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봉. 패자의 변: 채무자 관점에서 다시 쓴 외환위기 역사. 2000.12.31.

[요약] 외환위기의 실체에 대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점 (본문 15쪽)


원문보기_186p


목차

서론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외환위기 역사
채권자와 채무자, 승자와 패자

채권자가 쓴 위기의 역사

채무자가 다시 쓴 위기의 역사

음모론의 허실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유동성 부족’

1단계. 사전경고의 진실: IMF는 한국의 위기를 예견했나?

IMF 주장: 위기를 사전에 예견했다
IMF: 동남아국가에 대해서는 사전 경고

IMF: 한국을 오히려 선진국으로 격상

IMF: 위기 직전까지 한국경제를 칭송

IMF의 해명

제2단계. 한국 위기의 진짜 원인: 내부 결함인가? 대외 요인인가?

한국-IMF 합의 시: 무조건 한국의 잘못
합의 후: 대외적인 요인을 언급하기 시작

점차 대외요인의 비중이 증가

3단계. 처방의 정당성 검증: IMF는 왜 그토록 가혹했나?

IMF 처방의 정당성과 적절성
정당성 논쟁의 주역들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

IMF는 한국에 압력을 행사했나?

캉드쉬:  “IMF는 암세포의 확산을 저지했을 뿐이다”

시대 흐름에 따른 IMF의 역할 변화와 한국 처방

펠드스타인의 비판: “IMF의 너무 지나친 욕심”

피셔의 반론

IMF의 부당행위를 비판하는 여러 석학

4단계. 협상장에서 생긴 일: IMF는 미국과 밀착되었는가?

쌍무적인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역할을 IMF가 담당
벨로: “IMF는 미국 이익을 대변하는 현대판 트로이 목마”

펠드스타인, 암스덴: IMF의 미국 이익 대변은 부당
바그와티와 웨이드: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 복합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원을 사전에 저지했나?

일장춘몽으로 끝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

계속되는 미국의 압력

당당한 미국 재무부 삼인방

IMF가 미국의 이익 대변에 앞장선 이유

5단계. 처방의 적절성 논쟁: 감기는 어떻게 암이 되었나?

한국 기업 헐값세일
헐값세일에 대한 비판

IMF의 정통파 교리, 워싱턴 합의
워싱턴 합의인가? 워싱턴 혼란인가?

스티글리츠: IMF 비판에 선봉

삭스: “International Monetary Failure?”

여러 학자도 IMF 처방을 비판

삭스의 주장이 득세

비판에 대한 IMF의 반론

버그스텐과 삭스의 논쟁
펠드스타인: IMF 비판에 본격 가세

삭스: IMF와 미국 정부의 불장난

논쟁의 재연: 펠드스타인과 피셔

IMF: 잘못을 자인

크루그먼: 제3세대 모형에 의한 IMF 한국 처방 평가

결론. ‘IMF 신드롬’ 탄생

글을 마치며

외환위기의 원인은 복합적
내부구조결함론(內部構造缺陷論)

외부조건개입론(外部條件介入論)

금융공황론(金融恐慌論)
위기대응미숙론(危機對處未熟論)

IMF 과잉대응론(過剩對應論)과 실물위기파급론(實物危機波及論)

복잡계 현상이 가세

참고문헌


서론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외환위기 역사

1997년 11월 21일 한국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근대화 이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단절적인 변화(transitional change)를 경험했다.

무역시장과 금융시장의 개방으로 대표되는 세계화가 얼마나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는지, 냉전 체제 붕괴 이후 자본주의 체제 간에 경제전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세계의 정치-경제가 흘러가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한국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IMF와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실체가 무엇인지, 한국이란 나라가 세계 경제질서 속에서 얼마나 보잘것없고 존재 자체를 무시당하는 나라인지, 외자유치라는 그럴듯한 허울 아래 초국적 자본이 한국 시장을 어떻게 잠식해 들어오는지 조금씩 이해의 범위와 깊이를 더하고 있다.

위기를 겪으며 한국사회의 기존질서는 뿌리째 흔들리고 가치기준은 전도되었으며 그 와중에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면서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도 상당 부분 고갈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경제가 위기상황을 벗어났다는 자화자찬의 목소리도 있지만 여전히 외환위기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시중에 유동자금은 넘쳐나지만 수많은 기업은 자금 부족을 호소한다. 빈익빈 부익부가 고착화되면서 중산층이 붕괴되고 실업자가 양산된다. 해외투자가들이 자금을 조금만 회수해도 한국 증시가 폭락하고, 월스트리트가 일렁이면 한국 증시에서는 파도가 인다. 이 과정에서 최신 금융기술을 가진 초국적 자본은 대규모의 금융소득을 벌어들이고 국부는 해외로 유출된다. 그나마 수출로 외국에서 돈을 벌어오던 대기업은 하나 둘씩 문을 닫거나 초국적 자본의 손에 넘어간다. 한때 한국경제의 희망으로 보였던 테헤란로의 그 많은 벤처의 허상도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 모두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후유증과 무관하지 않다.[1]

하지만 외환위기[2]와 관련된 이처럼 많은 이야기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역사가의 손에 평가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 승자와 패자

사람은 보는 대로 믿는다기보다는 믿는 대로 본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사실을 보고 기록한다기보다는 역사가(歷史家)의 역사관(歷史觀)을 통하여 사건을 해석하고 재배열함으로써 혼(魂)을 불어넣는다.

네루는 “역사란 승자(勝者)의 손에 의해 기술된다”고 했다. 한국의 외환위기에서도 승자의 입장에 선 채권자들이 믿는 대로 역사가 정리되고 있다.

한국 외환위기에서 이해당사자는 당연히 채무자와 채권자다. 채무자라 함은 해외로부터 자금을 차입한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이며 특히 대규모의 단기차입금을 헤징도 하지 않은 채 달러표시로 무리하게 빌려온 단자회사들이 그 주역이다.

외환위기가 일어난 후 채권자들과 협상과정에서 민간의 해외차입금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주고 채권자들과의 협상을 주도했으므로 한국 정부도 채무자에 포함된다. 위기극복 과정에서 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되었으며 이는 전 국민이 언젠가 갚아야 할 부채이므로 넓게 보면 정부와 국민을 포함한 한국 전체를 채무자로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반면 채권자는 한국에 대출을 해준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금융기관이다. 해당국 정부도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다각도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그들 역시 광의의 채권자 집단에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로버트 루빈 장관, 로렌스 서머스 차관, 데이비드 립턴 차관보와 같은 미국 재무부 관료들은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여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서 IMF의 역할이 애매모호하다. 원칙적으로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공정한 ‘심판’ 역할을 해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채권자의 입장에 완전히 치우쳐 채권자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했다.[3]

따라서 IMF 역시 채권자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반면 세계은행은 상당히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므로 심판으로 분류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채권자가 쓴 위기의 역사

채권자가 쓴 한국 외환위기의 역사는 다섯 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제1단계다. 한국경제는 외환위기 이전부터 이미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는 크루그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아시아 성장한계론’이나[4] IMF가 주장하는 ‘동아시아 내부결함론’으로 요약된다. 채권자의 주역 격인 IMF의 주장에 따르면, IMF가 이러한 내부적인 결함을 미리 감지하고 한국에 대하여 여러 차례 사전경고를 했지만 한국 정부와 국민은 귀담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렸다.[5]

제2단계에서는, 이처럼 한국경제가 내부적으로 많은 구조적인 결함이 안고 있었는데도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IMF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결과 문제가 누적되어 외환위기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한국의 위기가 순전히 내부결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부 문제부터 철저히 고쳐야 한다고 IMF는 주장했다. 채권자는 물론 채무자 일각에서도 IMF 주장에 동조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제3단계로, 채권자들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위기재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광범위한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IMF의 진두지휘 아래 한국은 철저한 시장중심의 경제로 재탄생하고 소위 아시아적 가치와 도덕적 해이를 타파하며 사회 전반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기업의 부채비율을 낮추었다. 이로써 한국은 기존에 문제가 많았던 정부 주도의 개발경제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 깊숙이 이식시켰다.

제4단계에서는, 한국이 세계화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본시장 개방을 지연시킨 데도 위기의 원인이 있으므로 한국의 자본시장을 더욱 개방하는 동시에 불공정한 무역관행도 타파하는 등 무역시장도 과감히 개방했다.

마지막 제5단계다. 한국은 급등하는 원화 환율을 안정시키고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하여 IMF 처방대로 금리를 급상승시키고 긴축재정정책을 펼치며 경제성장률도 낮게 가져갔다. 초국적 자본에 한국 기업을 매각하여 외환보유고를 더욱 확충했다. 한국경제는 자유시장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근접하게 되었으며, 시대착오적인 아시아적 가치는 폐기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외환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해냈다. 여기까지가 채권자들이 주장하고, 흔히 알고 있는 한국 외환위기의 역사다.

하지만 서구 학자 가운데서는 이러한 채권자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버드대학교의 제프리 삭스나 『파이낸셜타임즈』의 마틴 울프[6] 같은 지성(知性)은 채무자인 한국이 잘못을 범하기는 했지만 그 대가가 너무 크며 또한 외환위기가 발발한 데는 반드시 채권자들의 책임도 있다고 했다. 대차관계에서는 항상 채권자와 채무자가 있기 마련이고 과실을 판단할 때는 양 측의 상황이 모두 고려되어야 하는데 왜 채무자만 일방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느냐는 반론이다.

세계은행의 수석부총재인 조셉 스티글리츠[7]는 한국의 위기와 관련해 의미 있는 발언을 한다.[8]

“모든 대차거래에서 채무자가 있으면 항상 채권자가 있기 마련이고 채권자도 채무자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동아시아의 채무국이 비난받는다면 채권국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외국은행이 어느 정도 한계대출자(marginal lender)였다면, 그들은 더욱 비난을 면할 길 없다. 한국의 은행을 통하여 한국 기업에 많은 부채를 안긴 해외채권자들은, 금융분석가들이 안정적으로 여기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부채비율을 안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제프리 삭스도 무분별한 채무자가 생기는 데는 무분별한 채권자가 있게 마련이라는 점을 지적했다.[9]

이러한 소수 의견은 당시 주류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들의 주장이 널리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어린아이들의 사소한 시비도 양쪽의 입장을 들어봐야 하는데 모든 것이 ‘한국 탓’이라는 주장은 채권자 측의 논리다. 한 나라의 역사가 단순한 사적인 기록에 그친다면 누구의 손으로 어떻게 쓰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며, 한국이 다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위기의 역사를 재해석하여 좀 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다시 스티글리츠의 주장을 보자.[10] “나는 동아시아에 대한 비관적인 목소리를 자주 듣는데 특히 동아시아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지난 25년간 이룬 업적에 대하여 보다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룬 것은 종이로 만든 집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의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가난을 극복했다. 만일 아시아인들이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다면 경제는 예전의 힘을 회복할 것이다.”

이처럼 채권자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기록된 역사는 그간 이룬 한국의 기적 같은 경제성과에 대한 자부심마저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기비하에 빠질 필요가 없으며 지난 25년간 이룬 업적에 대하여 보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채무자가 다시 쓴 위기의 역사

채무자의 관점에서 외환위기의 역사를 재기술하면 완전히 다른 흐름이 나온다.

먼저 제1단계다. 한국경제는 위기 이전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외환위기를 촉발시킬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크루그먼도 경제성장률이 점진적으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지 위기상황을 예견한 적은 없다. IMF나 세계은행도 위기 직전까지 한국경제의 기적적인 성장을 칭송한 것으로 보아, IMF는 위기를 사전에 예견하지 못했다. 특히 IMF가 한국에 대하여 사전에 경고를 했다는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제2단계로, 동남아의 외환위기가 한국으로 전염되면서 채권자들 사이에서 심리적인 공황상태가 일어나자 헤지펀드를 필두로 해외자본이 일시에 탈출을 시도하면서 외환이 폭등하고 유동성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동아시아 내부결함론’을 주장하면서 위기의 원인을 한국 내부문제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채권자들은 한국의 외환위기가 다각적인 원인이 복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국 정부와 협상 단계에서는 철저히 내부결함 문제만 부각시켰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협상을 끝낸 직후 IMF는 공식적 또는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한국 외부적인 요인이 상당부분 작용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제3단계에서, IMF와 한국 정부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한국경제 내부를 철저히 구조조정하는 데 합의하고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여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시켰다.[11] 그 과정에서 IMF는 주어진 권한을 넘어서는 여러 가지 월권행위를 했다.

제4단계로, IMF는 미국 재무부와 월스트리트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앞장섰다. IMF는 한국 측으로부터 무역이나 자본시장 개방과 관련하여 통상적이고 쌍무적인 관계에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양보를 받아냈다. 특히 미국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 대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여러 가지 경제정책을 요구하는 동시에 초국적 자본이 자유롭게 한국 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했다. IMF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유는 미국이 IMF의 최대주주이며 캉드쉬가 IMF 총재에 선임되고 세 번 연임하는 데 미국이 결정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제5단계다. IMF는 한국을 위기에서 탈출시킨다는 명분으로 고금리정책, 긴축재정정책, 낮은 경제성장률과 같은 축소지향적인 경제정책을 펼침으로써 외환위기가 금융위기, 실물위기 등 경제 전반적인 위기로 확산되었다. 한국의 기업과 금융기관, 부동산의 가치가 급락하자 초국적 자본은 한국의 많은 기업과 우량자산을 헐값세일(fire-sale) 가격에 매입했다. 그리고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으로 인해 아직도 혼란의 와중에 휩싸여 있다.

이상의 흐름이 채무자의 입장에서 정리한 위기의 역사다. 각 단계를 대비하면 다음의 [표 1]처럼 요약된다.

[표 1] 위기의 실체에 대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점

물론 이러한 채무자의 관점은 소위 ‘음모론’에 일방적으로 경사된, 편향적인 시각으로 치부될 수 있다. 패자(敗者)이며 약자(弱者)의 입장에서 감정에만 치우쳐 수호천사의 도움을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이를 비판하는 것은 세계화 시대를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이며 국수주의적인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을 여지도 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국수주의적인 입장에서 탈피하고 세계화된 국제질서 속에 편입되면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확보하여 거센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글로벌 차원의 정치-경제 질서의 냉엄함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국(富國)이 자신이 가진 다양한 형태의 힘이나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연스런 일이다. 이를 옳지 못하다고 비난한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할 사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냉전 체제가 붕괴된 후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체제 간 또는 국가 간에 새로운 긴장관계가 형성되었으며 헤게모니 확보를 위하여 치열한 물밑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동지가 더 이상 현재의 동지가 될 수 없으며, 적과의 동침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실이다. 이러한 냉엄한 국제 정치-경제 질서를 이해해야만 우리가 다시는 외환위기 같은 불행을 반복하지 않고 험난한 세계화 시대를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음모론의 허실

일부에서는 1997년에 일어난 동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미국의 음모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다양한 양태를 보이는 소위 ‘미국 음모론’은 신뢰성이 부족하며 논리적인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어 정통학자 사이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먼저 첫 번째로, 미국의 對중국 공격설이다. 미국이 국제금융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중국 길들이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舊소련 붕괴 이후 유일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1990년대 초부터 브루킹스 연구소 등을 주축으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앞으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헤게모니를 위협할 국가로 중국이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가기 전에 중국을 길들여 미국의 영향력 아래 묶어 둔다는 큰 방향을 세우고 그 실천수단으로서는 무력동원 같은 직접적 수단보다는 간접적으로 헤지펀드를 동원하여 중국에 대한 주요 자금줄인 아시아 화교자본을 공격함으로써 ‘병참선’을 끊는다는 전략을 추진했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다. 물론 이러한 전략을 통해 중국 금융시장을 다소 교란할 수야 있겠지만 그 효과는 미미할 것이므로 對중국공격설에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 중국의 외환시장이 대외적으로 개방되어 있지 않으므로 헤지펀드가 중국 금융시장에서 아무리 많은 이익을 올린다 해도 현실적으로 중국 외부로 유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미국의 對동남아 공격설이다. 이는 對중국 공격설과 연장선에서, 미국이 對중국 전략을 추진하는 전초전으로 동남아국가를 먼저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미국이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와 같이 주로 화교자본이 경제권을 장악한 동남아국가의 통화를 공격하여 이들 국가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화교자본의 무력화시킴으로써 중국 경제에 타격을 가한다는 내용이다. 그 와중에 말레이시아는 재빠르게 자본이동을 통제함으로써 헤지펀드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대응이 미진하여 외환보유고가 소진되고 결국 IMF 측에 손을 내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마하티르는 헤지펀드의 공격을 미국의 음모로 규정하고 맹렬히 비난했지만 국제사회로부터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미국이 여세를 몰아 중국의 관문인 홍콩을 공격하자, 중국 정부까지 발 벗고 나서 헤지펀드 공격을 방어하는 데 가세했으며 그 과정에서 홍콩의 은행들이 달러 확보에 나섰고 특히 한국의 금융기관에 대규모로 빌려주었던 크레디트라인 등 단기자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불똥이 튀어 한국이 유동성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역시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당시 동남아국가의 경제상황은 내부부실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차입한 자본이나 직접투자자본이 생산현장으로 투자되지 않고 부동산 같은 비수익자산 또는 저수익자산에 투자되어 자본수익률이 급락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의 위안화가 대폭적으로 평가절하되면서 동남아국가의 수출품이 가격경쟁력을 상실하는 사태까지 겹쳤으므로, 굳이 미국의 음모가 없었더라도 조만간 붕괴가 일어날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미국이 한국을 직접 공격했다는 설이다. 김영삼 정부의 대미정책이 미숙하여 초지일관 미국을 무시하는 듯한 외교정책을 펼쳤으며, 결정적으로 자동차 무역협상 당시 한국 대표가 협상도중에 책상을 치고 의자를 박차고 나오는 등 계속적으로 무례한 태도를 보이자 급기야 ‘한국을 손보기 위해’ 헤지펀드를 동원했다는 가십거리 같은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낮다. 단순히 사소한 감정적인 이유로 혈맹관계인 국가에 외환위기를 유도했다는 주장은 가십 거리로 치부될 수 있는 수준이다.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유동성 부족’

채권자가 쓴 역사와 채무자가 쓴 역사가 완전대립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양자 간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채권자들은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자 해외채권자들에게 진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지급불능 상태에 빠졌으며 그 원인으로 한국 내부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라는 ‘내부구조결함론’을 제시했다.

반면에 채무자의 관점은 한국이 비록 유동성 부족 상태에 빠졌지만 이는 캐시플로우(cash-flow)를 잘못 관리한 탓에 흑자도산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이므로 상당액의 유동성이 제공되었다면 한국이 외환위기를 탈출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IMF가 감기 환자에게 감기약을 주는 대신에 폐렴 수술을 집도함으로써 일을 크게 벌였다는 식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특히 수술 과정에서 수혈까지 차단함으로써 환자의 병이 필요 이상으로 악화되었다는 시각을 채무자 일각에서는 가지고 있다.

세계은행의 스티글리츠 수석부총재도 한국의 위기가 “지급불능 때문이 아니라 신인도 상실 때문”이라고 정리한다.[12] 마찬가지로 하버드대학교의 펠드스타인도 한국의 외환위기는 유동성 부족 때문이라고 규정한다.[13] “한국의 위기는 근본적인 채무이행불능 상태라기보다는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의 문제였다. 더욱이 한국의 경상수지적자 규모는 매우 작았고 급속히 감소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정부지출 감축과 세율 인상, 그리고 통화 긴축이라는 전통적인 IMF 정책은 필요치 않았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15년 전 남미처럼 채권은행이 협조하여 채권만기를 연장하고 이자상환을 위한 추가여신을 제공함으로써 단기부채를 재조정해주는 것이었다.”

외환위기가 일어난 원인을 굳이 하나만 선택하라면 이 글에서는 유동성 부족 때문이라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물론 전자의 주장처럼 한국경제 내부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1997년 당시 한국경제는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인해 고전하고 있었고 크루그먼의 주장처럼 성장잠재력이 급속도로 침하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이런 현상이 외환위기를 촉발시킬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뒤에서 상세히 설명되겠지만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한 가지만 들라면 ‘헤징(hedging)되지 않은 외화표시 단기외채가 과도했기 때문’이다. 위기 당시에 외채가 단기가 아니라 장기였다면 며칠 만에 그 많은 외채 상환요구가 없었을 것이고 외환보유고 부족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외채 상환요구가 있었다 해도 외화표시가 아니라 원화표시였다면 한국은행의 발권을 통해 부채를 상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외화표시 부채라 하더라도 사전에 헤징만 해놓았다면 환율이 일시에 급등했다 해도 부족분을 메울 수 있었고 따라서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유동성 부족론’과 맥을 같이 한다.


1단계. 사전경고의 진실: IMF는 한국의 위기를 예견했나?

결론부터 말하면 예견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IMF는 한국의 위기를 예견했고 한국 측에 경고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세 나라[14]에 위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미리 경고한 흔적은 보이지만, 한국에 위기를 경고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IMF의 공식보고서나 캉드쉬 총재 또는 피셔[15] 부총재 같은 고위층의 발언을 보면 오히려 반대로 한국에서 위기가 발발하기 직전까지 한국경제에 대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IMF 주장: 위기를 사전에 예견했다

크루그먼은 1994년 말에 동아시아 성장한계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막상 위기가 터지고 많은 사람이 그의 논지를 인용하자 정작 크루그먼은 자신이 위기를 예견한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률의 점진적인 하락을 전망했을 뿐이라고 입장을 정리한다. 그와는 상반되게 IMF는 동아시아의 위기를 미리 예견하고 동아시아 국가에게 경고를 했지만 동아시아가 이를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직후인 1997년 12월 2일에 캉드쉬는 서울 방문에 앞서 방콕에서 열린 국제노조연맹총회에 참석하여, 자신들이 여러 해에 걸쳐 한국에 대하여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과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이 지난 여러 해 동안 거듭되어온 IMF 측의 외환위기 도래 경고를 무시해온 데 대하여 개인적으로 좌절감을 느껴왔다.”는 소감을 피력한다.[16]

두 달 지난 1998년 2월 9일 미국 안보위원회 기조연설을 위해 뉴욕을 방문한 캉드쉬는 『파이낸셜타임즈』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위기를 예견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한다. “재난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위기국가들을 충분히 이른 시간에 설득하지 못했다. 그들이 문제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원인은 ‘거부 신드롬(denial syndrome)’에 있다고 본다. 동아시아는 지난 30년 동안 예외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난공불락이라는 아시아적 가치와 아시아적 모델에 대한 신념을 굳건히 해왔다.”

1998년 7월 2일 캉드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IMF-분데스방크 합동회의에서도 1997년 아시아 위기가 일어나기 18개월 전부터 IMF가 동남아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경고와 충고를 보냈으나 이들 국가는 듣지 않았다고 되뇐다.[17]

IMF: 동남아국가에 대해서는 사전 경고

이처럼 캉드쉬는 기회 있을 때마다 IMF가 동아시아의 위기발발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를 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을 제외한 동남아 세 나라에 대해서는 실제로 경고한 흔적이 있다.

동남아에서 위기가 발생하기 반년 전인 1996년 11월 7일 캉드쉬는 자카르타에서 아세안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참석한 회의석상에서도 동남아국가의 대외취약성에 대하여 강력히 경고한다. “아세안 국가가 대외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화계정의 적자를 줄이고 국내 저축을 늘려야 한다. 특히 해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는 민간부문에서 대규모의 자본이 유입되면 지출이 총체적으로 늘어나고 물가상승 압력도 커지며 통화계정 적자도 늘어난다. 아세안 국가는 훌륭한 경제성과를 이루었지만 대규모의 자본유입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는 면역성이 없다. 아세안 국가가 경제적 성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역내 협력체계를 강화하여 외부로부터의 차입 의존도를 줄이고 해외 자본 유입 은 가능한 한 장기 계약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내 은행 체제를 육성하여 정부 역할을 대신하도록 해야 한다. 안정에 가장 큰 위협을 주는 요인은 단기자본이 유입되면서 대외취약성이 노출되는 것이다. 아세안 국가는 높은 수익성과 건전한 펀더멘털(fundamental, 경제기초)을 찾는 해외투자가들이 선호하는 중심지역으로 부상했다. 선진국의 총투자 중에서 아세안의 비중이 거의 25%에 달한다. 이는 통화관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18]

IMF는 아세안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까지 적절히 제시했었지만 이러한 경고성 발언을 접한 아세안 국가는 오히려 화를 냈으며 태국은 충고를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 IMF의 주장이다.[19]

IMF: 한국을 오히려 선진국으로 격상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IMF가 경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IMF가 한국경제를 낙관했다는 정황자료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동남아 세 나라에서 위기가 시작된 1997년 5월에 IMF가 내놓은 『세계경제전망』보고서를 보면, 1998년의 세계경제지표를 전망하면서 사용한 한국 관련 기초자료에서 “한국이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정부예산이 균형을 이룰 것이며 소규모의 흑자가 지속되어 통상의 국가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한다.[20]

특히 이 보고서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간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했던 한국을 ‘선진경제권’으로 격상시켰다는 사실이다. IMF는 분석 대상국을 크게 ‘선진경제권, 개발도상국, 체제전환국’으로 분류하고 선진경제권을 다시 ‘주요산업국’과 ‘기타 선진경제권’으로 나눈다. 주요산업국은 소위 G-7 국가(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이며 기타 선진경제권에는 그리스, 홍콩, 이스라엘, 뉴질랜드, 스페인, 스웨덴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다. “홍콩, 한국, 싱가포르, 대만 등 여러 아시아의 신진산업경제와 이스라엘 등 전통적인 산업국가를 같이 묶었다. 이러한 재분류는 이들 나라의 경제발전이 선진 단계에 진입했음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 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에서나 제대로 발전된 금융시장과 수준 높은 금융기관의 보유, 그리고 서비스부문의 급속 성장 등 주요산업국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IMF는 한국에 위기를 경고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이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IMF: 위기 직전까지 한국경제를 칭송

1997년 7월 9일에 발표한 『IMF 1996/97년 연차보고서』에서도 한국의 펀더멘털에 대하여 높은 점수를 주었다.[21] 한국경제에 대한 평가와 자문을 위해 1996년 11월 15일 IMF의 이사진이 모여 협의한 결과 다섯 가지 결론을 낸다.

첫째, 한국의 펀더멘털은 건전하며 이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다.

둘째, 거시경제정책상 가장 큰 문제인 경상수지적자의 폭이 확대되는 현상은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일시적인 무역수지 역조 현상에 기인한다.

셋째, 취약한 금융부문을 조속히 구조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한국이 OECD와 BIS에 가입하는 등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요구되는 부수적인 조언이다.

넷째, 한국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자본시장 자유화에 대하여 지지한다. 자본시장 자유화는 한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은행금리를 낮출 것이다. 해외로부터 자본유입을 늘리기 위하여 환율변동 상하한의 폭을 넓히거나 없애는 조치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한국의 원화 선물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이다. 또 점진적인 자본시장 자유화보다는 신속하고 완전한 자본시장 자유화가 한국에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이다.

다섯째, 노동시장 개혁과 공기업 민영화와 같은 구조조정이 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이며 이러한 구조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이러한 평가로 미루어 볼 때, 당시 IMF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더욱 확대하도록 강조하는 동시에 노동시장 개혁이나 공기업 민영화와 같은 소위 워싱턴 합의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방식의 경제개혁을 한국 측에 권고했다. 더욱이 한국경제가 봉착한 거시경제적인 난맥상을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규정하고서도 막상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자 IMF는 위기의 원인이 오로지 한국의 내부결함 때문이라는 정반대 주장을 펼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처하기 약 7개월 전인 1997년 4월 24일 캉드쉬는 워싱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멕시코 사태와 비슷한 국제금융위기를 경험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No’라고 답한다.[22] “한국은 국제수지 적자 누증 등 당면한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활기찬 경제성장을 회복할 것으로 확신한다. IMF는 한국이 현재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에 만족하며 한국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한국 정부도 현재의 경상수지적자 규모가 과도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IMF도 다소 많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취하고 있는 조치는 곧 경상수지적자 규모를 보다 합리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캉드쉬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하여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97년 9월 12일 캉드쉬는 워싱턴에서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의 현 경제 상황은 위기가 아닌 적응과정으로 본다면서 동남아의 외환위기가 한국으로 파급될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을 밝힌다.[23]

“한국은 태국 외환위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건전한 거시경제정책과 유연한 변동환율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앞으로도 이번 동남아 외환위기 같은 사태를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최근 국내 금융시장의 취약성에는 다소 위험 요소가 보인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면서 경제 상황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건전한 금융시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많은 나라의 경험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국경제가) 다소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선진국과 1인당 국민소득 격차가 줄어들면서 한국이 과거처럼 고성장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경제정책을 건전하게 유지한다면 당분간 매년 6~7%의 성장은 무난하리라 본다. 신중한 거시정책을 펴면서 금융개혁에 박차를 가한다면 경상수지적자도 안정적인 수준까지 계속 줄어들고 거시경제도 괜찮아질 것이다.”

연이어 1997년 9월 24일 캉드쉬는 홍콩에서 열린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만난 강경식 부총리에게 “한국 경제운영은 매우 만족스럽다”고 안심시킨다.[24]

연차총회에 참가했던 세계은행의 울펜손 총재도 한국경제는 큰 문제가 없다면서 동남아국가와 한국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한국경제는 매우 괄목할 만하며 최근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태국과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국경제의 성공사례는 세계은행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정부의 거시경제 운용도 건전하므로 한국경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25] 이처럼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양대 국제기구의 수장들은 1997년 중반까지는 한국경제에 대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

이미 동남아에서는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한국에 위기가 전염되기 시작한 1997년 10월에도 IMF는 1997~1998년의 『세계경제전망』보고서에서 한국의 GDP 성장률이 1997년 6.0%로 1996년 4월에 예측했던 5.6%보다 다소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으며 1998년에는 6.0%의 견고한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예측한다.[26]

1997년 10월 6일에는 IMF의 애덤스 아태국장보가 IMF 연차협의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한다. 경제 상황을 점검한 후 10월 15일 재정경제원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한국경제에 대하여 매우 낙관적으로 진단한다.[27]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에 따른 다소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으로 매우 건실하다. 경상수지적자 축소 등 거시경제 여건은 여전히 건전하며 1997년 거시경제 운용은 성공적이고 재정수지는 매우 훌륭하게 관리되고 있다. 한국이 위기상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불황기의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라고 보기 때문에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거치면 보다 성숙한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자본시장 개방이 착실히 추진되고 있으며, 펀더멘털이 건실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한국으로의 해외자본 유입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대선 등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지만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치 일정에도 불구하고 금융개혁 등 구조조정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IMF의 해명

하지만 애덤스는 채 반년이 지나지도 않아 낙관적인 전망을 번복한다. 1998년 4월 10일에 애덤스는 6개월 전에 자신들이 발표한 한국경제에 대한 전망이 잘못되었다고 해명한다. 한국의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실태 등 경제 전반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는 언론과 가진 대담에서 “1997년 10월에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한국은 펀더멘털이 튼튼하므로 외환위기 가능성이 없다고 전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한국경제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던 우리의 희망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한국에 위기가 온 것은 대외적인 문제와 금융권 문제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에 대한 IMF의 개혁처방이 모든 점에서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사전에 완벽한 청사진을 갖고 이 문제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힌다.[28]

국제신용평가기관 역시 한국의 위기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세계 3위의 신용평가기관인 Fitch IBCA의 국가신용평가 담당임원인 휸은 “한국의 경우에 신용평가기관은 확실히 실수를 저질렀다. 한국은 위기 전에 높은 투자적격 등급을 받았다가 이제는 투기단계로 하락되었다. 처음 평가나 나중 평가 가운데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실제로 한국의 평가등급 하향조정은 주권국 사상 가장 극적인 것이었다.”라고 실책을 자인한다.[29] 휸은 자기들 외에 여러 국제기관도 같은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한다. “동아시아의 교훈은 신용평가기관과 IMF에게 매우 의미가 있는데 이는 국가위기 유형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해서는 어떠한 조기 경고도 없었다. IMF는 위기 직전까지도 동아시아를 칭찬하는 견해를 내놓았고[30] 세계은행도 1993년에 『동아시아 기적』이라는 보고서를 낸 뒤 견해를 철회한 바 없었다. 그리고 OECD 역시 한국을 회원으로 가입시켰으며 대규모 상업은행들도 위기 전야에 한국에 대한 대출을 상당히 늘렸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정황자료로 판단해볼 때 IMF나 캉드쉬가 한국의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고 경고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동남아국가에 대해서만 위기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경고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IMF의 모순된 행동에 대하여 측면 지원하는 인사도 있다. 메릴린치 세계금융연구원의 하이만 원장은 설사 IMF가 위기를 예견했다 하더라도 이를 발표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옹호한다.[31] “문제는 IMF가 어떤 나라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감지했다 하더라도 위기가 일어날 때까지는 그 나라를 선도할 수단이 없다. 위기 이전에 IMF는 당근만 가지고 있다. 일단 위기가 일어나야 IMF는 돈이라는 당근에 회초리라는 조건을 덧붙일 수 있다.”

캉드쉬도 1998년 4월 2일 워싱턴의 기자회견에서 같은 맥락의 해명을 한다.[32] “어떤 나라가 위기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될 때 IMF가 이를 경고하고 나서는 일이 과연 바람직한가? 우선 IMF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만은 없다는 문제가 있으며, 그러한 경고가 오히려 위기를 재촉할 위험도 있다. 역시 시장참가자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피셔도 같은 취지로 변명한다.[33] “IMF는 임박한 위기를 공개했어야 하는가? 우리는 태국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위기가 터질지 그리고 언제 터질지를 확실히 예견할 수 없었다. 위기가 일어나기 전에 IMF가 소방차처럼 비상등을 번쩍이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현장에 도착했다면 아마 넘길 수도 있는 위기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

물론 캉드쉬와 피셔의 말도 수긍 가는 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하여 위기를 감지하고도 이를 발표할 경우에 미치는 악영향을 감안하여 경고를 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해명은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동남아 국가에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IMF가 한국의 위기를 예견하고 사전에 경고했다는 주장의 허구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IMF는 한국의 위기를 예견한 적도, 경고한 적도 없다.


제2단계. 한국 위기의 진짜 원인: 내부 결함인가? 대외 요인인가?

제1단계에서 IMF는 한국의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고 이를 경고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결과 제2단계에서 한국의 내부결함으로 인해 위기가 촉발되었다고 IMF는 주장한다. IMF에 제2단계가 중요한 이유는 제3단계에서 한국 측에 광범위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려면 전제조건으로 한국 내부에 많은 결함이 잠재되었다는 점에 대하여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IMF가 주장하는 위기의 원인에 대하여 살펴본다.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IMF는 필요에 따라 한국 위기의 원인에 대하여 시간대별로 또는 대상별로 말을 조금씩 계속 바꾸어간다. 먼저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IMF는 ‘한국 내부결함론’을 강력히 주장하며 구제금융을 해주는 조건으로 총체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관철시킨다.

하지만 협상이 끝난 직후 IMF는 한국의 위기에 대외요인도 크게 작용했다고 말을 바꾼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대외요인의 영향도를 높이는 반면 내부결함의 비중을 낮춘다. 대상에 따라서도 말을 달리한다. IMF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거나 금융전문가 또는 학자를 상대로 할 때는 대외요인을 포함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원인분석을 내놓지만, 한국과의 협상과정에서는 철저히 대외요인을 배제하고 한국의 내부결함만을 추궁했다.

한국-IMF 합의 시: 무조건 한국의 잘못

한국의 위기 원인에 대한 IMF의 입장은 1997년 12월 3일에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임창렬 부총리가 캉드쉬 IMF 총재와 맺은 〈양해각서〉에 처음으로 드러난다.[34]

첫째, 정부가 개별 경제부문에 정책적으로 과도하게 개입하고 시장원칙을 무시함으로써 금융부문이 비효율화되고 기업부문이 거액의 부채를 안게 되었다.

둘째,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선진국의 규칙과 관행에 따르는, 보다 건전하고 투명한 금융 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신속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셋째, 대기업이 특정 분야에 과도하게 투자했고 수출가격이 하락했으며 정부가 대기업 부도를 용인함으로써 사상 유래 없는 대기업의 연쇄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넷째, 시장경제원리와 건전한 감독이 미흡하여 금융기관이 제대로 위험도를 평가하지 못했으며 민간기업의 과잉투자계획에 과잉 지원을 하여 기업이 부실해졌다.

이러한 내용은 한국이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열흘 만에 나온 분석이다. IMF의 본격적인 위기 원인 진단은 1997년 12월에 나온다. 『세계경제전망』에서 위기 원인을 세 가지로 진단한다.[35]

첫째, 한국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금융부문의 취약성이다. 금융기관이 대기업에 편중대출과 정책대출을 했으며 금융관련제도는 금융기관의 해외차입을 부추겼다. 금융기관의 경영에 대한 감독과 규제가 소홀했으며 위험도에 대한 건전한 분석과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기업집단은 직접금융보다 주로 부채에 의존했으며 금융기관으로부터 직접 대출 받거나 보증을 받았고 정부의 지원 아래 더욱 신용을 확장하였으며 헤징되지 않은 대규모의 단기해외차입을 일으켰다. 1997년에는 과잉투자와 경기하강 국면이 겹침으로써 몇 개의 기업집단이 도산했으며 이는 금융 체제를 더욱 약화시켰다.

셋째, 정부가 금융지원, 규제, 보조금을 통해 산업구조를 조정했다.

여기서 보듯 협상 전후에 나온 IMF의 모든 분석에서는 위기의 원인으로 한국의 내부결함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따라서 한국이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철저히 내부구조를 개혁해야 하고 그 선봉에 IMF가 서야 한다는 논지다. 물론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의 위기 원인을 철저히 규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도 당시 삭스, 스티글리츠, 펠드스타인, 울프, 암스덴 같은 석학들이 한국 위기의 성격은 동남아와는 다르며, 특히 과도한 자본시장 개방이나 투기꾼의 개입, 투자가들의 공황심리 같은 대외요인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지적했는데도 IMF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초지일관 몰고 나갔다.

합의 후: 대외적인 요인을 언급하기 시작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는 모르지만 1997년 12월 3일 한국-IMF 합의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인 12월 4일부터 캉드쉬는 말을 바꾼다. 도쿄의 일본기자클럽에서 가진 회견에서 한국 정부와의 협상 때와는 다르게 한국위기에는 대외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밝힌다.[36] “국제투자가들이 동남아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의 경제적 문제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국제적 금융위기 도미노’로 인하여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그동안 별 생각 없이 바라보던 한국의 정계와 재벌 그리고 은행의 유착구조를 새삼스레 의식하고 한국경제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한국경제가 악화되는 시점과 아시아 외환위기 도미노가 겹치면서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하루 전만 해도 한국의 내부결함론만을 주장하다가 합의가 이루어진 바로 다음날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입장을 바꾸어 한국의 위기에는 소위 전염 효과와 도미노 현상이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한 것이다.

해를 넘긴 1998년 1월 22일 피셔 부총재도 워싱턴에서 열린 은행가협회 세미나에서 동아시아의 위기 원인으로 대외요인을 거론하기 시작한다.[37] “선진국과 국제금융시장의 불안도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원인이다. 1990년대 초부터 일본과 유럽에서는 경제성장률이 낮아졌고 국내 투자의 활성화보다는 저축을 선호했으며 통화정책이 긴축적으로 운용되지 않아 저금리 현상이 지속되었다. 더욱이 위험도에 대한 신중한 고려 없이 무리하게 고수익만을 쫓는 국제투자가들 때문에 막대한 민간자본이 개발도상국과 신흥경제국가에 유입되었다. 또한 지난 3년간 엔-달러 환율이 큰 폭의 등락을 보인 것도 위기를 촉발시킨 원인이다.”

이러한 캉드쉬나 피셔의 발언에서 주목할 점은 IMF가 이제껏 한국의 대내요인만 열거하다가 처음으로 선진국과 국제금융시장의 불안과 같은 대외요인을 위기 원인으로 지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점차 대외요인의 비중이 증가

IMF와 캉드쉬 그리고 피셔가 말을 바꾸어 가는 모습을 시간 흐름별로 살펴보자.

먼저 1998년 2월 캉드쉬는 『파이낸셜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38] 그는 그동안 IMF가 국제금융 체제에 대하여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음을 자인하고 금융질서 회복과 금융위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섯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경제정책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 체제 설립.

둘째, 건전한 정책 실행을 위한 주변국 감시.

셋째, 금융부문 개혁.

넷째, 부채문제 해결을 위한 효과적인 구조 마련.

다섯째, 보다 신중한 자본계정 자율화.

여섯째, 국제금융기관의 강화.

다음으로 1998년 3월에 피셔는 UCLA에서 가진 특강에서 해외요인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인 분석결과를 내놓는다.[39] 1990년대 이후 유럽과 일본의 성장 둔화로 매력적인 투자기회가 줄어들고 저금리가 지속되자 대규모의 초국적 자본이 신흥시장에 대규모로 흘러들어 갔으며, 위험도가 높은 투기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 3년간의 엔-달러 환율의 큰 변동도 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과 함께 전염효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태국에 위기가 일어나자 유사점이 많은 한국과 인도네시아에 대하여 초국적 자본이 과민반응을 보인 결과 공황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피셔는 이들 국가 간의 유사점으로 신인도 상실, 급격한 평가절하, 취약한 금융 체제, 헤징되지 않은 해외부채 등을 거론한다.

1998년 5월에 IMF는 아시아 위기의 원인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결과를 내놓는다.[40] 위기발생 초기에 일방적으로 동아시아의 잘못으로 밀어붙이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다양한 관점을 포괄한다. 먼저 위기의 속성을 ‘그들 자신의 성공의 희생물(victims of their own success)’로 규정하면서 위기요인을 대내요인과 대외요인으로 구분한다. 그중에서 IMF는 대외요인으로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일본과 유럽이 저성장을 하고 금리가 인하되면서 투자수익이 낮아지자 고수익을 찾아 다니는 초국적 자본이 신흥시장의 위험을 과소평가한 채 신흥시장으로 대규모의 민간자본을 유입시켰다.

둘째, 위기국가들의 통화가 달러에 고정되어 있어 1994~1997년에 엔 환율이 급등하자 위기국가들은 글로벌 차원의 가격경쟁력을 상실했고 수출이 급감했다.

셋째, 태국 바트화의 폭락에는 헤지펀드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IMF는 처음으로 국제투기꾼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힌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경제위기로 증폭된 원인에 대해서는 위기국가 탓으로 돌린다. “IMF가 이끄는 국제사회는 인도네시아, 한국, 태국 등 최악의 충격을 받은 국가에 금융지원을 제공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위기국가의 정책 당국은 초기에 적절한 개혁과 신뢰회복 수단을 실행하는 데 주저함으로써 위기가 더욱 악화되었다.” 즉 위기국가들이 IMF의 충고에 따르지 않아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이 주장은 잘못되었다. 한국은 IMF의 모든 충고를 충실히 듣고 그대로 따랐는데도 위기가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캉드쉬는 1998년 5월 8일에 런던에서 열린 G-7 재무장관 회의에서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원인분석을 내놓는다.[41] 기본적으로 동아시아는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해왔던 기록을 갖고 있으며 거시경제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엔-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재조정된 상태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위기를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첫째, 공공 및 민간 부문의 금융구조가 취약했다.

둘째, 해외 단기대출이 과다했다. 특히 FRB 그린스펀 의장이 국제금융체제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한 국제금융기관의 차입금 부분에서 시장의 정서가 급변하면서 위기국가의 취약성이 노출되었다.

셋째, 지배구조, 부패, 그리고 미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실자본주의’ 등이 문제였다.

그리고 IMF는 1998년 6월에 『아시아의 위기: 원인과 치유』라는 특별보고서에서 대외요인을 두 가지로 지적한다.[42] 국제투자가가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면서 신흥경제국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과소평가했으며, 역내 일부 국가의 환율제도가 달러에 연동되어 있었다는 분석은 앞서 언급된 내용이다.

피셔는 1998년 9월 10일 워싱턴에서 열린 연방예금보호협회 주최 심포지엄에서, 단기국제자본의 자유화가 한국 위기를 촉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43]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금융시장 개방을 추진할 때는 몇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단 장기투자부터 우선 개방하고, 특히 외국직접투자를 개방해야 한다. 그리고 거시경제가 안정되고 은행과 금융 체제가 건전할 때만 금융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마침내 IMF 내부의 최고 이론가인 피셔 부총재의 입에서 자신들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시장의 자유화로 인해 위기가 촉발되었다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IMF는 한국 정부와 협상을 끝낸 후에야 내부결함론에 덧붙여 대외요인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캉드쉬나 피셔는 『파이낸셜타임즈』와 인터뷰, UCLA에서 강연, G-7 재무장관 회의석상, 연방예금보호협회와 같이 권위 있는 자리에서는 대외요인을 언급했지만 한국 측을 상대로 할 때에는 초지일관 한국 대내요인으로 인해 위기가 일어났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IMF가 주도한 제2단계는 이렇게 채권자들의 의지대로 진행된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이 일방적으로 잘못한 것으로 정리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한국경제 전체를 구조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채권자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3단계. 처방의 정당성 검증: IMF는 왜 그토록 가혹했나?

이번에는 제3단계다. 제1단계에서 IMF는 자신들이 위기를 예견하고 경고했지만 한국이 귀 기울이지 않아 경제위기가 촉발되었으며 위기의 원인은 순전히 한국 내부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2단계에서 IMF는 한국 측에 광범위한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그 와중에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한국사회 깊숙이 이식한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IMF 처방이 정당한가에 대하여 살펴본다.

IMF 처방의 정당성과 적절성

IMF는 한국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요구를 한다. 그중에는 정당(正當)한 것도 있고 부당(不當)한 것도 있다.

세계 181개 국가가 IMF라는 글로벌 차원의 중앙은행을 만들고 IMF 측에 부여한 임무 내에서 이루어진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위임되지 않은 사항이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정 목적 또는 특정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한국 측에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부당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예컨대 IMF가 구제금융을 해주는 조건으로 수입다변화제도를 폐지하도록 요구한 것은 IMF 고유의 권한을 넘는 부당행위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수입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이므로 IMF 측이 개입할 권한이 전혀 없었으며 WTO 차원에서 검토되었어야 할 과제다.

또한 정당하다고 해서 반드시 적절(適切)한 것은 아니다. IMF가 주어진 권한 내에서 취한 조치라 하더라도 방향성이나 내용이 부적절(不適切)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IMF가 요구했던 긴축재정정책은 IMF의 고유권한에 속하는 일이지만 그 조치가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논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순서로 검토한다. 먼저 본 장에서는 IMF의 역할과 임무에 관련된 여러 논쟁을 살펴본다. IMF가 한국 측에 요구한 여러 사안이 IMF가 수임한 권한 내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범위를 넘어선 부당행위인지 여부도 판단해 본다. 제4단계에서는 IMF의 부당행위가 IMF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국가의 압력 또는 요구에 의해 의사결정이 왜곡된 결과였는지 검토한다. 제5단계에서는 IMF가 한국에 취한 조처가 과연 적절했는지를 살펴본다. 그 대상에는 고금리, 긴축재정, 저성장 등 여러 가지 경제정책이 포함된다.[44]

정당성 논쟁의 주역들

동아시아발 외환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될 즈음인 1998년 9월 『월스트리트 저널』에는 세계경제를 망친 삼인방과 세계경제를 구원한 십자군 이야기를 다룬 “사면초가의 시장”이라는 흥미로운 글이 실린다.[45]

9월 24일과 25일 양일에 거쳐 게재된 글은 부제(附題)만 보아도 주장하는 바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글 “힘의 한계: 일류 미국 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글로벌 위기가 확산되었나”에서는, 루빈 재무장관과 서머스 재무차관, 피셔 IMF 수석부총재 등 ‘위기 삼인방’이 병에 걸린 세계경제에 잘못된 처방전을 남발함으로써 병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증상만 악화시켰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97년에 한국과 태국, 인도네시아가 위기에 빠졌을 때부터 위기 삼인방의 실책이 시작되었다. 고금리와 긴축재정, 부실은행 폐쇄 요구는 위기국가의 경제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요구였으며 오히려 기업의 대량 도산과 실업만 초래했다. 지난 1995년 멕시코에 적용했던 IMF의 고전적인 처방을 경제와 문화배경이 전혀 다른 국가에 그대로 반복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급격한 평가절하를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국제투자가들을 내몬 결과가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아시아 기업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정책 입안을 지시했지만 삼인방은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하며 명성에 걸맞지 않는 실책을 범했다.”

두 번째 글인 “위기 십자군: 자칭 케인지언들이 글로벌 금융재난에 맞서는 방식에 대하여 우열을 겨루고 있다”에서는 MIT의 크루그먼 교수, 하버드대학교의 삭스 교수, 세계은행의 스티글리츠 수석부총재 등 세 명의 십자군이 참신한 이론과 실효성 있는 대책을 제시함으로써 그나마 무너져 내리는 세계경제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 외에도 채권자 진영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을 가하는 인물이 몇 사람 더 있다. 과거에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던 진보적 좌익과 NGO가 한편이 되어 IMF와 미국 재무부를 비판한다.[46] 그리고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즈』 같은 강경보수잡지, 『파이낸셜타임즈』의 울프, 미국 의회의 공화-민주 양당, 그리고 전직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경제수석인 펠드스타인과 같은 보수주의자 등도 IMF 비판 대열에 가세한다.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

IMF가 취했던 여러 가지 행위의 정당성 또는 부당성을 판단하기 위하여 먼저 〈IMF 설립협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IMF에게 부여된 목표는 다음과 같다.[47]

제1조 국제적인 통화문제에 대하여 자문하고 협력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기구를 만들어 국제적인 통화협력을 촉진한다.

제2조 국제무역이 확장되고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이를 통해 회원국의 핵심적인 경제정책 목표인 높은 고용과 실질소득의 증진과 유지 그리고 생산자원의 계발에 기여한다.

제3조 환율 안정을 촉진하고, 회원국 간의 환율 질서를 유지하며,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예방한다.

제4조 회원국 간의 통화거래와 관련된 다자간 결제 체제를 구축하고, 국제무역의 성장을 가로막는 외환규제가 철폐되도록 지원한다.

제5조 적절한 보호조항 아래 회원국이 IMF의 일반적인 자원을 임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국내적 또는 국제적인 번영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국제수지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도록 회원국에 신용(대출)을 제공한다.

제6조 이를 통하여 회원국이 국제수지 불균형의 폭을 조속히 줄여간다.

이를 근거로 IMF가 구제금융 조건으로 한국 정부와 합의한 사항에 대하여 살펴보자. 1997년 12월 3일에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임창렬 부총리는 캉드쉬에게 〈의향서〉와 〈양해각서〉를 전달한다.[48]

〈의향서〉에는 세 가지, 〈양해각서〉에서는 여섯 가지의 합의사항이 들어 있다. 〈의향서〉에서 155억 달러의 3년 대기성 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지급불능에 빠진 부실 금융기관을 처리한다.

둘째, 한국경제를 더욱 개방한다.

셋째,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광범위한 정책을 실행한다.

다음으로 〈양해각서〉에서는 여섯 가지를 합의한다.

첫째, 통화긴축과 재정긴축을 통하여 경상수지를 적절히 조절하고 강력한 거시경제의 틀을 만들어 물가상승을 억제한다.

둘째, 금융산업의 구조조정과 자본확충, 투명성 개선, 시장기능과 감독기능 강화,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포괄적인 전략을 세운다.

셋째,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한다.

넷째,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가속화한다.

다섯째, 무역자유화를 더욱 추진한다.

여섯째, 경제통계가 투명하고 시의적절하게 공개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내용은 IMF가 중남미의 외환위기 때 적용했던 소위 ‘워싱턴 합의’의 복사판이다. 중남미의 위기와 한국 위기의 속성이 완전히 다른데도 IMF는 동일한 처방을 내렸다.

정당성을 살펴보자. 첫 번째 거시경제정책, 여섯 번째 통계자료 문제는 IMF의 고유 영역이다. 두 번째 금융산업 문제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세 번째 기업 소유지배구조, 네 번째 자본시장 자유화, 다섯 번째 무역자유화 문제는 명백히 IMF의 고유영역을 넘는 부분이다. 그리고 〈IMF 목적〉 제2조에서 “높은 고용과 실질소득 증진과 유지 그리고 생산자원의 계발에 기여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 부분도 IMF는 한국에서 명백히 실패했다. 오히려 IMF는 당초부터 주어진 역할과 반대로 한국에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함으로써 ‘낮은 수준의 고용과 실질소득의 감소’라는 결과가 나왔다.

IMF는 제5조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한국이 ‘국제수지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도록 신용(대출)을 제공’했으면 되었을 일을 다른 사안을 괜히 건드려 병세가 악화되었다.

IMF는 한국에 압력을 행사했나?

캉드쉬는 IMF 실무 팀이 한국 정부와 긴급구제금융 조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상을 벌이고 있을 즈음인 1997년 12월 1일, 스페인 『엘파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경제모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비판한다.[49]

“아시아 국가가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낡은 경제모델을 과감히 포기해야 할 것이다. 경제모델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유용한 시점이 있는 반면 시대에 뒤떨어져 포기해야 할 시점도 있다. 신발을 닳도록 신고 나서 그것을 버리듯 낡은 생각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미구엘 데 우나무노[50]의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 저축, 근면, 결속 등 전통적 아시아적 가치는 더 개방적이고 투명한 체제에 적응해야 한다”

IMF는 한국 정부와의 협상과정에서도 계속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여 협상은 난항을 겪는다. 12월 1일 새벽 임창렬 부총리가 협상결과를 1일 상오에 발표하겠다고 밝혔지만 캉드쉬는 이를 일축한다. 2일 새벽까지 다시 벌어진 재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부실 종금사 9개를 정리하기로 합의한 후 다시 IMF 측이 재벌처리와 은행정리 문제를 들고 나와 협상이 결렬된다. 상호지급보증 해소, 연결재무제표 작성의무 강화,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수입다변화제도 조기 폐지 등을 추가로 요구했기 때문이다.[51] 임창렬 부총리가 2일 아침에 예정된 국무회의 직전에 캉드쉬에게 전화를 걸어 실무협상결과를 설명하지만 캉드쉬는 미국정부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합의를 거부한다. 미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첫째, 3년 미만 단기채, 국공채, 기업어음 시장의 조기 추가개방, 둘째, OECD에 제출한 금융시장 개방일정 재조정, 셋째, 국내 은행 등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금융기관의 자유로운 인수합병 등과 같이 월스트리트 자본이 한국 자본시장에서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52]

게다가 캉드쉬는 12월 2일 태평양재무장관회의 석상에서 재벌해체 문제까지 거론한다. “아시아 국가는 현재의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낡은 아시아의 경제모델을 버려야 한다. 특히 아시아의 낡은 경제모델인 한국 재벌그룹은 해체되어야 한다.”[53]

이처럼 IMF는 초기 협상단계에서부터 한국을 몰아붙인다. 또한 입지 확보를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직간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캉드쉬:  “IMF는 암세포의 확산을 저지했을 뿐이다”

하지만 캉드쉬는 자신과 IMF가 한국에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면 부인한다.

1997년 12월 4일, 도쿄 일본기자클럽의 회견에서 한국 정부에 대하여 정책적인 강요를 한 적이 없다고 캉드쉬는 강변한다.[54] 합의사항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비판이 한국에서 나오고 있다는 지적에 대하여도 “IMF는 한국 정부에 정책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금지원에 따른 협의와 조언을 통하여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국 정부와 이끌어낸 합의사항은 IMF의 일방적인 강제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 측이 마련한 개혁안을 IMF가 점검하고 조언하여 나온 것이므로 한국인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답한다.

다음 날인 12월 5일, 캉드쉬는 『르몽드』와의 회견에서 한국경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는 발언을 한다. 한국 위기는 한국의 내부결함으로 인한 것이며, 내부 구조조정을 하는 한편 세계화를 더욱 추진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IMF가 한국에 부여한 지원조건은 과거 멕시코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멕시코와 다른 것은 한국의 경우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재벌에 바탕을 둔 경제 체제, 국가-은행-기업 간의 유착, 시장의 폐쇄성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IMF의 계획은 투명성과 자유화의 원칙을 지키면서 기존의 경제 체제를 재편하고 성숙 단계에 접근한 한국경제를 세계화에 접근시키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암세포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익한 것이며 IMF의 지원 없이는 치료가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캉드쉬는 위기를 이용하여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한국에 이식하고 한국의 문호를 더욱 개방시키겠다는 의도를 비쳤다.

며칠 후 12월 12일, 캉드쉬는 미국 공영방송인 PBS의 마거릿 워너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이 IMF 프로그램을 “한국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분노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하여 “IMF의 조처는 ‘강요’가 아니라 한국이 해결책을 찾도록 하기 위한 ‘국제공동체의 도움’”이라고 주장한다.[55]

이와 같이 한국에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기 위하여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압력을 가하고서도 캉드쉬는 사실을 부인하는 동시에 모든 것이 한국 정부의 자발적인 의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IMF와 한국 정부가 협상을 체결한 후인 1997년 12월 8일에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와 같은 IMF의 부당행위 뒤에는 루빈 미재무부 장관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제임스 루빈 재무장관과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은 추수감사절 휴가를 함께 보내면서 IMF가 강경조건을 고수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한국에 대해서는 이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루빈 장관은 그의 한국 파트너인 임창렬 부총리에게 여러 차례 중요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협상과정을 감시하기 위해 데이비드 립턴 재무부 차관보를 서울에 급파했다.”는 것이다.[56]

같은 날 『뉴욕타임즈』도 “루빈 장관은 한국 구제금융 방안에 이빨(강경조건)이 들어가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고 쓰고 있으며[57] 10일자에서는 “클린턴 행정부가 구제금융 방안을 마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힌다.[58]

시대 흐름에 따른 IMF의 역할 변화와 한국 처방

여기서 IMF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IMF가 탄생한 것은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59] 고정환율 체제의 운영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폐지함으로써 브레턴우즈 체제는 사실상 역할을 다했다. IMF는 새로운 존재 이유를 찾아야 했으며 1980년대에 들어 중요한 역할을 발견하게 된다.[60] 당시 외환위기가 일어난 멕시코와 남미국가에 신용을 제공하고 위기극복과 관련된 경제자문과 함께 관리감독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위기국가에 대한 일차적인 신용제공 문제가 채권은행과 채무국 사이의 개별협상 차원으로 넘어가자 미국 정부는 위기국가의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하여 멕시코에 긴급자금을 수혈한다. 그리고 미국의 니콜라스 브래디 재무장관은 소위 ‘브래디 플랜’을 마련한다.

미국 정부는 채권은행들과 협상하여 위기국가의 만기대출을 연장해주고, 이자상환을 위하여 추가적인 여신을 제공한다. 또한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던 일부 국가에는 부채를 탕감해주고, 종국에 가서는 잔여채권에 대하여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는 대신 보다 낮은 이자율을 적용하거나 원금을 감면하거나 탕감해주는 소위 ‘브래디 본드(Brady bonds)’를 발행한다. 여기서 IMF는 채권국에 경제구조조정 계획을 요구했으며 이를 조건으로 IMF는 브래디 본드의 담보를 마련하기 위한 신규차관을 제공했으므로 결국 채무국의 신용위험 부담은 채권은행에서 IMF 등 국제기구로 전가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위기국가들은 성장세를 회복했으며 대부분의 부채를 상환할 수 있었다.[61]

브래디 플랜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남미국가의 문제가 채무이행불능이 아니라 일종의 유동성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미국가는 일시적으로 외채를 상환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지 수출을 통해 외화를 확보할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자유화 물결과 더불어 IMF에게는 다시 한 번 역할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들 국가가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IMF는 민영화, 금융 체제, 조세구조 등 과거 남미의 경우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정책적으로 개입한다. 이러한 IMF의 부당행위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IMF는 신용제공을 조건으로 의도를 대부분 관철시킨다.

한국은 소련이나 동유럽처럼 채무불이행 상태가 아니라 남미처럼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에 처했다. 따라서 남미의 경우처럼 IMF 기금을 이용하거나 채권은행을 설득하여 유동성 부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든지 아니면 부채를 탕감해주면 되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IMF는 소련이나 동유럽에 요구한 정책을 한국에 제시했다. 게다가 일본이 한국에 자금지원을 할 수 없도록 저지하여 한국이 IMF 체제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긴급구제금융을 조건으로 한국 측에 광범위한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후, 구조조정을 전면적으로 주도했다.

브라운대학교의 웨이드는 IMF의 이러한 부당행위는 한국이 세계자본시장에 접근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IMF와 합의내용이 발표된 이후 외환보유고가 더욱 줄어든 것도 합의내용에 신뢰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62] 웨이드 등은 IMF가 부당행위를 하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63] 하나는, IMF가 소련과 동구권의 위기 당시 구조조정과 제도개편에 직접 개입하면서 성공적인 성과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IMF가 ‘월스트리트-재무부-IMF 복합체’의 선두에 서서 구조조정과 제도개편을 통하여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월스트리트 자본이 한국에 진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구사의 일환이라는 점을 웨이드는 지적한다.

펠드스타인의 비판: “IMF의 너무 지나친 욕심”

IMF의 부당행위에 비판을 가하는 또 다른 대표주자는 하버드대학교의 펠드스타인이다.[64]

그는 1998년 3월 5일 『파이낸셜타임즈』에 기고한 “너무 지나친 욕심”이라는 글에서 IMF가 무리하게 주권국가의 권한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IMF는 아시아에서 자기들의 역할에 배치되게 위기국가들의 주권을 간섭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IMF가 위기국가에 구조개혁을 강요하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부적절한 행동이다. IMF의 장황한 구조개혁 목록을 이행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아시아 국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권고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IMF는 주권국가의 합법적인 역할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IMF는 위기국가가 국제금융시장으로 복귀하는 데 필요한 정책만 요구해야 한다. 구조개혁을 요구하는 것은 최후의 대출자[65]라는 IMF의 역할과 상충한다. 문제가 발생할 때 IMF는 회원국에 자문해주고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중개인 역할을 해야 한다. IMF가 분수에 맞지 않게 위기국가의 경제 체제를 개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면 스스로의 합법성과 유효성을 상실하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펠드스타인은 같은 달에 『포린어페어즈』에 기고한 “IMF 재조명”을 통해 반복하여 IMF의 부당행위를 지적한다.[66] “아시아의 외환위기 사태를 맞아 IMF는 국제수지조정에 초점을 맞추던 종래의 태도를 바꿔 피지원국의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IMF의 이러한 역할변화는 지금은 물론 먼 장래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므로, IMF는 일시적 외환부족이나 지속적인 무역수지 적자에 직면한 국가를 지원한다는 전통적 역할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IMF의 전략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문제는 주권국가에 대한 국제기구의 위상에 관한 것이다. IMF는 회원국의 지원요청 없이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으며,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스스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경우에도 해당 회원국은 IMF의 고객(client)이지 피보호자(ward)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나라의 경제구조와 제도의 성격은 그 나라의 합법적인 정치기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그 나라가 재정지원을 필요로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서, 그 나라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사항을 IMF가 자신의 기술적 판단으로 대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IMF는 그 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정상궤도로 재진입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조언과 재정지원을 제공하는데 그쳐야 하며, 아무리 바람직한 일이라 해도 외환위기를 구실로 국제수지 문제 해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거나 그 나라 정치 체제의 관할 아래 있는 경제문제의 개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펠드스타인은 IMF가 피지원국에 대하여 특별한 개혁조치를 요구하는 행위가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긍정적인 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개혁조치로 인해 위기국가들이 국제자본시장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가.

둘째, 기술적인 문제로 주권국가의 주권을 불필요하게 간섭하지는 않는가.

셋째, 만약 유럽의 주요국이 외환위기에 빠진다면 그들에게도 이러한 개혁조치를 강제할 수 있는가.

펠드스타인은 특히 이러한 관점에서 IMF가 큰 실책을 범했다고 비판한다. “1997년 12월 초의 IMF 프로그램에 포함된 구조개혁 조치는 한국경제를 장기적으로 개선시킬 수도 있겠지만, 한국이 국제자본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필요한 조치는 아니었다. 또 그러한 개혁조치는 노동시장의 규칙, 기업의 구조와 경영에 대한 규제, 정부-기업 간의 관계, 수입규제 등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항이었으며, 이러한 조치는 현재 유럽국가에 요청되고 있지만 ‘강제하지는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합법적인 주권국가에 대하여 세부적인 경제처방까지 요구하는 것은, 설사 그에 대하여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점으로 남을 것이다. 하물며, 실제로는 경제적 처방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체적인 의견 일치가 존재한다 해도 그러한 합의는 급격하게 변해왔으므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경제가 보여준 눈부신 성과는 현재의 한국 경제구조가 경제적-정치적 발전 단계와 근면, 자기희생, 단결을 강조하는 문화적 가치관에 매우 적합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설사 한국의 경제구조를 미국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도 그러한 변화는 경제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전환이 현재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외환위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수행하는 것은 그 시기를 매우 잘못 택한 것이다.”

피셔의 반론

이 같은 펠드스타인의 엄중한 비판에 대하여 IMF의 피셔 부총재는 즉각적으로 반발한다.[67] 펠드스타인이 던진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모두 “Yes”라고 응수한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인 “개혁조치로 인해 위기국가가 국제자본시장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아시아의 경우에는 대답은 Yes”라고 답한다.

둘째, “기술적인 문제로 주권국가의 주권을 불필요하게 간섭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에서는 다소 주저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에 대한 답은 복잡하다. 무엇이 기술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적절한 간섭인지에 대하여 널리 인정되고 있는 정의가 없다.”

셋째, “만약 유럽의 주요국이 외환위기에 빠진다면 그들에게도 이러한 개혁조치를 강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Yes”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펠드스타인의 세 가지 기준에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다. ‘프로그램이 위기의 잠재적인 원인을 해결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어떤 나라가 위기재발을 막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국제사회가 금융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다. 이것이 구조적인 수단이 포함된 근본적인 이유다. 물론 많은 수단을 적용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많은 부분은 세계은행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피셔는 IMF의 부당행위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자신들이 강요한 구조조정 압력 중 많은 부분이 IMF의 권한이 아니라 세계은행의 몫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다.

이러한 피셔의 강변은 그 후에도 계속된다.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두 달 후인 1998년 1월 22일, 워싱턴에서 열린 은행가협회 회의석상의 “아시아 위기: IMF의 관점”이라는 주제발표에서 IMF의 역할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68]

“IMF의 역할은 첫째, 국제 교역의 균형 잡힌 성장을 도모하여 고성장과 소득 상승에 기여하며, 무역 자유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둘째, 환율 안정을 도모하고, 회원국 간에 안정된 환율 체제를 유지하며,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방지하는 것이다. 셋째, 회원국이 국내외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국제수지의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다음부터 비상식적인 주장이 이어진다. “IMF는 회원국이 건전한 경제정책을 운용하고 무역과 ‘투자 자유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IMF는 전 세계 국가를 회원국으로 두고 있으며 회원국과 정책협의를 통하여 바람직한 정책을 권장하기 때문에 쌍무적인 관계에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서 문제는 IMF에는 ‘투자 자유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역할이 주어진 적이 없는데도 IMF는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여 한국의 자본시장 개방에 앞장선 것이다. 더욱이 “쌍무적인 관계에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발언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당사자들이 테이블에 앉아 합리적으로 협상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없는 결론을 IMF가 이끌어낸다면 도대체 누가 어떤 방식을 통하여 정책 권고를 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IMF의 부당행위를 비판하는 여러 석학

이와 같은 IMF의 부당행위에 대하여 삭스, 펠드스타인, 벨로, 암스덴, 서로우 같은 세계 석학들이 연이어 비판을 가한다.

삭스는 1997년 12월 11일 『파이낸셜타임즈』에 기고한 “IMF 자체가 권력이다”에서, IMF가 남들에게는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거꾸로 가고 있으며 IMF 자체의 실패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69] “아시아에 천억 달러를 퍼붓고도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은 IMF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공적인 논의나, 코멘트 또는 정밀한 조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IMF가 5백 명의 스태프(총 1천 명 중 선진국 담당 5백 명을 제외한 숫자)로 75개국 14억 인구(인도 중국을 제외한 개발도상국의 57%)의 경제정책을 좌우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따라서 각국의 금융 체제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접근방법에 대하여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개혁안이 나오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한국에서 IMF는, 협의과정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합의안의 내용을 이해할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한 3당의 대통령 후보에게 이행을 보장한다는 각서까지 강요했다.”

연이어 삭스는 IMF에 대한 개선책으로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IMF가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단일기관에 전 세계 개발도상국 절반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책임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둘째, IMF 이사회는 단순히 ‘고무도장’만 찍을게 아니라 IMF 스태프를 단속해야 하며 필요하면 외부전문가로부터 조언을 받아야 한다. 셋째, IMF의 활동은 공개되어야 하고 전문적인 논의와 검토를 거쳐 최고 수준의 전문능력이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

펠드스타인은 1998년 4월 『보스턴 글로버』를 통해 비판의 수위를 한층 높인다.[70] “IMF가 범한 최대의 잘못은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위기를 근본적인 구조 개혁의 기회로 이용한 데 있다. 이를 위해 IMF는 주권국가 정부의 고유 영역까지 부당하게 간섭했다. 한국에 대하여 노동법과 기업 감독 규정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IMF는 이러한 문제를 한국 사람의 손에 맡겨야 하지 않았을까? 구조개혁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IMF는 한국경제가 건전치 못하고 관리가 엉망이며 부패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발표를 듣고 국제투자가들이 서둘러 자금을 인출하고 신용 연장을 꺼리는 것이 과연 이상한 행동일까. 이러한 식으로 IMF는 자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신뢰를 떨어뜨리고 금융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펠드스타인은 IMF가 1997년 당시 취해야 했던 적절한 역할로서 세 가지를 든다.

첫째, IMF는 채무국과 채권국의 대표 사이에서 정직한 중개자로서 행동했어야 했다. IMF는 당사자끼리 서로 수용 가능한 선에서 대출을 연장하거나 조정하는 협정을 체결하도록 도와주었어야 했다.

둘째, IMF의 주요 역할은 최후의 대출자였다. 통화가치 폭락의 위험에 처한 회원국에 즉각적으로 대출을 제공했어야 했다. IMF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에 대하여 1천억 달러 이상의 긴급구제금융을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하고서 즉시 자금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 자금인출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셋째, IMF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맞도록 예산과 금리 조정을 권고했어야 했다. 각 나라가 처한 입장이 서로 다른데도 IMF는 모든 나라에 같은 처방을 내린 것이다.

가정이지만 만약 당시에 IMF가 펠드스타인의 충고처럼 행동했다면 현재의 한국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벨로 등도 IMF의 부당행위를 강하게 비난한다.[71] IMF가 동아시아에서 취한 소위 안정화정책이 실제로는 불안정화 효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 개방이라는 처방도 위기의 핵심요인이 무분별한 해외차입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IMF가 정반대의 처방을 내렸다는 지적이다. 또한 규제가 완화된다고 해서 투자가들이 더욱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벨로는 강조한다.

MIT의 서로우도 1999년에 낸 『부의 구축』이라는 책에서, IMF가 개개의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은 없다고 주장한다.[72]

“현존하는 IMF, 세계은행, UN, WTO 같은 국제기구는 세계경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기구가 아니다. IMF는 부유한 산업국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상환금 결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립된 기구다. 세계은행은 개발도상국의 기초적인 인프라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다. UN은 국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기구다. 그리고 WTO는 국가간의 자유무역을 보증하기 위한 기구다. 이 모든 기구는 현존하는 정부가 만든 산물이므로 어떤 기구도 개개의 정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 오히려 개개의 정부가 이들 기구를 간섭해야 한다.”

서로우의 기준에 따르면 IMF는 자신의 권한을 넘어 세계은행과 WTO가 해야 할 일까지 간섭하고 나선 것이다.

요컨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IMF가 한국 측에 요구한 광범위한 구조조정은 그들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다. 전 세계 많은 석학이 다각도로 비판하고 있지만, 한국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에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겠다는 그들의 입장은 초지일관이다. 다음 제4단계에서 그 이유를 알아보자.


4단계. 협상장에서 생긴 일: IMF는 미국과 밀착되었는가?

IMF 위기역사의 제4단계에서 IMF는 미국 등 대주주 국가와 힘을 합해 평상시의 쌍무적인 관계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많은 양보를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냈다. 본 장은 그 과정에서 IMF가 대주주 국가의 이익을 대변한 사례와 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쌍무적인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역할을 IMF가 담당

1997년 12월 3일 IMF는 한국 정부와 〈의향서〉를 교환하면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다음 사항들을 추가한다.

무역자유화와 관련하여 다음 세 가지를 폐지한다.

첫째, 무역관련 보조금을 폐지한다.

둘째, 수입선다변화제도를 폐지한다.

셋째, 규제적인 수입승인제를 폐지한다.

그리고 자본자유화와 관련하여

첫째, 외국인의 국내 금융시장 진입허가 일정을 당긴다.

둘째, 외국금융기관에 대하여 국내 금융기관의 우호적인 M&A를 내국인과 동등하게 허용한다.

셋째, 외국금융기관이 은행 자회사나 증권사 현지법인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한다.

넷째, 외국은행이 제한 없이 국내 은행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서는

첫째, 독립적인 외부감사, 완전공시, 기업집단의 결합재무제표 공시, 국제회계원칙을 적용한 재무제표 작성 등을 통하여 기업의 투명성을 높인다.

둘째, 은행대출에 있어 시장원리를 존중하고 정부가 은행경영과 대출결정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치금융을 즉시 없앤다.

이와 같은 IMF와의 합의 결과는 피셔의 말처럼 “쌍무적인 관계에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요구”가 관철된 것이다.[73]

IMF는 대주주인 미국, 일본과 힘을 합해 그들이 풀지 못했던 한국에 대한 경제현안을 일시에 해결한 것이다.

IMF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미국을 위해서는 자동차수입 시 형식승인제도를 폐지했으며 일본에는 수입다변화제도 폐지라는 선물을 주었다. 자본시장 개방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 정부는 개방 일정을 이미 대외에 공표하고 국제사회와 합의한 대로 개방을 추진하고 있었는데도 IMF의 요구에 따라 외환위기와 전혀 관계가 없는 단기채권, 국공채, 심지어 기업어음, 보증사채 시장까지 조기에 개방하고 외국금융기관의 현지법인이나 합작법인 설립을 허용한다. 이들 사항은 OECD 협상 등을 통하여 미국이 한국에 끈질기게 요구해왔던 사항으로서 미국 금융기관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다. 적대적 M&A의 허용도 1~2년 뒤에 개방하게 되어 있던 일정을 앞당겨 실시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IMF는 수많은 선물을 끼워 넣기 식으로 대주주 측에 안겨주었다.

벨로: “IMF는 미국 이익을 대변하는 현대판 트로이 목마”

IMF의 대주주는 미국이고 따라서 IMF는 사실상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국제기구다.[74] 예컨대 FRB의 그린스펀 의장은 IMF를 통해 미국의 지도력을 강화할 것을 노골적으로 주장한다.[75]

그는 1998년 1월 30일 미연방 하원 금융재정위원회에서 가진 증언에서 미국이 IMF의 신차입협정(New Arrangement to Borrow)에 참여하는 동시에 IMF에 대한 미국의 지분을 늘려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아시아의 위기는 잘못된 투자와 매우 취약한 금융부문이 빚어낸 작품이다. 자국의 경제성과나 주변국과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파멸적인 정책을 바로 잡도록 주권국가를 설득할 수 있는 기구가 바로 IMF이다.”  그린스펀은 IMF를 통해 주권국가의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IMF에 대한 미국의 장악력을 늘리고, 신차입협정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주장한다.

또한 그린스펀은 2월 13일 미 의회 대외정책 청문회에서 가진 증언에서 “지금 우리는 미국형 시장시스템이 공감을 얻는 대단히 극적인 사건을 보고 있다”라고 발언함으로써 한국의 위기를 통해 미국식 시장시스템을 한국에 철저히 이식하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힌다.[76]

이처럼 IMF가 대주주인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사실은 미 무역대표부(USTR)의 바셰프스키 대표의 국회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77] 그는 1998년 2월 하원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한다. “IMF 프로그램 중에서 구조개혁 요소는 그 나라의 무역시스템 개선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만일 이 프로그램이 효과적으로 시행된다면 우리의 무역정책 목표를 보충하고 보강할 것이다. IMF에 대한 지지는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계속 지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시장보다는 정부정책에 의해 주도되는 경제는 미국 기업이 한국과의 무역, 투자 그리고 경쟁에서 ‘특정한 구조적 장벽’에 많이 부딪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셰프스키 대표가 언급한 ‘특정한 구조적 장벽’은 수입통관 절차나 허가, 농산물에 대한 수입 면허 그리고 금융서비스 분야의 개방을 포함한다. 특히 한국은 IMF와의 합의에 따라 농산물에 대한 수입면허와 허가에 대한 규정을 자유화하고 금융부문을 외국인 소유주와 외국기업에 과감히 개방하기로 약속한다. 이러한 결과에 만족한 바셰프스키 대표는 “IMF 프로그램이 시장 접근성을 높이고 한국 재벌의 과다한 공격적 수출 방식을 교정할 것”이라고 평한다.

이러한 증언에 대하여 벨로 등은, 한국의 재벌을 와해하고 국가와 산업 간의 연계를 약화시키려는 일련의 조치가 IMF 조건의 중요한 부분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한다.[78] 또한 IMF 구제금융의 분명한 목표 중 하나는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과 세계진출을 이끈 대우, 현대, 삼성과 같은 거대한 재벌을 해체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 “IMF의 정책요구는 한국의 외채 중 막대한 부분을 재벌에게 떠맡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민과 노동자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 해서 재벌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 반드시 해답이라고 할 수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 벨로는 “IMF가 주요 주주국가와 자금제공국가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한국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IMF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모든 방면에 걸쳐 무역과 안보 그리고 상업적인 이익을 ‘구제금융’이라는 이름 아래 끌어들여 마치 ‘현대판 트로이 목마’처럼 행동했다. 아마 이것이 IMF가 한국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였던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라고 IMF에 대하여 강하게 비난한다.

IMF가 미국과 밀착하여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영미식으로 개편하겠다는 의도는 피셔 부총재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된다. “한국 모델과 일본주식회사 모델에서는 이러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 나라가 세계경제의 혜택을 누리려면 그 나라의 자본시장은 반드시 재구축되어야 한다.”라고 발언하여 한국에 월스트리트 방식을 이식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했던 것이다.[79] 클린턴 행정부 초기에 상무부 국제통상담당 차관을 지낸 예일대학교의 가턴[80]은 이를 빗대어 ‘월스트리트의 승리’로 표현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 재무부의 루빈 장관과 서머스 차관을 맥아더 장군에 비유한다. 그들의 지휘 아래 IMF가 동아시아 국가를 미국식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개조시켰다는 것이다.[81]

결국 이러한 IMF와 미국의 시도는 상당 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IMF가 요구하는 사항 몇 가지는 한국경제가 고질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를 제대로 적시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은 한국의 무역장벽을 허물고 대기업의 경쟁력을 취약하게 만드는 동시에 월스트리트 자본이 한국에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내용이었다

펠드스타인, 암스덴: IMF의 미국 이익 대변은 부당

IMF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여러 석학은 엄중한 비판을 가한다.

하버드대학교의 펠드스타인은, 아무리 한국이 위기에 처했지만 이를 기회로 미국이나 일본이 한국의 무역-자본 시장을 개방시키려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IMF가 이러한 시도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82] “IMF 프로그램 중 일부는 일본과 미국이 오랫동안 한국에 요구했던 정책의 반복이다. IMF가 한국의 약점을 노려서 과거에 거부당했던 무역과 투자정책을 강요한 권한남용으로 비쳐진다. IMF는 위기를 이용하여 위기국가에 근본적인 개혁을 강요할 수 있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더 나아가 MIT의 암스덴은 IMF를 아예 ‘정치적 기구’로 정의한다.[83] “IMF의 주체가 정부들이고, 대주주 격인 미국이 이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IMF는 정치적 기구라 할 수 있다. IMF의 목적은 회원국, 특히 북대서양 국가가 제공한 대외차관을 보호함으로써 세계의 금융안정을 도모하는 데 있다. 단기금융 지원과 전문적 자문으로 채무국을 돕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채권국과 채무국의 최대 이익을 동시에 추구할 수는 없다. 따라서 IMF는 대개 위기국가에 대한 금융지원에 엄격한 조건을 부과하여 부유한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브루킹스연구소 부소장인 리탄도 IMF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다.[84] “미국과 서방세계가 아시아 위기국가들과 누렸던 정치적, 외교적인 우호관계를 쓸데없이 위협해서는 안 된다. 위기 당사국 사이에서는 금융지원을 대가로 미국과 서방 선진국이 가혹한 개혁을 강요한 데 대하여 원망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 최고의 석학이자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의 전 총재인 자크 아탈리[85]도 IMF가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금융위기에 개입하는 것은 미국과 IMF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이며, 아시아 위기를 계기로 자신의 역할과 정치적 입지강화를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IMF 처방의 효율성에 대해서도 “IMF의 기능은 소방수 역할에 그쳐야 한다. 물을 뿌려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것이지 불이 나지 않도록 예방 또는 감시 활동을 하거나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하지만 현재 IMF는 주로 미국에 봉사하는 역할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고 혹평한다. 동아시아의 외환위기가 일본으로 전염되는 것을 막아 결국 미국을 보호하려는 것이 IMF의 또 다른 목적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미국은 일본의 대미 무역흑자가 못마땅하지만 일본이 벌어들인 돈이 미국 내의 금융자산에 재투자되고 있어 그런대로 넘어가고 있다. 만일 아시아 위기의 여파로 미국 금융시장에 있는 일본자본이 대거 빠져나간다면 미국에는 대재앙이다”라고 답한다. IMF가 미국의 지배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그것보다는 미국과 IMF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미국 정부가 아시아의 위기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의회의 반대 때문에 곤란하다. 이 점에서 IMF는 미국 정부의 유용한 ‘바람막이’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IMF도 이번 위기를 위상을 높이는 호기로 활용하고 있다”라고 답하여 IMF와 미국의 관계를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IMF와 미국 재무부의 행태에 대하여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을 계기로 IMF와 미국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싣는다.[86] “IMF는 미국 관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에 일본식 금융구조를 벗어 던지고 미국식 자본주의로 대체하도록 강요했다. IMF는 전통적으로 예산과 금융정책에 초점을 맞춰왔으나 최근에는 금융시장을 재구축하는 일을 떠맡고 있다. 독일의 한 경제분석가는 서머스 재무차관을 6.25때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에 비유한다. 아시아에 대한 IMF 지원을 계기로 지구촌이 미국식 시장경제를 추구하고 있지만, IMF 내에서도 이에 대한 회의론이 있다. 예를 들면 IMF의 이인자인 피셔 부총재도 미국식 시장경제의 장점을 인정하지만, 이의 단점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미국 내부에서조차 IMF와 힘을 합해 한국 내부에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강제적으로 이식하려는 미국 재무부와 월스트리트의 시도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바그와티와 웨이드: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 복합체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로렌스 클라인은 IMF의 배후에는 워싱턴의 정책서클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87] “솔직히 말해 미국이 한국에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작용하고 있다. 재벌개혁의 이면에는 미국의 산업계가 개입되어 있다. 참고로 워싱턴에는 ‘미 재무부-IMF-FRB’로 연결되는 정책서클이 있는데 이들의 지향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1991~1993년에 미 대통령 경제자문역으로 활약했던 컬럼비아대학교의 바그와티는 과거 미국에서 있었던 ‘군산(軍産)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88]라는 용어에 빗대어 ‘월스트리트-미국 재무부 복합체(Wall Street-Treasury complex)’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89] 바그와티에 따르면, 복합체에는 월스트리트, 미국 재무부와 국무부, IMF, 세계은행이 포함되며 서로 간에는 인력 교류도 활발하다. 한국위기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루빈[90]은 월스트리트 출신이고 알트먼(Altman) 역시 월스트리트 출신으로 나중에는 재무부로 갔다. 부시 정권의 재무장관인 브래디(Nicholas Brady)[91]도 월스트리트로 돌아갔다. 세계은행 총재 직무대행이었던 스턴(Ernest Stern)[92]은 현재 제이피모건의 관리담당중역으로 있으며 울펜손(James Wolfensohn)[93] 세계은행 총재는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가 출신이다. 이처럼 강력한 네트워크는 월스트리트의 이익추구를 위해 힘을 집결시켜 ‘월스트리트에 좋은 것은 세계에도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IMF는 위기국가들이 자본시장 개방이라는 목표를 수용하도록 냉혹하게 강요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위기에서는 미국 은행들이 한국의 바겐세일에 참여하여 그들이 입은 손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고 바그와티는 설명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은행들은 ‘최후’의 대출자가 아니라 ‘최초’의 대출자로 행동한 IMF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94]

그리고 복합체는 자본흐름의 자유화가 태생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는 여러 증거나 논리에도 불구하고, IMF를 내세워 이상적인 세계란 진정으로 자본흐름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믿음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하는 동시에 IMF는 구제금융을 활용하여 자기조직의 존재가치를 보증 받고 입지를 굳건히 한다고 바그와티는 설명한다.

웨이드 등은 더욱 적극적으로 ‘월스트리트-재무부-IMF 복합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95] 그는 삼자간 복합체의 협력 아래 IMF가 표면에 나서서, 한국의 부채상환 일정을 조정해 주는 대신에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구조조정과 제도개혁에 대한 양보를 얻어내고 이를 통해 월스트리트 자본이 한국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웨이드는 IMF가 아시아의 위기를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황금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96] “IMF가 주장하는 것처럼 국제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개발도상국에 비용보다 훨씬 큰 편익을 제공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IMF는 국제기구의 선두에 서서 위기국가에 이를 강요하고 있다. 그 이유는 IMF가 오랫동안 갈구해왔던 바대로 영미식 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개혁을 위기국가에 강요할 수 있는 황금 기회로 보기 때문이다. IMF는 누구의 지시를 받는가? IMF는 과거보다 더 미국 재무부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미국 재무부는 영국 재무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재무부는 오늘날 월스트리트와 런던의 금융기관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이들 금융기관은 자본자유화를 열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금융센터의 경쟁자보다 더욱 힘이 있으며 효과적이므로 다른 나라의 금융시장이 개방되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1999년 2월 『뉴욕타임즈』는 당시 전후사정을 상세히 소개한다.[97]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금융위기에는 미국의 과도한 금융개방 압력도 한몫을 했다. 또 미국 정부의 금융개방 압력은 월스트리트 금융기관의 로비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가 특히 아시아를 겨냥해 금융 자유화의 압력을 가했던 것은 미국의 은행과 증권회사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잠재적인 금광(gold mine)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OECD 가입 협상이 그 대표적인 예다. OECD의 관계자들은 ‘미국 재무부는 한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면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시켜 주겠다고 운을 뗐고 한국은 결국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보다 신속한 금융개방에 합의했다’고 증언했다. 1996년 2월에 작성된 미국 재무부의 3쪽짜리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채권시장 개방과 기업의 장단기 차입허용, 주식시장 개방 확대 등을 언급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한국의 OECD 가입을 시장개방에 이용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세계 금융시장 자유화 추진과정에서 한국을 주요 목표로 삼았고 OECD 가입을 전제로 한국의 시장개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은 법적 여건이나 자본시장 현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시장개방 요구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금융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칠레에 대한 개방압력이 미국 의회의 신속처리법안 통과 반대로 무산된 직후 한국을 시장 자유화의 매력적인 대상으로 생각했다. 1996년 6월 20일에 작성된 미 재무부 비망록에 한국은 미 재무부가 추구하는 시장자유화 우선대상국에 포함돼 있다. 미국은 한국 시장을 열기 위해 OECD를 이용했으며, 미 재무부는 비망록에서 ‘이들 지역(아시아)이 미국 금융산업의 이해가 걸린 곳’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한국은 OECD에 가입하기 위해 당초 계획 이상의 시장 개방에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지나치게 빨리 시장을 개방하면 상당수 금융기관이 적응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채권-주식시장, 단기차관 도입을 개방했다. 이에 한국 기업들은 외국의 단기자본 시장에 접근함으로써 급작스런 자본 이탈이 있을 경우 공황상태에 처할 위험이 커져갔다. 한국은 장기 자본시장을 묶어둔 채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단기자본 시장을 개방하는 잘못을 행했다. 미국은 자본이동 자유화를 진전시키는 내용을 IMF 강령으로 채택하도록 요구했고, IMF가 이를 수용했다.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IMF 이사회는 1996년 7월에 금융시장을 개방한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환영한다고 밝혔다.”[98]

이처럼 미국 내부에서조차 다양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IMF와 미국 재무부는 밀착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에 무리하게 월스트리트식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한다.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원을 사전에 저지했나?

미국으로서는 한국으로부터 ‘일반적인 쌍무적인 관계에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한국을 IMF 체제 속으로 몰고 가야 하는데, 만약 일본이 한국에 자금을 지원한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므로 미국은 적극적으로 저지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1997년 11월초만 해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자금지원 요청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사카키바라 대장성 재무관이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 재무부와 국무부 관계자들과 협의를 가진 후부터 일본은 입장을 바꾼다. 협의 주요의제는 한국 지원을 둘러싼 미-일 양국 간 입장조율이었다. 11월 10일 엄낙용 차관보가 일본을 방문하여 사카키바라 재무관을 만나 일본은행이 한국은행을 지원해주도록 의사를 타진한다. 하지만 이미 자금지원은 IMF를 통해서만 하도록 미국과 일본이 합의했기 때문에 한국을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듣는다.[99] 일본 시중은행이 한국의 채무를 만기연장할 수 있도록 일본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엄 차관보의 요청에 대해서도 “일본의 경제사정이 어려울 뿐 아니라 일본 검찰이 금융기관과 대장성의 유착관계를 수사하는 중이라서 대장성의 위상이 많이 약화된 터라 실현되기 어렵다”는 대답을 듣는다.

1997년 11월 17일, 루빈 재무장관 역시 시카고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이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지원하는 데 앞장서지는 않을 것이며 IMF를 통해 협력하겠다고 강조함으로써 일본 측과 사전에 협의한 대로 행동한다.[100] 이러한 미국의 의도는 서머스 재무차관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97년 12월 3일 CNN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이 IMF를 통해서만 한국에 긴급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미국 기업을 위해 한국 시장을 완전히 개방시키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한국에 대한 자금지원은 한국의 은행이 더 이상 자국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하고, 미국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있어 모든 장벽을 철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

『빈곤의 세계화』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초스도프스키에 따르면,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을 때 협상 팀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한국에 요구할 구제금융의 조건은 미국 재무부와 상공회의소, 월스트리트 은행가 그리고 주요 유럽은행 사이에 합의되어 있었고[101] 미국 상공회의소는 실제로 최종합의 내용의 상당 부분을 직접 집필하기까지 했다.[102] IMF 협상 팀이 한국 정부와 협상하면서 시간을 지연시킨다고 비난 받은 것도, 캉드쉬로부터 승인받지 않은 조건을 합의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 때 캉드쉬는 미국으로부터 한국과 엄격한 협약을 맺어야 한다는 강경한 지시를 받았고[103] 한국 정부와 IMF 간의 협의과정에서 미국 재무부는 직접 현장을 지휘한다. 립턴 재무차관보와 주한 일본대사관의 재무관 등 양국 관리는 협의장소인 서울 힐튼호텔과 인근 하이야트호텔에 머무르며 IMF 실무협의단을 지휘한 것이다.[104] IMF 실무협의단을 이끌었던 휴버트 나이스 단장은 회담 도중에 간간이 자리를 비우고 립턴을 만나 보다 강도 높은 요구사항을 받아오면서 난처한 표정을 짓곤 한다. 협상에 참가한 한국 측의 고위관계자는 “사실은 립턴이 협상의 창구였다고 할 정도로 나이스 단장은 사사건건 간섭을 받았다.

결국 우리로서는 별다른 협상수단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라며 협상과정에서 미국 측으로부터 심한 압력을 받은 사실을 인정한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IMF와의 협상타결을 두 번이나 발표했지만 미국과 일본의 추가요구로 이를 번복하였다.

일장춘몽으로 끝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

동아시아가 외환부족 사태에 봉착하게 되면 IMF 틀 안에서 자금을 지원하되 미국이 원하는 대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도는 이미 1997년 여름에 시도되었던 AMF 설립 추진과정에서 드러난다. IMF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최후의 대출자’라면 아시아통화기금(AMF, Asian Monetary Fund)은 아시아 역내의 ‘최후의 대출자’에 해당한다.

MIT의 암스덴은 동아시아 국가의 AMF 설립 시도가 루빈 장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밝힌다.[105] “한국 같은 나라가 외채문제에 봉착했을 때 달리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없다. 1997년 가을에 IMF의 독점적 위치를 약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판 IMF’의 결성을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루빈 재무장관이 이에 강력히 반대하면서 아시아 재무장관들의 팔을 비틀어 결국에는 물러나 앉도록 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IMF가 모종의 경쟁상대를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AMF에 대한 최초의 구상은 1996년 12월에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나왔지만 본격적인 논의는 1997년 여름 동남아국가의 통화가 급격히 평가절하하면서 시작되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8월 16일에 “아세안 각국 중앙은행이 회원국의 주요 통화를 떠받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상호협의에 나섰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상호교감이 있었다.”라는 발언을 통하여 AMF 구상의 일부를 내비쳤던 것이다.

프라츠아브 차이야사른 말레이시아 외무장관도 아세안 국가의 통화가 투매되는 위기상황에 대한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한편 통화위기가 아세안 국가의 결속을 앞당기는 호기를 제공했다고 강조하고 이에 따라 아세안 자유무역지대(AFTA)의 조기실현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낙관론을 펼치기도 했다.[106]

일본은 당초 AMF 설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태국에 대한 지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40억 달러 이상을 내놓아야 할 입장에 처하자 설립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어차피 자금지원을 할 바에야 아시아 국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21세기 세계경제의 주역이 될 수도 있는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공헌도를 과시하는 동시에 엔 블록 내에서 맹주 역할을 부각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아시아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서구 국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유학생활을 통해 서구식 정치경제 시스템에 정통했던 일본의 사카키바라 재무관이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AMF 설립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107] 그가 제시한 AMF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에 대하여 서구의 정치가들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기금(fund)’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구(facility)’에 가깝다고 비판했지만 사카키바라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모습을 보인다.

1997년 9월 18일 방콕에서 열린 ASEM 재무장관 회의에서 AMF 구성이 본격적으로 협의되었다. 1천억 달러의 기금을 조성하여 역내 국가가 금융위기를 겪게 될 경우 이를 지원한다는 구상이었다. 기금의 반은 일본이 분담하고 나머지 반은 역내 국가가 분담한다는 것이었다. AMF 구상에 대하여 일본과 아세안 국가는 물론 한국도 적극적으로 찬성을 표명했다.[108] 하지만 중국은 일본의 역내 영향력 증진에 대한 견제 때문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호주는 미국과 같은 입장이었고 IMF는 당초에는 찬성하는 쪽이었지만 미국이 반대하자 곧바로 입장을 바꾸었다.

미국의 반대가 분명해지면서 AMF 구상은 점차 힘을 잃게 된다. AMF 설립이 정치적인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109] 문제의 핵심은 AMF가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IMF의 감독 아래 어느 정도 귀속되느냐는 문제였다. 일본 정부는 AMF가 IMF와의 상호보완성은 유지하지만, 단순히 IMF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지역적인 특성과 자율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도덕적 해이 문제를 거론하며 반대에 나섰다.[110] IMF가 자금지원을 조건으로 위기국가가 견실하게 경제운영을 하도록 요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만일 위급하다고 해서 AMF가 손쉽게 자금지원을 하면 위기국가의 경제운영이 방만해진다는 논지였다. 따라서 IMF의 틀 안에서 통화위기 문제를 대처해가는 것 이외에 따로 기금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편다.

이에 일본 정부는 AMF가 긴급자금의 융자를 필요로 하는 국가에 ‘정책자문(policy advise)’을 제공함으로써 IMF와 경쟁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또한 IMF가 ‘협정조건’을 계속해서 달 수 있으며, AMF는 보다 짧은 단기자금만을 제공하고 IMF는 예전 역할을 그대로 수행한다고 양보한다.

하지만 IMF의 피셔 부총재는 “위기에 처한 나라에 금융정책의 개선을 요구하지 않은 채 자금지원만 하는 것은 큰 실수다. IMF와 융자조건이 다른 국제기구를 설립하는 방안에 대하여 우려를 금치 못한다”고 반박한다.[111] 또한 피셔는 “IMF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금이 지역차원에서 만들어지면 중복투자와 자원낭비를 초래하게 될 것이므로 IMF의 기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반대의사를 분명히 한다. IMF는 1997년 12월에 일본 도쿄에 아시아 지역을 통괄할 사무소를 개설키로 하는 등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만약 AMF가 설립되면 아시아 최대 부국인 일본의 입김이 AMF를 좌지우지할 것은 뻔한 일이고 아시아에서 IMF의 존재기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결국 미국은 IMF 증자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서 일본을 회유한다. G-7 재무장관회의에서 아시아권에 대한 할당을 높이자고 제안하며 이를 당초의 40%에서 45%로 늘리자는 것이었다. IMF는 어차피 미국이 주도할 것이므로 아시아의 권한을 강화시켜 주면서 이들을 품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였다.

9월 25일 세계은행의 울펜손 총재도 통화위기 재발방지를 위해 일본과 동남아국가가 제안한 AMF 창설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다.[112] 그는 IMF-세계은행 연차총회를 결산하는 기자회견에서 “현재 IMF가 동남아국가가 제안한 목표들을 수행하고 있으므로 별도의 기구를 설립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11월 6일 결국 IMF는 일본이 AMF 설립을 포기했다고 발표를 한다.[113] AMF를 만드는 대신 일본, 미국, IMF는 도쿄사무소를 통해 아시아의 금융시장에 대한 감독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한 것이다. 11월 13일 서머스 차관보는 미국 의회 증언에서 “IMF는 국제적인 대응의 중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어떠한 협력적인 지역금융협정도 도덕적 해이의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설계되어야 한다”라고 발언하여 AMF 논쟁의 종식을 선언한다.[114]

동아시아가 제안한 AMF의 구상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에 대하여 글로서먼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지역패권 경쟁으로 해석한다.[115] 미국의 의도는 IMF에 대한 지분확대를 모색하는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면 IMF 체제 내에서 긴급자금을 지원을 하는 대가로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시킨다는 것이다. 일본의 목적은 AMF 설립을 통하여 동아시아 역내의 영향력을 확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AMF 설립을 반대함으로써 일본을 견제하고 위안화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끈질기게 방어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AMF의 설립은 세 나라 간에 묵시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힘의 균형에 균열을 생기게 하는 조치였으며 결국 없었던 일로 종결되었다고 글로서먼은 설명한다.

『월스트리트 저널』는 이러한 과정에 대해, 미국 재무부가 월남전 상황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으로 비유한다. IMF의 자금이 고갈되어 가고 미국 의회는 IMF에 대한 자금재충전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자금지원이 필요하지만 지원을 받게 되면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에 손상이 가는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월남전 때 미국 행정부가 전쟁재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의회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116]

만약 AMF가 설립되었거나 1997년 11월에 일본이 한국에 직접 자금지원만 해주었다면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미국의 압력

미국은 한국과 〈의향서〉와 〈양해각서〉를 서로 교환한 후에도 한국의 자본시장 개방을 추가로 요구한다.[117] 서머스 재무차관은 1997년 12월 15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그동안 OECD 가입과 최근의 IMF 구제금융 협상과정에서 매우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다. 한국의 이러한 조치는 미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향후 비준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국에 WTO 협상의 공약 이행과 관련된 추가조치를 제공토록 촉구할 것이다”라고 발언한다. 또 협상기간 중에 한국으로부터 이러한 양보를 받아내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서머스는 “그동안 대단히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 그러한 조치를 ‘무역 대 금융협상’의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답한다.

1998년 10월 8일 서머스 차관은 IMF 연차총회 참석차 워싱턴을 방문 중인 이규성 재경부장관과 면담을 갖고, 한국의 재벌개혁 속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만을 전하고 철강, 자동차 등의 과잉투자 해소를 요구한다.[118] 그는 재벌개혁의 진행현황과 주요 산업의 과잉투자 문제에 관심을 표시하면서 “철강과 자동차는 한국의 자체경쟁력뿐 아니라 세계 시장의 안정을 위해 과잉투자를 해소해야 한다”라고 요구한다. 미국 정부가 국내 특정산업의 과잉투자 문제까지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무역자유화에 대한 미국의 요구는 외환위기 이전부터 진행되었던 공세의 연장선일 뿐이다. 벨로는, 미국 정부는 한국이 제2의 일본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여 일본에 취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무역공세를 펼쳤으며 이는 한국에 보복능력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 듯하다는 견해를 편다.[119]

미국으로부터 전방위 공격을 받은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는 1987년 96억 달러 흑자에서 1992년 1억5천9백만 달러 적자로 반전되었고 1996년에는 대미 무역적자가 1백억 달러 규모에 이르렀는데도 미국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당당한 미국 재무부 삼인방

루빈 재무장관은 1997년 12월 3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서반구 재무장관 회의에서, IMF가 한국과의 협상과정에서 금융과 교역부문의 장벽을 낮추도록 압력을 행사했느냐는 질문에 “협상의 주요 의제는 아니었다”라고 답하여 압력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또한 “협상참여자는 IMF와 한국 정부였지만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도 입장을 전달했다”라고 밝혀 미국 외 여러 나라의 입김이 개입한 사실도 시인한다.[120]

서머스 재무차관은 미국의 개입사실을 당당히 밝힌다.[121] 1998년 2월 “최근 몇 개월 동안 IMF는 아시아 경제를 자유화하고 미국의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이 늘어나도록 아시아 시장을 개방하는 데 있어서 과거 수년간 벌여왔던 무역협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라고 발언한다.

립턴 재무차관보도 미국의 압력을 시인한다. 그는 1998년 3월 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러 분야에 걸친 견해를 밝힌다. 반미감정과 미국의 개입의도에 대해서는 “우리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갖고 있다. 바로 어려운 시기에 한국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한국과 아시아, 또 미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우리는 사태 초기인 12월 초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나타났을 때 한국인들이 문제의 심각성과 미국의 개입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자 미국이 친구로 왔다는 점이 이해되면서 반미감정이 수그러들었다. 미국은 한국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답한다.

립턴은 한국에 개방을 요구하는 이유도 설명한다. “위기 상황일 때 더욱 과감한 결정이 필요하다. 위기를 맞은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더 이상 경쟁의 압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변화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할 때다. 한국은 외국의 투자와 경쟁을 두려워해서 안 된다. 외국의 투자는 한국경제에 자본, 기술, 경쟁 측면에서 여러 가지 압력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한국은 금융부문 개방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 많은 야심적인 조치가 취해졌지만 항상 더 좋은 조치가 있을 여지는 있다. 개방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 나갈 경우 한국경제가 보다 더 경쟁적으로 바뀌어 한국의 저축자들은 더 높은 수익을 올리고, 투자가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지게 될 것이다.”

IMF는 한국과 협상에서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곤혹스러워하며 가능한 한 사실을 숨기는 쪽으로 행동하는데 비해 ‘루빈 장관-서머스 차관-립턴 차관보’로 이어지는 삼인방은 미국 재무부가 한국-IMF 협상에 직접 개입하여 미국의 국익을 반영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리낌 없이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IMF가 미국의 이익 대변에 앞장선 이유

위기 초기 한국에서는 IMF가 위기에 빠진 한국을 공명정대하게 구원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IMF가 미국이나 일본 등 대주주 국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IMF가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연유는 대개 두 가지로 짐작된다.

첫째, 캉드쉬가 IMF 총재로 선출되는 데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사회에서 세계은행 총재를 미국이 맡고 IMF 총재를 유럽이 맡는 관행은 IMF 출범 때부터 유지된 불문율이다. IMF 총재는 이사회에서 과반수 찬성으로 선출하는데 실제로는 막후에서 미국과 유럽의 주요 국가가 합의하여 총재를 정한다. 1987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이 자크 드 라로시[122] 총재와 경합 상태에 있었던 미셸 캉드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캉드쉬가 임기 5년인 제7대 IMF 총재에 취임하게 된다. 1992년 연임에 성공하고 1996년 5월에 만장일치로 세 번째 연임하여 IMF 사상 최초로 15년간 총재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IMF의 미국 지분이 18%로 IMF 이사회의 주요 결정사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미국의 의사를 거스르고서는 IMF가 독자적으로 행보할 입지가 좁다.

IMF의 지배구조와 의사결정구조는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었다. IMF의 지배구조는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회원국 전원이 참여하는 이사회(board of governors)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등 G-5가 임명하는 이사들로 구성된 집행위원회(executive board)이다. 두 기구 모두 회원국의 출자액에 비례하여 투표권을 갖는 ‘비례투표제(weighted voting)’를 채택한다. 보통 의사결정은 ‘과반수제’로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80~85%(초기에는 80%, 현재는 85%)를 넘겨야 하는 ‘특별 다수제(special majorities)’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국 워릭대학교의 리치가 연구한 바처럼, ‘비례투표제’에서 투표권의 차이가 그대로 권력의 차이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123] 미국처럼 투표권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한 나라가 자신의 투표권보다 더욱 큰 권력을 발휘하고, 그에 비해서 투표권을 작게 보유한 나라는 투표권보다 더욱 작은 권력을 가진다는 ‘투표의 모순’ 현상이 생긴다. IMF가 설립된 1946년에 미국은 투표권의 33%를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은 43%를 행사했으며 1996년에 미국의 투표권은 18%인데 비해서 권력은 21%였다.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15%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권력은 12%였으며 IMF 설립 시 미국의 주장으로 도입된 ‘특별 다수제’는 케인즈의 우려처럼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근거가 되어 IMF에서 미국의 입김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리치의 연구 결과다.

결론적으로 제4단계에서 IMF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공정한 거래를 주선했다기보다는 IMF의 대주주(특히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여 한국의 금융시장을 개방시키고 무역장벽을 허문 것이다.


5단계. 처방의 적절성 논쟁: 감기는 어떻게 암이 되었나?

이상 위기역사의 제4단계까지 진행되었고, 마지막 제5단계를 살펴볼 차례다. 여기서는 IMF가 주어진 권한 내에서 부당행위를 하지 않고 여러 회원국의 공동이익을 위해 정당하게 행동했다 하더라도 IMF가 한국에 처방한 여러 경제조치가 적절했는가에 대하여 검토한다.

IMF가 요구한 고금리정책, 긴축재정정책, 낮은 경제성장률을 실행하는 와중에 한국의 외환위기는 사회 전반의 총체적인 위기로 확산된다. 또한 한국의 기업이나 금융기관, 부동산의 가치가 급락했으며 그중 상당 부분은 헐값세일(fire sale)로 해외자본에 매각된다. 멕시코나 중남미의 위기 때의 상황이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한다.

첫째, 헐값세일에 관한 것이다.

둘째, IMF가 중남미 위기나 한국 위기에 모두 공통으로 적용했던 원칙, 소위 ‘워싱턴 합의’의 실체에 대하여 살펴본다.

셋째, IMF 한국 처방의 적절성 여부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검토한다.

결론은 명확하다. IMF의 한국 처방을 주도한 루빈 장관 스스로 “나는 그들의 상태가 실제보다 더욱 절박한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1998년 9월 루빈은 자신들이 내린 처방 때문에 위기가 더욱 증폭되자 IMF로 하여금 동아시아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완화하도록 요구한다.[124]

한국 기업 헐값세일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아시아의 어느 중상류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벌어질 일을 한번 상상해보자. 시티은행의 현금지급기에서 현찰을 뽑아 지갑을 두둑하게 채운 뒤 그들은 월마트로 가서 프리토레이, 스니커즈 같은 미제 음식을 잔뜩 사서는 포드 자동차의 트렁크에 담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복합 영화관 시네플렉스에 들러 비자카드로 입장료를 치른 뒤 최신 월트디즈니 영화를 본다. 밤이 깊어 아이를 모두 재운 부부는 집안의 여유자금을 미국 금융회사인 피델리티의 뮤추얼 펀드에 집어넣을 것인지 아니면 미국 유수의 보험회사인 AIG에서 내놓은 보험상품에 투자할 것인지를 놓고 입씨름을 벌인다.”

외환위기가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난 1998년 2월 20일 크루그먼이 전미경제연구소(NBER) 회의에서 발표한 “헐값세일(fire sale)하는 외국인직접투자”의 서두는 1998년 초 『뉴욕타임즈』가 전망한 아시아의 미래상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125] 동아시아의 위기는 지역 내에 대규모의 외국인직접투자(FDI: Foreign Direct Investment)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투자열기는 IMF의 압력과 더불어 동아시아 각국 정부가 자체적인 현금수요 때문에 외국인 소유에 대하여 비우호적이었던 종래의 정책을 철회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또한 다국적기업은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의 기업과 자산을 헐값에 사들일 수 있는 호기라고 인식하여 이러한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으며, 1995년 멕시코 등 중남미 위기 때에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을 크루그먼은 지적한다.

헐값세일은 한국의 외환위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IMF와 협약대로 초긴축정책과 고금리정책이 시작되자 한국 증시는 폭락을 거듭하면서 한국 기업의 가치가 크게 낮아진다. 많은 부채를 안고 있던 기업은 현금확보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여기에 자본시장의 전면자유화가 허용되면서 외국인의 투자한도가 대폭 올라가고 적대적 인수까지 허용되면서 한국 기업의 파격적인 헐값세일이 시작된다.

1997년 12월 27일 『뉴욕타임즈』에 폴락의 글이 실린다.[126]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이미 초라해진 한국은 국가 자존심을 구기는 또 다른 강타를 맞았다. 외국기업이 한국 기업을 접수하려는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이다. IMF가 외국인투자한도를 높인 상황에서 주식시장이 폭락하자 한국 기업의 가치는 헐값이 되었다. 한국의 여러 재벌기업까지 도산 상태에 빠지거나 과중한 부채에 허덕이면서 보물 같은 제국의 상당 부분을 팔도록 강요받고 있다. 미국 기업의 기대에 찬 ‘인수 잔치(acquisition spree)’가 막 시작되었고 몇몇 거래 협상은 매우 가능성이 보인다. 서울은 자산 쇼핑에 나선 사업가와 금융인의 ‘산업관광(industrial tourism)’으로 넘쳐나고 있다. 돈만 가지면 누구나 한국을 찾고 있다. 한국의 원화 가치는 거의 절반으로 떨어져 1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주가는 연초의 3분의 2 이상 떨어졌다. 한국 정부는 재벌의 은행지분 소유를 4% 이내로 제한하여 한국 기업이나 은행을 모두 외국인이 인수하도록 한다는 불평을 듣고 있다.”

클린턴 정부 초기 상무부 국제통상담당 차관을 지냈던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장인 가턴도 “위기국가 대부분은 깊고 어두운 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완전히 달라진 아시아가 있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미국 기업이 더욱 깊이 침투하고 더욱 가깝게 접근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는 10년 이상 걸려야 볼 수 있었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6개월 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규모와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고 당시 아시아의 상황을 설명한다.[127]

헐값세일에 대하여 미국의 토리첼리(Robert Torricelli) 상원의원은 “한국은 주요 자산 일부를 헐값에 팔려고 한다.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다시 얻으려면 여러 세대가 걸릴 자산을 사업판단 착오로 잃게 된다는 사실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다”라고 발언한다.[128] 여기서 그는 헐값세일의 이유를 ‘사업판단 착오(failure of business judgement)’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샌더스 하원의원은 1998년 2월 3일에 IMF 기금확충에 대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지지발언을 하면서 “IMF에 미국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위기국가를 구하는 데 미국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IMF에 충분한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은행과 기업을 헐값에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다.[129]

헐값세일에 대한 비판

헐값세일에 대하여 미국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미국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지역담당 클린턴 특별보좌관인 크리스토프는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걱정스러운 일은 그들의 기업이 미국 기업에 헐값에 팔린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그 결과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의 시대로 새롭게 들어가고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다”라고 경고한다.[130]

웨이드 등도 IMF의 부당행위로 인해 아시아 기업이 헐값에 팔리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깊은 우려의 뜻을 표한다.[131] “IMF는 한국에서 표준적인 처방을 훨씬 넘어서는 요구를 하고 있다. 위기 해결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데도 한국에 구조적, 제도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서구와 동일한 금융 체제가 운용되도록 금융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부실금융기관의 폐쇄나 자본재충전을 요구하는 동시에 외국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을 자유롭게 매입할 수 있도록 했고, 서구의 회계감사기준을 따르도록 하여 외국의 회계기업이 한국의 금융기관을 회계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IMF는 한국의 자본시장을 더욱 폭넓게 개방시킴으로써 외국자본이 보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민간기업의 외화차입 제한도 없애버렸으며 해외수출에 대한 정부보조금이나 수입면허제를 폐지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외국자본이 많은 동아시아의 기업과 은행을 매입했으며 흑자를 내는 건실한 기업도 환율 폭락과 함께 아주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 외국인의 소유가 늘어나면서 벌써부터 아시아인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고 있으며 아시아 지역의 신문 사설에는 이미 ‘제2의 아편전쟁’ 또는 ‘미국-IMF의 제국주의’라는 기사가 실리고 있다.”

또한 웨이드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한다.[132] “금융위기가 일어나면 언제나 부를 갖고 있거나 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자들에게 소유권과 권력이 넘어가며 아시아 위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의도적이었든, 상호 협력을 했든 간에 아시아 위기에서의 승자는 의심할 바 없이 서구와 일본 기업이다. 소유권 이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영국의 한 금융가는 ‘어제 10억 달러 하던 것이 오늘은 5천만 달러가 되었다.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웨이드는 이러한 헐값세일은 세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대규모의 평가절하이고, 둘째는 IMF가 강요한 자본자유화 조치이며, 셋째는 IMF 주도로 이루어진 구조조정 노력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절묘하게 복합되어 과거 50년에 걸쳐서 대규모의 재산 이전이 일어났으며, 이는 1980년대의 남미 위기나 1994년의 멕시코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 위기에서 IMF, 세계은행, WTO 같은 국제기구는 아시아 정부를 감언이설로 속여 그들의 경제 체제를 서구식으로 바꾸었으며, 특히 선두에 선 IMF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미국 국회의 아시아 전문가인 크로닌은 1998년 1월에 낸 국회연구보고서에서 “많은 한국인이 IMF 처방에는 워싱턴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라고 충고한다.[133]

미 평화청(USIP)[134]의 스나이더와 솔로몬도 1998년 4월에 낸 “아시아 금융위기를 넘어: 미국 리더십을 위한 도전과 기회”라는 특별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도덕적 해이와 미국에 대한 한국 국민의 반발에 대하여 우려하는 목소리를 낸다.[135] “아시아에서는 미국의 사업에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IMF를 이용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려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홍콩의 사업가인 고든 우[136]는, ‘이들 모든 이슈는 매우 단순하다. 만일 미국이 구원의 손길을 뻗으면 아시아인들은 그것을 기억할 것이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이 IMF에 반발하는 조짐이 보이며 이는 미국에 대한 반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아시아 위기에서 IMF가 강요한 처방을 실질적으로 지시한 ‘의사’가 미국이라는 인식이 폭넓게 퍼지면서 미국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지고 있다. 일부 한국 국민과 태국 국민은 미국이 미국 금융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무리한 조건을 IMF 구제금융의 대가로 내걸어 ‘자기 장사(self-serving manner)’를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미국의 리치(Jim Leach)[137] 하원의원도, “IMF와 세계은행은 경제적인 문제가 제2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인식에서 1944년 미국 주도로 브레턴우즈에서 창설되었다. 우리는 종종 경제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만 경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브레턴우즈의 모든 합의 배경에는 전쟁과 평화라는 문제가 숨어 있으며 미국 국민이 만일 이 점을 망각한다면 그들은 큰 실책을 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 있는 충고를 한다.[138]

파산 직전에 빠진 한국 입장에서 헐값세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미국 일각에서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는 한국인들에게 더욱 좌절감만 안겨줄 뿐이었다.

IMF의 정통파 교리, 워싱턴 합의

헐값세일이 논쟁의 초점으로 부상하는 이유는 IMF가 한국의 위기극복을 위해 내린 처방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IMF의 한국 처방과 관련된 논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IMF는 한국의 특수상황을 무시한 채 중남미의 외환위기에서 사용했던 처방을 그대로 사용하여 부작용만 키웠다.

둘째, IMF가 제시한 2.5~3.0%의 경제성장률은 너무 낮게 책정되었다.

셋째, IMF가 과도한 긴축재정을 요구했다.

넷째, IMF가 고금리정책을 처방한 결과 한국 기업이 대규모 도산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IMF 처방은 IMF의 ‘정통파 교리’로 간주되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강명규는, IMF 체제를 ‘워싱턴 합의’라는 신국제-정치경제학의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구조조정대부조건(構造調整貸付條件)으로 표현한다.[139] “워싱턴은 잘 알다시피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관뿐만 아니라, 미국의 FRB와 각종 경제연구소, 그리고 미국 행정부와 의회의 고위 실무급 의사결정자들의 거대한 집합소다. 단순히 한 나라의 수도라는 영역을 초월한 세계경제에 관한 정보의 발신지인 것이다. 워싱턴이라는 경제정보의 용광로 속에서 경제전문가 사이에 형성된 ‘보편적인 사고의 수렴’이 바로 워싱턴 합의인 것이며, 그것은 결국 시장력이라는 십자가를 내세우는 미국 경제패권사상의 정화(精華)다.”

이러한 워싱턴 합의는 1980년대 중남미 위기 이후 전통적인 위기극복처방이 되었으며 미국 정부, IMF, 세계은행의 지원 아래 전 세계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워싱턴 합의에 기초를 둔 처방이 제시된다.[140]

워싱턴 합의의 세부내용은 존 윌리엄슨(John Williamson)이[141], 정치적으로는 워싱턴 국회와 행정부 의견을 종합하고 경제적으로는 IMF와 세계은행, 워싱턴의 싱크탱크 의견을 종합하여 1989년에 열 개 항목으로 정리했다.[142] 여기서 ‘합의’라는 의미는, 개발도상국이 추진해야 할 경제개혁의 방향과 그 내용에 관해서 워싱턴의 경제학자들 간에 뚜렷한 합의가 존재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합의가 존재하는 부분을 윌리엄슨이 정리를 했다는 의미다.[143] 열 가지 항목의 세부내용은 다음과 같다.[144]

첫째, 재정정책. 대규모의 재정적자가 지속되면 통화가 팽창하고 물가가 오르며 자본이 해외로 유출된다. 따라서 정부는 재정적자를 최소로 유지해야 한다.

둘째, 정부지출의 우선순위. 정치적 이해관계집단(공무원, 군수(軍需), 산업 보조금)에 배분된 공공지출은 기본적인 국민건강, 교육, 인프라와 같이 긴급하고 미비한 영역으로 재배분되어야 한다.

셋째, 조세개혁. 폭넓은 과세기반을 확보해야 하고 한계세율을 적절히 유지함으로써 경제적 효과를 높여야 한다.

넷째, 이자율. 이자율은 시장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실질이자율이 올라가면 자본유출이 방지되고 저축률이 올라간다.

다섯째, 환율. 복수환율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개발도상국은 수출품이 해외에서 가격경쟁력을 가짐으로써 수출이 증진될 수 있도록 경쟁력 있는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여섯째, 무역자유화. 쿼터제와 같은 양적인 무역제한제도는 관세로 대체되어야 하며, 관세는 단일화되어야 하고 점진적으로 인하함으로써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자국의 생산성이 개선되도록 촉진해야 한다. 수출품을 만드는 중간재에는 관세가 적용되지 않도록 한다.

일곱째, 외국인직접투자. 외국인투자를 통하여 필요 자본과 기술이 이전되므로 적극 장려해야 한다. 외국인직접투자의 유입을 방해하는 장벽을 없애고 외국기업과 자국기업을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

여덟째, 민영화. 민간기업에서는 경영자가 이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책임을 지므로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정부소유기업은 민영화되어야 한다.

아홉째, 규제철폐. 과도한 정부규제는 부패를 조장하고 중소기업인은 고위 관료들과 접촉할 수 없어 냉대받게 된다. 정부는 시장 적대적인 규제를 폐지함으로써 더욱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시장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

열째, 재산권. 모든 경제주체를 위해 기본적인 재산권은 반드시 보호해야 하며 여기에는 노동자와 비공식부문도 포함된다. 법이 취약하거나 사법 체제가 허술하면 부를 쌓고 축적하려는 유인효과가 줄어든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이들 열 개 항은 IMF를 통하여 그대로 한국에 적용되었다.

워싱턴 합의인가? 워싱턴 혼란인가?

하지만 『포린폴리시』의 편집인 나임은 워싱턴 합의(consensus)에서 주장하는 열 개 항은 실제로 ‘합의(consensus)’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워싱턴 ‘혼란(confusion)’으로 부르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145]

샌디에고대학교의 파인버그(Feinberg)도, 10개항에 대하여 워싱턴 모두가 지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합의’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보편적 수렴의견(universal convergence)’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워싱턴 합의가 나온 지 3년이 지난 1993년에는 이를 만든 윌리엄슨 자신도 ‘합의’라는 단어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밝힌다.[146]

이러한 ‘합의’ 또는 ‘혼란’에 대한 논란은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워싱턴의 경제학자 간에도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사항을, 그것도 중남미와 완전히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한국의 위기에 그대로 적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동남아 위기는 중남미 위기와 유사한 원인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달랐다.

IMF는 재정적자가 5% 수준이면 대개 경고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1996년에 재정적자가 4%를 넘었으나 1997년에 2.5%로 떨어졌고 1998년 초에는 이미 재정흑자를 이루었다. 이에 비해 태국은 8%, 1982년의 멕시코는 9%의 재정적자를 보였다. 물가 측면에서도 한국은 김영삼 정권 전체를 통틀어 재정적자가 7% 수준이었다. GNP 대비 부채비율은 인도네시아가 57%, 멕시코가 70% 수준이었지만 한국은 IMF가 위험수준으로 보는 48%를 하회했다. 수출 대비 부채비율도 한국은 6%로 멕시코의 24%나 인도네시아의 31%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한국의 입장이 중남미와 근본적으로 다른데도 IMF는 중남미에 적용했던 워싱턴 합의를 ‘기계적으로 관례에 따라 즉각’ 한국에 적용하는 기민함을 보였다.[147]

스티글리츠: IMF 비판에 선봉

워싱턴 합의에 바탕을 둔 IMF의 한국 처방에 대하여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학자가 IMF와 자매기구인 세계은행의 스티글리츠 부총재라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다.

한국 정부-IMF 간에 협상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무렵인 1997년 12월 1일 스티글리츠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 재무장관회의에서 IMF의 동아시아 처방을 반대하는 의견을 비친다.[148] 동아시아 위기국가의 실추된 신인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장 둔화를 최소한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시아가 현재의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선 단기적으로는 성장 둔화를 최소화해야 한다.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튼튼한 금융제도 구축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동아시아 국가는 지불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인도를 상실한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는 기간과 그 강도를 얼마나 최소화하고 경제 전반적인 성과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얼마나 성공리에 펼칠 수 있느냐에 따라 경제 신인도가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의견표명은 IMF의 의사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국-IMF 협약이 체결된 후인 12월 15일 스티글리츠는 한국을 방문하여 성명을 발표한다.[149]

“세계은행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것은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력이 높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이번 방한기간을 통해 한국의 펀더멘털이 건실하다는 믿음을 재확인했으며 한국 정부가 현재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경제발전에는 건실한 거시경제, 높은 저축률과 교육열, 앞선 기술의 생산시설,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분배, 대외지향적 경제운용 등이 중요한 요소였다. 아직도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경제 전망은 매우 밝다.”

이처럼 스티글리츠 수석부총재는 한국의 펀더멘털은 외환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튼튼하며 미래 전망도 밝다는 시각을 내비침으로써, 한국이 내부적 결함이 많다고 주장하는 IMF와 대조를 이룬다.

1998년 1월 8일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자 IMF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150] “IMF가 아시아 국가에 강요하는 지나친 긴축과 높은 이자율은 필요 이상의 불황과 도산을 야기할 것이다. 1980년대 중남미처럼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외환위기가 일어난 경우에는 통화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재정과 통화를 긴축하고 이자율을 높이는 것이 정석이지만, 민간부문의 금융부실로 위기가 초래된 아시아의 경우는 다르다. 부실금융구조의 재편이 중요하며, 이 와중에 환율 방어라는 ‘정통파 교리’에 따른 긴축정책을 펴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경기후퇴의 악순환을 초래할 것이다. 위기의 ‘근본’ 원인에 초점을 맞춰야지, 사태해결을 어렵게 하는 ‘부차적’ 문제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IMF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피셔는 “긴축이 좋아서 하라는 것이 아니다. 과거 스웨덴은 외환위기 당시 이자율을 700%까지 올린 사례도 있다. 아무리 이자율을 천문학적 수준까지 높이더라도 정부가 확고한 환율 방어 의지를 보인다면 환율은 안정될 것이다”라고 적극적인 방어에 나선다.

미국 재무부 관료들까지 가세하여 IMF를 감싼다.[151] 서머스 재무차관은 1998년 1월 9일 “아시아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력한 긴축정책이 필요하다는 IMF 측의 해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라고 밝히면서 IMF를 강력히 옹호한다. 루빈 재무장관도 “일부 국가가 IMF와 합의한 경제개혁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의 구제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혼란은 심화될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태국이 IMF와 약속을 저버리고 흑자재정을 편성하고 재협상을 요구하는 점을 우리는 주목하고 있으며 경제위기가 가중될 경우 비난의 화살은 IMF가 아니라 이들 국가에게 쏠릴 것이다”라고 강력한 경고를 발한다.

이에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IMF가 금융부문 부실이라는 똑같은 원인을 두고 일본과 한국에 차별적으로 권고한 사실을 지적한다. 금융부문 부실로 인해 엔화 약세를 겪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는 금융 구조조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적자 확대정책을 권고하면서 한국에는 정반대의 정책을 권고하고 있다는 것이다.[152]

스티글리츠는 1998년 3월 9일~13일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후원으로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개발포럼에서, 고금리로 인해 자본유입이 이루어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IMF의 고금리정책의 허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153] “국제투자가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자율이 아니라, 예상이자율에서 위험 프리미엄(risk premium)을 뺀 차감액이 얼마인가 하는 것이다. 이자율이 올라가면 파산확률도 올라가고 따라서 위험 프리미엄도 올라가게 된다. 결국 파산의 위험을 차감하고 난 나머지 기대수익은 오히려 낮아지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부채는 대부분 민간부문의 부채이므로 투자가들에게 채무불이행에 대한 염려가 항상 일순위에 오는 것이다.” 논리 정연한 설명이며, 스티글리츠의 예견처럼 한국에서는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며칠 후 1998년 3월 17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통산성 부설연구소(MITI Research Institute)의 개원 10주년 국제 심포지엄에서도 스티글리츠는 IMF 프로그램에 대하여 일관성 있게 비판한다.[154] “이번 금융위기는 동아시아 국가가 지난 30년간 성취한 놀라운 경제성장에서 유일한 위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환위기 때문에 타격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혼란이 지난 25년간의 경제성장을 완전히 되돌려놓지는 못할 것이며 이번의 위기를 동아시아 경제가 근본적으로 잘못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어느 나라 경제도 외환위기를 완전히 피한 적은 없으며 동아시아의 외환위기 경험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훨씬 적다. 이번 불황 이전까지 지난 30년간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단 한 번도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적이 없으며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각각 한 번씩 경험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각각 6년의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다. IMF는 한국에 오로지 물가 안정만을 목표로 하는 금융정책을 강요하지만 물가는 위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현재도 물가수준은 높지 않으며 과거에도 높았던 적이 없는 한국에는 필요치 않은 개혁이다. IMF는 현재의 위기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조치를 넘어서는 간섭을 하고 있다. 물가와 실업률 중에서 선택을 하는 것은 각 나라의 사회적 가치관에 따르는 것인데 IMF가 간섭하는 것은 민주주의 과정에 대한 침해이며 개혁과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저해요인이 된다. 따라서 상황변화에 따라 IMF 프로그램을 조정할 수 있도록 IMF와 한국 정부가 계속 대화하는 것이 한국 국민 사이에서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와 지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주장은 후에도 계속된다. IMF 프로그램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1998년 5월 그는 “시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한, 투자가들은 금리가 높으면 위험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하고 투자를 기피한다. IMF가 아시아에 고금리정책을 요구했지만, 외국인투자는 들어오지 않고 있으며 환율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IMF의 긴축정책, 즉 부실은행 폐쇄, 정부예산 축소, 물가 억제 등의 조치가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고금리가 투자가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증거는 희박하다”라는 주장을 편다.[155]

스티글리츠는 1998년 9월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도 “IMF가 기업의 부채비율이 높은 동아시아에 고금리정책을 요구한 것은 외환시장 안정의 순기능보다는 기업에 대한 해악이 훨씬 컸다”라고 비판한다.[156]

1998년 9월 말에는 자매기관인 세계은행과 IMF가 나란히 경제보고서를 낸다. 여기서도 역시 두 기관은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처방에서 상반된 인식을 드러낸다. 세계은행은 『동아시아: 회복의 길』이라는 보고서에서 동아시아 각국이 함께 재정지출을 늘려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시행하여 서로 경제성장을 촉진해야 한다는 처방을 제시한다.[157] 세계은행은 외국자본의 신뢰회복으로 해외자본이 유입되는 것이 동아시아 경제회복의 관건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보다는 우선 성장을 촉진시켜 기업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자기자본보다 많은 부채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를 억제할 경우에 기업의 부채구조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고 이들 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신인도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세계은행 보고서는 덧붙인다.

반면에 IMF는 『세계경제전망』보고서에서 동아시아의 경기침체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세계은행과 인식을 같이 하면서도, 처방에서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외환보유액의 축적, 금융개혁, 신중한 금리인하를 강조한다.[158] 특히 국제시장에서의 신뢰회복은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을 빨리 진행하고 기업의 과다한 부채부담을 해결하는 데 달려 있다는 기존의 주장을 계속한다. 이렇듯 IMF의 자매기관인 세계은행이 IMF의 한국 처방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박하면서 반대의 처방을 내놓은 것은 상당히 눈길을 끈다.

삭스: “International Monetary Failure?”

다음으로 하버드대학교의 삭스가 비판을 이어간다.[159] 그는 한국이 IMF와 협상을 체결한 직후부터 초지일관 IMF의 실책을 비판한다. 그의 주장에 깔린 기본적인 인식은 한국의 외환위기가 내부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펀더멘털[160]에 잘못된 것이 없는데도 국제투자가들이 심리적 공황(panic) 상태에 빠지면서 생긴 일시적 유동성 부족 때문이므로, IMF가 주장하는 총체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유동성만 제공하면 모든 문제가 스스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한국의 위기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화가치가 과대평가되면서 수출증가율이 둔화되었다.

둘째, 장기투자를 위해 단기차입금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이는 장기투자 프로젝트가 원활히 진행된다 하더라도 해외채권자들이 언제 대출회수를 결정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전략이었다.

셋째, 외국계 은행의 국내 활동을 꺼려왔다. 미국, 유럽, 일본의 은행이 한국경제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외국은행이 한국의 은행에 대출을 해주도록 했다. 이는 결국 자금흐름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세 가지 바탕 위에 국제투자가들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대출금을 동시에 회수하자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 사태에 빠졌다는 것이 삭스가 보는 위기의 전모다. 이를 근거로 삭스는 IMF의 한국 처방을 강하게 비판한다.

삭스는 한국이 IMF와 협약을 체결한 며칠 후인 1997년 12월 8일 “국제통화 실패?”라는 글을 『타임』에 싣는다.[161] 흥미로운 것은 “International Monetary Failure?”라는 제목이 IMF의 이름에 빗대어 IMF의 실책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삭스는 “IMF는 과연 구세주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후 아니라는 결론부터 내린다. “IMF의 간섭은 국제투자가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투자대상을 바꾸려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는 점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아시아가 금융위기의 곤경에서 벗어날 기회는 희박하지만 아직 조금은 남아있다. 구제책은 세 가지다. 첫째, 아시아 국가는 재정긴축과 높은 이자율은 금융공황만 심화시키므로 이러한 통상적인 처방을 막아야 한다고 IMF를 설득해야 한다. 전통적인 근검절약 대신에 신뢰회복이 주요 의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번 위기가 정부예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민간시장에서 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미국은 특히 일본 등 아시아 국가가 자체적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여 아시아의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시아가 스스로 외환위기를 지원할 수 있는 자금을 조성토록 하고 비틀거리는 일본의 금융 체제를 바로잡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공공자금을 풀도록 해야 한다. 셋째, 부유한 채권국가의 관료들은 단기자본의 흐름이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단기자본의 무절제한 흐름에 대한 지원을 재고해야 한다. 금융시장이 지나친 무절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기준을 도입할 때가 되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IMF의 정통적 금융이론이 아니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처럼 삭스는 IMF와 전혀 다른 처방을 낸다. 기존 처방은 한국에 통하지 않으며, 일본이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하고, 단기자금의 횡포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흘이 지난 12월 11일 삭스는 『파이낸셜타임즈』에 “IMF 자체가 권력이다”라는 글을 싣는다.[162] 여기서 그는 IMF 처방에 대하여 ‘과잉살육(overkil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한국의 펀더멘털이 탄탄했는데도 IMF가 무리한 긴축을 강요하여 원화가치의 평가절하, 그로 인한 수입가격 상승, 극도의 통화 위축, 21%를 넘는 높은 이자율, 기업 연쇄부도, 금융기관 폐쇄 등의 사태를 야기했으며 이러한 과잉살육 조치는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건전한 거시경제를 추구하고 있었던 나라에는 합당치 않다. 만일 IMF가 금융위기 조짐이 나타난 초기에 미국, 일본, 유럽의 금융기관에 한국에 신용을 공급하도록 요구했거나, 한국의 취약점을 드러나게 하는 대신 강점을 보강토록 했다면 투자가들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며 신용을 회복하고 시장을 안정시킨 후 점진적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삭스의 이러한 충고는 지금 와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지적인데도 우리가 IMF를 설득하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했던 정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2월 12일 『르몽드』와 12월 18일 『뉴욕타임즈』는 삭스의 주장을 싣는다. “한국의 경우는 충격적 긴축을 통한 구조조정보다 신용위기를 완화하면서 점진적으로 경제구조를 바꿔나가도록 해야 한다. IMF가 지원을 결정한 후 급등하기 시작한 단기금리는 20%를 넘어섰으며 자금거래가 거의 끊겼다. 이러한 상황은 IMF가 원하는 금융시장 안정과 거리가 멀다. 신용위기가 나타난 후에 IMF가 요구하지 않았어도 구조조정과 경제성장률의 하향조정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IMF는 한국경제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대신 체질을 강화하는 개혁을 유도해야 한다.”[163] “IMF의 엄격한 요구가 아시아의 경기침체와 정치 불안정을 낳을 위험이 크다. 높은 저축률과 첨단산업부문을 가진 한국에 소비와 투자를 줄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정책이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불능력을 가진 한국의 외환시장에서 공황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본이 일찍부터 개입했어야 했다.”[164]

해를 넘긴 1998년 1월 2일 삭스는 “한국 처방, 재검토 필요하다”는 글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165]

첫째, 한국 정부가 IMF와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IMF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만이 해답은 아니다. IMF도 현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고 있다. 향후 몇 주간의 최우선 과제는 이미 타결된 IMF 합의안에 대하여 재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한국 정부와 IMF의 합의안은 며칠 만에 서둘러 마련된 것이다. 당연히 한국 정부와 IMF는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둘째, 개혁의 속도에 관한 것이다. “한국에 경제개혁이 필요하지만 ‘응급수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개혁이 빨리 이루어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IMF 처방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한다. IMF가 자신들이 다루지 못하는 병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IMF는 공공부문에서 촉발된 위기는 IMF의 표준적인 처방(워싱턴 합의)을 통하여 치유하는 데 능숙하지만, 한국처럼 민간부문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위기를 다루는 데는 미숙하다. 위기를 촉발시킨 원인이 다른데도 별생각 없이 표준적인 처방대로 예산 삭감, 고금리, 금융긴축을 강요하고 있다. 게다가 IMF는 금융기관 폐쇄라는 처방까지 덧붙여 금융공황을 가속화시키는 우를 범했다. 금융기관의 폐쇄로 주요 금융기관은 여신업무를 중단했으며 많은 건실한 기업이 급속히 도산 상태를 맞았다. 기업파산의 위험도가 높아지자 해외자본 유출은 점점 가속화되었으며 통화시장과 주식시장이 더욱 하락세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IMF 처방은 당초 기대와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논지 아래 삭스는 IMF와 전혀 다른 처방을 제시한다. “한국의 은행에 대한 규제는 유보되어야 한다. 생산적 산업에 대한 채무상환 연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통화 공급을 완만하게 증가시켜 충분한 신용이 공급되도록 해야 한다. IMF가 설정한 본원통화 8% 증가 목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므로 완화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35% 수준을 보이고 있는 콜금리도 15~20%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물론 낮은 이자율로 원화가 평가절하할 것이다. 하지만 환율붕괴의 근본원인은 돈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한국의 채무불이행과 경제붕괴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성장에 대한 확신과 국제사회로부터 채무불이행의 우려를 씻어내는 동시에 통화 공급량이 증가된다면 한국경제는 원화를 추가적으로 절하하지 않고도 화폐공급 확대분을 흡수할 수 있다. 이처럼 보다 현명한 미시경제학적 정책(생산적 산업부문에 대한 적절한 은행대출 확대)이 국제신인도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몇 주일은 조건을 재협상할 적기가 될 것이다. IMF는 이제 자신들이 오판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는 이를 시인하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재협상할 준비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삭스는 동아시아 위기의 원인규명에서부터 현실인식과 처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IMF와는 상반된 주장을 편다.

여러 학자도 IMF 처방을 비판

스티글리츠와 삭스 외에 여러 학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IMF의 한국 처방에 관하여 비판한다.

국제금융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스탠퍼드대학교의 맥키논은 1997년 12월9일 “일본경제의 침체와 동아시아 통화위기”라는 주제로 세계경제연구원과 한국무역협회가 공동개최한 강연회에서 IMF가 한국에 과도한 압력을 넣고 있다고 지적한다.[166] “재정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고도성장한 나라에 경제성장률을 2.5%로 낮추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IMF가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금융부문 개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제성장률은 강제적으로 정할 성질이 아니다.”

또한 맥키논은 한국이 다른 위기국가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167] “IMF가 요구한 경제안정화정책 중에서 경제성장률 억제가 우선적 과제는 아닌데도 성장 목표치를 확정한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물가 안정을 위한 목표 설정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장은 부수적인 문제다. 경상수지적자나 과도한 경제성장률 때문에 외환위기가 일어난 것이 아니므로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멕시코 같은 초긴축정책은 한국에는 적합하지 않다.”

울프는 IMF 협상이 타결된 사흘 뒤인 12월 6일 『파이낸셜타임즈』를 통해 IMF가 내린 한국 처방에 대하여 비판한다.[168] “부채비율이 높은 국가에 고금리 처방은 대단히 위험하다. 경기침체를 불러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특히 IMF 처방 중에서 단기금리를 21% 이상(실질금리로는 15% 이상)으로 올리고, 원화를 단기적으로 30% 이상 절하시키는데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5%로 유지하며, 재정흑자를 GDP의 1.5%로 유지하라는 요구는 어떻게 조합해도, 한국 기업과 은행의 병든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또한 고금리를 유지하면서 자본시장을 활짝 열면 해외자본이 유입되어 자금시장의 불안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IMF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금융부문을 강화하는 것과 금융시장 개방은 서로 다른 문제다.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자본금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금융시장을 개방한 것이 위기의 근원이었다. 오히려 민간 경제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적극적인 재정확대정책을 허용해야 한다.”

또한 울프는 사흘 뒤인 12월 9일 “똑같은 낡은 IMF 처방”이라는 글에서 IMF가 과거와 상황이 다른 한국에 전형적인 처방을 내린데 대하여 비판한다.[169]

MIT의 암스덴은 1998년 1월 22일 IMF가 일방적으로 통화주의자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170] “IMF는 ‘경기침체’라는 수단을 주로 사용하여 이상한 사업을 하는 기구다. 회원국의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고 그 틈새로 외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저성장을 유도하는 기묘한 방식을 사용한다. 기업이 투자를 유보하고 노동자의 월급이 줄어들고 정부지출이 줄어들면 외채 상환이 더욱 용이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율안정과 외채 조기상환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고도성장이라는 케인즈 학파의 이론을 IMF는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통화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수입이 늘면 저축이 늘고, 저축이 늘면 외채 상환도 쉬워진다는 케인즈 이론을 국제금융계는 좋아하지 않는다. 은행가들은 대개 인플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화주의가 득세하게 되었고 IMF는 모든 채무국의 눈엣가시가 되어 있다.”

암스덴은 한국에 대한 IMF 처방이 잘못된 것이므로 한국 정부가 IMF와 재협상을 벌이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IMF의 오류는 금리부문에서 두드러진다. IMF는 고금리정책을 통해 통화량 감소, 원화 안정, 투자 감축 등을 노렸으나, 한국은 IMF 체제 시작 이전부터 이미 고금리와 통화긴축 하에 있었다. 추가 금리인상은 이미 부채상환에 허덕이는 대다수 기업의 도산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인플레를 우려한 IMF정책은 5% 수준의 낮은 물가상승률과 재정흑자를 누리던 한국에는 올바른 처방이 아니다. 한국은 IMF의 고금리 목표를 낮추도록 협상하는 데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고금리로 인한 기업도산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는 건실한 기업이 단기부채 때문에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IMF와 강력한 협상을 벌여야 한다. IMF는 한국 기업 파산의 해결책으로 외국기업에 의한 인수를 제시하고 있다. IMF 덕분에 현재 한국에서는 외국인의 기업 지분 50% 인수가 가능해진 상태다. 이것이 IMF가 선진국의 이익에만 충실한 것처럼 비쳐지는 이유다. 하지만 왜 한국의 우량기업이 외국기업에 헐값에 정리세일 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가.”

또한 암스덴은 한국의 정부나 경제전문가들이 나서서 IMF와 협상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한국은 한때 IMF에 몸담았던 인물이나 정부와 업계의 경제전문가들 그리고 유능한 협상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채무국과 다르다. 한국은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다윗이 될 수 있다.”

영국 서섹스대학교의 그리피스존스는, 아시아 위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보다 위기가 깊고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역내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171] “그것은 위기에 대한 부적절한 관리 때문이며, 그 원인은 그 나라 자체에 의한 것과 외생변수로 나눌 수 있다. 외생변수는 IMF와 일본의 저성장 등이 있다. 더욱이 아시아 국가의 긴밀한 무역관계는 고도성장기에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현재는 약점으로 작용하여 역내 수입 수요를 축소시켰다. 또한 아시아 국가는 과거 국제수지 적자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여 초기에 위기의 깊이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데 시간을 낭비했으며 위기관리에도 실패했다. IMF 프로그램은 엄격한 거시경제 조건을 과욕적으로 요구하여 급격한 구조개혁을 추진하고 있지만, 신인도를 회복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IMF는 시장의 평가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한 국가에 대한 IMF의 부정적인 정보는 신인도를 더욱 낮추고 긍정적인 평가는 신인도 회복에 도움을 준다. 특히 한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 한국은 은행의 구조조정을 포함해서 IMF 프로그램을 조심스레 따라갔지만 심각한 불황으로 귀결되었고 신인도를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해외차입에서 높은 프리미엄을 치르고도 무역상 신용도 회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수출 증가와 경제회복 그리고 구조조정은 더욱 힘들어졌다.”

일본의 국제금융정책을 총괄했던 사카키바라도 비판대열에 가세한다.[172] 그는 1998년 1월 25일 박영철 한국금융연구원장과 가진 대담에서 IMF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다. “IMF의 한국 지원 프로그램 중에서 고금리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고금리정책이 (한국경제에) 가져올 부작용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조만간 국제회의 등을 통해 공개 표명할 것이다.”

삭스의 주장이 득세

IMF의 한국 처방에 대하여 비판과 반박이 오가는 가운데 현실 경제는 삭스와 같은 비판론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IMF의 고금리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금융시장과 주식시장은 붕괴되었고 기업이 대규모로 도산하면서 한국 원화의 가치는 더욱 하락했기 때문이다.

1998년 1월 초 동아시아의 상황이 예견대로 진행되자 삭스는 득의양양해진다. 그는 처음에 IMF 처방에 대하여 비판하다가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IMF가 아시아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발언을 한다.[173]

삭스는 1월 14일 싱가포르 은행가들과 금융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IMF가 아시아에 잘못 처방된 약을 투여하는 바람에 경제 전체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작은 취약점’에서 비롯되어 급속히 금융권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IMF의 개입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아시아 금융 체제의 몰락에 대하여 IMF는 그동안 감춰졌던 문제점이 한꺼번에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IMF가 초기 감기증세에 잘못된 치료약을 투여함으로써 위기를 확산시켰다. 특히 IMF는 부실은행의 대량 폐쇄조치를 요구하여 은행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는커녕 대규모의 예금인출사태를 초래해 공황 현상을 야기했다. 은행의 기본기능이 중단되면 경제의 혈액순환이 멈추게 되며 이는 결국 기업의 흑자도산으로 연결되면서 가치 있는 경제자산까지 몰락하게 된다. 캉드쉬를 비롯해 IMF의 그 누구도 지금 같은 위기가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아시아식 성장론에 대해서도 옹호한다. “지금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손가락질과 헐뜯기가 만연하고 있으며 지난 30여 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아시아의 금융 체제가 부패와 정실주의, 통제부재와 종신고용 관행에 물든 허구에 불과한 것처럼 매도되고 있다.”

1998년 4월, 삭스 등은 한국 등 3개국에서 IMF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원인을 다섯 가지로 분석한다.[174]

첫째, IMF는 시장의 신뢰도가 단기간에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시장에 충분히 심지 못했다. IMF의 등장은 단지 대문 앞에 도착한 구급차라는 인상밖에 주지 못했다.

둘째, IMF는 동아시아의 금융위기가 채권자들 사이에 조성된 공황심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해당 각국의 경제체질이 심각하게 약화된 때문이라고 선언해버림으로써 시장의 동요를 증폭시켰다.

셋째, 시장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IMF가 취한 방법은 매우 특이한 가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 가설은, 금융기관 폐쇄, 금융규제 강화 등 금융시장 구조조정을 위해 단호한 조처를 취하면 채권자들이 믿음을 갖고 만기가 도래하는 채권의 상환기일을 연장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넷째, IMF의 재정-통화정책도 문제였다. IMF는 위기국가가 해외자본의 철수로 인한 자금경색으로 이미 심하게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재정흑자 실현을 위해 긴축재정을 운용했다. 고금리정책도 부작용만 일으켰다.

다섯째, IMF 스스로 진정한 의미의 ‘최후의 대출자’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투영하는 데 실패했다. IMF가 최후의 대출자로서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보지 않지만, IMF가 즉각 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자금규모만 엄청나게 불려서 지원금으로 발표한다고 해서 채권자의 채권회수 사태를 저지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볼 수 없다.

삭스는 또한 IMF 프로그램이 단기간에 금융시장의 신인도를 회복시키지 못한 원인을 두 가지로 든다.

첫째, IMF 프로그램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금융위기 외에 무역자유화, 독과점 해제, 민영화 등 너무 광범한 정책과제를 다루었다. 물론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지만 금융위기라는 화급한 불을 끄는 데 필요한 힘이 분산될 뿐이었다.

둘째, 제1단계 IMF 프로그램의 내용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이는 대중의 신뢰회복에 장해요소가 되었다. 다행히 1997년 12월 이후의 제2단계 프로그램부터는 그 내용이 공개되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비판론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만큼 IMF의 입지는 좁아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IMF는 반론을 제기한다.

비판에 대한 IMF의 반론

IMF에 대한 비판에 반론을 제기한 인물은 IMF의 캉드쉬와 피셔, 그리고 미국 재무부 관료들이 주축이다.

IMF 총재인 캉드쉬는 1998년 1월 5일 『르몽드』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반론을 편다.[175] 일단, IMF 처방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일고 있다는 지적을 ‘미인대회’에 비유한다. “IMF가 대형 지원 프로그램을 실행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논평가들이 미인대회 심판관처럼 말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먼저 한 마디 하면 그와 비슷한 기조의 이야기가 전 세계를 돌며 반복된다. 특히 한국, 인도네시아의 지원과 관련해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낡은 거시경제적 처방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IMF가 만든 지원계획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살펴보고 그러한 말을 하는지 의문이다.”[176]

IMF가 자주국가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유감이다. IMF 프로그램은 적용대상 국가와 협상을 통하여 입안되며 최종결정도 해당국가가 내린다. IMF는 가장 신속하면서도 인간적으로 피해가 적은 여러 조치에 대하여 해당국가와 논의하여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IMF가 투기꾼 노릇을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러한 비판은 ‘보험업이 너무 위험하니까 보험회사를 아예 차리지 말라’는 소리와 비슷하다. IMF는 위기국가의 신인도 회복을 위하여 해당국 정부나 금융기관이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응수한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캉드쉬의 답변 중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 예컨대 IMF 프로그램을 결정할 때 해당국가와 ‘협의’한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의 경우 외견상으로는 ‘협의’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IMF가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일방적인 강요’를 한 것이다.

연이어 1998년 1월 14일 캉드쉬는 한국에서 가진 경제단체장 간담회에서 IMF 프로그램의 적절성을 반복하여 주장한다.[177]

IMF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긴축일변도여서 경제활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신인도를 회복하기 위하여 단기적으로는 긴축이 필요하다. IMF는 한국의 경제와 기업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온 것이다”라고 답한다. 고금리에 대해서는 “금리가 높은 수준이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한국경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 환율도 여전히 불안하다. 당분간은 긴축기조를 통해 이자율을 높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의 고금리 고충을 이해한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회복을 위해 일시적 고금리는 불가피하다. 어느 나라도 고금리 없이 외환위기의 극복이나 대외신뢰도의 회복을 이룬 나라는 없었다. 고금리 체제를 당분간 유지하는 것이 신인도 유지에 중요하며 구조조정 촉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답한다.

캉드쉬는 1998년 2월 6일 미국 대외관계자문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의 통화가치 하락은 IMF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며 만일 IMF의 지원이 없었다면 통화가치는 더욱 하락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178] 물론 IMF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위기 상황은 더 악화되었겠지만 삭스의 지적처럼 IMF 프로그램이 시행되자 통화가치가 더욱 하락하다가 여러 선진국에서 구제금융자금이 유입되고서야 하락이 멈추었는데도 캉드쉬는 이를 자기들의 공으로 내세운다. 만일 삭스가 주장하는 처방을 처음부터 적용했다면 애당초 대규모의 통화가치 하락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캉드쉬는 “만일 이자율을 급등시키지 않았다면, 통화가 더욱 평가절하되면서 대규모 외채를 안고 있는 기업의 고통이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고, 이자율 인상이 연기되었다면 신인도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삭스의 비판처럼, 이자율 급증으로 인해 평가절하가 멈춘 것이 아니며 이자율이 낮아서 신인도가 실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캉드쉬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 후에도 이러한 캉드쉬의 주장은 비슷한 내용으로 반복된다.

다음은 피셔 부총재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97년 12월 11일 삭스가 『파이낸셜타임즈』에서 ‘과잉살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IMF의 한국 처방을 비판하자 피셔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12월 17일 『파이낸셜타임즈』에 “제대로 된 작품: 사적 견해”라는 반박문을 싣는다.[179] 그는 여기서 아시아의 구제금융은 신뢰를 회복하고 금융 체제를 강화하도록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첫째, IMF가 낮은 경제성장률을 제시한 것은 신인도 회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시아 경제가 회생하려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투자가들의 신인도 회복이다. 이를 위해 경제 활성화보다는 금융시장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일정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IMF가 제시한 경제성장률은 현재 상황을 분석하여 적정수준을 제시한 것이지 결코 하향 조정된 것이 아니다. 위기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한국의 1998년 예상 성장률을 2.5~3%로 잡은 것은 절대로 낮은 수치가 아니다.”

둘째, IMF가 지나치게 강력한 긴축재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하여 “해외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고 자본이 유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차입을 늘려 재정확대정책을 펼 수는 없다. IMF는 각국의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긴축의 강도를 조절하고 있다. 금융부문 재구축 비용과 수지회복에 필요한 정도의 재정지출 조정을 요구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셋째, 고금리정책에 대해서도 “그동안 아시아 국가는 인위적으로 금리를 낮게 유지해왔다. 저금리로 인한 지속적인 자본유출을 억제하려면 금리인상은 불가피하다. 금리인하정책을 고수한 국가에서는 개인과 기업의 보유자금이 예금으로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국으로 유입된 긴급 지원자금이 다시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넷째, IMF가 금융시장 개방을 요구한 것에 대하여 “금융시장 개방을 미루던 한국이 외국은행의 국내 시중은행 인수를 허용하고 주식시장의 종목당 투자한도를 50%까지 개방한 것은 올바른 조치다. 개방에 따라 국내 시장이 무너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단견이다”라는 주장을 편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이 금융산업 재구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프로그램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한 피셔의 주장은 “그동안 금융산업을 개방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예로 한국이 거론됐었지만 최근 사태는 금융산업 보호가 비효율과 국제기준 미달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피셔의 주장도 캉드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버그스텐과 삭스의 논쟁

다음은 좀 색다른 논쟁을 살펴보자. 관변연구소인 국제경제연구소(IIE)의 버그스텐[180] 소장은 IMF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IMF가 재원부족에 봉착하여 미국 측에 180억 달러의 기금 증액을 요청하자 여러 가지 연설이나 글, 국회증언을 통하여 IMF를 적극 지원한다. 그리고 삭스는 1998년 2월 2일부터 『슬레이트』 지면을 통해 “아시아 구제금융”이라는 제목 아래 버그스텐을 상대로 네 번에 걸친 공개논쟁을 벌인다.

먼저 2월 2일 삭스의 비판이 시작된다.[181] 그는 동아시아 처방부터 IMF의 역할, 운영방식까지 모든 것이 잘못되었으므로, IMF는 철저하게 개혁한 후 기금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기금을 즉시 증액해야 한다는 버그스텐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IMF는 추가로 180억 달러의 증자를 미국인들에게 요구했다. IMF는 손을 내밀기 전에 조금이나마 자신을 변명해야 했다. IMF는 비밀주의와 개발도상국에 대한 독점력에 너무 젖어 있어 그러한 요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미국 재무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IMF가 전략이나 실행에서 반복적으로 심각한 결함(deep weakness)을 보이고 있는데도 미국 재무부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오는 ‘미국인들’, ‘비밀주의’, ‘독점력’, ‘심각한 결함’ 등은 이후 핵심 논점이 된다.

삭스는 계속하여 IMF의 동아시아 처방을 비판한다. “IMF가 아시아 위기에 대하여 언급한 대부분의 예측과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IMF의 공식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외환-주식 시장은 여전히 하락세다. 아시아 경제는 서방 은행의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IMF 자금을 사용함으로써 미국 금융계를 기쁘게 했다. 아시아가 신뢰성과 안정을 회복하고 있다는 IMF의 용감한 주장은 공염불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삭스는 IMF 기금을 늘리기 전에 IMF를 철저하게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IMF는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비밀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모든 대출 기록을 자동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다만 극히 미묘한 시장정보의 경우에만 며칠간 유예가 가능하다. 집행위원회는 IMF의 자체 보고서에만 의존하지 말고 일상적으로 광범위한 전문가의 견해를 들어야 한다. IMF 전략도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IMF가 과거에 저질렀던 많은 실패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처방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IMF가 금융공황, 유동성, 신용확보 경쟁, 질서 있는 퇴출과 같은 문제에 대하여 둔감하다는 점이다. IMF의 구제금융 조치는 종종 시장 반응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금융공황을 부추기도 한다. 이제는 국제적 금융위기에 대하여 보다 시장 지향적인 방향으로 해결을 모색할 때다.”

이러한 삭스의 공개적인 비판에 대하여 버그스텐은 한 달이 지난 3월 4일 『슬레이트』에 반박문을 싣는다.[182] “IMF에 대한 당신의 비방은 오류와 근거 없는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서두를 꺼내면서 삭스의 주장을 반박한다.

첫째, 미국 의회에 금융지원을 요구한 것은 IMF가 아니라 재무장관, FRB 의장 그리고 경제-대외정책 관료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친 미국 대통령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버그스텐의 주장이 맞고 삭스의 주장이 틀린 것이지만 IMF와 미국 행정부 관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자는 IMF와 미국 정부를 동일체로 간주했으므로 이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둘째, ‘미국인들’이 한 푼이라도 더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IMF에 기탁하는 모든 달러에 대해서는 동일한 금액을 도이치 마르크, 엔, 기타 통화로 자동 인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는 반박이다.

셋째, 삭스가 IMF의 ‘비밀주의’를 집요하게 매도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에 대한 IMF 프로그램은 인터넷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다. 미국 정부와 IMF는 정보공개를 원한다. 하지만 일부 주요 국가는 정보공개에 대하여 ‘주권침해’를 내세워 계속해서 반대하고 있다. IMF도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이 주장에 대하여 삭스는 자신의 다음 글에서 강하게 재반박한다.

넷째, IMF는 개발도상국에 대하여 독점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가장 실소를 금치 못하는 부분이 IMF가 ‘개발도상국에 독점력’을 행사한다는 당신의 주장이다. 사실은 그 반대다. 수하르토 대통령과 인도네시아 정권은 불행하게도 지금 시위를 벌이고 있다. IMF 프로그램은 위기국가 스스로가 실행하기를 원할 경우에만 실행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IMF가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요구한 여러 가지 정책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부도를 담보로 거의 강압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또한 동아시아 국가가 AMF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IMF가 미국 재무부와 함께 이를 극렬히 저지하고 나선 이유 역시 IMF의 독점력이 상실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당신은 IMF 프로그램의 ‘심각한 결함’과 IMF의 예측 실패에 대하여 언급했다. 물론 거대한 금융자본이 흘러 다니고 신흥경제와 같은 복잡한 세계에서 누구라도 모든 일을 잘할 수는 없다. 당신이 소장으로 있는 HIID[183]에서도 몇 가지 실수를 범했을 것이며 나는 당신이 아시아 위기를 예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라고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판을 한다. 삭스 당신도 틀린 주제에 왜 참견하느냐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양자 간의 잘잘못 논쟁이 아니라 IMF가 위기를 예견하지 못했으며 처방도 잘못 내렸다는 점을 버그스텐이 시인했다는 것이다.

버그스텐은 고금리 처방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은행 체제를 복구하고자 할 때 고금리를 유지하는 것은 확실히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통화안정이 우선적으로 시급한 경우 일시적인 고금리정책은 불가피하다. 항상 해왔듯이 IMF는 상황변화에 따라 성장, 물가, 예산 목표를 신축적으로 조정한다.”[184]

마지막으로 IMF의 개혁에 대해서는 버그스텐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IMF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는 아시아 위기로부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개인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개혁과제는 조기경보제도의 개선,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민간 채권자들도 구제비용의 일부를 부담하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이다. 하지만 그러한 개혁이 제도화될 때까지 IMF 재원 확충을 유예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height of irresponsibility)’가 될 것이다.” 개혁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먼저 IMF의 재원부터 확충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삭스와 버그스텐은 모든 관점에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일주일이 지난 3월 12일 다시 삭스의 글이 『슬레이트』에 실린다.[185] 여기서 논점이 세 가지로 줄어든다.

첫째, 버그스텐이 “개혁이 제도화될 때까지 IMF 재원 확충을 유예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가 될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삭스는 “미국 행정부, 심지어는 의회 내의 IMF 동조자들도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재무부와 의회의 IMF 지지자는 IMF 개혁을 위해 집중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면서 버그스텐을 몰아붙인다.

둘째, 버그스텐이 IMF에는 비밀주의가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한 반박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에 대한 IMF 프로그램은 인터넷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은 IMF의 비밀주의를 집요하게 매도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독자를 오도하는 것이다. 물론 IMF 문서 중 극히 일부가 최근 인터넷에 개재되고 있다. 이는 대중의 질책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관계자는 IMF가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기관이라고 인정한다. 지난 1월 자카르타에 있을 때 나는 인도네시아 국민이, 심지어 최고 엘리트들까지 IMF 비밀협정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략 60건에 이르는 IMF의 최근 대출 프로그램 대부분은 극비로 취급되어 인터넷을 비롯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기밀은 시한이 없었다. 그 뒤에야 IMF는 30년이 지나면 기밀 목록에서 해제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셋째, 재원확충 시기다. 버그스텐이 IMF의 재원이 고갈되었으니 빨리 채워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데 대하여 삭스는 IMF가 재원을 제대로 쓰지 못해서 부족현상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IMF는 불과 몇 달 만에 아시아 국가에 대한 구제금융 대출을 위해 1,180억 달러를 제공했으나 지원 효과는 보잘것없었다. 12월 초 한국에 대한 570억 달러의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부터 대대적인 자본유출을 막을 수 없었다. 자본유출은 채권은행과 채무은행이 만기가 도래한 단기채무의 상환조건을 재조정하기로 동의했을 때 중단되었다. 그러한 채무재조정은 IMF의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는다.”

다음은 마지막 서신이다. 삭스의 글이 나온 지 일주일 뒤에 버그스텐은 다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186] 여기서는 목소리의 수위가 상당히 낮아지고 양자가 상당 부분에서 합의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버그스텐은 IMF가 잘못되었다는 점에 대하여 시인한다. IMF가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든지, 투명성이 부족하다든지 하는 점은 인정하지만 기금확충 시기를 앞당기는 부분에서는 초지일관이다.

“나는 시기에 관해서만 의견을 달리할 뿐이다. IMF는 181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이 일방적으로 독주할 수 없는 국제기구이다. 따라서 개혁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IMF는 말레이시아나 브라질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소요되는 재원이 부족하다. IMF는 단지 100~150억 달러의 가용자금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IMF 자체 자금만 210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개혁 차질, 한국과 태국의 경기침체 지속과 함께 위기가 다른 아시아 국가나 아시아 지역 밖으로 확산될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IMF의 텅 빈 금고를 보충하는 것은 매우 긴급한 과제이다.”

다음으로 버그스텐은 IMF의 아시아 처방이 수정된 데 대해서도 삭스와 의견을 달리한다. “아시아 종합처방에서 초기 거시경제 목표는 위기의 범위나 기간 때문에 수정된 것이지 당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잘못된 처방 때문에 수정된 것은 아니었다. ‘IMF는 많은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가까스로 잡게 되었다’는 당신의 주장은 다소 악의적이고, IMF가 ‘막대한 손해를 입은 후에야’ 순응했다는 주장은 과장된 추론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다.”

이상에서 보듯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삭스가 버그스텐을 논리에서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안에서 버그스텐은 IMF의 잘못을 수긍하면서 IMF 기금확충 시기에 대해서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펠드스타인: IMF 비판에 본격 가세

IMF 비판에서 삭스와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펠드스타인도 1998년 3월 『포린어페어즈』에 기고한 “IMF 재조명”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187] 그중에서 한국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그는 먼저 아세안과 한국을 구분한다. 아세안에서는 자국통화가 고평가되어 있었고 경상수지적자도 상당 수준에 달했지만,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의 위기는 근본적인 채무이행 불능상태라기보다는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 문제였다. 더욱이 한국의 경상수지적자는 매우 작은 규모였고 급속히 감소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정부지출 감축과 세율 인상 그리고 통화 긴축이라는 전통적인 IMF정책은 필요치 않았다.”

다시 말해 IMF는 위기의 원인을 잘못 진단했으며 처방도 잘못 내렸다는 것이다. 펠드스타인은 한국의 내부결함이 미미했기 때문에 IMF의 전통적인 처방 대신 단기부채만 재조정했으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15년 전 남미처럼 채권은행이 협조하여 채권만기를 연장하고 이자상환을 위한 추가여신을 제공함으로써 단기부채를 재조정해주는 것이었다. 단기부채를 장기채권으로 연장하는 데 필요한 가산금리는 4% 수준이었으며 이는 한국이 수출을 늘림으로써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4%의 가산금리는 한국 GDP의 1%, 수출의 4% 정도에 지나지 않으므로, IMF는 임시긴급자금을 제공하고 채권은행을 협상그룹으로 조직하여 충분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IMF는 직접적으로 구조개혁에 개입하여 괜히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 펠드스타인의 주장이다. 특히 그는 IMF가 한국에 요구한 긴축적인 재정-통화정책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한다. “한국의 저축률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고 경상수지적자가 감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세율 인상과 정부지출 감축은 왜 필요한 것인가. IMF 프로그램으로 인해, 인플레는 5%에 불과한 데 비해 대출금리는 30%에 이르고 있다. 25%라는 살인적인 실질금리는 가뜩이나 부채비율이 높은 한국 기업을 무차별적 도산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 원화를 추가적으로 하락시키면 한국 기업 중 달러 부채를 많이 안고 있는 기업의 도산 위험은 증가하겠지만, 고금리로 인해 한국의 모든 기업이 도산 위험에 처하는 경우보다는 그 손실이 작을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도 신용경색을 우려하여 은행에 대하여 BIS 비율을 강제적으로 적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힌 마당에, 한국이 BIS 기준을 도입하여 신용경색과 기업도산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만약 IMF가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렸더라면 한국에서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으로 전망한다. “외환위기가 한국을 강타했을 때 가장 필요한 조치는 해외채권자들로 하여금 투자를 계속 유지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으며, IMF는 한국의 외환부족 문제가 일시적인 것일 뿐 영구적인 채무이행 불능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채권자들에게 설득했어야 했다. 하지만 IMF는 한국경제의 구조적-제도적 문제점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정반대의 인식을 심어주고 말았다. 개혁처방이 담고 있던 그 엄청난 내용을 감안할 때, 한국이 개혁을 실제로 이루어 낼지에 대하여 채권자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IMF는 한국이 개혁 프로그램을 준수하는 경우에만 570억 달러의 자금이 제공될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국제신인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했고, 그 결과 12월 말에 이르러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거의 고갈되고 말았다. 이처럼 최초의 전략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식한 미국 정부와 IMF는 한국의 국가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100억 달러의 긴급자금지원을 조기집행하기로 하는 동시에, FRB를 비롯한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은 채권은행에 단기대출을 연장하고 장기채권으로 전환하도록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위기는 어느 정도 진정되기는 했으나, 이와 같은 협상이 좀 더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한국의 상황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처럼 펠드스타인은 삭스와 마찬가지로 위기의 진단에서부터 처방과 결과까지 모든 측면에서 IMF가 잘못 대응했다고 지적한다.

삭스: IMF와 미국 정부의 불장난

삭스도 펠드스타인과 견해를 같이 한다. 그는 한국이 위기에 빠진지 6개월이 지난 1998년 6월 24일 “심화되는 아시아 위기”를 통해 다시 IMF 비판에 나선다.[188] 그는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전반적인 경제위기로 확산된 원인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공황이 또 다른 공황을 낳았다. 은행이 아시아지역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탈출 경주가 벌어졌다. 다른 채권은행보다 먼저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은행의 살 길처럼 되어버렸다. 아시아의 중앙은행이 보유한 유동자산이 단기부채보다 적었으므로 먼저 빠져나가는 은행만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계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둘째, IMF와 미국 정부가 불장난을 했다(play with fire). 그들은 아시아의 이자율을 전격적으로 상향조정하여 고수익을 노리는 투기성 단기자본이 아시아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하지만 IMF가 내놓은 고금리정책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셋째, IMF의 고금리정책에 국제투자가들의 불안이 겹쳐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부채로 인한 디플레이션 사이클’이 형성되었다. 부실채권은 아시아 은행의 재무구조를 악화시켰고 은행은 파산이나 폐쇄를 면하기 위해 기업에 대출상환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대출이 어려워지면서 파산기업이 늘어나고 은행의 재무구조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은행은 또 다시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넷째, IMF와 미국 정부는 1997년 말 급격한 통화가치 하락이 있은 후 아시아 국가에 환율 방어에 나서라고 경고했다. 환율시장이 안정되어야 투자가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정책입안자들은 환율위기 이후 닥쳐올 아시아의 수출 공세를 두려워했었다. 그 결과 중국은 1년간 위안화를 평가절하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에 이르렀으며 일본과 미국은 함께 엔화 지지에 나섰다. 이러한 조치는 신용경색을 더욱 가중시켰다.

다섯째, 아시아 외환위기는 역내에서 이중으로 악영향을 미쳤다. 동남아 지역의 신용압박과 그로 인한 경제활동 둔화로 일본의 역내 수출이 감소하여 부실은행 문제를 안고 있던 일본은 더욱 경기침체에 빠져들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의 수출품에 대한 일본의 수요도 격감하는 등 일본의 경기침체는 아시아 전체의 위기심화로 이어졌다.

이상에서 보듯 단순한 유동성 부족 문제로 시작된 외환위기가 사회 전체의 경제위기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IMF와 미국이 저지른 실책이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삭스가 지적한 다섯 가지 요인 중에서 세 가지(둘째, 셋째, 넷째)가 IMF와 미국의 ‘불장난’으로 인한 것이다.

논쟁의 재연: 펠드스타인과 피셔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은 지 거의 1년이 지난 1998년 10월 펠드스타인과 피셔 사이에 다시 논쟁이 일어난다. 피셔는 10월 3일 『이코노미스트』에 “세계금융의 개혁: 위기의 교훈”이라는 글을 싣는다. 한편, 펠드스타인은 10월 7일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에 “IMF 개혁: 위기관리에 초점을 두어”를 싣는다. 두 편의 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시아 위기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위기가 확산되는 현상을 피셔는 세계금융시장 탓으로 돌리지만 펠드스타인은 잘못의 근원이 IMF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피셔는, IMF가 주도한 고금리정책이 위기국가에 불황을 가져왔고 무리한 구조조정은 경기를 침체시켰으며 유동성 위기를 치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세간의 비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어논리를 편다.[189] “고금리를 비판하는 사람은 만약 저금리를 유지했을 경우 높은 환율로 인하여 위기국가의 대외채무 부담이 가중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 고금리정책으로 안정된 환율을 회복했다. 구조조정이 꼭 필요했느냐는 비판에도 무리가 있다. 아시아 위기의 진원지는 비효율적인 정부와 기업이므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보장하기 위하여 구조조정은 필수적이었다. 일부에서는 위기국가에 부담을 적게 줄 수 있도록 구조조정의 속도와 폭을 점진적으로 조정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를 보면 점진적 구조조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의지이다. IMF 처방의 실패는 처방 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처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위기국가의 태도 때문이며, 외부환경이 나빴던 것도 원인이다. 일례로 멕시코 위기 당시 멕시코 경제는 수출증대로 활력을 찾았으나,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경기침체로 수출이 줄어들었다. IMF에 대한 비판과 개혁론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처럼 피셔는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한다.

피셔의 주장에 대하여 펠드스타인은 IMF가 아시아 위기를 관리하면서 저지른 실수를 세 가지로 압축한다.[190]

첫째, 국제투자가들의 신뢰를 저해시켰다.

둘째, 채무국에 급진적이며 불필요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셋째, 지나친 통화긴축정책을 강요했다.

덧붙여 펠드스타인은 IMF가 저지른 근본적인 실수에 대하여 질타한다. “아시아 위기는 당사국의 잘못이 일차적인 책임이지만, 더 적은 고통으로 해결될 수도 있었다. 아시아 국가는 기본적으로 펀더멘털이 건전하기 때문에 대외채무를 갚을 능력이 있었다. 이들의 문제는 단기 유동성 부족이었지 지불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IMF는 아시아에 유동성을 제공하고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했어야 하지만, 아시아가 무능하고 부패한 경제구조를 가졌다고 규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캉드쉬는 아시아 국가가 IMF에 의한 개혁을 계기로 경제구조의 근간을 바꿀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야말로 IMF가 얼마나 거만하고 부적절하게 일을 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IMF는 한 나라의 주권을 빼앗을 권리가 없으며, 환란 와중에 경제구조를 바꾸는 조치는 구조조정이나 환란 해소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IMF가 주어진 권한을 넘어 월권행위를 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IMF: 잘못을 자인

드디어 1999년 1월에 IMF 스태프로부터 잘못을 시인하는 보고서가 나온다. 래인 등이 쓴 “인도네시아, 한국, 태국에서의 IMF 지원 프로그램: 예비평가”라는 보고서에서 IMF의 여러 가지 실책을 인정한다.[191]

위기국가에 적용된 IMF 프로그램에서는 경기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 IMF의 전망이 어느 정도 낙관적이었으며, 정책 당국의 통상적인 전망에 동의하도록 압력 받은 점도 있고, 비관적인 전망을 할 경우 신인도에 충격이 갈 것을 회피하기 위한 고려 때문이었기도 했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또한 “주목할 것은, 경기불황의 심각성을 정책 당국은 물론 민간분야나 학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삭스나 펠드스타인 같은 여러 석학이 이러한 문제를 수없이 경고했다.

보고서에서는 신인도 회복에 실패했다는 점도 시인한다. “지나서 보니 확실한 것은, 프로그램은 적절한 재원조달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아 신인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두 가지 명확한 가설적인 대안이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더 많은 재원조달과 민간분야의 참여였다.”

환율 문제도 언급한다. “명확한 정책방향이 없는 상태에서 변동환율제를 채택함으로써 통화가 끝없이 평가절하되었다. 통화정책에서는 환율이 핵심적인 정책목표가 되고 금리가 실행목표로 되어야 하는데도 IMF 프로그램에는 환율에 대한 정책목표도 없었고 단순히 정책성과를 측정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통화정책도 잘못되었다고 반성한다. “프로그램에서 통화정책의 기본적인 목표는 인플레와 불황의 악순환 고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같이 인플레가 없었던 나라까지도 악순환 고리에 빠졌다. 과도한 통화긴축이 경제행위를 심각하게 위축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IMF 스태프들이 실책을 인정한 사실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크루그먼: 제3세대 모형에 의한 IMF 한국 처방 평가

IMF 한국 처방에서 크루그먼은 대미(大尾)를 장식한다.[192] 그는 기존에 나와 있던 제1세대 위기 모형과 제2세대 위기 모형으로는 동아시아의 위기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칭 ‘제3세대 위기 모형’이라고 이름 붙인 모형을 제안한다. 이제껏 살펴본 논쟁에서는 IMF를 비판하는 측이나 반론을 제기하는 측 모두 다분히 정성적(定性的)인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크루그먼의 평가는 정량적(定量的)인 모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참신성을 더한다.

제1세대 위기 모형에서는 재정적자와 같은 거시경제상 문제가 있는데 고정환율을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난다. 제2세대 위기 모형에서는 높은 실업률 같은 사회문제와 통화당국의 환율고수라는 정책이 상충하면서 위기가 일어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위기 직전에 이와 같은 재정적자나 고실업 문제가 없었으므로 크루그먼은 새로운 위기 모형을 고안한 것이다.

새로운 제3세대 위기 모형에서는 ‘헤징되지 않은 대규모의 외화표시 부채’가 위기의 핵심 원인이다. 먼저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태에서 여러 국내 기업이 해외로부터 대규모의 자본을 차입하여 국내에 투자하는데 부채의 대부분이 헤징되지 않은 외화표시 부채 상태라고 가정한다. 그런데 어떠한 요인(예컨대 태국의 위기가 한국에 전염되는 것과 같은 요인)으로 인해 자국통화가 급격히 평가절하되면, 기업의 대차대조표가 악화되면서 투자재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해 자국통화의 가치가 더욱 하락하고 중앙은행은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풀게 되는데 언젠가는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고 결국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제3세대 위기 모형이 한국에서 작동한 것으로 크루그먼은 해석한다.

이 모형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도 헤징되지 않은 외화표시 부채가 과다한 경우에는 투자자들의 의심만으로도 자기실현적인 공황 상태가 일어나는데 이를 ‘다중균형(multiple equilibria)’ 상태라고 한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의 [그림 1]과 같다.

[그림 1] 크루그먼의 제3세대 외환위기 모형[193]

기존의 위기 모형에서는 정상적인 상황만 균형상태로 보고 위기상황을 불균형 상태로 보았지만 제3세대 위기 모형에서는 정상적인 상태(정상균형상태, 그림에서 B)나 외환위기 상태(위기균형상태, 그림에서 B’) 모두를 경제적으로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로 본다.

크루그먼은 이와 같은 제3세대 위기 모형에 IMF 처방을 포함한 다섯 가지의 위기극복 대안을 대입하여 그 실효성을 검증한다.

첫째, 한국의 경우처럼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는 것이다. IMF는 위기국가에 신용을 제공하고 위기국가가 IMF 지원자금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환율을 떨어뜨리면 그 나라의 경제는 위기균형점(B’)에서 정상균형점(B)으로 이동하는 효과가 난다. 처방의 실효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대출액을 차환하거나 만기 연장하는 경우에도 IMF의 자금지원과 같은 효과가 나온다. 이는 투자가들로 하여금 자국통화를 달러로 교환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IMF 자금지원과 같은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펠드스타인이나 삭스가 주장한 방법으로 IMF가 직접 나서서 자금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채권국을 설득하여 차환이나 만기연장을 했었다면 위기가 극복되는 동시에 IMF의 재원이 고갈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정부가 재정확대정책 또는 재정긴축정책을 펼 수 있다. 실제로 IMF는 동아시아에 재정긴축정책을 폈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위기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그림 2]에서 보면 재정긴축정책으로 인하여 <곡선 GG>가 왼쪽으로 이동하여 <곡선 G’G’>가 되면 정상균형점 자체가 생기지 않을 수 있으며, 이는 불황으로 위기가 더욱 증폭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이러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와 반대로 재정확대정책을 펴서 <곡선 GG>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곡선 G”G”>가 되면 위기균형점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그림 2] 재정 긴축 및 확대 시의 제3세대 위기모형

만일 확장에 필요한 재정이 충분하다면 이러한 대응책은 극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당시 재정적자가 없는 상태였고 IMF 위기 극복과정에서 100조 원 이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사실로 볼 때 마음먹기에 따라 과감한 재정투입을 할 여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재정긴축정책 대신에 재정확대정책을 폈으면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넷째, IMF가 가장 즐겨 쓰는 대응책으로 일시적으로 금리를 인상시켜 환율을 회복하는 방법이다. 금리가 충분히 인상되면 [그림 3]처럼 <수직선 AA>가 <수직선 A’A’>로 이동하면서 위기균형점이 없어질 수 있다.

[그림 3] 금리인상 시의 제3세대 위기 모형

하지만 고금리로 인해 투자자체가 붕괴됨으로써 또 다른 유형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고금리정책을 통하여 환율은 회복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면서 경제 전체가 극도의 불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다섯째, 구조개혁을 한다. 위기국가는 IMF의 강요로 여러 가지 구조개혁을 했지만 이러한 대책은 제3세대 위기 모형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위기국가의 경제시스템은 건전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구조개혁이 위기탈출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대외신인도를 높이는 효과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IMF가 동아시아에 대하여 경제개혁의 범위를 무리하게 확대함으로써 신인도 회복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 측면이 더 크다는 것이 여러 석학의 주장이다. 또한 위기국가가 안고 있는 문제가 매우 깊고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모든 것이 통제 밖에 있다는 느낌을 부각시킴으로써 위기국가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루그먼은 제기한다. 한국의 경우에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되었다.

이상 다섯 가지 대안을 놓고 볼 때 한국의 위기극복 과정에서 IMF는 두 번째 방법(대출금 차환 또는 만기연장)을 제외한 네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194] 그중 첫 번째 직접적인 구제금융 지원은 당연히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방법(재정긴축정책, 금리 인상, 구조개혁)은 큰 부작용을 남겼다. 크루그먼이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잣대에 비추어 평가하면 IMF의 한국 처방은 분명히 실패한 정책이다.

만일 IMF가 삭스나 펠드스타인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크루그먼의 잣대에 넣어보면 두 번째처럼 대출액의 차환 또는 만기연장을 유도하는 동시에 세 번째의 재정확장정책을 펼치되, 네 번째의 고금리 정책 대신 저금리정책을 쓰고 다섯 번째의 구조조정은 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결과는 지금과 완전히 다르게 위기도 극복되었을 것이고 부작용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만일 그랬다면”이라는 가정은 통하지 않겠지만, 이러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상의 시뮬레이션도 필요하다.

여기까지 제5단계를 요약하면 IMF는 한국을 외환위기로부터 탈출시킨다는 명분 아래 고금리정책, 긴축재정정책, 낮은 경제성장률과 같은 축소지향적 경제정책을 펼쳤다. 많은 경제전문가의 비판이 따랐지만 IMF는 이를 무시했으며 결국 한국의 외환위기는 금융위기와 실물위기로 확산되어 한국경제는 총제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의 기업과 금융기관, 부동산의 가치가 급락하자 초국적 자본은 한국의 많은 기업과 우량자산을 헐값세일 가격에 매입했으며, 아직도 한국경제는 그 후유증과 부작용을 극복하지 못하고 혼란에 휩싸여 있다.


결론. ‘IMF 신드롬’ 탄생

여기까지 채권자의 입장에서 쓰인 경제위기의 역사를 채무자의 입장에서 재정리했다.

IMF는 한국의 위기를 사전에 예견하지 못했고 경고한 흔적도 없다. 위기가 발생하자 IMF는 한국경제 내부의 결함 때문에 위기가 일어났다고 규정한 후 이를 근거로 한국 정부로부터 통상적인 쌍무적인 관계에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수많은 양보를 받아낸다. 동시에 구조조정을 선두지휘하면서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영미식으로 전환시킨다.

남미의 위기에서 성공했던 정책을, 상황이 완전히 다른 한국에 적용하자 그 부작용으로 한국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한국의 여러 기업, 금융기관, 부동산의 자산가치가 폭락하면서 초국적 자본에 헐값세일로 매각되었다.

한국으로서는 세계 경제질서의 냉엄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찍이 경험치 못했던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잘못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

돌발적인 발언을 해서 곧잘 IMF나 미국을 당황케 하는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부총재는 1998년 3월 12일 아시아개발포럼에서 의미 있는 기조연설을 한다.[195]

“특이한 점은 예전에 아시아의 성공요인으로 꼽혔던 요인이 이제는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정부와 산업계가 직접 정보를 교류하던 효율적인 방식을 성공요인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정치적 정실주의’나 ‘투명성의 부족’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요한 실패원인으로 간주한다. 아시아 국가의 해외시장 개방정책 역시 핵심적인 성공요인으로 강조되었지만, 지금은 말을 바꾸어 시장개방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서 경제개혁과제 중 하나로 상품시장이나 자본시장의 장벽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러한 와중에 ‘IMF 신드롬’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IMF의 주장만 진실인 양 되뇌는 일부 논객이 IMF 신드롬의 주역이다. 물론 우리가 잘못하여 큰 변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빌미 삼아 과거의 모든 장점까지 내버리고, 우리가 근본적으로 따라갈 수 없는, 세계최대의 경제국가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시스템을 그대로 복제한다면 우리도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IMF의 논지에 무분별하게 동조하는 행동이 한국 외환위기가 경제위기 상황으로까지 증폭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는데도, 오히려 온갖 논리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오직 월스트리트 방식만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IMF의 주장을 반복한다.

“자본시장을 더욱 개방하라, 외자만 유입된다면 헤지펀드라도 좋다, 무역장벽을 더욱 낮추어라, 기업은 부채비율을 낮추어라,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라, 대기업 집단을 해체하라, 벤처만이 살 길이므로 대기업은 더욱 규제하라, 우량기업과 부동산을 해외자본에 매각해도 결국 한국 땅에 있으면 한국 것이다.” 자신들의 주장이 월스트리트 자본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아니면 알고서도 또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사실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글을 마치며

필자는 상당히 화가 난 상태에서 이 글을 썼다. 승자(勝者)의 일원(一員)인 IMF가 외환위기의 원인을 일방적으로 패자(敗者)인 한국 탓으로만 돌린다는 사실에 분격하여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했다. 어쩌면 승자의 논리에 부화뇌동하여 ‘IMF 신드롬’을 일으킨 논객들에게 더 화가 많이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써내려온 패자의 변(辨) 역시 모두 진실은 아니다. 한국의 외환위기를 단순히 ‘남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우리 스스로도 부끄러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복합적

한국의 외환위기는 왜 일어났는가? 국내외 여러 경제학자와 전문가의 주장을 종합하면 한국의 경제위기는 다음의  [표 2]와 같이 여섯 가지 원인이 복합되어 일어났다.

먼저 1997년 이전부터 한국 내부에는 구조적인 결함이 누적되고 있었고(內部構造缺陷論), 동시에 해외에서는 국제투기자본의 준동이나 미국의 패권주의 전략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外部條件介入論).

OECD 가입으로 자본시장이 개방되어 단기외채가 급증하고 있었지만 정책 당국은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危機對處未熟論).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그 영향이 한국에까지 전염되면서 1997년 말 외환 유동성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金融恐慌論). 이에 IMF와 월스트리트는 한국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긴축재정과 구조개혁을 무리하게 요구했고(IMF 過剩對應論), 비현실적인 정책이 실행되면서 외환위기가 금융-실물 경제 위기로 확산되었다(實物危機 波及論).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표 2] 한국 외환위기의 6가지 원인

내부구조결함론(內部構造缺陷論)

1997년 이전부터 한국경제 내부에 구조적인 결함이 누적되어 있던 상태에서 외부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외환위기가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크루그먼[196]은 한국이 차관 등 외자를 대규모로 끌어들이고 높은 저축률을 투자에 활용하는 동시에 농촌인력을 대거 산업현장에 동원함으로써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기술발전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부분이 극히 적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국에 외자유입이 줄어들고 인구증가율이 둔해지면 필연적으로 경제성장률이 하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동아시아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자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크루그먼은 많은 각광을 받았다.

실제로 한국경제는 1990년대 들어 경상수지적자가 누증되었다. 1990~1996년에 누적적자 규모가 487억 달러에 달했고, 특히 1996년에는 적자규모가 경상 GDP의 4.7% 수준으로 급증했다. 이는 ‘고비용-저효율’ 구조에 따른 대외경쟁력의 약화, 지속적인 고성장으로 인한 수입 급증, 주요 수출품목의 국제가격 급락 등이 주요 원인이다. 고임금, 고지가라는 ‘고비용 경제구조’가 심화된 가운데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같은 주요 수출품의 국제가격이 글로벌 차원의 공급과잉으로 급락한 것이다. 이러한 경상수지적자의 증가는 당연히 외환보유고 축소로 연결되었다.

외부조건개입론(外部條件介入論)

한국경제가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외환위기를 당할 만큼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 온 충격이 워낙 강력하여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인 외부충격이 앞서 언급된 ‘음모론’이다.

헤지펀드와 같은 국제투기자본의 준동도 핵심 원인이다. 헤지펀드는 1990년대 이후에 전 세계적인 금융개방, 금융자유화 추세를 적절히 활용하여 국가를 상대로 투기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을 촉발했다. 원래 헤지펀드는 미국 내부에서 활동하던 사모펀드였지만, 1980년대 말에 미국 내의 금융자유화를 틈타 큰돈을 벌어들인 대형 헤지펀드가 등장했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 불어닥친 글로벌 차원의 금융개방, 규제완화를 기회로 인식하고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공격 대상은 내부의 구조적 결함을 시장이나 정부가 제대로 해결하고 있지 못한 국가로 삼았다. 1992년 헤지펀드의 대표 격인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가 영국의 파운드화를 공격하여 10억 달러를 벌어들인 후 헤지펀드의 국제적인 투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197]

중국의 무리한 위안화 평가절하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위기가 일어나기 수년 전 중국이 세계 금융시장의 메커니즘도 모르는 채 주변국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위안화를 30% 평가절하함으로써 경쟁상대국인 한국과 동남아국가의 무역수지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금융공황론(金融恐慌論)

금융공황론은 소위 ‘소떼이론(herd theory)‘이 현실화되었다는 주장이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사자가 소를 공격할 때 위험을 가장 먼저 감지한 소가 도망가면 다른 소들도 덩달아 도망간다는 이론이다. 영화관에서 장난으로 “불이야” 하고 고함치면 서로 먼저 도망가려다 출입구에서 가로막혀 대형사고가 나는 현상과 유사하다. 당시 한국에서는 헤지펀드가 ‘처음 도망간 소’에 해당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동남아의 위기가 한국으로 전염되었다는 소위 ‘전염이론(contagion theory)’이 현실화된 것이다. 한국의 경제사정이 동남아만큼 취약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감기가 전염되듯’ 동남아의 위기가 한국으로 전염되었다는 주장이다.

1997년 들어 만성적인 경상수지적자와 환율 고평가에 시달리던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의 외환시장에서 헤지펀드가 투기를 시작했다. 헤지펀드가 고평가된 통화에 대하여 대규모 매도 포지션을 취하자 이들의 통화가치는 폭락한다. 말레이시아는 자본통제를 실시하여 헤지펀드의 공격을 막았지만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수비에 실패하여 헤지펀드가 큰 수익을 올렸으며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다.

여세를 몰아 1997년 10월 헤지펀드가 홍콩달러를 공격하자 홍콩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금융시장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홍콩달러가 평가절하 압력을 받자 홍콩 내부에서는 미국 달러화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다. 그 결과 홍콩의 금융기관이 달러화 확보에 나서 한국에 대한 단기여신을 대규모로 회수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놀란 일본 은행들도 덩달아 본격적으로 여신을 회수했다. 불행하게도 홍콩의 외환위기가 한국 외환위기에 결정적인 뇌관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 금융기관의 단기차입금 차환비율이 10월의 80% 내외에서 12월에는 30%대로 급속히 낮아진다. 달러 부족사태를 맞은 한국의 금융회사가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를 매집하여 환율이 폭등하고 외환시장에서 달러화가 고갈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국제부도의 위기에 몰린 금융기관은 한국은행에 긴급외화자금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한다. 한국은행은 외환보유고의 일부를 동원하여 국내 금융기관을 지원해주면 해외채권자들의 자금회수 러시가 진정될 것으로 오판한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유동성 지원에 나서자 오히려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호기로 보고, 구미의 금융기관까지 가세함으로써 결국 외환위기까지 연결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월스트리트 투자기관이 동남아국가와 한국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계좌로 취급하던 상황에서 동남아에 위기가 발발하여 동남아로부터 자본탈출 러시가 일어나자, 동남아국가와는 별 상관이 없던 한국에서 국제투자기관이 ‘소떼’처럼 앞다투어 탈출을 시도함으로써 대규모의 외환유출 사태가 일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한국에까지 전염된 것이다.

위기대응미숙론(危機對處未熟論)

정부를 비롯하여 한국의 여러 경제주체가 외부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경제정책을 책임졌던 강경식 부총리나 김인호 경제수석을 형사고발한 조처도 같은 맥락이다.

1996년 말 정부가 OECD에 가입하기 위해 전제조건인 외환자유화를 시도하면서 국내 금융기관의 단기자금 차입을 자유화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전체 해외차입금은 1992년 629억 달러에서 1997년 11월에 1,618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특히 국내 금융기관이 금리가 훨씬 싼 일본이나 홍콩으로부터 단기차입금을 경쟁적으로 빌려오면서 한국의 단기외채가 889억 달러로 총외채의 55%에 달했다. 국제금융 경험이 거의 없던 단자회사가 종금사로 전환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국제금융 업무까지 인가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종금사들은 홍콩에서 대규모 신용을 단기저리로 차입한 후 국내에서 기아자동차와 같은 기업에 장기고리로 대출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저하되고 고비용-저효율로 경영환경이 악화된 데다 위안화의 평가절하로 가격경쟁력까지 하락하자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 사태가 일어났다. 관리종목으로 편입된 상장회사의 수가 1996년 8개 사에서 1997년 71개 사로 급증했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비중[198]이 1996년 말 4.1%에서 1997년 말 6.0%로 급등했으며 1997년 7월 이후 기아자동차 문제 처리가 장기화되면서 한국의 대외신인도도 하락했다.

한편 한국 정부가 외교관계에서 난맥상을 보여 문제가 더욱 불거졌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통상무역 때문에 마찰이 많았고, 일본과는 독도 문제로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등 외교상 한계를 넘어서는 발언이 나오는 등 대미관계와 대일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한국이 외환보유고 부족상태에서 미국과 일본에 손을 내밀었지만 냉담한 답변을 얻은 것은 그 영향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외환위기 전후 정부 당국의 위기관리 능력 미숙도 크게 작용했다. 대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금융기관이 부실화되어 대외신인도가 급락하는 상황인데도 정부는 펀더멘털이 건전하다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소홀했다. 또한 외환보유고를 민간은행의 부실을 메우는 데 소진함으로써 외환보유고 부족 사태를 자초했다. 채무 주체가 민간은행인 만큼 한국은행이 외환보유고를 사용하는 대신 민간은행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여 해외채권단과 개별협상을 했었더라면 IMF 구제금융 신청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 나왔다.

앞서 언급했듯이 IMF와 협상과정에서도 한국 정부는 미숙한 면을 드러냈다. IMF가 주장하는 내부결함론에 대하여 제대로 반론을 제기하지도 못하고 IMF의 요구를 거의 원안대로 수용하였으며, 무역시장 개방과 같이 외환위기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미국과 일본의 요구까지 들어주었다.

IMF 과잉대응론(過剩對應論)과 실물위기파급론(實物危機波及論)

1997년 12월 이후 IMF는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섣부른(mis-focused) 긴축 위주의 거시경제정책과 구조개혁을 요구함으로써 위기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주장이다. IMF는 남미형 외환위기에 적합한 고금리나 재정긴축 같은 정책을 한국에 적용하여 상황을 악화시켰다.

남미는 외채의 주체가 정부이며 만성적으로 낮은 저축률 때문에 외환위기가 일어났으므로 고금리나 재정긴축 같은 처방이 주효했다. 하지만 한국은 외채의 주체가 금융기관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축률을 기록하던 상황이었으므로 고금리 처방은 오히려 해외채권단의 자금회수를 자극하여 외환위기를 악화시켰다. 고금리 처방을 하면 기존의 외자가 해외로 유출되지 않고 단기에 새로운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유인효과가 일어나지 않았다. 해외채권단은 거꾸로 고금리정책이 부채비율이 높은 국내 기업을 연쇄 도산시켜 금융기관이 부실해지고, 이 때문에 국내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채권회수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BIS 비율을 즉각 적용하도록 요구한 IMF의 시스템개혁 처방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국내 은행이 BIS 비율을 맞추기 위하여 신규여신을 억제하고 기존여신을 대거 회수하자 고금리와 더불어 국내 기업의 연쇄도산이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외환위기가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의 위기로 확산되면서 과잉살육(overkill) 현상이 일어났으며 고금리, 연쇄도산, 대량실업이 수요를 급랭시켜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고 자산가격까지 폭락하여 경기침체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상 여섯 가지가 한국에서 경제위기가 일어나게 된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복잡계 현상이 가세

여기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여섯 가지 개별 요인이 별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 파괴력이 증폭되었다는 점이다. 소위 복잡계 이론에서 말하는 ‘적극적 되먹임(positive feedback loop)’이라는 현상이 일어났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목격하는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에서는 대개 소극적인 되먹임(negative feedback loop)이 일어난다. 가령 어떤 대기업이 부도를 내면 증시는 크게 출렁거리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충격은 흡수되고 시장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온다. 새로운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어 수요가 폭증하면 처음에는 높은 가격이 형성되지만 연이어 경쟁기업이 유사품을 내놓게 되고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처음에는 큰 파동이 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은 다시 잠잠해진다. 소극적인 되먹임이 작동하여 원래의 균형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적극적인 되먹임이 작동하여 기존의 균형상태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균형상태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한국의 외환위기도 여기에 해당한다. 적극적인 되먹임이 일어날 때는 대개 바닥(場, field)이 흔들린다. 예컨대 바닥에 종이를 깔고 위에 담뱃갑을 세로로 세울 경우 담뱃갑을 쓰러뜨리려면 약간의 힘이 필요하고 바닥의 종이에 아주 조금의 힘만 주면 담뱃갑은 쉽게 넘어간다. 만약 여러 개의 담뱃갑을 촘촘히 세워놓았다면 바닥에 아주 작은 힘을 가해서 담뱃갑 하나만 쓰러뜨려도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다른 담뱃갑은 그냥 넘어진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외환위기에서도 바닥이 흔들리면서 각각의 위기 요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작은 충격이 더욱 큰 충격으로 증폭되는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마치 수확체감의 법칙 대신에 수확체증의 법칙이 작동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시 바닥은 왜 흔들렸나?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는 이미 임기 말의 레임덕 현상을 겪고 있었고, 노동개혁에서부터 금융개혁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진척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정책운영은 난맥상을 보였다. 게다가 대통령 아들이 비리사건에 연루되면서 급기야 국정운영은 마비상태에 빠졌고 기아자동차 문제까지 겹쳐 바닥은 더욱 흔들렸다. 이전부터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악화일로에 있던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온 작은 충격이 적극적인 되먹임 현상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충격으로 증폭되어 급기야는 외환위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외환위기는 위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 원인에 바닥이 흔들리고 적극적인 되먹임이 일어나는 복잡계 현상이 가미되면서 만들어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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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스트리트저널』 (1998. 9. 24)은 IMF와 미국 재무부의 루빈 장관이 동아시아의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그 부작용은 비극적인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암은 정복되지 않았으며 환자들은 의사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 이 글에서는 ‘외환위기’와 ‘경제위기’라는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1997년 11월 21일 외화보유고 부족으로 한국 정부가 IMF 측에 긴급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 일련의 상황을 ‘외환위기’라 하고, 그 이후 미숙한 대응으로 야기된 금융위기와 실물위기까지를 포함하여 ‘경제위기’라 한다.

[3] 그 이유는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한마디로 미국이 IMF의 최대 주주였고 IMF의 캉드쉬 총재가 세 번이나 연임하는 데는 미국의 결정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4] Krugman, Paul (1994). “The Myth of Asia’s Miracle”. Foreign Affairs, November/December.

[5] 물론 이는 외환위기 발생 후에 IMF가 주장한 내용이다.

[6] Martin Wolf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의 부편집장이며 경제논설실장이다. 세계은행 수석연구원과 런던의 무역정책연구소를 거친 후 1987년부터 『파이낸셜타임즈』에서 활약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와 월스트리트 자본의 주도로 진행되는 ‘금융시장의 세계화’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하면서 전 세계 지식인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칼럼니스트이다.

[7] Joseph E. Stiglitz는 1997년 2월에서 2000년 2월까지 세계은행의 수석부총재를 지냈다. 앰허스트대학을 나와 MIT에서 폴 사무엘슨과 로버트 솔로우 밑에서 경제학을 배웠으며, 1969년에 26세의 나이로 예일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다.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했고, 1993년부터 클린턴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윈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5년부터 세계은행에서 근무했다. 세계은행 수석부총재로 한국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주관했다.

[8] Stiglitz, Joseph E. (1998. 3. 12). “Sound Financ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in Asia”. Keynote Address to the Asia Development Forum.

[9] Sachs, Jeffrey D. (1997. 12. 19). “It’s Malaysia vs. Markets”. The Chattanooga Times.

[10] Stiglitz, Joseph E. (1998. 3. 27). “The View from the Bank”. Interview at the Final Plenary Session of the Asian Development Forum, Held in Manila on March 9~13, 1998, under the Auspices of The World Bank and The Asian Development Bank. Asiaweek.

[11] 세계경제평론가인 William Pfaff는 『시카고트리뷴』을 통해, 아시아의 내부 붕괴는 아시아 성장모델이 영미식 자본주의체제와 충돌한 결과이며 IMF 처방을 영미식 자본주의체제의 이식으로 규정한다. “IMF 처방은 IMF가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부와 긴밀한 협조 아래 개발되었고 미국 주류의 경제관점이 반영되었다. 미국은 아시아 모델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IMF 처방은 적용 초기에 아시아의 시장과 은행, 통화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더욱이 디플레이션으로 이미 고통 받고 있는 경제에 한층 더 디플레이션을 강요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Pfaff, William (1998. 1. 13). “American-Inspired Remedies to Asia’s Problems No Longer Credible”. Chicago Tribune.

[12] Stiglitz, Joseph E. (1997. 12. 1). Statement to the Meeting of Finance Ministers of ASEAN Plus 6 with the IMF and the World Bank.

[13] Feldstein, Martin (1998). “Refocusing the IMF”. Foreign Affairs. March/April.

[14] 이 글에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은 문맥에 따라 ‘동남아’ 국가 또는 ‘아세안’ 국가로 표현할 것이다.

[15] Stanley Fischer는 IMF 수석부총재이다. 런던정치경제대학을 마친 뒤 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경제학자다. 돈부시와 함께 거시경제론 교과서를 집필했으며, 1994년부터 IMF 수석부총재로 취임하여 IMF와 미국의 가교 역을 맡는 동시에 이론 분야에서 IMF의 논리를 세계에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 Camdessus, Michel (1998. 2. 9). “Defending the Fund”. Interview with Financial Times.

[17] Agence France Presse (1998. 7. 2).

[18] Xinhua News Agency (1996. 11. 8).

[19] New York Times (1997. 8. 1).

[20] IMF (1997). World Economic Outlook May 1997.

[21] IMF (1997). Annual Report of the Executive Board for the Financial Year Ended April 30.

[22] 『한국일보』 (1997. 4. 25).

[23] 『중앙일보』 (1997. 9. 18). 김수길 워싱턴 특파원과 가진 인터뷰.

[24]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문예당.

[25] 『조선일보』 (1997. 9. 22).

[26] IMF (1997). The 1997 Annual Report.

[27]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문예당.

[28] YTN (1998. 4. 17).

[29] Huhne, Christopher (1998. 1. 13). “After Asia: Some Lessons of the Crisis”. Fitch IBCA Sovereign Comment.

[30] “IMF는 주로 공공채무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였고 민간부채가 외환위기의 원인이 될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 이후에 더 극적인 정책변화를 필요로 했다.”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31] New York Times (1997. 12. 8). John G. Heimann은 메릴린치 세계금융연구원(Global Financial Institutions Group) 원장을 역임했으며 금융관련 기업이나 기관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32] Camdessus, Michel (1998. 4. 2). “Is the Asian Crisis Over?,” at the National Press Club, Washington DC.

[33] Fischer, Stanley (1998. 3. 20).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at the Forum Funds Lecture at UCLA.

[34] Lee, Kyung-Shik and Chang-Yuel Lim (1997. 12. 3). “Letter of Intent of the Government of Korea”; Lee, Kyung-Shik and Chang-Yuel Lim (1997. 12. 3). “Korea’s Memorandum on the Economic Program”.

[35] IMF (1997). World Economic Outlook October 1997.

[36] 『동아일보』 (1997. 12. 5).

[37] Fischer, Stanley (1998. 1. 22). “The Asian Crisis: a View from the IMF”. at the Midwinter Conference of Bankers’ Association for Foreign Trade, Washington DC.

[38] Camdessus, Michel (1998. 2. 9). “Defending the Fund,” Interview with Financial Times.

[39] Fischer, Stanley (1998. 3. 20).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at the Forum Funds Lecture at UCLA.

[40] IMF (1998). World Economic Outlook May 1998: Financial Crisis, Causes and Indicators.

[41] Camdessus, Michel (1998. 5. 8). “Toward a New Financial Architecture for a Globalized World”. at 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London.

[42] Camdessus, Michel (1998. 2. 13). “The Role of the IMF: Past, Present, and Future”. at the Annual Meeting of the Bretton Woods Committee, Washington DC.

[43] Fischer, Stanley (1998). “In Defense of the IMF: Specialized Tools for a Specialized Task”. Foreign Affairs, July/August.

[44] 그 외에도 한국과 간접적인 연관을 갖는 논점이 여럿 있다. IMF 자체의 도덕적 해이에 관련된 논쟁, 자본자유화 논쟁 등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논점만 다룬다.

[45] Davis, Bob and David Wessel (1998. 9. 24). “Markets under Siege – Limits of Power: How Global Crisis Grew Despite Efforts of a Crack U.S. Team”. Wall Street Journal; Davis, Bob and David Wessel (1998. 9. 25). “Markets under Siege – Crisis Crusaders: Would-Be Keyneses Vie over How to Fight Globe’s Financial Woes”. Wall Street Journal.

[46] Bello, Walden, Nicola Bullard, and Kamal Malhotra (1998). “Taming the Tigers: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Third World Quarterly, 19(3).

[47] Articles of Agreement of IMF, Article 1: Purposes. <www.imf.org>.

[48] 정확한 명칭은 〈Letter of Intent of the Government of Korea〉와 〈Korea’s Memorandum on the Economic Program〉이지만 여기서는 〈의향서〉와 〈양해각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Lee, Kyung-Shik and Chang-Yuel Lim (1997. 12. 3). “Letter of Intent of the Government of Korea”; Lee, Kyung-Shik and Chang-Yuel Lim (1997. 12. 3). “Korea’s Memorandum on the Economic Program”.

[49] 『문화일보』 (1997. 12. 1).

[50] 스페인의 작가 겸 시인.

[51] 『서울경제신문』 (1997. 12. 2).

[52] 『한겨레신문』 (1997. 12. 2).

[53] YTN (1997. 12. 2).

[54] 『동아일보』 (1997. 12. 5).

[55] 『한겨레신문』 (1997. 12. 13).

[56] Wall Street Journal (1997. 12. 8).

[57] New York Times (1997. 12. 8).

[58] New York Times (1997. 12. 10).

[59] Friedman, Milton (1998. 9. 3). “Friedman Says IMF Bailout Led to Crisis”. Asian Wall Street Journal.

[60] Friedman, Milton (1998. 10. 12). “Clear Lessons to Be Learnt from the East Asian Episodes”. Times.

[61] 과거 베이커 플랜은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과 외채상환 능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신규차관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와는 달리 브래디 플랜은 채무를 과도하게 진 개발도상국의 외채 원리금을 삭감해주고 IMF와 세계은행의 역할을 제고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는 채무 구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을 기대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과중한 외채상환부담에 따른 경기부진이 개발도상국의 정치적 불안을 고조시켰기 때문이다.

[62] Wade, Robert (1998). “The Asian Debt-and-Development Crisis of 1997~?: Causes and Consequences”. World Development, 26(8): 1535-54, August.

[63] Veneroso, Frank and Robert Wade (1998). “The Asian Crisis: the High Debt Model vs. the Wall Street-Treasury-IMF Complex”. New Left Review, 228, March/April.

[64] Feldstein, Martin (1998. 3. 5). “Trying to Do Too Much”. Financial Times. Martin Feldstein은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며 NBER의 원장이자 CEO이다. 1967년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9년부터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자문을 지냈다.

[65] 최후의 대출자(Lender of Last Resort)란, 어떤 나라가 지급불능 사태에 빠지면 IMF가 대출은행에 차환이나 만기연장을 하도록 유도하고, 이도 안 되면 마지막으로 구제금융을 지원한다는 차원에서 ‘최후’의 보루를 의미한다.

[66] Feldstein, Martin (1998). “Refocusing the IMF”. Foreign Affairs, March/April.

[67] Fischer, Stanley (1998. 3. 20).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at the Forum Funds Lecture at UCLA.

[68] Fischer, Stanley (1998. 1. 22). “The Asian Crisis: a View from the IMF”. at the Midwinter Conference of Bankers’ Association for Foreign Trade, Washington DC.

[69] Sachs, Jeffrey D. (1997. 12. 11). “IMF Is a Power unto Itself”. Financial Times.

[70] Feldstein, Martin and Kathleen Feldstein (1998. 4. 28). “Tying Aid to Reform Undermines Asian Nations’ Recovery”. Boston Globe.

[71] Bello, Walden, Nicola Bullard and Kamal Malhotra (1998). “Taming the Tigers: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Third World Quarterly, 19(3). Walden Bello는 필리핀대학교 사회학 교수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빈부격차 문제를 다루는 남반구 글로벌 포커스(Focus on Global South)라는 NGO(본부는 방콕 소재)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국제 시민운동가다.

[72] Thurow, Lester Carl (1999). Building Wealth: the New Rules for Individuals, Companies, and Nations in a Knowledge-Based Economy. Harper Collins. .

[73] Fischer, Stanley (1998. 1. 22). “The Asian Crisis: a View from the IMF”. at the Midwinter Conference of Bankers’ Association for Foreign Trade, Washington DC.

[74]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문예당.

[75] Greenspan, Alan (1998. 1. 30). “Testimony of Chairman Alan Greenspan before the Committee on Banking and Financial Services, U.S. House of Representatives”. 〈www.bog.frb.fed.us〉. Alan Greenspan은 미국 FRB 의장이며 미국의 경제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다. 철저한 안정론자로서 대통령이나 의회의 정치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책을 견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54년 뉴욕에서 경제자문회사를 설립한 이래 30여 년간 경제자문 일을 해온 실물 경제통이다. 1987년 레이건에 의해 FRB 의장에 임명된 뒤로 클린턴의 민주당 행정부를 거쳐 다시 공화당 정부에 이르기까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

[76] Greenspan, Alan (1998). “Testimony to the Senate Foreign Relations Committee in Mid February 1998”. in David Sanger (1998. 2. 13). “Greenspan Sees Asian Crisis Moving World to Western Capitalism”. New York Times,

[77] Charlene Barshefsky는 미 무역대표부(USTR) 12대 대표(1997.3~)로서 클린턴 행정부에서 무역협상을 담당했다. 1993년 USTR 부대표로 시작했으며 그 이전에는 법률회사에서 일했다.

[78] Bello, Walden, Nicola Bullard and Kamal Malhotra (1998). “Taming the Tigers: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Third World Quarterly, 19(3).

[79] Bello, Walden, Nicola Bullard and Kamal Malhotra (1998). “Taming the Tigers: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Third World Quarterly, 19(3).

[80] Jeffrey Garten은 1992년에 『차가운 평화(Cold Peace)』라는 책에서 일본과 독일의 시스템은 기업이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도록 유도한다고 격찬했지만, 이제는 “내가 일본의 강점에 대하여 확실히 잘못 판단했다”고 수정을 가한다. Jeffrey Garten은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장이다. 월스트리트에서 13년간 근무했으며 1993~1995년(클린턴 행정부)에 상무부 국제통상 담당 차관을 지냈다.

[81] Wall Street Journal (1998. 9. 24).

[82] Feldstein, Martin (1998). “Refocusing the IMF”. Foreign Affairs, March/April.

[83] Amsden, Alice (1998. 1. 22). “해외기고: IMF의 오류”. 『조선일보』.

[84] Litan, Robert E. (1998. 2). “A Three-Step Remedy for Asia’s Financial Flu”. the Brookings Institution. Policy Briefs #30. Robert E. Litan은 브루킹스 연구소의 부소장이다. 1977년 예일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법률가이며, 1987년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전공분야는 반독점, 은행, 금융제도, 인터넷정책, 무역정책 등이다.

[85] 『르몽드』(1999.1.5)와 가진 인터뷰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Jacques Attali는 1981~1991년까지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보좌관을 지냈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총재를 지냈다.

[86] Wall Street Journal (1998. 9. 24).

[87] Klein, Lawrence (1999. 1. 4). “아시아판 뉴딜정책을 펼쳐라” 매일경제신문 인터뷰. 『매일경제신문』.

[88] ‘군산복합체’라는 용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처음 사용했다.

[89] Bhagwati, Jagdish (1998). “The Capital Myth: the Difference between Trade in Widgets and Dollars”. Foreign Affairs, May/June.

[90] Robert E. Rubin은 1997년 한국 외환위기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다. ‘루비니즘(Rubinism)’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계금융시장에 대한 장악력이 높았다. 하버드대학교와 예일대학교 법대를 졸업했으며, 1급 법률회사의 변호사이자 세계 최대 투자기관인 골드만삭스의 공동 회장을 지낸 바 있다.

[91] Nicholas F. Brady는 미국 제68대 재무장관으로 레이건 행정부 말(1988년 9월)에 임명되어 부시 행정부 말(1993년 1월)까지 재직했다.

[92] Ernest Stern은 J.P.Morgan의 Managing Director이다. 1995년에 J.P.Morgan에 가기 전에 세계은행에서 근무했으며 총재 직무대행까지 역임했다

[93] James D. Wolfensohn은 세계은행의 제9대 총재로 1995년부터 시작된 5년 임기를 마치고 재선임되었다. 1981년에 투자회사를 세워 국제투자은행가로 활동하다가 세계은행 총재가 되면서 그만두었다.

[94] 앞서 언급된 것처럼 최후의 대출자(lender of last resort)는 어떤 나라가 지급불능 사태에 빠지면 온갖 수단을 강구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구제금융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보루라는 것이다. 하지만 IMF는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해보지도 않고 바로 구제금융을 제공하여 대출은행의 손해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바그와티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최초’의 대출자(lender of first resort)라는 표현을 썼다.

[95] Veneroso, Frank and Robert Wade (1998). “The Asian Crisis: the High Debt Model vs. the Wall Street-Treasury-IMF Complex”. New Left Review, 228, March/April.

[96] Wade, Robert (1998). “The Asian Crisis and Western Triumphalism”. JPRI Critique, 5(5), June.

[97] 『뉴욕타임즈』는 5개월 동안 해외 8개국 10여 명의 특파원을 동원하여 “글로벌 전염(global contagion)”이라는 제목으로 금융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는 특집 시리즈기사를 1999년 2월 15일부터 18일까지 4차례 연재했다. 그중에서도 2월 16일자에 한국의 OECD 가입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Kristof, Nicholas D. With David E. Sanger (1999. 2. 16). “How U.S. Wooed Asia To Let Cash Flow In”. New York Times.

[98] 이러한 보도에 대하여 『한겨레신문』의 정운영은 “OECD 가입은 애초에 남의 장단에 맞춘 춤이었다. 선진국 명함이 그렇고, 세계화 구호가 그렇다. 졸속 개방으로 상당수의 금융기관이 쓰러질 줄 알았지만 한국 정부는 밀려드는 달러에 정신이 나갔고, 미국 정부는 자유화 설교로 그런 위험에 눈을 감게 만들었다. 1997년 11월에 돌발한 한국의 외환 위기는 1996년 6월 미국 재무부의 금융 자유화 작전 메모에서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라고 비판한다. 정운영 (1999. 3. 2). “누구의 장단인가”. 정운영 에세이. 『한겨레신문』.

[99]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문예당.

[100] New York Times (1997. 11. 18).

[101] Chossudovsky, Michel (1998. 1. 1). “The IMF Korea Bailout”. Third World Network.

[102] Bello, Walden, Nicola Bullard, and Kamal Malhotra (1998). “Taming the Tigers: the IMF and the Asian crisis”. Third World Quarterly, 19(3).

[103] Burton, John (1997. 12. 3). “Bruising Battle at Korea IMF Talks”. Financial Times.

[104] 『중앙일보』 (1997. 12. 4).

[105] Amsden, Alice (1998. 1. 22). “해외기고:IMF의 오류”. 『조선일보』.

[106] 『매일경제신문』 (1997. 8. 18).

[107] Financial Times (1997. 10. 31).

[108]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문예당.

[109] Kynge, James and Gillian Tett (1997. 11. 14). “Asian Monetary Fund Debate Hots Up”. Financial Times.

[110] 강경식 (1999). 『강경식의 환란일기』. 문예당

[111] Rowley, Anthony (1997. 10. 13). “Markets in Turmoil: Asian Monetary Fund”. Business Times(Singapore).

[112] AFP (1997. 9. 25).

[113] Jiji Press Ticker Service (1997. 11. 7).

[114] Murayama, Kohei (1997. 11. 14). “U.S. Eyes Supplementary Funds for Asian Stability”. Japan Economic Newswire.

[115] Glosserman, Brad (1999. 1. 13). “Prelude to a Struggle for Asian Leadership”. Japan Times.

[116] Wall Street Journal (1998. 9. 24).

[117]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7. 12. 15).

[118] 『한국일보』 (1998. 10.

[119] 미국의 주요 공세내용은 다음과 같다. Bello, Walden (1997. 12. 21). “Korea: Travail of the Classic Tiger Economy”. Focus-On-Trade.

– 한국 TV제조업체를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 한국으로 하여금 직물, 의류, 철강 등 제품에 ‘자발적인 수출제한’을 채택하도록 강요했다.

– 1986~1989년 사이에 달러 대비 원화가치를 40%까지 평가절상시킴으로써 미국 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약화시켜 한국 제품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켰다.

– 한국을 일반특혜관세(GSP) 적용대상에서 제외했다.

– 지적재산권 위반에서 미국산 대형승용차 수입에 대한 차별적 관세부과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문제 삼아 한국을 스페셜 301조와 슈퍼 301조 위반국으로 지정하여 이에 근거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 미국 담배에 대하여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산 쇠고기와 쌀 수입을 늘리라고 강요했다.

– 산업부문의 98%, 서비스부문의 32%를 외국인 주식투자 대상 업종으로 개방하라고 강요했으며 장거리통신, 해운서비스, 은행업, 정부물자 조달, 그리고 기타 부문을 자유화하라며 압력을 강화했다.

[120] 『매일경제신문』 (1997. 12. 4).

[121] Summers, Lawrence H. (1998. 2. 23). “American Farmers: Their Stake in Asia, Their Stake in the IMF”. Treasury News. U.S. Department of Treasury.

[122] Jacques de Larosiere는 프랑스 출신으로 1978~1987년까지 IMF 총재를 지냈다

[123] Leech, Dennis (1998. 5). “Power Relations in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a Study of the Political Economy of a priori Voting Power Using the Theory of Simple Games”. CSGR Discussion Paper, No. 06/98. Centre for the Study of Globalization and Regionalization, University of Warwick.

[124] Wall Street Journal (1998. 9. 24)

[125] Krugman, Paul (1998). “Fire-Sale FDI”. For NBER Conference on Capital Flows to Emerging Markets, 2. 20~21.

[126] Pollack, Andrew (1997. 12. 27). “Corporate Fire Sale Seen for Korea”. New York Times.

[127] Bello, Walden (1998). “East Asia: On the Eve of the Great Transformation”.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5(3).

[128] Pollack, Andrew (1997. 12. 10). “Koreans Pressing U.S. and Japanese for Speedier Aid”. New York Times.

[129] Sanders, Bernie (1998. 2. 3). “East Asian Economic Conditions?”. U.S. House of Representatives, Committee on Banking and Financial Services, Washington DC.

[130] Kristoff, Sandra (1998. 3. 24). “Japan, China, U.S. Key to Asian Financial Recovery”. USIS Washington File EPS205. Sandra Kristoff는 클린턴 행정부 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아시아지역을 담당했다. 국가안보회의는 국가안보에 관여하는 여러 부처가 의견을 교환하고 이견을 조정하여 통합적인 안보정책을 도출해내는 기관이며, 대통령이 안보문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로도 활용한다.

[131] Veneroso, Frank, and Robert Wade (1998). “The Asian Crisis: the High Debt Model vs. the Wall Street-Treasury-IMF Complex”. New Left Review, 228, March/April.

[132] Wade, Robert (1998. 8). “The Asian Debt-and-Development Crisis of 1997~?: Causes and Consequences”. World Development, 26(8): 1535-1554.

[133] Cronin, Richard P. (1998. 1. 28). “Asian Financial Crisis: An Analysis of U.S. Foreign Policy Interests and Options”. CRS Report.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134] 미국 평화청(USIP: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은 1984년 국회가 기금을 내어 독립적이고 초당적으로 설립한 기관으로, 국제적인 충돌의 평화적인 해결을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135] Snyder, Scott and Richard H. Solomon (1998. 4). “Beyond the Asian Financial Crisis: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for U.S. Leadership”.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Special Report.

[136] Gordon Wu는 홍콩의 Hopewell Holdings Limited 사장이다.

[137] Jim Leach는 아이오와 주 하원의원이며 공화당 소속이다. 1976년에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계속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138] Snyder, Scott and Richard H. Solomon (1998. 4). “Beyond the Asian Financial Crisis: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for U.S. Leadership”.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Special Report.

[139] 강명규 (1997. 12. 9). “워싱턴 컨센서스 실체파악을”. 『문화일보』

[140] Marshall, Andrew (1998. 9. 20). “The Washington Consensus Cracks: Western Economists Are Fighting among Themselves as the World Financial Crisis Bites”. The Independent.

[141] John Williamson은 1989년 중반에 워싱턴의 권력자들 요구로 남미국가에 촉구하는 주요 경제개혁 리스트를 “경제개혁에 대한 워싱턴의 의견”이라는 보고서로 작성하여 11월 IIE(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주관으로 열린 회의에 제출했다. 공식적으로는 1990년에 출간된 『중남미 구조조정』이라는 책에 수록된 “정책개혁에서 워싱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글에서 세부내용을 볼 수 있다; Williamson, John (1990). “What Washington Means by Policy Reform”. in John Williamson, eds., Latin American Adjustment: How Much Has Happened?. Washington DC: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John Williamson은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선임연구원으로 프린스턴대학교, 요크대학교, MIT, 워릭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영국 재무부와 IMF에서 자문활동을 했다. 국제통화문제, 발전국가 부채 문제 등에 관한 글을 썼다.

[142] Naim, Moises (1999. 10. 26). “Fads and Fashion in Economic Reforms: Washington Consensus or Washington Confusion?”. Working Draft of a Paper Prepared for the IMF Conference on Second Generation Reforms, Washington DC.

[143] 양수길 (1997. 4. 27). “코리안 콘센서스”. 『서울경제신문』.

[144] Williamson, John (1990). The Progress of Policy Reform in Latin America, Washington DC: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145] Naim, Moises (2000). “Washington Consensus or Washington Confusion?”. Foreign Policy, Spring.

[146] Williamson, John (1993). “Democracy and the Washington Consensus”. World Development, 21(8): 1332-1333.

[147] Hveem, Helge (2000). “Washington Consensus vs. the East Asian Model?”. Nordic Newsletter of Asian Studies 1998-2.

[148] Stiglitz, Joseph E. (1997. 12. 1). Statement to the Meeting of Finance Ministers of ASEAN Plus 6 with the IMF and the World Bank, Kuala Lumpur.

[149] Stiglitz, Joseph E. (1997. 12. 15). 한국방문 발표 성명. 『중앙일보』.

[150] Asian Wall Street Journal (1998. 1. 8). “World Bank Questions Plan by IMF for Asia”.

[151] Crustsinger, Martin (1998. 1. 7). “U.S. Confident in IMF Effort as Asian Economic Woes Roil Markets”. the Associated Press(AP).

[152] Asian Wall Street Journal (1998. 1. 8). “World Bank Questions Plan by IMF for Asia”.

[153] Stiglitz, Joseph E. (1998. 3. 27). “The View from the Bank”. Interview at the Final Plenary Session of the Asian Development Forum, Held in Manila on March 9~13, 1998, under the Auspices of the World Bank and the Asian Development Bank, Asiawee.

[154] Stiglitz, Joseph E. (1998. 3. 17). “Redefining the Role of the State”. Presented on the 10th Anniversary of MITI Research Institute(Tokyo), World Bank.

[155] New York Times (1998. 5. 31).

[156] 『동아일보』 (1998. 10. 1).

[157] World Bank (1998. 9). “East Asia: the Road the Recovery”.

[158] IMF (1998). World Economic Outlook, October.

[159] Sachs, Jeffrey D. (1997. 12. 8). “International Monetary Failure? The IMF Prescriptions Might Actually Make Asia’s Financial Turmoil Worse”. Time.; Sachs, Jeffrey D. (1997. 12. 11). “IMF Is a Power unto Itself”. Financial Times.; Sachs, Jeffrey D. (1998. 1. 2). “특별기고: 한국처방 재검토 필요하다”. 『조선일보』.

[160] 펀더멘털을 판단하는 지표에는 재정 균형 또는 흑자, 낮은 물가상승률, 민간의 높은 저축률, 수출 증가 등이 포함된다.

[161] Sachs, Jeffrey D. (1997. 12. 8). “International Monetary Failure? The IMF Prescriptions Might Actually Make Asia’s Financial Turmoil Worse”. Time.

[162] Sachs, Jeffrey D. (1997. 12. 11). “IMF Is a Power unto Itself”. Financial Times.

[163] 『르몽드』 (1997. 12. 12).

[164] New York Times (1997. 12. 18).

[165] Sachs, Jeffrey D. (1998. 1. 2). “특별기고: 한국처방 재검토 필요하다”. 『조선일보』.

[166] McKinnon, Ronald I. (1997. 12. 9). “일본경제의 침체와 동아시아 통화위기”. 세계경제연구원과 한국무역협회 공동주최 강연회.

[167] McKinnon, Ronald I. (1997. 12. 14). “조선일보 경제과학부 서원석 차장대우와의 대담”. 『조선일보』

[168] Wolf, Martin (1997. 12. 6). “Korea’s Big Chance”. Financial Times.

[169] Wolf, Martin (1997. 12. 9). “Same Old IMF Medicine”. Financial Times.

[170] Amsden, Alice (1998. 1. 22). “해외기고: IMF의 오류”. 『조선일보』.

[171]) Griffith-Jones, Stephany, Jacques Cailloux and Stephan Pfaffenzeller (1998). “The East Asian Financial Crisis: a Reflection on Its Causes, Consequences and Policy Implications”. IDS Discussion Paper 367, Brighton, U.K.: Institute of Development Studies, University of Sussex.

[172]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1998. 1. 25). “IMF 고금리정책 한국경제 부작용”. 『조선일보』. 사카키바라 에이스케(Sakakibara Eisuke)는 IMF의 이코노미스트, 일본 대장성장관 특별고문, 국제금융담당 차관, 재정통화정책연구원 원장 등 국제기구와 일본 정부 내에서 30년 이상 국제금융과 재정 전문가로 활동했다.

[173] Dow Jones Online News (1998. 1. 14).

[174] Radelet, Steven, and Jeffrey D. Sachs (1998. 4. 20). “The East Asian Financial Crisis: Diagnosis, Remedies, Prospects”. Harvard Institute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CAER Discussion Paper No. 29.

[175] Camdessus, Michel (1998. 1. 5). 『르몽드』와의 인터뷰.

[176] Camdessus는 1998년 2월 9일 『파이낸셜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Camdessus, Michel (1998). “Defending the Fund.”. Interview with Financial Times. “아시아와 협정은 IMF의 기존방식과 차이가 많다. 그 예로 금융체제 강화, 투명성 증대, 시장 개방, 시장 신뢰 재구축 등을 통하여 구조개혁을 한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캉드쉬가 새롭게 추가한 내용 모두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IMF가 기존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워싱턴 합의)에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추가함으로써 한국의 사회시스템을 완전히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읽을 수 있다.

[177] Camdessus, Michel (1998. 1. 14). 기자회견과 경제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 인터뷰.

[178] Camdessus, Michel (1998. 2. 6). “The IMF and Its Programs in Asia”. Speech at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179] Fischer, Stanley (1997. 12. 17). “IMF-the Right Stuff. Personal View. Stanley Fischer-Bailouts in Asia Are Designed to Restore Confidence and Bolster the Financial System”. Financial Times.

[180] C. Fred Bergsten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싱크탱크인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를 1981년에 설립하여 현재까지 소장직을 맡으면서 민주당의 정책 브레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와 카네기국제평화재단에서 활동했으며, 국가안보회의, 재무부 금융담당 차관을 지낸 행정가이기도 하다.

[181] Sachs, Jeffrey D. (1998. 2. 2). “The Asian Bailout (From: Jeffrey Sachs, To: C. Fred Bergsten)”. Slate.

[182] Bergsten, C. Fred (1998. 3. 4). “The Asian Bailout (From: C. Fred Bergsten, To: Jeffrey Sachs)”. Slate.

[183] Harvard Institute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84] 버그스텐 소장은 1998년 2월 2일 『브리지 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한국 정부의 금리인하 추진 방침에 대하여 ‘섣부른 행동’이라고 경고한다. “한국 정부는 금리인하 문제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섣부른 금리인하가 다시 외환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한국인들은 최근 들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성급하게 금리를 인하함으로써 모든 것을 망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금리 현상이 몇 주 또는 몇 개월 지속된다고 해서 한국경제가 회복 불능상태로 쇠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해외발행 장기국채 등으로 외환보유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금리인하보다 더 시급하다.”.

[185] Sachs, Jeffrey D. (1998. 3. 12). “The Asian Bailout (From: Jeffrey Sachs, To: C. Fred Bergsten)”. Slate.

[186] Bergsten, C. Fred (1998. 3. 19). “The Asian Bailout (From: C. Fred Bergsten, To: Jeffrey Sachs)”. Slate.

[187] Feldstein, Martin (1998). “Refocusing the IMF”. Foreign Affairs, March/April.

[188] Sachs, Jeffrey D. (1998. 6. 24). “The Deepening Crisis in Asia”. mimeo.

[189] Fischer, Stanley (1998. 10. 3). “Reforming World Finance: Lessons from a Crisis”. The Economist.

[190] Feldstein, Martin (1998. 10. 7). “Reforming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Focus on Crisis Management”. the Asian Wall Street Journal.

[191] Lane, Timothy, Atish R. Ghosh, Javier Hamann, Steven Phillips, Marianne Schulze-Ghattas and Tsidi Tsikata (1999. 1). “IMF-Supported Programs in Indonesia, Korea and Thailand: a Preliminary Assessment”. IMF.

[192] Krugman, Paul (1999). “Analytical Afterthoughts on the Asian Crisis”. mimeo.

[193] 그림에서 가로축 y는 총소득을 나타내고 세로축 e는 자국화폐의 환율을 나타낸다. e가 높다는 것은 환율이 올라가는 것이므로 자국화폐의 실질가치는 평가절하되는 것이다. <수직선 AA>는 국내 투자수익률과 해외이자율이 같은 수준에서 환율이 결정된다는 의미이며, <곡선 GG>는 환율변화에 따라 총소득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곡선은 좌향으로 한번 굽어지면서 두 개의 균형점을 만든다. 하나는 정상적인 환율 수준에서 생기는 균형점(정상균형점, 그림에서 B)이지만 다른 하나는 ‘초평가절하된(hyperdepreciated)’ 환율 수준에서 기업부문이 대규모로 파산하면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균형점(위기균형점, 그림에서 B’)이다.

[194] IMF는 자기들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위기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결국은 채권국과 채권금융기관을 설득하여 차환이나 만기연장을 주선한다.

[195] Stiglitz, Joseph E. (1998. 3. 12). “Sound Financ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in Asia”. Keynote Address to the Asia Development Forum.

[196] 크루그먼은 초기에 내부구조결함론을 주장했다가 나중에는 금융공황론으로 입장을 바꾼다.

[197] 소로스의 퀀텀펀드는 1988년 50억 달러에 머물던 자산규모가 1995년에는 300억 달러대로 급증했다.

[198] 고정이하 여신/총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