여숭은 옛 땅으로 감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후 부여를 성씨로 하는 군장은 소멸됐다(※躩駕(곽가)는 말갈의 다른 이름임).〉

《新舊唐書》에는 扶餘崇을 의자왕의 아들 扶餘隆으로 표기했으며, 682년 高句麗 寄治(=다른 지역에 설치된 지방관서)에서 죽었다고 했으나, 1920년 中國 洛陽의 북망산에서 그의 묘지와 誌石이 발굴됨으로써 《唐書》가 틀렸음이 입증됐습니다. 그가 죽은 682년은 高句麗가 멸망한지 14년이나 지난 후이므로 高句麗의 寄治가 있을 수 없으며, 百濟郡 사람들이 中國의 북방, 동북방에 살던 돌궐과 말갈에 투항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扶餘崇이라는 별도의 인물이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한 百濟人 집단이 中國 동북부에 존재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百濟가 지금의 한반도 서남부에만 존재했다면 백성들이 中國 북부에 살던 돌궐과 동북부에 살던 말갈에 흩어져 투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百濟가 한반도 서남쪽에 웅크린 소국이 아니라, 中國 동부, 남부, 日本까지 포용한 거대한 국제 해상왕국이었음을 웅변하는 기사도 있습니다.

淸나라 乾隆帝 때 편찬된 《欽定滿洲源流考》는 宋나라 때인 961년 王溥가 쓴 《唐會要》와 元나라 때 馬端臨이 지은 《文獻通考》를 인용, 百濟의 영역을 다음과 같이 상정했습니다.

〈동북쪽으로는 新羅와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遼東半島에 있는) 廣寧, 錦州, 義州로부터 시작해 남쪽으로는 (산동반도의) 海城, 蓋平을 포함하고, 한반도의 황해, 충청, 전라지역을 포괄한다〉고 했습니다.

《隋書》 百濟 조에는 〈백제에는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뿐 아니라, 중국인들까지 거주하고 있다〉고 했고, 《舊唐書》 백제 조에도 〈百濟扶餘別種 東北新羅 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 동북에 신라,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왜에 이른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으며 (백제)왕은 동서 양 쪽 성에 모두 거소가 있다)〉고 했으며, 《新唐書》에도 〈百濟西界越州 南倭皆踰海北 (백제의 서쪽 경계인 월주, 남쪽의 왜는 모두 바다 건너에 있다)〉고 나옵니다.

월주는 中國 절강성에 있는 동양 最古의 陶窯地로서 漢나라 때부터 宋나라 때까지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무늬의 청자 생산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百濟의 서쪽 경계가 中國 월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찍이 민족사학자 申采浩 선생은 그의 저서 《朝鮮上古史》에서 〈근구수왕이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중국)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慕容씨의 燕, 符堅의 前秦을 정벌하고 지금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 등지를 차지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中國 황제가 그리고 쓴 《梁職貢圖》및 中國 기록들은 百濟가 中國 요서지방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고, 9개의 부용국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22개의 첨로(=담로)를 설치, 7세기까지 운영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첨로, 또는 담로라고도 발음하는 백제 侯國의 증거로는 耽羅(=다모라 ․ 제주도), 일본 규슈 구마모토(熊本)현 다마나(玉名)시, 혼슈(本州)) 긴끼(近畿)지방 효고(兵庫)현 아와지(淡路)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 시기적으로는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百濟 멸망기에 나타난 黑齒常之(630~689년)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일까 합니다. 百濟가 국제 해상왕국이었다는 내용을 보완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三國史記》 열전 흑치상지전에 그는 百濟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이후, 任存城에 3만의 군사를 모아 唐軍과 싸워 큰 피해를 입혔다고 나옵니다. 후에 그는 唐에 항복하여 燕國公, 燕然道大總官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대총관은 지금 우리나라의 군사령관(大將) 급에 해당합니다. 그와 그의 아들 黑齒俊(676~706년)의 묘지석이 1929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굴됐고, 1986년 中國學者 李希泌이 쓴 《曲石精盧藏唐墓誌》에 그 탁본을 소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묘지석은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명문이 모두 판독 가능하다고 합니다.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府君諱常之 字桓元 百濟人也 其先出自扶餘氏 封於黑齒 子孫因以爲氏焉 其家世相承爲達率 曾祖諱文大 祖諱德顯 考諱沙次 竝官至達率 (부군(=아버지)의 휘는 상지요, 자는 환원으로 백제인이다. 그 선조는 본래 (王姓인) 부여씨로서 흑치(국)에 봉해졌다. 자손들이 흑치라는 성씨를 쓰게 된 원인이다. 그 가문은 대대로 (제2관등인) 달솔을 세습했다. 증조의 휘는 문대, 조부의 휘는 덕현, 부의 휘는 사차로서 모두 달솔 관등에 이르렀다.)〉

흑치상지의 증조부 문대는 달솔로서 흑치국에 분봉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왕의 자제 宗族으로서 봉한다는 22개 담로 중 하나인 흑치국에 분봉되었고,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그 지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래서 성씨도 부여씨에서 흑치씨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흑치라는 이름은 주민들이 치아를 호보하기 위해 틸랑이라는 열매를 씹은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위치는 지금의 중국 남동부 광서성 百濟鄕(鄕은 한국의 면에 해당)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에서는 70~80년 전까지만 해도 이빨이 검은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98년 中國에서 출간된 《中國將帥全傳》에 따르면 〈黑齒常之 唐高宗李治則天后時名將 百濟(今廣東欽縣 西北)西部人 (흑치상지는 당나라 고종 이치와 측천무후 시대의 명장으로 백제(지금의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百濟 서부는 한반도의 서부가 아니라, 한반도 바다 건너 서쪽(중국의 동부 내지 동남부)이라고 中國人 학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 몽골이 세운 元나라(1271~1368)의 역사책 《元史》에 기록된 흥미로운 대목 하나를 소개합니다. 서기 660년 羅唐연합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멸망한 百濟가 그로부터 600년도 더 지난 13~14세기에 元의 기록에 나오는 것입니다. 칭기즈칸이 宰相으로 뽑은 遼나라의 왕족 출신 耶律楚材의 문집에 『世祖(=쿠빌라이) 至元 4년(1267년)에 백제국이 사신 梁浩를 보내 조공했다』고 했습니다. 그때도 어떤 형태로든 百濟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재미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때 中國에 존재하던 요서 百濟의 후예가 中國 해안가를 끼고 어느 지역(=중국 남서부?)에선가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하다가 元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廣西省에는 지금도 百濟鄕, 百濟墟라는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백제허를 그 곳에 사는 壯族들은 중국 발음인 ‘바이지허’나 ‘바이지쉐’라고 읽지 않고「대백제」라는 한국 발음으로 읽는다는 점입니다. 中國 사람들은 대백제(대한민국처럼 백제가 스스로를 높이는 나라 이름)라는 지명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지만 百濟의 흔적이 없으니까 허라는 이름을 붙여 백제허라고 했지만, 壯族들은 조상대대로 불려온 그대로 「대백제」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中國 서남부 땅에 百濟가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아무튼 《梁職貢圖》는 시기적으로 따져봤을 때, 武寧王(재위 502~523년)대와 같은 시기입니다. 475년 高句麗 長壽王의 漢城 침입으로 부왕 개로왕(武寧王은 개로왕의 동생 昆支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이 붙잡혀 죽고, 어머니의 뱃속에 든 상태로 日本으로 피신했던 武寧王은 王이 된 후, 절치부심하여 百濟를 해상 강국으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武寧王은 461년 日本 규슈 스꾸지(築紫 ․ 축자)의 가카라지마(현재의 加唐島)에서 태어나 40여년을 日本에서 살다가 41세 때인 501년 東城王이 죽자, 귀국하여 百濟 제25대 왕이 됩니다. 武寧王은 자신의 죽음을 「崩」이라고 하여 中國 황제가 사용한 용어를 묘지석에 남김으로써, 百濟가 대왕국(高句麗는 광개토대왕비에 好太王이라고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임금을 太王이라 했음)이었음을 스스로 입증했습니다.

최근 武寧王과 관련된 일화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일왕 아키히도(明仁)가 68회 생일을 맞은 2001년 12월22일, 『간무(=桓武 ․ 재위 781~806년)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왕자 淳陀태자(513년 훙)의 직계 후손인 和新笠 태후입니다. 이 사실은 《續日本紀=日本의 역사책)》에 쓰여 있기 때문에 나는 한국과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밝힌 것입니다. 또 하나는 2004년 8월3일 아키히도 천왕의 당숙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가 아키히도 천황의 지시를 받고 충남 공주 武寧王陵에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는 옛날부터 日本 왕실에서 대대로 사용해온 향로에 1300년 된 沈香木 향을 피우고, 제삿술, 제수를 진설한 다음, 武寧王 영전에 머리 숙여 절을 했습니다. 武寧王이 자신의 조상임을 인정하는 제사였습니다. 제사가 끝난 후, 공주시장을 예방하고 日本 왕실에서 가져온 향로와 향목을 기증하고 돌아갔습니다.

 

▲ 한국 金씨의 유래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金씨나 李씨가 맞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金씨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입니다. 김해 金씨만 6백만 명이 넘는다고도 합니다. 그리 흔하디 흔한 성씨가 중국에서 왔다면 믿어지십니까.

《三國史記》 本紀에서 저자 金富軾은 신라인이 중국 五帝시대의 인물인 少皥 金天씨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金씨로 했다고 했습니다. 金庾信傳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삼국통일 완성한 文武王이 자신이 중국 秦나라의 후예이며, 한무제때 秺侯라는 제후에 봉해진 흉노족 왕자 金日磾의 후손이라고 자신의 陵碑에 못박아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金씨와 秦, 秦과 투후 金日磾의 관계를 찾아 중국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司馬遷은 《史記》 秦 本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秦의 선조는 少皥 金天씨의 아들로서, 五帝 가운데 하나인 顓頊의 후예다. 전욱의 손자인 伯益의 딸 女修가 베를 짜던 중 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大業을 낳았다. 대업이 장성하여 女華에게 장가들어 大費를 낳았다. 대비가 舜임금에게 벼슬하매 舜이 그에게 嬴이라는 姓을 하사했다. 대비의 후손 孟謀가 商(=殷)의 건국을 도운 공으로 처음 諸侯가 되었다. 孟謀의 후손 季勝, 그의 아들 孟增이 周나라 2대왕인 成王에게 벼슬했다. 맹증의 손자 衡父가 趙父를 낳았다. 조보는 말달리기를 잘했는데, 5대 穆王이 東夷계 徐堰王에게 포위당했을 때, 말을 달려 楚王에게 고하여 구해준 공로로 목왕이 조보를 趙城에 봉하였다. 8대 孝王때 조보의 후손 非子는 秦邑(오늘날 감숙성 청수현)에 봉해져 西戎의 방위를 맡게 되었다. 12대 幽王이 申侯에게 살해당할 만큼, 周 왕실이 위급할 때, 秦襄公이 유왕의 아들 平王을 구하였으므로 周왕실은 岐(=중국 섬서성 서부지역) 以西의 땅을 秦에게 할양했다. 이것이 秦의 시작이다.〉

秦나라가 건국된 후, 金人(청동으로 만들어진 사람모양의 상)으로 된 西方의 神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白帝祠가 등장하는데, 白帝가 소호 김천씨입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秦나라 嬴씨의 선조 소호씨가 바로 우리 민족인 동이족이라는 것이 중국학자의 말입니다. 대만의 古代 중국 역사학자 徐亮之교수는 秦의 시조에 대해 1955년 발간된 저서 《中國史前史話》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少皥之族系屬東夷 不與諸夏同科 乃西漢來 以前學者所公認. 少皥氏的後裔芎嬴姓 少皥之後 秦之先爲嬴姓 可見秦芎 乃同族而異枝 秦雖稱覇西戎 而實出東夷․ (소호족은 동이계에 속한다. (중국민족인) 하족과 같지 않다는 것은 西漢(=前漢)이래 중국학자들도 공인하는 바다. 소호시의 후예가 궁씨와 영씨다. 秦의 선조는 본래 嬴씨지만 秦芎이라는 표기도 있어서 두 성씨가 동족이며 파가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 秦이 비록 서쪽에서 패권을 잡았다고는 하나 실은 東夷 출신인 것이다.)

재위 26년인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 嬴政은 210년 전국을 주유하다가 태산 근처에서 병이 들어 죽으면서 제위를 장자인 扶蘇에게 전하도록 유언했으나 환관 趙高가 승상 李斯와 짜고 遺詔를 고쳐 次子 胡亥를 즉위시켰습니다. 焚書坑儒를 반대하다 만리장성 축성 감독관으로 쫓겨 가 있던 태자 부소는 불려와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고, 匈奴(=중국인이 북방 기마민족을 불렀던 총칭)로 도망쳤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부소의 측근이 부소의 혈육을 데리고 흉노로 도망쳤다는 설도 있습니다. 흉노황제 單于는 부소 또는 부소의 혈육을 句麗侯에 봉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제후인 구려후에 봉했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흉노의 황제는 부소 또는 부소의 후예에게 구려후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의 제후에 봉했을까요. 朴成壽 前 정신문화연구원 교수(2016년 3월2일 작고)에 따르면 단군 王儉은 아들 넷을 뒀는데, 첫째가 扶婁(단군조선 2대왕), 둘째가 扶蘇(부싯돌을 만든 사람), 셋째가 扶虞, 막내가 扶餘라고 합니다. 진시황의 장남이 단군의 둘째아들과 이름이 같고, 그 후손이 받았다는 봉작이 구려후라는 점은 의미가 심장하지 않습니까? 중국의 초기 三皇시대, 동이족 군장으로 黃帝와 맞섰던 蚩尤의 爵號가 구려후입니다.

구려후의 후손인 흉노의 休屠王(우현왕이라고도 하며, 몽골 고원에서 볼 때 오른쪽인 오늘날 청해성, 신강성 쪽 통치를 맡은 직위)은 秦을 이은 漢나라에 위협적인 존재가 됩니다. 한의 창업자인 劉邦이 건국 초기, 흉노를 치려다 괴멸상태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이후, 한의 숙적은 흉노였습니다. 힘을 축적한 한의 武帝는 젊은 장수 霍去病(기원전 140~117년)을 보내 흉노를 공격합니다. 곽거병 군과 맞서 싸우던 휴도왕은 같은 흉노 일족인 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고, 휴도왕의 왕비 閼氏(알지 ․ 부인이라는 뜻)와 아들 둘은 곽거병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武帝의 총애를 받은 두 형제는 그의 조상들이 金人像을 만들어 祭天의식을 했다는 연유로 武帝로부터 金씨 성과 벼슬을 하사받습니다. 지구상에서 최초의 金씨가 생겨나는 순간입니다. 형제 중 형이 金日磾이고, 동생이 金倫입니다. 형제는 말 마니아이던 武帝의 총애를 받아 차례로 馬監, 光祿大夫에 올랐으며, 莽何羅의 亂때 武帝의 위급을 구한 공로로 형은 秺侯, 동생은 都成侯라는 제후에 봉해집니다.

김일제는 대략 기원전 135년에 태어나 기원전 85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김일제가 죽자, 漢 황실은 무제의 능인 茂陵에 陪葬합니다. 배장은 해당 황제에게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만 베풀어지는 영예입니다. 김일제의 묘는 현재 중국 西安(=옛 長安의 지금 이름)에서 40㎞ 떨어진 陜西성 興平현 南位향 道常촌, 무제가 묻혀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 지점에 있습니다. 현재 김일제의 후예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이 바로 섬서성 紫陽현 高橋진입니다.

김일제는 商과 建이라는 아들 둘을 뒀습니다. 건은 부마도위, 상은 아버지의 작위인 투후 작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상은 후손이 없이 일찍 죽고, 건을 이은 國, 국을 이은 아들 當, 당의 아들 星도 투후 작위를 세습합니다. 김일제의 5세손인 성이 문무대왕 비문이 말하는 星漢王입니다. 이 성한왕이 경주로 들어와 신라 金씨의 시조 「金閼智」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김일제의 동생 김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金安上은 투후와 맞먹는 都成侯 벼슬을 하며 아들 다섯을 둡니다. 김안상 또한 9대 宣帝(재위 기원전 74~49년)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선제의 杜陵에 배장됩니다. 현재 서안 두릉 동쪽 편에 선제의 공신 무덤 여섯 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데, 김안상의 묘는 두 번째나 세 번째 묘일 것으로 중국학계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김안상의 계보는 다섯 아들 중 둘째 敞의 장남 涉, 또 涉의 장남 湯으로 이어집니다. 탕도 도성후의 벼슬을 세습했습니다. 김윤의 5세손 탕이 한국 땅 가락으로 망명해와 김해 金씨의 시조, 金首露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뿌리를 가진 秦과 신라 金씨와의 관계에 대해 문무왕비문은 분명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문무대왕릉 비석은 1796년(정조20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당시 경주부윤 洪良浩(1724~1802년)는 이를 탁본해서 서울로 보냈습니다. 비문은 발견 당시,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 읽을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 비문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문무왕의 후손인 금석문의 대가 추사 金正喜도 이 비문의 탁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북경의 학자들에게 보냈을 뿐입니다. 실학자 柳得恭도 『김일제의 金이 鷄林(=신라)의 金일지 모르나 (비문의) 전문을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증거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명색이 조선조 최고의 금석문 학자라는 사람에게조차 외면당한 이 비는 그 후 버려지다시피 하다가 日帝때는 빨래판으로 사용됐고, 그나마 일본인들의 손에 반동가리가 났습니다. 다행이라면 추사가 북경으로 보낸 拓本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 우리가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비문의 탁본은 淸의 금석학자 劉喜海의 손에 들어가 《海東金石苑》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비문 조각들은 그 이후 있는 곳이 묘연했으나,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졌으며, 2009년 9월2일 행방이 묘연했던 상단 부분이 발견됐습니다. 상단 부분은 주택의 수돗가에 박혀 있었으며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는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경주 국립박물관 측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주박물관 진정환 학예연구사는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조각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각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현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무왕릉 비문에 따르면 문무왕의 출자를 밝히는 구절인 前面 제5행에 『秺侯 祭天之胤이 七葉(=7代)를 전하여……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투후가 바로 위에서 말한 김일제f는 것입니다.

비문의 제6행에는 『15대祖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라 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여러 조각이 나고, 글자도 마모되어 전문을 해독하기 어렵습니다. 성한왕에 대해서는 신라 金씨의 시조인 金閼智로 보는 견해, 그 아들인 烈漢(또는 勢漢)으로 보는 견해, 閼智의 7세손으로 金씨 중 최초로 신라의 왕위에 오른 味鄒王으로 보는 견해 등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 비는 陵碑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동해에 散骨했다고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기사가 전하고 있어, 문무왕의 시신을 경주의 사천왕사 근처에서 화장하고 부근에 擬陵(의릉=가짜 능)을 만든 것이거나, 사천왕사를 창립한 문무왕을 기려 그곳에 능비만을 세운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다음은 문무대왕릉 비문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입니다.

〈 …(전략)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火官之后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宗과) 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秺侯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거기서 出自한) 바다.

15대조 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仙岳으로부터 신령이 비로소 탄생하여 金宮殿에 어림하고 玉欄干을 대하여 처음으로 조상의 복이 상서러운 수풀처럼 많아 石紐山(=夏나라를 세운 禹임금이 태어난 곳으로 禹王을 상징. 禹王도 전욱의 자손이므로 遠祖로 여긴듯)을 보는 것 같았다.

임금님(=文武王)의 생각하심은 멀고 깊으셨으며, 풍채는 훌륭했으며 빼어났다. 도량은 하해 같으시며 위엄은 우레 같으셨다. 천지는 (싸움에서)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를 피하니 만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새 나라를 여시게 했다.(중략)

…봉오리로부터 와서 그 줄기가 합해진 것이 500년이었는데, 큰 命에 처하여 하나를 이루니(중략)

…舜임금의 바다(같은 덕은) 적셔 截懸함이 있고, 堯임금의 해같이 밝음은 끝이 없었다. (중략)

…조야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無爲로서 교화가 속히 이루어졌다. (주는 것을 감히) 구하지 않았으나 (옛) 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이상 碑文 前面 28행)

(일찍이 黃帝께서는 신농씨를 대신하여 왕천하하신 뒤) 丸山에 그 공을 기하심이 있었다. (중략)

…곧 바로 九州를 一匡하고 동정서벌하여 (그처럼 통일천하를 이룬 후) (중략)…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때 나이 56세였다.

…(고통스러운 역사로 무덤을 이루어 놓으면) 땔나무꾼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나 토끼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장사는 간소하게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그 유언에 의해) 화장을 하니 그 달 초열흘에 불에…(중략)

…몸을 천하게 도를 귀하게 부처를 흠모하셨다. 장작을 쌓아 장사지내니…멸함이네. 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네.

…크나 큰 (그)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月 25일에 大舍 (臣) 韓訥儒는 (임금의 가르침을 받들어 썼나이다).

(이상 碑文 後面 21행)」〉

그럼 漢나라 황실에서 권력 實勢였던 김일제의 5세손 星이나 金倫의 5세손 湯이 왜 경주나 김해 땅에 정착했을까요.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前漢을 멸망시키고 新나라를 세운 王莽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秺侯 當의 이모부입니다. 왕망은 한의 10대 황제 원제(재위 ․ 기원전 40~33)의 황후 王씨 가문 사람입니다. 11대 성제(재위 기원전 33~7)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王鳳이 大司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에 재상격인 대사마가 되어 정권을 잡습니다. 왕망은 아홉 살 난 평제(재위 기원전 1~기원후 5)를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더니 서기 5년 어린 평제를 제거한 후, 9대 선제의 손자인 두 살짜리 劉嬰을 세워 섭정하다 서기 8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에 오릅니다. 新나라(서기 8~23년)입니다.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김일제 후예이자 실력자인 金씨 계열의 도움이 컸습니다. 왕망이 전권을 장악한 이후 金씨 계열은 강력한 정치실세가 됩니다. 그러나 新은 화폐개혁 등 여러 가지 개혁 작업의 잇단 실패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한 황실 劉씨 집단의 저항을 불러와 15년 만에 後漢을 세운 劉秀에게 멸망당합니다. 따라서 新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金씨 계열은 살아남기 위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 때 만든 화폐 五殊錢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제주 高, 粱, 夫씨가 태어났다는 三姓穴의 전설도 해외로 탈출한 이 시대 인물의 하나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경주에 온 성한왕 「星」이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김해에 온 「湯」이 龜旨峰에서 알로 태어난다는 金首露의 난생설화 등은 마찬가지로 바로 출자를 밝힐 수 없는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비문에 등장하는 주요 단어, 火官之侯, 「秦伯」, 「波鯨津氏」, 秺侯, 「秺侯祭天之胤」, 「假朱蒙」, 「星漢王」 등의 단어와 뜻, 그리고 淵源을 신라 왕실은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사람도 웬만하면 자기 조상의 계보를 알고 있는데, 왕실에서 몰랐을 리 없습니다.

이 비문이 없었다면 신라 육촌의 長들이 秦에서 망명해온 사람, 즉 「秦之亡人」이라는 《三國志》 魏志 동이전의 기록이나, 《三國史記》, 《三國遺事》의 『신라 사람들은 진나라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라느니, 『신라 金씨는 少皥 金天씨의 후손이라 성을 金으로 했다』느니 하는 점필제 金宗直의 「彛存錄(이존록)」이나 「金庾信傳」의 명문도 뒷받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문에 나와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습니다. 火官之侯 기원전 2300년 전, 秦伯(=진목공) 기원전 650년대, 派鯨津氏 기원전 200년대, 투후 기원전 100년대, 假朱蒙 기원전 50년대, 성한왕 서기 20년대, 文武王 서기 660년대 등입니다.

첫 번째의 화관지후는 기원전 2300년 전 인물로 五帝 시대의 임금인 舜이라고 합니다. 왕망이 시조신으로 내세운 이가 舜임금이었다는데서 나온 해석입니다. 秦伯은 진시황의 선조로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준 秦穆公(기원전?~기원전 621년)입니다. 춘추시대 진의 제9대 군주였던 목공은 북쪽으로는 河西를, 서쪽으로는 西戎에 이르기까지 사방 1,000리의 크고 작은 나라 12개국을 제패한 패자로서 진의 굳건한 기반을 닦은 인물입니다. 鯨津은 포항의 옛 이름이라고도 하며, 일본에 鯨津이라는 이름의 神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어떤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투후는 김일제이며, 성한왕은 왕망 시절, 이름이 金星이고, 신라 이름이 김알지입니다. 또는 알지의 아들 烈漢이거나, 이후, 아도-수류-유부-구도를 거쳐 7세손인 味鄒王(재위 262~284년)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알지는 金을 뜻하는 흉노어로서 알티, 알타이, 알탄과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한자로 쓰면 金金이 되는 셈입니다.

한편 김일제의 아우 김륜의 후예는 도성후라는 봉작을 대대로 세습하는데, 성한왕 김성과 비슷한 시기에 김륜의 5세손 김탕은 처가인 許씨와 합동으로 왕망을 도왔습니다. 서기 23년 왕망이 망한 후, 중국 동해안으로 피난해 있다가 후한을 세운 劉秀(=광무제)가 추격해오자, 처가 許씨 일가와 함께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옵니다. 지금도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海流에 맡기면 저절로 덕적도, 충남 당진, 전남 신안 앞바다, 남해안까지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이 해류는 다시 일본 이끼(壹岐)섬, 후꾸오카(福岡))를 거쳐 니이가다(新瀉) 앞 바다까지 흐릅니다. 金海(金씨 바다라는 뜻) 앞바다까지 흘러온 김탕 일행은 거기에 정착하여 칸(수로왕)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 漢나라때 대대로 고관을 지낸 부인 許씨 일가의 도움도 컸습니다. 전설에는 인도 아유타國에서 온 처녀 許黃玉이 왕비가 됐다고 하지만, 사실 김탕은 중국에 있을 때, 이미 許씨와 혼인한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許씨 일가가 김탕보다 나중에 도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우수한 鐵器와 선진 지식을 갖고 있던 김탕 일행은 토착세력을 제압하고, 형식적으로는 그 지역의 부족장이었던 9명의 칸의 추대를 받아 서기 42년 가야의 왕이 됩니다. 그가 김해金씨의 시조 김수로 왕입니다. 首露란 마로, 마루, 머리라는 우리말의 漢譯이며, 우두머리, 두목이라는 뜻입니다.

金씨는 신라, 가야 왕조만 연 것이 아닙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遼를 쳐부수고 金(1115~1234년)나라를 건국한 阿骨打(아구타), 그가 국호를 金이라고 칭한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는 바로 신라 金씨의 후손이었다는 내용이 金의 역사책, 중국 기록 등에서 나옵니다.

生女眞(=요나라에 복속하지 않고 산림에 숨어산 여진족)의 完顔부로 이주한 金含甫(혹은 金函普)가 그 사람입니다. 《渤海國誌》와 《大金國志》를 보면 <大金國志云 金始祖 謂含甫 本自新羅>라고 되어 있습니다.

함보는 신라의 고려 歸附를 반대, 금강산 부근인 지금의 강원도 麟蹄지방에서 復國운동을 벌이다 여의치 않자, 행적이 묘연해진 마의태자(경순왕 김부의 장남)의 아들 金幸이라고 합니다. 그는 북쪽으로 망명하여 여진 完顔부 추장의 딸과 혼인, 克己를 낳고 克己는 古乙을 낳고, 古乙은 活羅와 盈加를 낳았습니다. 活羅가 유능하여 완안부 추장에 추대되었습니다. 活羅는 劾里發을 낳고, 핵리발은 烏耶束과 阿骨打를 낳았습니다. 활라가 죽은 후, 잠시 그 아우 盈加가 뒤를 이었다가 조카 오야속에게 추장 자리를 넘겼고, 오야속이 일찍 죽은 후 동생 아골타가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金나라 황제나 황족이 공식으로 完顔이라는 姓을 쓴 것은 부족이름에서 기인합니다.

아골타가 바로 金나라(1115~1234년)의 시조입니다. 신라가 망한 해는 935년. 1세를 30년으로 치면, 그로부터 정확히 6세가 지난 180년 후, 金이 건국됐습니다. 아골타가 자신의 Family Name인 金을 국호로 정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을까요.

金을 세운 여진족은 설, 정월대보름, 단오 등 우리와 똑같은 명절을 즐기고 활쏘기를 즐겨했습니다. 여진과, 여진의 前名인 肅愼, 조선의 女眞식 발음은 모두 「주신」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볼 때는 다 똑같은 「주신」사람들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시대에 따라 한자의 假借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金 건국 500년 후인 1616년, 建州여진(=현재의 함북 회령 지방) 출신 누루하치가 세운 또 다른 金(전의 金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後金이라 칭함)의 國姓은 아이신기로(愛新覺羅 ․ 애신각라). 아이신은 金, 기로는 部族이라는 여진 말입니다. 현대 ‘겨레’라는 우리말과 같은 계통의 단어입니다.

丁卯胡亂, 丙子胡亂을 겪으면서도 조선이 淸(1616~1911년)나라에 행한 배신행위(明이 망하기 전에는 明과 손잡고 淸을 치려고 시도했으며, 明이 망한 후에는 明의 연호를 계속 쓴 행위 등)에 대해 淸은 지나치게 관대했습니다. 호란 때 붙잡아간 사람(소현세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척화파 김상헌)은 물론이고 明과 손잡고 淸을 쳐부수려던 林慶業 장군까지도 죽이지 않고 조선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는 조선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개국한 明이 조선 초기에 가혹한 공물과 貢女를 요구하는 등 공연한 트집을 잡아 군림하려 한 행동과는 대조적입니다. 특히 聖祖 康熙帝(재위 1661~1722년) 같은 사람은 조선이 망해버린 明을 잊지 않고 明의 연호를 쓰는 것을 알면서도 『조선은 의리의 나라』라며 이를 문책할 것을 주장하는 신하들을 오히려 만류했다고 합니다. 의아스러울 정도로 조선에 호의적입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청을 세운 여진족은 우리와 형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淸 태조 누루하치(재위 ․ 1616~1626년)가 1616년 瀋陽에서 金의 건국을 선언하며 내린 조칙 중에 『나는 추모왕의 자손으로서…』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추모는 여진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광개토대왕비에는 鄒慕로 나옴)을 가리킵니다. 누루하치는 자신을 고구려의 후예라고 공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911년 孫文이 주도한 辛亥혁명으로 청의 마지막 황제 宣統帝 傅儀가 퇴위하고 난 후, 평민으로 돌아간 청의 황족들은 성을 金씨로 바꿨다는 것이 金史전문가인 한양대 任桂淳 전 교수의 말입니다. 본시 金씨였으니까, 金씨로 돌아갈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고조선 侯國들의 西方 진출과 게르만족 대이동

古朝鮮 國家는 영역이 요동, 요서로 넓어짐에 따라 다수의 부족을 제후제도를 통해 통치했습니다. 제후국은 2개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형은 직할지로서 일찍 제후국이 된 濊, 貊, 扶餘, 沃沮, (高)句麗, 震, 肅愼 등입니다. 제2유형은 ‘변방국’으로서, 동호, 오환, 선비, 奚, 烏孫, 柔然, 山戎(=동흉노), 突厥(=原튀르크), 室韋(=原몽골)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古朝鮮 제왕 檀君은 제후국에 왕족을 보내거나 부족장을 제후로 임명해 통치했습니다. 이 때문에 제후국 호칭이나 왕명에는 檀과 관련된 이름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선비족의 왕 단석괴, 柔然(=아발)은 大檀, 흉노의 왕은 단우(單于 ․ 선우로 읽는 것은 후의 변화, 단후 또는 단간의 변음) 등이었습니다.

阿史那(=아침 해가 떠오르는 곳), 해(태양)같은 단어의 자취도 찾을 수 있습니다. 突闕의 王族이 아사나氏이고, 아나사의 축소 변음이 烏孫으로서 烏孫의 국명, 奚族의 國名, 烏와 桓의 合成인 烏桓의 국명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제후국들은 1,500여 년 간 古朝鮮 통치를 받는 사이에 古朝鮮 문화를 分有 통합하여 상위의 공통 아사달(=古朝鮮) 문명을 형성, 발전시키게 됩니다. 아사달 문명권의 원민족들이 공유한 주요 문명항목으로는 언어, 통치제도와 양식, 금속기술, 무기, 태양숭배, 天孫사상, 신앙과 종교, 기마, 弓射, 축제, 경기, 음악과 무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古朝鮮 사람들이 中國 山東, 山西, 河南省 등에 진출해 자치 소국들을 세워 생활함에 따라 아사달 문명권은 中國의 山東半島 일대와 萬里長城 일대, 淮河 일대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古代 中國 夏문명이 뒤이어 들어왔기 때문에 두 문명이 변경에서는 重疊되었습니다. 따라서 아사달 문명권은 古朝鮮 국가보다 그 지리적 범위가 더 넓었습니다.

아사달 문명권 민족들과 古中國 문명권은 처음엔 협조와 평화관계가 장시간 존속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10세기경부터 古中國 계열 왕국들이 山東半島의 古朝鮮 系列 소국들, 소위 九夷를 공격함으로써 평화는 깨졌습니다. 기원전 7세기 齊나라 환공시절, 재상이었던 管仲의 孤竹國(=고조선 제후국=기자조선) 침범, 기원전 284년 燕 秦開의 古朝鮮 공격과 반격, 기원전 214년 진시황의 고조선 공격과 반격이 이어져 약 200년간 아사달 문명권과 古中國 문명권은 갈등기에 들어갔습니다.

만리장성은 이 시기 아사달 문명권에 대한 古中國 문명권의 방어선이었습니다. 漢 高祖(=유방)때까지도 열세였던 古中國이 武帝가 준비한 대병력으로 古朝鮮을 공격해 기원전 108년 마침내 古朝鮮 국가는 패전해 붕괴되고(漢四郡 설치), 古朝鮮 문명권은 해체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古朝鮮 문명권에 속했던 여러 민족들은 각각 漢族과 투쟁하면서 때로는 漢族을 굴복시키고 때로는 패전하여 쫓기기도 하면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동하였습니다.

西方으로 이동한 몇 개 민족만 들기로 합니다. 西洋史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은 먼저 기원전 108년 古朝鮮 해체로 말미암은 東方의 민족 대이동에서 파급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西洋에서 ‘훈(Hun)’이라고 부른 흉노는 古朝鮮 東胡族의 한 갈래입니다. 흉노족은 기원전 50년, 기원 직후, 그리고 서기 160년 경, 크게 세 차례에 걸쳐, 그리고 4세기 중엽에 카자흐스탄, 키르기스 지방을 경유, 광대한 「하서회랑」 벌판을 통해 본격적으로 서쪽으로 쳐들어갑니다. 西洋에서는 침략이라고 하지만, 흉노족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신천지 개척입니다.

흉노의 본격적 서양 침공은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습니다. 376년 鮮卑 拓拔씨가 北魏의 전신 代나라를 세운 후, 라이벌인 흉노를 약화시키기 위해 漢族과 손을 잡고 대대적으로 남흉노를 침공, 약 20만 명을 살해합니다. 이때 匈奴 單于는 패사하고, 그 아들 赫連勃發은 북쪽으로 도망칩니다. 후에 혁련은 나머지 흉노족을 규합하여 내몽골 지방에 大夏(407~431년)를 건국합니다.

이를 계기로 中國 북부, 몽골 남부 오르도스 지방에 살던 흉노족은 북방으로 밀려났으며, 다시 서쪽으로 쫓겨 유럽 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Hun족 가운데 최초로 서양을 떨게 했던 집단이 아틸라(Attila=Goth語로 아버지라는 뜻 ․ 395~453년)가 이끈 군단입니다. 434~452년 아틸라가 이끌던 시대가 훈族의 전성기입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훈족은 판노니아 평원에 도착하여 그 곳 東고트(Goth 게르만족의 일부)족을 몰아낸 후, 정착하여 훈 제국을 세우고 거대제국으로 확장했습니다. 게르만족은 이 때문에 오늘날, 독일, 프랑스 지방으로 이동하여 서양사에서 프랑코 왕국(오늘날 독일과 프랑스를 합한 나라)이라고 하는 나라를 건국합니다.

東로마제국은 아틸라에게 뇌물을 바쳐가며 延命을 시도했습니다. 훈 제국은 아틸라 사망으로 멸망했지만, 후에 마자르(Magyar)족이 도착하여 헝가리 왕국을 계승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헝가리입니다.

이어 柔然(Aval=大壇, 西洋史에는 무크리, 또는 쿠르자트로 표기하는데 무크리는 貊高麗(맥족의 고려), 즉 高句麗라는 뜻이라고 합니다)族이 서방에 이동해 와 캅카스 지방과 다뉴브江, 라인江 右岸 일대에 6세기 초 정착하여 250여년이나 이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뒤이어 부여족 일파가 캅카스 지방을 거쳐 발칸반도에 들어가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합니다.

특히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상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가리아를 세운 扶餘의 일족이 중앙아시아의 카스피海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한 경로는 요동에서 카스피海까지 밝산(백두산)~부여호~발칸시호~발칸산입니다. 이 명칭벨트가 재미있습니다. 扶餘族의 이동로라는 명칭적 증거라고 할까요. 이 지방은 東로마(=비잔틴)제국의 屬地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온 Hun족(현재 헝가리의 마자르族)의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이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江 兩岸과 北캅카스 지방에 흩어져 정착했습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扶餘族이 불가(Bulgar)族으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부여(불)의 加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훈族 지배로부터 독립하면서 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합니다. 그러나 건국 7년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아들 다섯을 남기고 갑자기 사망하고 맙니다.

쿠브라트 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습니다. 장남은 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으나 그 남부를 장악했던 카자르(Khazar)족의 지배아래 들어갑니다. 넷째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복속했습니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江을 건너 東로마제국에 복속했습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굴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北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붙인 볼가(Volga=불가)江과 카마(Kama:고마=고(구)려)江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고추가는 왕이 되지 못한 王父, 王妃를 배출한 특수한 신분의 加족)국을 건설합니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國은 그들이 扶餘族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하겠습니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성했습니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통상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세계와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國을 볼가江의 명칭을 따서 ‘볼가 불가(Volga Bulga)’라고 부르면서 아랍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고추불가’ 族은현재 소련 연방의 하나였던 타타르(達旦=몽고의 이칭)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구조가 한국어와 동일하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黑海 연안을 횡단한 후, 679년 다뉴브 江을 건너 발칸반도에 도착합니다. 東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령합니다. 이때 東로마제국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軍營에 파견돼 생활하면서 행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불가족과 동로마제국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이 펼쳐집니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조상신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군」편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불가족은 681년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그 곳에 정착하여 그 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합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부여)加族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古代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입니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변음)’라 불렸으며 슬라브 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습니다. 불가리아 귀족 명칭인 ‘보야’도 그들이 扶餘族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코 王國과 접경하게 됐습니다. 니케포로스 1세의 東로마제국은 이를 허용치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의 크룸(Krum)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습니다. 크룸칸은 811년 산맥고개에 매복했다가 로마軍을 대파했으며 니케포로스 1세를 전사시켰습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칸은 지금의 발칸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축출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피아(소비 또는 사비의 변음)로 정했으며, ‘소비’동산에 올라 조상신 ‘탄구르’에게 승전의 제천의식을 올렸습니다. 산 이름도 ‘발칸’ 산(밝산, 白山 : 古代 韓民族이 제천의식을 행한 山)으로 작명했습니다. 발칸산은 서울 北岳山처럼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며 크룸 칸의 제천유적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유래했습니다. 이것도 불가리아 지배층이 扶餘族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 수도를 ‘소비(사비, 또는 소부리=솝울=서울)’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습니다. 예컨대 扶餘族의 一派인 百濟의 聖王이 538년 公州에서 扶餘로 천도할 때, 국호를 南夫餘로, 수도를 ‘사비(→소비)’라고 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전북 익산의 옛 이름인 솝리(솜리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이름)도 솝우리→소부리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마한의 수도였기 때문에 솝리라고 한 것입니다.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東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 병사했습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東로마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크룸 칸의 뒤를 이은 불가리아 칸은 東로마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 보리스(Boris) 칸은 864년 그리스 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 국가가 됐습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 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東로마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屬州로 떨어졌습니다. 그 사이 소수 불가族과 다수 슬라브族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族 모습을 많이 갖게 됐습니다. 불가리아는 12세기 後半,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으나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化 하여 제1제국의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무튼 불가리아 민족은 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을 즐기며, 갓난아기 때는 엉덩이에 몽골반점이 있습니다. 현재 白人 세계에서 갓난아이의 엉덩이에 몽골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뿐이라고 합니다. 그 原因은 불가리아인의 조상이 扶餘族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불가리아와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현在 原불가족이 어디에서 出自했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黑海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한편 烏孫族은 서방으로 이동하다가 康居족과 융합하여 오늘의 카자흐 민족을 형성했습니다. 뒤이어 돌궐족이 서방으로 이동했습니다. 《隋書》 돌궐전은 『돌궐의 선조는 平凉(=평량=북평=지금의 北京)의 雜胡이다. 성은 阿史那씨』라고 했습니다.

이를 캐어 들어가 봅니다. 古朝鮮 해체 무렵 古朝鮮族 마을 하나가 외족에게 초토화됐습니다. 살아남은 한 소년과 몇 가족이 흉노족에게 구원받아 안전한 몽골 지역까지 피신해서 혼혈하며 힘을 길러 재기했습니다. 현재 모든 튀르크 민족들은 基源地를 위투켄 山과 기슭이라고 여기며 지금도 극히 신성시 합니다. 위투켄 山은 몽골의 항가이 산맥 가운데 4021m로 우뚝 솟은 최고봉이며, 몽골인들은 오르혼 탱그리 山, 지방민들은 박달(때로는 복돌=檀)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산입니다. 위투켄 山 끝자락에는 방목에 적합한 고원과 평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위투겐은 古朝鮮 말 우뚝한 어원이라고 합니다. 옛 中國 역사가들이 표기한 돌궐에서 우뚝할 突자를 차자한 것도 이러한 뜻을 포함한 것이라고 봅니다. 왜 우뚝한 산의 古朝鮮 이름이 突闕族 발생지에 붙여졌을까요. 돌궐족의 始祖가 古朝鮮 사람들이기 때문임이 自明합니다.

돌궐족은 이어 柔然(=Aval)이 지배할 때에도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장이(당시 최고계급은 무당, 두 번째 계급이 대장장이였다고 합니다) 역할을 하며 세력을 길러 아사나 두만(Tuman=우두머리라는 뜻)이 552년 알타이 산기슭에 돌궐 제1제국을 건국해 제위에 오르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왕족은 아사나 族이고, 최고 귀족은 아사달(=阿史德)이라고 호칭했습니다. 아사나氏가 아니면 선우가 될 수 없었고, 아사덕氏가 아니면 귀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出自를 중시하는 북방 기마민족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아사나 두만은 재위 30년간 돌궐제국을 동쪽은 흥안령산맥으로부터 서쪽은 카스피海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돌궐족이 알타이에 돌궐제국을 건국한 6세기 후반은 한국사에서 高句麗 百濟 新羅의 文化가 찬란했던 三國時代라는 사실입니다. 언어구조가 동일한 어족을 알타이어족이라 한다고 하여 韓國 민족이나 한국어가 알타이에서 왔느니, 몽골에서 왔느니 설명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이미 古朝鮮 말을 분유한 古朝鮮族의 후예 하나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쪽으로 이동해 가서 6세기에 알타이 산기슭에 대제국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돌궐족은 中國의 이간책에 따라 580년 東돌궐과 西돌궐로 나뉘었고, 서돌궐은 唐에 굴복했다가 완전히 멸망했으나 동돌궐은 684년 아사나 쿨 튀르크 (阿史那骨突祿)에 의해 재기해 다시 돌궐 제2제국을 건설해 唐과 겨루었습니다. 여기에 高文簡을 首長(=고려왕)으로 한 멸망한 高句麗 유민 20여만 명이 참여해 돌궐제국의 한 줄기를 이루었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이 부분은 후에 돌궐 편에서 상술하겠습니다.

그 후 돌궐족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西方으로 이동하는 중에 위그르(지금의 신강성), 키르기스, 우즈베크, 타지크, 투르크멘 등 다수의 국가와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결국 오스만 베이(Osman Bay)의 아나톨리아 반도 끝까지 진출하여 1299년 오스만투르크를 건국, 오늘의 터키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이 사이 튀르크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3억 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종래 韓民族의 기원과 古代文明 이동의 큰 흐름을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느니, 몽골, 바이칼, 알타이,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왔느니 하는 가설은 사실이 아닙니다. 패러다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상호 교류는 있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반대로 東方 아사달 문명이 서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라시아 대륙의 고대역사가 격동하게 된 것입니다.

日帝 식민주의 史觀은 古朝鮮 역사를 말살 왜곡했습니다. 日本을 중심으로 한 內鮮一體를 주장하던 그들 입장에서 볼 때 朝鮮의 역사가 日本보다 길 경우, 日本이 朝鮮에 종속당해야 하는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고대 역사를 기록한 수십만 권의 책을 불살라버리고, 조선사편수회 같은 관변 역사학자 등을 이용해 三國時代 이전을 역사에서 깎아 내버린 것입니다.

中國이 펼치고 있는 東北工程은 高句麗, 渤海의 歷史를 中國史에 편입하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古朝鮮과 아사달 문명이 편입의 주목적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민족의 기원인 古朝鮮과 아사달 문명의 역사 진실을 밝히고 지키는 것은 韓國 국민과 학자들의 의무이며, 역사의 독립운동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자원부국인 中央아시아 지역은 물론 인구가 많은 터키와 교역할 때, 우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여 잘 알고 있으면 유리한 면이 많을 것입니다.

 

▲ 터키(=突厥)와 한국

터키는 전신이 튀르크(Turk ․ 영어 u위에 우무나우트)로, 한자로는 돌궐이라고 표기합니다. 몽골과 함께 中國에서 흉노라 칭하던 북방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습니다.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입니다. 뜻과 발음이 똑같은 터키, 한국 양국어가 현재도 400여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튀르크는 시대에 따라 한자로 鐵勒, 土浴渾, 突騎施 등으로 표기됐습니다. 지금은 土耳己라고 씁니다.

《舊唐書》에는 〈철륵은 본래 흉노의 한 갈래이다〉라고 했고, 《新唐書》에는 〈奚國은 대체로 흉노의 갈래인데, 東胡계열이다〉라고 했습니다. 東胡란 東夷의 별칭입니다.

柔然의 한 부족으로 살아가던 튀르크족은 阿史那씨의 족장 부민칸(Bumin Khan)代에 이르러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유연을 멸망시킨 후, 552년 돌궐 제1제국(552~583년)을 세워 초대 칸으로 추대됩니다. 부민칸은 伊利可汗이라고도 부르는데, 中國 사서에서는 만인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頭曼 또는 豆滿, 土門으로 기록됩니다. 기원전 3세기에 처음 등장한 흉노족 초대 선우 頭曼과 똑같습니다. 두만강, 토문강은 중국 발음이 모두 ‘토우먼’으로 모든 강의 ‘으뜸 강’이라는 뜻입니다. 頭曼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高句麗 전성기엔 契丹, 靺鞨(=女眞=肅愼)과 마찬가지로 일부는 高句麗의 기층민중에 속했습니다. 돌궐은 高句麗가 멸망한 후(668년), 高句麗의 유민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특별히 긴밀해졌습니다. 高句麗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들은 초기엔 唐, 渤海, 후엔 新羅의 지배를 받으면서 滿洲 및 韓半島에서 살아갔으나, 귀족계급 등 중상류층 가운데 수십만 명이 唐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일부는 몽골, 글안, 돌궐 등 북방 초원에 흩어져 타민족과 섞여 살다가 684년 東돌궐의 阿史那骨祿이 올란바토르(현 몽고의 수도)를 수도로 하는 「돌궐 제2제국」을 수립할 때,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그 숫자는 돌궐 전 인구의 절반이 넘는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돌궐의 황제는 「선우」 또는 「가한」이라고 불리며 그 아래로 左賢王, 右賢王이 있었습니다. 돌궐 제2제국의 선우는 고구려 유민을 우대하여, 高句麗 왕족의 일원이며 유민의 수장인 高文簡을 高麗王(고구려 유민들 사이에는 막리지로 불렸다고 함)으로 봉하고 사위로 삼았습니다. 왕은 둘 밖에 없는 것이 돌궐의 전통이었으나, 高句麗 유민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이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王을 한명 더 늘려 高句麗人을 앉힌 것입니다.

돌궐은 특히 高句麗 유민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수장인 제사장에 임명했습니다. 이를 탕구르, 또는 텡그리라 했습니다. 탕구르, 또는 텡그리가 하늘(天)이라는 뜻 외에 古代 샤만(무당)의 호칭이었습니다.

골록의 뒤를 이은 黙啜은 돌궐의 전성시대를 이룩하여 698년 10만 기병으로 唐을 유린, 黃河에서 山東 사이를 폐허화시켰습니다. 이처럼 돌궐의 강력한 부흥 때문에 中國이 옛 高句麗 땅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에, 698년 大祚榮이 渤海(최초 국명은 震)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돌궐은 7세기말에 아사달 톤유크라는 귀족이 중앙아시아 소그드語 계통의 文字를 만들어 歷史를 기록했습니다. 古代 터키語로 기록된 돌궐 비문이 몽골 오르혼江, 南시베리아 예니세이江 상류 및 서북 몽골지방에 세워져 있습니다. 터키 사람들도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조상이 몽골고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 비석이 19세기 중엽 영국인 학자에 의해 해석되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알게 됐습니다.

‘예니세이’는 러시아 중부에서 北流하는 강으로, ‘큰 강’이라는 뜻입니다. 이 강의 지류 앙가라江은 바이칼湖에서 발원하는 유일한 강입니다. 가라는 우리나라의 가라, 가야, 가락에서 보이듯, 큰 강을 의미하는 고대어입니다. 결국 ‘예니세이’나 의미가 똑같습니다. ‘앙가라’의 앙(An=수메르 최고 神의 이름)은 ‘한(크다는 뜻)’과 마찬가지로 ‘크다’는 뜻을 가진 古語입니다. 그러니 앙가라도 큰 물, 바다, 큰 지역을 의미합니다. 현재 앙카라江가에 있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도 여기서 유래한 말입니다.

唐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돌궐은 8세기 무렵, 투르키스탄, 카작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스탄’은 ‘땅’이라는 우리 古語라고 합니다. 땅을 구한말 이전까지는

‘ㅅ당’으로 표기했습니다. 땅보다 더 ‘스탄’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후에 사라센 제국의 傭兵으로 남하합니다. 사라센은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트의 후계자가 中東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이룩한 대제국이었습니다.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징기스칸의 몽골에 패해 일시 그들의 지배를 받던 튀르크는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튀르크를 세워 20세기 초반까지 7세기를 이어오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케말 파샤의 국민혁명으로 멸망했습니다.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터키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다 독일이 패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소국으로 전락했습니다.

터키는 「돌궐 제2제국」을 같이 한 우리 민족에 대해 깊은 유대감과 함께 형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이 6ㆍ25때 북괴의 남침을 당하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군대(1만4936명, 전사 721명, 부상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던 것입니다.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면서 데모를 벌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7세기 때부터 문자를 갖고 있는 그들은 역사를 통해 터키와 한민족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터키는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지극히 한국인을 좋아합니다. 한국인이 터키에 입국할 때의 절차도 다른 외국인보다 더 너그럽다고 합니다. 그런 한국인이 2002년 韓日월드컵 때, 터키와 日本의 경기에서 日本을 응원했다고 하여 터키는 몹시 서운히 여겼다고 합니다. 다행히 4강전에서 터키에 졌기 때문에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지만.

이런 역사적 유대를 잘 알고 적절히 대응한다면 국가 관계나 기업들의 통상에서 유리한 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 터키의 역사나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 지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같은 우랄 알타이語인 터키 말과 문자를 연구하여 古代 터키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우리의 古代史 일부와 옛 우리 언어를 많이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 黃海

한반도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볼 때, 왼쪽에 있는 바다는 동해입니다. 옛 지도에는 가끔 朝鮮海라는 이름으로 기록돼 있는 경우도 있지만, 국제통용 명칭은 유감스럽게도 「日本海」입니다. 당연히 국제 지도에는 「日本海」로 표기돼 있습니다. 최근세에 와서 日本의 힘이 강해진 후, 국제사회에 통용되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이 시기는 朝鮮이 日本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결국은 倂呑당한 때입니다. 당시엔 바다 이름에 관심을 쏟을 형편도 아니었지만, 알았다고 해도 이에 항의할 주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日本海」는 고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힘이 약해져서 바다 이름조차 지키지 못하고 日本에 빼앗긴 셈입니다.

하지만 동해와는 달리, 오른쪽에 있는 바다의 이름은 예외 없이 「黃海」입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표기도 黃海로 돼 있고, 불리는 이름도 黃海요, 국제통용어도 「Yellow Sea」입니다.

어째서 黃海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는 중국의 황하에서 붉은 황토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바닷물이 누렇게 보이기 때문에 누르 黃, 바다 海를 써서 黃海가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바다를 내려다 봤을 때, 과연 黃海의 색깔이 누렇습니까? 수심이 얕아서 동해처럼 짙푸른 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파란색입니다.

黃海의 유래를 정확히 알려면 우선 우리 역사와 동양사상의 眞髓인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우리의 古代 역사는 中國의 량심적인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그 연대가 오래 되고 당시의 疆域 또한 넓었습니다. 漢字의 원형이라고 하는 甲骨文字의 창시자인 殷은 中國도 인정하다시피 우리 민족을 일컫던 東夷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殷의 마지막 왕인 紂를 쳐부수고 周나라를 세운 武王이, 은의 현인 箕子를 朝鮮王에 봉했다는 것은 中國 漢나라 武帝때 사람 司馬遷이 지은 《史記》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는 역사적 왜곡이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당시의 中國이 朝鮮이라는 나라를 지배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殷의 제후로 있다가 이제 겨우 나라를 건국한 周가 자기 나라 정치가 불안정하고 문물제도가 정비되기도 전인데, 언제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王을 봉하는 실력을 갖출 수 있었겠습니까.

殷의 예에서처럼 中國의 중심부를 차지하며 살고 있던 東夷족은 周의 건국 이후, 中國의 동쪽지방, 그러니까 黃海와 연접한 산동반도와 그 남쪽지방으로 밀려나거나 요동지방을 지나 만주, 한반도 등으로 서서히 이주했습니다. 그 시간은 수 백 년에 걸친 것이었습니다.

周 이후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의 中國 통일, 項羽와 劉邦의 楚漢싸움, 漢의 건국을 지나면서도 中國의 동해안에는 수많은 東夷족들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요동반도(燕), 산동반도(齊 魯), 吳越(강소, 절강, 복건, 광동)지방 등이 그곳입니다.

이에 대해 古代 중국사를 전공한 臺灣의 徐亮之 교수는 1955년 펴낸 《中國史前史話》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可知殷周以前 乃至殷周之世的 東夷其活動面 實包括今日 山東 河北 渤海沿岸 河南東南 江蘇西北 安徽中北 湖北東隅 以及遼東半島 朝鮮半島等 廣大地域 而山東半島 其中心 (은나라와 주나라 앞 시대부터 은주시대까지 동이족의 활동 지역이 사실 지금의 산동성, 하북성의 발해연안, 하남성의 동남지역, 강소성의 서북지역, 안휘성의 중북지역, 호북성의 동부 끝 및 요동반도와 한반도 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이었다.)〉

韓國 학자가 견강부회식으로 쓴 글이 아니라, 양심적 중국인 학자가 쓴 글이라 서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사가 또 하나 있습니다. 《前漢書》의 武帝(재위 BC 141~87년)편을 보면 『동이족을 쫓아 산동반도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냄새가 진동하는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물고기의 머리, 창자를 조금에 절여놓은 것이었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입니다. 中國(人)은 이를 「醢」라고 表記해 놓았습니다. 우리 民族이 즐겨먹던 「젓갈」을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가자미 식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해」입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이상한 느낌을 받습니다. 中國을 통일한 것으로 알려진 漢나라 때, 中國의 동쪽지방을 漢의 황제가 정벌하러 다녔다는 것은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리고 정벌 대상이 東夷족이라니 말입니다. 이는 漢나라 때도 中國의 동쪽지방에는 東夷족이 살고 있어서 漢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山東半島에도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던 시기에 山東半島에서 바다를 격해 수백km 떨어진 韓半島에 漢四郡이 설치돼 있었다는 종래의 학설은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구한말, 인천에 들어와 중국촌을 건설한 화교들과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됐을 때, 공산치하를 떠나 한국에 건너온 사람들은 대부분 산동지방 사람들이었습니다. 산동반도에서 인천이나 충남 당진까지 직선거리로 50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지만, 그들은 자손대대의 口傳을 통해 자신들의 뿌리가 東夷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中國의 동쪽 해안지방, 요동지방, 한반도에 걸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黃海는 어떤 바다였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굽(=馬蹄) 모양의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黃海는 內海, 또는 中海입니다. 「黃」이 노랗다는 뜻 외에 內 또는 中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임을 안다면 『아하』하며 고개가 끄덕여 질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中國에서는 문서에 기록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黃海를 결코 「黃海」라고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들끼리 말할 때는 「동해」라고 호칭합니다. 中國의 동쪽에 있는 바다니까 東海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서에 쓸 때나 新聞에 보도할 때는 黃海가 국제 통용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黃海」라고 표기하지만, 그 외에는 黃海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黃海가 東夷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명칭인 만큼 中國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정작 한국 사람들은 「黃海」 속에 이토록 속 깊은 의미가 있는 줄 잘 모릅니다. 「黃海」 대신, 「西海」라는 명칭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합니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해대교」, 「서해안시대」, 「서해교전」 등 예를 들면 한이 없습니다. 政府나 언론에서도 「서해」라고 씁니다. 이는 심하게 말하면 자신의 歷史를 모른다는 고백이나 다름없습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스스로 저버리는 우매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 잘못하면 「東海」를 「日本海」로 빼앗기듯, 언젠가 「黃海」도 中國이 사용하는 「동해」라는 이름으로 빼앗길 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혹시 「G2」로 성장한 中國이 「東中國海」라는 말을 만들어 쓰거나, 「東支那海」의 일부에 包含시키면 우리까지 덩달아 따라 사용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요즘 동해 이름 찾기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가 동해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동해가 있으니까요. 日本, 中國, 베트남, 러시아 등 자기 나라 동쪽에 있는 바다를 다 동해라고 합니다. 방향을 중심으로 하는 서해라는 말을 쓰면 안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동해라는 이름을 언제부터 썼는지, 그런 이름으로 외국에 알려진 것이 언제인지, 日本海보다 과연 앞선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아니,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아무튼 빼앗긴 뒤에 다시 찾기 운동을 하는 것보다 애초부터 빼앗기지 않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 영어권에서는 숫자 1~12의 이름이 왜 제 각각일까

12는 세계 곳곳에서 聖數로 취급돼…수메르 文明의 영향?

최근 朝鮮日報에 미국의 유력지 ‘월스트리트저널’을 인용한 흥미 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 중고등학생의 數學 실력이 漢字문화권 국가인 중국, 한국, 일본, 대만 학생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1부터 20, 특히 1~12까지 基數의 호칭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정확하게 십진법을 적용해 11, 12를 10+1, 10+2라는 뜻의 ‘십일’, ‘십이’라고 하는데 비해, 미국은 ten one, ten two라고 하지 않고 별개의 수인 eleven, twelve를 씁니다. 동양권에서 17은 10+7인 ‘십칠’이라고 하는데 비해 미국은 ‘칠십’으로 느껴질 수 있는 seventeen을 사용하므로 수학의 기본인 演算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자문화권의 기수는 정확하게 10진법으로 불리지만, 영어의 기수는 1부터 20까지 좀 불규칙합니다. 1에서 12까지는 固有의 이름이 있고 13부터 19까지는 앞에 three, four 등 단수, 뒤에 10을 의미하는 -teen이 붙는 방식입니다.

1에서 12까지 별도의 고유 명칭이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서양문화권에서 12는 聖數입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神들의 숫자는 12, 인도 힌두교의 경전 베다에 나오는 神도 인드라 등 12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던 히타이트 왕국의 神들도 12, 이집트에도 최고의 神 ‘라’를 포함하여 12 神이 있습니다. 12는 이밖에도 유태인의 12支派, 예수의 12 제자, 달력의 12달에 나오고, 동양에도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라는 12地支가 있습니다.

12의 起源은 이집트문명보다 최소한 1000~2000년 전의 문명으로 인정받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定說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점포판에 쓰여 있는 쐐기문자를 현대어로 해독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12神과 관련된 神話입니다. 점토판에는 수메르에 최고신인 안(An)을 포함하여 엔릴, 엔키, 난나, 우투, 이시쿠르 등 男神 6명과, 안의 부인 안투, 닌릴, 닌키, 닌갈, 인안나, 닌후르쌍 등 女神 6명을 포함하여 12명의 神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神이란 인간의 상상력 속에만 있는 虛像이 아닙니다. 天體 가운데 태양을 公轉하는 12개의 行星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현재 태양을 公轉하는 行星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등 9개 밖에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천왕성은 1779년, 해왕성은 1846년에 수학적 계산에 의해 발견됐으며, 명왕성은 1930년대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行星이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기원전 수 천 년 전에 18세기 이후에 그 존재가 알려진 行星을 포함시켜 12神으로 삼았겠느냐는 것입니다.

行星의 수 12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이들 9개 외에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3,000여개의 소행성, 달, 그리고 3,600년을 주기로 태양을 타원형으로 공전하는 미지의 行星(점토판에는 ‘마르둑’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등 3개가 포함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12개가 맞습니다. 소행성은 어느 시점까지 지구보다 더 큰 ‘티아마트’라는 이름의 행성이었으나 다른 천체와 충돌하여 파괴된 흔적이라는 것이고, 달은 본래 行星이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날, 지구의 衛星으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다만 최근 240년 간 수학과 과학의 발달 덕분에 발견된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이 기원전 수천 년 전에 쓰인 점토판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수께끼입니다. 수학으로 계산하여 추정했거나, 망원경 같은 광학기구가 있어서 관측했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직접 눈으로 봤거나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이라면, 이 수메르人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