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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수상 관련자료]


약력

  • 1899, 히로시마현(廣島縣)에서 출생
  • 교토 대학(京都大學) 법학부 졸업 후 大藏省에 들어가 세무서장․재무 국장․주세(主稅)국장 등을 역임
  • 1947, 재무차관 역임
  • 1949, 衆議院 의원 및 3차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의 재무장관 역임
  • 1951, 샌프란시스코 美日강화회의에 전권위원으로 참석
  • 1956, 이시바시(石橋) 내각의 재무장관
  • 1957, 기시(岸) 내각의 재무장관․통산장관 역임
  • 1960, 自民黨 총재 및 수상 취임, 所得倍增計劃 추진
  • 1964, 병으로 사임

시대적 배경

그가 經濟官僚이자 政治人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 시기(1947~1949)는,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경제가 부흥하느냐 몰락하느냐의 기로에 선 시점


성장 과정

정통 관료의 길을 걷다가 政治人으로 변신. 持病 등 불우한 청장년기를 지낸 후 42세에 3등 관료에 오를 정도로 출세가 늦었음

1945년 패전으로 인해 다수의 엘리트 관료들이 물러나면서 官運이 트이기 시작

終戰 이전까지는 평범한 관료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전후 일본경제의 재건자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됨


주요 업적

10년 내 소득을 2배 증가시킨다는 所得倍增計劃을 추진, 당초 계획보다 훨씬 빠른 8년 만에 목표를 달성

소득배증계획의 계획과 실적 비교[기준년도 1958년 대비 1970년] 주:1970년 목표치는 1956~1958년 3년 평균 실질가격으로 算定

구분 기준년도

(58년)

目標 對備 實績 成長率(%)

1970

목표

1970

실적(倍)

목표

성장률

실제

성장률

GNP(兆円)

人當(万円)

輸出(億$)

輸入(億$)

總人口(万名)

9.7

8.8

27.0

31.3

9,111

26.0

20.8

93.2

98.9

10,222

40.6(4.2)

31.7(3.6)

202.5(7.5)

195.3(6.2)

10,372(1.1)

7.8

6.9

10.0

9.3

0.9

11.6

10.4

16.8

15.5

1.0


후대에 미친 영향

일본을 오늘날 세계 2위의 經濟大國으로 만든 장본인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은 이케다의 국민소득배증계획을 20세기 후반 일본경제사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 인식[1]

소득배증계획은 사회자본의 확충, 산업구조 고도화, 무역과 국제협력의 적극 추진, 과학기술 진흥, 농업근대화 등을 통해 고도성장을 결정적으로 앞당겼다는 평가


리더십 특성

① 大器晩成形 관료, 경제원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

학생 시절부터 病弱했으며 오랜 持病으로 관료로서의 성장도 더딘 대기만성형

고등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고 교토대학 법학부를 25세의 나이로 졸업

종전 후 전시 내각에 참여했던 엘리트 관료들이 대거 퇴진하면서 官運이 트이기 시작

중소기업 지원대책을 경제원리에 따라 추진

닷지 라인으로 강력한 긴축정책이 추진된 결과, 資金難에 몰린 중소기업의 도산 사태가 속출

중소기업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 이케다는 “가난뱅이는 보리밥을 먹어라.”는 유명한 말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 이케다는 정부개입에 의한 官主導型 市場經濟를 신봉했으나, 정부 정책은 경제원리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

② ‘월급 2배론’의 슬로건 → “政治의 季節에서 經濟의 季節로”

前시대의 ‘政治主義’에서 ‘經濟主義’로 이행

기시(岸) 내각 하에서 安保騷動(美日안보조약 개정 논란), 미이케(三池) 탄광 쟁의,[2] 경직법(警職法) 개정 파동[3] 등 전 사회에 이념갈등 증폭

이케다는 이념적 편향을 버리고 정국대립을 가져올 수 있는 발언을 삼가. 그러나 기본 정책 목표에 대해서는 원칙을 고수

※“3분의 1로 줄인다”와 “6할 감소”

수상 취임 직후인 1960년 9월, “금후 3년 간 9%의 경제성장을 목표로 한다. 또한 향후 10년 간에 농민을 3분의 1로 줄인다”고 발언했다가 말썽이 일자, “농민의 6할이 줄게 될 것이다”라고 정정. 표현만 바꾸었을 뿐 기본적인 경제정책의 목표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음

경제성장의 추진을 통해 민심의 안정을 기하고자 시도.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의 이행” 호소

국민들에게 명쾌한 ‘월급 2배론’의 비전을 제시하여 희망과 자신감을 고취하고 건설적 방향으로 국민역량을 집중

1950년대 경제성장세가 둔화되는 ‘굴절론(屈折論)’을 부인하고 “고도성장은 이제부터”라는 비전을 제시

사회갈등과 소극적 태도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던 상황을 타파. 종전까지는 경제계획 시 성장잠재력을 항상 과소평가하여, 해마다 세금의 초과징수가 발생 → 민간경제 확대에 사회자본의 개발이 뒤처져 경제성장에 장애요인

소득배증계획의 성공요인은 리더가 고도성장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국민들에게 피부에 와닿는 비전을 제시하여 의욕을 고취시킨 것. 실제 정책들은 妙案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정책의 종합에 불과


[1]「포브스」誌가 기업인, 경제평론가, 학자 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2000.10), 주요 응답자는 財界의 오가 노리오 소니 회장, 히구치 히로타로 아사히맥주 회장,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 회장 등.

[2]미이케(三池) 탄광 쟁의: 1960년 발생한 일본 전후 최대 노동쟁의. 1959년에 사측이 1,280명의 지명해고를 노조에 통보하자 이듬해부터 전면파업에 돌입, 300일 간 50만 명의 전국 노조원들이 동참. 재계가 회사 측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가 노조 측을 지지하면서 ‘자본 대 노동’의 싸움으로 확대. 사용자 측의 승리로 결론이 나면서 강경노조는 노사협력으로 선회하는 계기가 됨.

[3]경직법(警職法, 警察官職務執行法) 개정 파동: 1958년 10월에 정부가 경찰관의 직무집행에 관한 권한을 크게 강화시키는 법안(불법집회해산, 강제동행 등)을 상정하면서 언론과 사회당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던 사건. 결국 정부는 법안개정을 단념하고, 법안은 심의 미완료로 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