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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으나,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
  • BC 259, 趙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秦나라의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출생. 그의 어머니는 富商인 여불위(呂不韋)[1]의 애첩이었던 주희(朱姬)
  • BC 247(13세), 秦王에 즉위
  • BC 238(22세), 親政 시작
  • BC 221(39세), 6國을 멸망시켜 통일을 실현하고 始皇帝라 칭함.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고 도량형(度量衡)과 문자의 통일, 흉노[2] 정벌, 만리장성 축조 등 대내외로 국가기반 조성
  • BC 210(50세), 사망

시대적 배경

周나라의 봉건제도가 무너진 후 지속된 春秋戰國時代라는 기나긴 분열기의 막바지

신흥강국 秦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천하통일 사업을 완수


성장 과정

13세에 왕위에 오른 후, 여불위의 後見 아래 성장

22세가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여불위를 축출하고 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

여불위의 후견 아래 상업과 경제에 대한 마인드를 키웠고, 궁궐의 권력투쟁을 몸으로 겪으면서 의례를 중시하는 유교보다는 용인술을 강조하는 法家思想[3]에 심취


주요 업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도로, 도량형, 문자 등 이후 중국사회가 2천 년 간 유지해온 기본골격을 마련


후대에 미친 영향

秦나라는 2대로 단명했으나 진시황이 만든 기본골격은 왕조를 바꾸어가면서 계속 유지. ‘China’는 秦(Chin)나라에서 유래

진시황이 직접 고안한 皇帝라는 칭호는 삼황오제(三皇五帝)[4]에서 따온 말로, 이후 중국 최고통치자를 일컫는 말로 굳어짐


리더십 특성

“폭군”이라는 이미지는 역사의 조작

구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질서를 최단기간에 구축하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을 초래

진시황에 대한 많은 악평들은 진나라를 무너뜨린 한왕조에 의해 날조된 것

사치 향락의 대명사인 아방궁(阿房宮)[5]은 사실무근으로 판명. 중국 사회과학원은 최근 아방궁 유적지 발굴조사를 통해 궁궐을 지은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 사상 최악의 문화탄압으로 알려진 분서갱유(焚書坑儒)[6]도 지나친 과장

BC 212년, 불로장생약을 구하는 데 실패한 방사(方士)[7]들이 달아나자, 사기성이 농후한 방사 460여 명을 구덩이에 매장하고 관련 서적의 일부를 소각한 것이 사건의 본질

현장경영의 실천

10년 간 황제가 직접 천하를 순시하는 다섯 차례의 순수(巡狩)를 실행

순수 때마다 반드시 그 고장의 명산에 올라 천하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편 거대한 비석을 건립. 순수는 평균 3개월 이상이 걸리는 긴 여행으로 암살의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으나 진시황은 순수를 계속. 정기적으로 점검해야만 광대한 중국 영토의 통치가 가능하다는 신념의 발로

순수를 하지 않는 해에는 변장을 하고 수도 함양(咸陽) 시내를 돌아보았다고 함

마지막 순수 때 산둥성(山東省)에 이르러 과로로 쓰러져 객사

통일 중국의 비전 및 골격 마련

皇帝라는 칭호를 통해 이제까지 지역의 수장인 王을 뛰어넘어 천하의 보편적 리더십을 확립하고 통일제국의 위상을 드높임

자신을 “最初의 皇帝”란 뜻에서 “始皇帝”라 하고 이후 2세, 3세로 이어져 萬歲에 이르기를 꿈꾸었으나 2세 만에 좌절. 그러나 통일 중국이라는 그의 비전은 현대 중국에까지 계승. 중국은 물론 대만 역시 “지구상에 중국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원칙에 동의

※중국의 전통적인 統一思想과 正名思想[8]에서는 ‘統一’을 정상적인 상태로, ‘分斷’을 變局으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으며, 이는 진시황에게서 비롯

統一中國을 위한 인프라와 天下標準(global standard) 구축

同文(문자통일), 同軌(도로 폭 통일) 정책 등 거대한 중국의 시스템을 일원화 하는 정책을 단기간에 집중 추진→ 2천 년 간 지속될 통일 중국의 골격 형성

각국에서 통용되던 六國文字를 폐지하고 각국의 장점을 취한 소전체(小篆體)[9]를 창안

각국마다 서로 路幅이 다르던 도로의 규격을 통일하여 수레 한 대로 천하를 다닐 수 있도록 함

※1천 년 이상 지속된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언어, 제도 등의 표준이 유지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유럽이 분열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

※유럽은 18세기 프랑스혁명 무렵 비로소 미터, 그램 등 도량형의 통일을 시도했으나 아직도 영미권과 대륙권으로 도량형, 언어, 법제, 화폐 등이 천차만별

시황제가 만든 도로는 판축공법(版築工法)[10]으로 만들어졌는데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무가 자라지 않을 정도로 견고. 간선도로는 폭이 50m이며 중앙의 7m는 황제 전용 도로, 바깥쪽은 일반 도로로 되어 있으며 지정된 곳에서만 횡단할 수 있도록 함 (왕복 8차선인 경부고속도로의 폭은 3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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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축공법 양식의 예 (몽촌토성)


[1] 여불위(呂不韋, ?~BC 235): 韓나라의 수도 양책(陽簀)의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원래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았던 장양왕을 즉위시킴. 장양왕(莊襄王)에 의해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로 책봉. 장양왕이 죽고 태자 정(政)이 왕위에 올라 親政을 하기 전까지 막강한 권세를 유지하였으나, 이후 태후(太后: 진시황의 어머니)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파직, 자살.

[2] 흉노(匈奴): BC 3세기 말에서 AD 1세기 말까지 중국의 북방에서 활동한 기마유목민족.

[3] 법가(法家): 기본사상은 信賞必罰로서 禮制를 보충하는 것. “법은 백성의 부모와 같으며, 법은 천하의 가장 좋은 道이고, 聖君의 實用이다. 법은 治道의 근본이지만, 그 정치사상의 중심은 富國强兵에 있다.”

[4] 삼황오제(三皇五帝):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三皇은 복희(伏羲), 여와(女蝸), 신농(神農), 五帝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喾), 요(堯), 순(舜)을 일컬음

[5] 아방궁(阿房宮): 秦나라의 궁전. 아방(阿房)이라는 이름은 수도에서 가까운 궁전(阿-가깝다), 사방이 넓은 궁전(阿-넓다)에서 유래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음.

[6] 분서갱유(焚書坑儒): BC 213년 진시황에 의한 사상, 언론 탄압사건. 전제지배를 관철코자 의학, 점술, 농학 이외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BC 212년에는 시황제를 비난하던 유생 460여 명을 갱(坑)에 생매장했다고 전해짐.

[7] 방사(方士): 고대 중국에서 不老長生說을 제창하거나 이를 위해 마술적 기법과 약방을 사용했던 사람들을 총칭.

[8] 정명사상(正名思想): 명칭과 실질의 일치를 지향한 中國戰國時代의 사상. 그 발단은 “정치의 급선무는 이름을 올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주창한 공자(孔子)에게서 비롯. 명칭에 어울리는 실질이면 훌륭한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믿음.

[9] 소전체(小篆體): 진시황이 이사(李斯)를 시켜 이전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통일시킨 한자체로서 상형문자(象形文字)의 일종. 이사는 순자에게 제왕학(帝王學)을 배웠으며, 중국 秦나라 통일에 큰 공적을 세운 法家의 정치가.

[10] 판축공법(版築工法): 두 쪽의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절굿공이로 세게 쳐 단단하게 만든 후 위에서부터 굳게 하는 일종의 원시적 시멘트 공법. 만리장성도 판축공법으로 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