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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컨센서스 7차 콜로키엄]

  • 주제: 사이버문명과 포스트휴먼
  • 발제자: 이종관 교수 (성균관대학 철학과)
  • 일시: 2006년 12월 20일 (수요일) 오후 5시
  • 장소: EAI 회의실
  • 참석자: 김병국, 손동현, 윤순봉, 이정우
  • 정리: 송문희(EAI)

콜로키엄 정리자료_text 20p


[요약] 사이버문명과 포스트휴먼

[발제] 사이버문명과 포스트휴먼 (이종관 교수)

[토론]


[요약] 사이버문명과 포스트휴먼

21세기 문화에 스미는 철학

대체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는 물질성이 아니라 ‘의미’의 영역이다. 문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도덕적-미적 가치가 다양하게 표현되는 상징의 영역이다. 이러한 문화는 최근 경제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경향을 보인다. 생산 중심의 전기 자본주의가 20세기 후반 소비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지배적 요인은 상품의 실물적 사용 가치(use-value)에서 기호 가치(sign-value)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과학 기술에서도, 멀티미디어와 정보통신 분야의 눈부신 발전에서 보듯이 문화적 표현 수단을 다양화하고 그 표현물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기술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근대 산업 사회가 인간의 단순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용적인 내구재의 대량 생산을 기반으로 존재했다면, 새로운 세기는 ‘문화 경제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문화의 상품화를 통해 문화마저 효율성, 자본 증식,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의 논리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현대 문화를 상품화된 문화로, 그리하여 비천한 대중 문화로 방기해 버리면, 현대 상품 경제의 내면 한구석에 소중히 감추어져 있는 문화적 의미조차 고갈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철학은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조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대문화에 과감하고도 은밀하게 스며들어가야 한다.

정보화의 도래와 포스트휴먼

현대는 디지털 파도로 상징되는 급속한 정보화의 시대이다. 이로 인해 사이버 공간이 창궐하게 되었지만 사이버 공간이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인문학적 상상력과 해석학적 마인드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사이버 공간이 요구하는 그러한 절실함을 인지하고 사이버 공간에 인문학적 사색을 불어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정보화가 결국은 인간 이후의 존재자, 즉 포스트휴먼의 출현을 몰고 오게 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인간, 나아가 존재의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날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 해법은 미술. 영화, 건축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을 철학적으로 가로지르는 모험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탈(脫)인간화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예술

나와 대상을 분리해 아름다움을 감성적 관찰 대상으로 객관화하고 이원화했던 것이 근대 인식론에서의 미학이라면, 셸링, 니체, 하이데거는 예술에 철학과 동등한, 또는 그 이상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영화 미술 건축 등의 예술 각 장르에서 아름다움이란 것이 진실과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진실이 철학과 관련 있는 것이라면 아름다움은 예술과 관련 맺고 있다. 여기에 하이데거는 ‘아름다운 것은 곧 진실’이라는 명제를 통해 철학과 예술의 통합을 시도한다. 하이데거는 이른바 주체 활동의 중심은 세계라는 객관적인 대상을 관찰하고 진실여부를 판별하는 데 있다는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넘어서 “진리의 본질적 속성은 아름다움에 있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놓는다. 즉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이 ‘감추는 것을 드러냄’이란 통로를 통해서라면 ‘진리의 숙명은 아름다움에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으로 요약되는 금세기 탈(脫)인간, 비(非)인간화 경향을 하이데거는 ‘최고의 위험’으로 경계했다. 그리고 예술이야말로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라고 결론 짓는다. 건축을 예로 들면, 건축물은 거기 서서 자신과 세계를 이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향해 열린 정신을 표현함으로써 세계를 그 안으로 포용하면서 세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즉 진리를 판별해내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키워드>

기호 가치(sign-value), 포화될 수 없는 시장, 문화 경제의 시대, 정보화의 도래와 포스트휴먼, 탈(脫)인간화, 하이데거, 탈(脫)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탈(脫)실체화, 사이버적 존재자(지식-통화-기호), 사이버경제의 반(反) 경제 원리(희소성이 없음), 인공생명(artificial life), 디지털문명의 파장, wet life vs. dry life,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new left(neo futurism) or new right (neo humanism)


[발제] 사이버문명과 포스트휴먼 (이종관 교수)

1. 디지털파도 속의 문화와 경제

(1) 포스트모던적 상황과 사이버스페이스 출현 배경: 포스트모던 자본주의로의 전환

1) 자본주의의 위기: 공급과잉, 수요부족

산업 혁명을 통한 대량생산의 체제가 20세기에 완성되면서 인간의 단순욕구 충족을 중심으로 한 자본 증식의 전략과 그에 의한 현실의 지탱은 공급과잉으로 초래된 공황에 빠져들며 한계에 도달하였다.

2) 위기 탈출(기호가치의 발견): 포화될 수 없는 시장의 발견

이러한 위기에서 탈출구를 열어 준 것은 상품의 실물적 실용적 가치 혹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상품이 의미하는 것이 발생시키는 가치, 즉 기호가치의 발견이다.

3) 멀티미디어와 정보통신 기술의 절박성: 기호와 상징의 생산과 유통기술의 필요성과 2차 기술혁명

이처럼 상품의 상징적 측면이 중심을 차지함으로써 새로운 기술적 수단이 절박하게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상품의 의미 및 그와 관련된 정보를 생산해내고 유통시키는 기술이다. 따라서 상품의 상징 내지 이미지 가치의 창출과 그와 관련된 정보 순환을 신속화하는 과학 기술, 즉 각종 영상매체, 미디어, 컴퓨터, 정보 통신 과학 기술이 엄청난 투자를 흡입하며 현실의 중심부를 지배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목도하면서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회를 정보처리, 영상테크닉에 의해 생산되는 기호와 기호의 논리에 따른 사회의 조직화가 실물생산을 위주로 한 사회조직의 원리를 대체하는 시뮬레이션의 시대로 정의했다.

(2) 사이버스페이스의 출현과 공간적 특성

1) 사이버스페이스의 출현

바로 이러한 요구에 대한 전면적 지원의 결과 이룩된 과학적 결실이 바로 디지털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에서 그 기본단위가 되는 비트는 탈물질화된, 단지 0과 1을 표시하는 전하값에 불과하다. 디지털 정보는 재현대상과 어떠한 물질적 속성도 공유하지 않는 이진부호로 약호화되어 컴퓨터의 연산과정을 통해 처리되기 때문에 현실적 제한이 없이 정보를 연쇄 결합시켜 무한한 기호와 이미지 조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디지털 기술은 하이퍼리얼리티를 넘어 사이버스페이스(가상현실)를 탄생시켰으며 현실은 그것에 의해 삼켜진다.

2) 사이버스페이스의 공간적 특성

사이버스페이스는 연장성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다. 연장성이 부재하면 거리도 부재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거리의 증발로 인해 영토적 고착이 순간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성과 즉시성으로 대체되면서 그 의미를 상실하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가 일어난다.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한 지점이 하나의 존재자에 의해 점유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지점이 하나의 존재자의 의해 점유될 수도 있고 하나의 지점이 무수한 존재자에 의해 점유될 수도 있다. 한 대상이 점유하고 있는 하나의 지점은 동시에 그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점유될 수 없다는 동질적 공간의 필연적 질서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위반되고 있는 것이다. (실재 물리적 공간에서 존재자는 그것이 점유하는 지점이 다른 것에 의해 점유되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이것은 사이버스페이스가 동일성과 타자성이 혼재하는 공간, 즉 섞임의 공간(hybrid space)임을 시사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동시성과 즉시성이 지배하는 탈실체화되고 탈영토화된 공간이며 그 안에서는 유동적 유통적 상태를 생성하는 혼성적 변이과정이 일상화되어 있다.

(3) 사이버스페이스의 경제와 문화 통합

1) 사이버스페이스에 적합한 존재자

이제 이러한 특성의 사이버스페이스는 어떤 존재자들의 공간일 수 있는가? 탈실체화되어 실체를 떠나 실체를 지시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식, 통화, 기호이다.

① 지식: 비물질적이고 구성적이다. 이해는 곧 새로운 지식의 생산을 의미한다.

② 통화: 실물적 가치의 대용물이 아니다. 통화의 가치는 다른 통화와의 관계에서 잠정적으로 결정된다.

③ 기호: 자기지시적이고 변별성을 갖는다. 해석은 기호가 지시하는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호를 만들어내 차이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이들 존재자에는 물리적 실재공간의 적용원리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탈영토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는 동시성과 여기서 순식간에 저기로 유통될 수 있는 소통성을 갖고 있다.

2) 사이버경제의 반(反) 경제 원리

시장화의 형태로 진행되는 사이버공간을 향한 이주과정은 그 시장에서 거래되기에 가장 적합한 상품이 선택되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며, 이러한 상품은 바로 그 자체 이미 사이버적 존재방식을 갖는 존재자, 대표적으로 통화, 기호, 지식이다.

희소성이 없음:

이러한 존재자들은 탈실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물리적 제한성을 갖고 있지 않다. 물리적 제한성이 없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요인인 희소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기존의 경제활동이 상품의 희소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희소성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고 소비는 그에 의존하는 함수라고 하면, 사이버 시장의 경제활동은 경제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위배하는 기능원리를 갖는 것이다. 돈, 기호, 지식은 물리적 제한성, 즉 희소성이 없으며 따라서 그 희소성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 기호, 통화와 같은 사이버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희소화시키고 소모되지 않도록 보존 소유하는 방식으로는 창출될 수 없다. 오히려 유동적 유통적 특성을 갖는 사이버상품은 소유가 아니라 끊임없는 유통 속에 오직 다른 것으로 생산될 때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보존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이 사용되면 될수록 가치가 있는 것이다.

3) 사이버 경제의 소비양태: 문화적 활동

사이버 상품의 소비자는 실물의 소비자와 근본적으로 소비양태가 다르다. 실물은 완제품으로 그 고유기능을 완성하여 제공되고 소비자는 그 상품의 수동적 사용자가 되어 상품을 소모할 뿐이지만, 지식, 기호, 통화와 같은 사이버상품은 그렇게 완성된 상태로 소비자에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스스로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되고 투자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이버공간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사이버시장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엄격한 구분은 모호해지고 사실상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생산활동을 하고 있으며 또 생산활동을 해야 사이버시장은 지속된다. 사이버시장은 프로슈머(prosumer)를 탄생시킴으로써 지속될 수 있다. (UCC의 등장)

4) 문화적 활동의 확장

이로부터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희소성에 기반한 경제 원리가 수축되고 있으며 오히려 지식, 이해, 표현, 소통 등의 인간 활동이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시장은 문화적 활동이 확장되는 공간이다.

2. 포스트휴먼의 도래와 인간의 운명

사이버 경제에 의해 주도되는 사이버 공간으로의 이주과정은 인간 친화적 역사가 될 것인가?

(1) 디지털문명의 파장

1) 물리적 공간과 시간을 급격하게 압축시켜 오히려 유한한 삶의 활동 영역을 생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끝없는 팽창의 압력하에 놓아 인간의 삶의 시간을 급격히 단축시킬 것이다.

2) 급격한 세대 교체가 일상화되어 인간의 삶이 어느 순간 할 일 없이 종료되면서 결국 삶의 장에서 실업 상태에 놓일 것이다.

3) 자아가 해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자아가 해체될 때 우리의 육체는 그에 제한을 가했던 중심적 통제력의 몰락을 경험하며 무절제한 희열의 방임 속으로 빠져든다. 그 이전의 역사를 비이성과 야만이라고 경멸했던 현대인들은 이제 디오니소스적 흥분과 동요 속에 방치될 가능성도 있다.

(2) 포스트휴먼의 도래

1) 사이버스페이스의 역설

미래의 인간 거주 공간으로 개척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인간의 삶을 파고들고 가로지르는 동안, 그리하여 시장을 보다 인간친화적인 소통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는 동안, 역으로 인간은 그곳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 새로운 천 년의 사이버스페이스에는 인간 이후의 존재자, 즉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출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은 자연인의 몸과는 다른 물리적 기반을 통해 인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지적 능력을 실행하는 인공적 존재자를 말한다.

2) 인간의 종말

마빈 민스키 같은 MIT의 인공지능학자들은 마치 유인원이 인간을 진화시킨 후 생의 역사에서 탈락했듯이 포스트 휴먼이 출현하면 근대 휴머니즘이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했던 인간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3) SF에 불과? or현실적 근거?

현재 진행중인 정보화와 그에 따른 컴퓨터의 발전을 조금만 성찰해보면, 포스트 휴먼의 도래는 충분히 거론될 근거가 있다. 앞으로 생명공학과 칩 생산 기술이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컴퓨터가 인공신경과 생체 칩의 형태로 실용화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육체 안에 이식된다면, 컴퓨터는 더 이상 인간과 인터페이스(interface)관계만 유지하는 인간의 타자가 아니다. 미래의 컴퓨터는 이식이란 과정을 통해 인간의 몸과 하나가 되면서 인간 내부에 침투할 것이다.

4) 인간이 컴퓨터의 일부로 흡수

그리고 이것은 인간보다 지능적인 컴퓨터가 오히려 인간을 그 컴퓨터의 일부로 흡수하고, 결국 그 인간을 포스트휴먼으로 변신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인간은 여러 형태의 하드웨어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3) 포스트휴먼의 존재방식

1) 디지털 지능인 포스트휴먼은 자신이 처할 현실을 자유롭게 선택

포스트휴먼은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자기가 처할 여러 가상현실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2) ‘몸에 의존하지 않음’과 영생

포스트휴먼은 마치 현재의 개인용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바꾸어도 기능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과 같은 생체적 몸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포스트휴먼은 여러 가지 물리적 기반을 바꾸어가며 삶을 지속할 수 있다. 이로써 포스트휴먼에게는 신체 이외에는 대체가능성이 없기에 자연인이 맞이하는 죽음이란 것은 없다.

3. 가상과 실재의 치열한 싸움: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이 진짜 생명체다?

(1) 디지털파도를 타고 오는 존재론적 충격

20세기 후반부터 밀려오기 시작한 이 디지털 파도가 일으키는 소용돌이는 무엇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란 개념을 쓰면서 역사가 정보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모호해지며 오히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진짜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에 예견하였다. 최근 더욱 격렬해지는 디지털 파도는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의 출현을 몰고 오면서 진짜와 가짜의 관계를 동요시키고 있다. 실재 생명이 갖고 있는 특성을 디지털로 탁월하게 구현할 수 있는 가상생명기술의 출현은 생명자체는 물론 우주자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접근방법을 모색하도록 한다.

(2) 인공 생명

1) 생명의 특징

① 생명은 세포로 되어 있다. ② 생명은 수용액에서 일어나는 탄소 염기의 화학작용에 기초하고 있다. ③ 거대하고 복잡한 부자 DNA가 세포활동을 통제하고 또한 후손에게 전달되는 유전인자를 담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낸다. ④ 생명은 진화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⑤ 생명은 형태와 기능을 지배하며 복제되고 전달되는 정보이다. ⑥ 생명은 자기조직화의 몇 가지 일반 법칙을 활동 중에 드러낸다.

2) CA

이러한 생명의 특성을 인공생명 기술은 자동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를 통하여 모델링하는 데 성공하였다. 세포자동자가 활성화하고 세포의 시스템이 발전해 가는 것을 지켜보면, 규칙들에서 무작위적 변화(돌연변이)의 가능성이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도 있고 시스템의 행위에서 진화를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시스템은 실제생명에 비해 훨씬 단순하지만, 놀랍도록 생명과 닮은 많은 행위의 패턴을 보여준다.

3) 세포자동자의 충격: 생명의 원리는 실리콘을 기반으로 더 잘 구현

이렇게 디지털로 발생, 성장, 진화, 돌연변이, 소멸 등의 생명현상이 탁월하게 구현될 수 있다면 이것이 가져다 주는 충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 우리가 유일한 생명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탄소를 기반으로 한 단백질 생명체’ 이것만이 생명의 고유한 특성을 구현하는 유일한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생명성’을 결정하는 본질적 요소가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적 기반’이 아니라 ‘생명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진화: 크리스탈 → 탄소(단백질) → 실리콘

생명은 크리스털에서 탄소를 거쳐 실리콘 생명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나아가 디지털 생명은 탄소 기반 생명을 모사한 가상 생명(virtual life)이 아니라 이 가상 생명이 오히려 생명의 원리를 훨씬 실재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실재 생명이라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다.

생명카테고리의 새로운 이원화: wet life vs. dry life

이러한 논의는 생명의 카테고리를 이원화하는 데로 이른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생명체와 생명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는 생명체가 그것이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생명은 물을 필요로 하고 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wet-life라 불리고, 가능한 생명은 물 없이 실리콘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dry-life라 불린다. 이제 생명이 역사는 wet-life에서 dry-life로 진화하며, wet-life는 dry-life에게 생명의 원리를 계승시킨다.

실재와 가상이라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구도 퇴장

실리콘으로 구현되는 현실이나 생명 또한 마찬가지로 실재성을 주장할 수 있다면, 그리고 또 실리콘으로 구현되는 현실이나 생명이 오히려 실재의 원리와 생명의 원리를 더 잘 구현할 수 있다면, 실재는 물리적 실재와 그를 디지털 테크닉을 통해 흉내 낸 가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적 현실과 어떤 매체를 통해서 이미 현실화된 실재로 구분되어야 한다.

(3) 인간이여 꺼져라?

인공생명의 출현으로 인간은 야릇한 실존적 결단 상황에 처한다. 그는 ‘인공생명’의 출현을 진정한 생명체의 출현으로 인정하고 환영하면서 진화역사에서 도태되어야 하는가? 인간들은 지금까지 인공생명은 가짜이며 생명은 생산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공생명의 출현은 금지되거나 최소한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디지털기술을 통해 정말 인간과는 그 물리적 기반이 다른, 그래서 인간의 복제품이 아니라 전혀 다른 매체로, 예컨대 살도 없이 생명의 원리를 구현하는 존재자가 출현한다면, 그것은 우리보다 더 진짜로 생명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여기서 철학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인간이 생명진화의 역사에서 도태를 선언하고 꺼져 들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사의 운명이 소진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계속 존재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판단 근거를 철학은 제공해야 한다.

4. 새로운 좌우의 출현: new left(neo futurism) or new right (neo humanism)?

디지털 파도가 불러일으키는 파장을 성찰해본 결과 미래를 이끌어 갈 철학적 구도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1) NF

NF는 20세기 전반 기계문명에서 역사의 진보를 낙관하며 전통에 대한 과격한 파괴와 급속한 발전을 추구하던 모던 미래주의(MF)의 21세기적 변종이다. NF는 20세기 후반부터 획기적 발전을 보이고 있는 첨단 기술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여러 사회 문화적 현상을 담아내려는 모색이다.

(2) modern futurism와 neo futurism의 차이점

NF는 MF와 같이 첨단 기술에 의해 출현할 여러 새로운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표현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MF가 반복성, 규칙성, 딱딱함, 정형성 등의 직선적 발전의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었다면 NF는 이를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사이버스페이스가 여러 근대적 이항 대립이 와해되는 혼성 잡종의 공간이 될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고 형상화하는 작업이 NF의 중심 내용을 이룰 것이다. NF는 포스트 휴먼의 도래라는 상황 앞에서 이제 인간과 인공지능의 결합으로 출현하는 새로운 모습의 지능적 존재자를 형상화하고 이미지화하는 작업에 몰두할 것이다.

나아가 몸 자체는 더 이상 존재의 기반으로써의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인간과 달리 사이보그나 포스트휴먼에서는 몸은 인공지능을 외부를 둘러싸는 껍질이나 표피 나아가 장식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물질로 또 다른 모습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또한 NF는 필연적으로 neo-humanism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스트휴먼에 대한 열광은 곧 인간 종 자체의 도태를 의미하며 인간존재 의미의 허무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3) neo humanism

1) 개념적 정의

NU은 인간의 실존적, 존재론적 허무화에 직면하여 인간존재의 의미를 재확보하려는 사상적 움직임을 일컫는다.

2) NU(neo humanism)과 근대 humanism과의 차이

근대 휴머니즘은 르네상스를 선도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초월적 신과 보이지 않는 천국을 동경하던 중세적 세계관으로부터 인문주의자(humanist)들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사상적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데카르트의 명제 발견 이후 인간은 모든 것의 주체가 되었으며 또 그 진리로부터 인간의 자아와 주체성의 실현을 갈망하는 휴머니즘을 잉태시켰다.

반면 사물은 단지 인간 주체에 대해서 ‘있는 대상’으로 이해됨으로써 그 자신 안에 있는 스스로의 내적 능력과 의미를 결여한 반복적 법칙의 존재자, 즉 기계적 존재자(mechanism)로 전락한다. 인간 자아를 주체로 설정하여 세계를 대상화하는 휴머니즘과 세계를 기술적으로 지배하는 과학 기술은 사실상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 기술은 존재자의 내적 의미와 내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존재자들을 외적으로 강압되는 인과 관계로 체계화시키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세계를 대상화시키며 주체로서의 지위를 구가하는 인간 자신 또한 이러한 상황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이다.

NH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 휴머니즘이 과학기술과 공모관계를 형성하며 결국 인간 스스로를 도태시키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근대 휴머니즘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우선 수학적 합리성에서 절정을 보이는 이성은 더 이상 인간 실존의 본질적 근거로 주장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유한성, 또 근대이성에 의해 비합리적 부분을 치부되던 인간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이루어 질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이 시뮬레이션 할 수 없는 인간적 부분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철학적 작업이 이루어 질 것이다. 즉 인간의 합리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취급되던 예술적 상상력, 죽음에의 불안 등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심급으로 해석되면서 인간보다 월등한 합리성으로 무장한 인공지능 문명에 도전하는 거점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세계는 인간이 그의 이성적 활동에 통해 그 진리를 고갈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새로이 해석되어야 할 비밀을 던져주는 영역으로 존중될 것이다.

(4) neo mysticism: 세계에 비밀을 되돌려주는 철학

이렇게 세계의 비밀을 인정하는 태도는 새로운 형태의 신비주의, 즉 neo-mysticism을 동반할 것이다. 그런데 비밀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비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밀은 우리를 다른 존재자에 대해 비로소 열어주는 고유한 가능성이다. 완전히 인식되고, 장악하고 계산될 수 있는 세계는 사실상 사물에 대한 통로를 차단한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잘 보여줄 수 있다. 그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이 우리가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완전히 조작 가능한 타자는 그 스스로 자유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세계는 비밀을 인정받음으로써 의미의 영역으로 탄생한다. 앞으로는 신화적 세계관에 대한 개방적 관용적 태도가 확산되면서 신화에 대한 관심이 부상할 것이다. 이러한 조짐은 영화 반지제왕, 동화 해리포터, 그리고 여러 온라인게임에서 선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토론]

토론주제

  • 디지털문명의 파장과 인간퇴출의 위협,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예술?
  •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우월한가?
  • 사이버적 존재방식을 갖는 지식-기호-통화는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채로 존재하는 것인가?
  • 포스트휴먼의 도래에 따르는 새로운 이념구도는 무엇이 될 것인가?
  • 인류의 문명전환은 미리 계획되고 조정되는 것인가?

1. 디지털문명의 파장과 인간퇴출의 위협,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예술?

이종관: 근대이성이 만들어낸 최종적 방식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이다. 오늘날 디지털문명이 확장됨에 따라 가상공간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연장성’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갖는 사이버스페이스는 반(反)시장 경제원리를 기반으로 배타성이 없는 인간친화적인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제 인간은 그들이 만든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퇴출되고 포스트휴먼(posthuman)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위험에 처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시에 여러 개의 세계를 살 수 있는 공간(空間)의 복수화(複數化)에 따라 인간의 삶이 그만큼 분열되고 이 과정에서 자아가 해체되기 때문이다. 즉 사이버스페이스는 동일성과 타자성이 상호침입하는 섞임의(hybrid) 공간이 됨으로써 결국 자기동일성(실체)과 완벽한 자기경계를 유지할 수 없는 탈(脫)실체화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과 수렴기술을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몸에 의존하지 않는 포스트휴먼은 더 이상 휴먼(인간)처럼 ‘던져지는 존재’가 아닌 자기가 처할 현실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문명진화의 방향을 살펴보건대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디지털문명으로의 급격한 전환의 한가운데서 달라지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성찰 또한 필요하다. 디지털 문명의 파장으로 삶의 장에서 소외될 위기에 처한 인간은 제러미 러프킨의 예언처럼 예술이나 봉사활동으로 눈을 돌리거나 혹은 달라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러 개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multi-player’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윤순봉: 일찍이 찰스 다윈은 강한 종족도, 머리가 좋은 종족도 아닌,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종족만이 진화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환경적응과 생존의 측면에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개미나 바퀴벌레가 인간보다 훨씬 더 우수한 종족일 수도 있다. 이러한 다윈의 견해를 인간에게 대입시켜 볼 때 인류의 긴 역사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 근대 3~4백 년간 근대이성의 논리에 힘입어 인간의 ‘지능’이 인류최고의 가치로 중시되어온 것뿐이지 실제로 그 이전엔 ‘생존을 위한 번식’이 ‘지능’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앞으로 인류의 진화방향을 탄소 → 단백질 → 실리콘 생명기반으로의 진화로 단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생명의 본질은 ‘에너지(energy)’일 수 있다. 따라서 인류의 진화방향도 인간의 ‘지능이 고도화된 형태의 포스트휴먼’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new energy)’에 기반한,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그 무엇으로 진화해 나갈 가능성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김병국: 생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끝없는 팽창의 압력하에서 결국 인간의 자아가 해체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불확실성’이 그만큼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때 해체되는 자아는 무엇이고 해체 후 다시 재정립되는 자아의 내용물은 무엇이 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는 자는 누가 될 것인가? 아마도 끝없는 팽창의 압력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동시에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multi-player’가 새로운 시대의 승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문명의 파장에 따라 변화될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인간 삶의 방식에 변경이 생기게 되는 경우 이들 인간의 집합체인 사회는 또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이러한 시대에는 환경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소수만이 잘 살고 이러한 전환에 실패한 다수는 낙오자로 전락해 버림으로써 심각한 계층격차와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세상이 이런 방향으로 변화되는 경우 앞으로는 정치도 이에 맞게 새롭게 변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정치는 시대변화의 추동력이 만들어 낼 새로운 형태의 질서와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담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을 삶의 장에서 퇴출시키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할 포스트휴먼의 도래라는 것은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가 생명모델링에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정도까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가능해질 것인가?

손동현: 생명의 본질을 단백질도 실리콘도 아닌 ‘제 3의 에너지(energy)’로 본다면 이것의 내용물은 무엇일까? 만약 인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고 정치(精緻)한 지능을 가진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가 미래의 힘의 원천인 에너지원까지 흡수하게 된다면 장차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2.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우월한가?

윤순봉: 사이버 스페이스의 진화에 따른 포스트휴먼 출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가 될 것이다.

인간의 뇌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만 완벽한 디지털화와 포스트휴먼의 도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뇌가 스스로 자신의 뇌를 해석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인간보다 훨씬 더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어야만 인간의 뇌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의 활동영역을 ‘암묵적인 배움’(tacit learning)과 ‘명백한 배움’(explicit learning)으로 나눌 때 ‘암묵적인 배움’을 완벽하게 ‘명백한 배움’으로 전환시킬 수 없다면 완전한 디지털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날로그적 속성을 갖고 있는 에너지라는 힘의 원천을 디지털로 완벽하게 재현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종관: 아날로그가 ‘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면 디지털은 ‘비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디지털의 관심은 아날로그의 재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의 원리는 새에서 착상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 비행방법은 다르다. 새처럼 날아가는 것도 중요한 기능이긴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좋고 우월한 것인가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만의 새로운 인프라스트럭쳐를 바탕으로 아날로그가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디지털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앞으로 다가 올 디지털 세상은 아날로그와는 전혀 다른 논리를 지닌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3. 사이버적 존재방식을 갖는 지식-기호-통화는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채로 존재하는 것인가?

이종관: 공황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 극복과정에서 경제의 중심가치가 상품이 갖고 있는 ‘실물가치’ 중심에서 상품이 상징하는 ‘기호가치’로 변화됨으로써 포화될 수 없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시장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기호가치’가 경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자 기호를 산출하고 유통시키는 멀티미디어 기술이나 정보통신기술이 중요시되고 있고 그 결과로 출현하게 된 것이 사이버스페이스이다. 사이버스페이스(가상현실)는 실제적인 물리적 공간에서 ‘배타적 공간적 점유성’을 가짐으로써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즉시성과 동시성이 실현됨으로써 연장성이 상실되고 탈영토화된(deterritorialization) 공간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과거 ‘희소성’을 기반으로 했던 시장시스템과 구별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시장은 문화적 활동이 확장되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 가장 적합한 사이버적 존재자가 바로 지식-기호-통화이다.

김병국: 지식-기호-통화가 비물질적이며 구성적이며 자기조직화가 가능한 사이버적 존재방식을 갖는다는 측면에서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통화의 경우를 살펴보면 과거 무역이 번성하기 전에는 통화와 상품간의 관계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통화와 다른 통화간의 상대적인 관계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가상적인(virtual) 특성을 갖는 통화가 원래 그것이 표상했던 실물상품보다 거의 4배 이상의 규모와 가치를 가진 채 유통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통화와 지식-기호 간에는 그 구성적 특성에서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통화의 경우는 중앙은행의 보장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유통이 가능한 것이고 통화량이나 수요, 공급 등은 모두 실물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사이버공간의 대표적 상품 중 하나인 ‘통화’가 실제세계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과연 가상공간이라는 것도 실제세계와 동떨어진 채로 혼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통화가 실물경제와의 사이에 일정한 영역에서 자율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실물경제 트렌드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곧, 가상공간(cyber space)과 실제세계(real space)도 어떤 식으로든 연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세계가 서로 연동되어 움직이는 과정에서 앞으로 어떤 형태의 산업이 새로운 비중을 갖고 부상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4. 포스트휴먼의 도래에 따르는 새로운 이념구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종관: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의 출현과 함께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뒤바뀌고 있다. 인류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오는 디지털파도의 위협과 인간이 다른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한 부속품이나 도구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존재론적 충격의 와중에서 앞으로의 이념적 구도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아마도 첨단 기술에 의해 출현할 여러 새로운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 할 new left(neo futurism)와 급속한 과학기술의 진전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허무화에 직면하여 인간존재의 의미를 재확보하려는 new right(neo humanism)의 두 갈래 길로 나뉘어질 것이다.

손동현: 우리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도래를 환영해야 할 것인가, 저지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힘으로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도래를 막는 것이 가능한가? 결국 단백질에 기반한 삶이 실리콘에 기반한 삶에 자리를 비켜줘야만 하는 것인가? 포스트휴먼에 대한 열광은 인간 종 자체의 도태를 의미하며 결국 인간존재의 허무화를 초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네오 휴머니즘(neo humanism) 철학적 과제는 무엇이 될 것인가?

윤순봉: 제러미 러프킨은 ‘소유의 종말’에서 논리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차별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모든 ‘learning’이 ‘access’의 문제로 전환될 것임을 예견했다. 그런데 사이버적 존재자로 예시되고 있는 지식, 기호, 통화라는 것은 실제로는 논리적인(logical) 단계에서 문제된다. 앞으로 가상공간에서는 ‘논리나 이성’보다는 ‘창조, 감성, 감각, 예술, 문화’처럼 복제가 불가능한 것들이 고부가가치를 만들게 될 것이다. 특히 인간존재의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위기감인 ‘불안(不安)’ 같은 감정은 인공지능(AI)이 결코 흉내낼 수 없다. ‘노드 → 링크 → 네트워크’로 진화해 나가는 가상공간 상의 각 단계에서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발’(emergence) 현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인류진화의 방향은 ‘real space→ cyber space→ mythology space, energy space’의 단계를 거치면서 나아가는 것으로도 상상할 수 있겠다. 그런데 cyber space와 real space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동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정우: 포스트휴먼이 도래하게 되면 휴먼(인간)은 삶의 장에서 소외되고 결국은 퇴출당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 대다수의 삶의 방식은 물질세계의 변화속도에 발맞춰 재빨리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 본질적 측면에 있어서는 ‘연속성’이 있을 수 있다. 미래에 포스트휴먼이 도래한다고 하여도 어차피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문화 속에 휴먼(human)의 문화도 많이 디자인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과 연속성을 갖는 포스트휴먼이 탄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외피가 아닌 디자인의 내용물(contents)인 것이다.

김병국: 디지털문명의 파장이 실업상태를 몰고 온다면 인간은 이러한 환경하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포스트휴먼이 도래하여 이들이 지식세계의 중심을 장악하고 인간을 몰아내게 된다면 살과 몸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지식은 포스트휴먼에게 맡기고 인간은 신비주의에 빠져 그저 예술만 추구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5. 인류의 문명전환은 미리 계획되고 조정되는 것인가?

이종관: 시대변화의 추동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사람이나 조직 등 행위자(actor)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시스템 분석이 보다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명전환의 과정에 있어 어떤 특정한 디자이너가 존재하는지가 의문이고,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인류문명의 전환방향은 결국 최초 디자이너의 손을 떠나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우: 어떤 변화를 바라보는데 있어 주어진 결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시대변화를 단순히 우연과 우연의 결합의 산물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우연을 좀더 자세히 해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주체성을 빼고는 시대변화의 추동력을 분석할 수 없다. 근대자본주의를 만든 것이 근대자본가 계급이었던 것처럼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어떤 의도로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주도해 나가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김병국: 근대자본주의는 자본가 혼자만의 작품이 아닌 근대자본가와 국가, 그리고 노동자의 합작의 결과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자본가는 시대변화의 주역이 아니라 에이전트(agent)에 불과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대변화를 추동하는 세력들 중 어느 하나의 구성인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보다 체계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의 분석이 필요하다.

손동현: 문명전환을 설명하는데 있어 인과적, 목적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 조직이 현대문명의 흐름에 대한 방대한 계획과 청사진을 갖고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현대문명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자 인간의 숙명이 될 것이다.

시대변화의 추동세력을 찾아내려 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문화와 문명의 전환에 따라 어떤 산업이나 조직, 집단이 유리해 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보다 실용적인 연구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