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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809, 켄터키 주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
  • 1837, 변호사 개업
  • 1834~1841,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 선출
  • 1847, 연방 하원의원 당선
  • 1856,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共和黨에 입당
  • 1858,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 더글러스(Stephen Douglas)와의 치열한 논전으로 유명
  • 1861, 미국 16대 대통령 취임
  • 1861, 남북전쟁 발발
  • 1863,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
  • 1864, 재선에 성공
  • 1865, 남북전쟁 승리
  • 1865, 4월 14일 금요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남부지지자였던 존 일키스 부스(John Wilkes Booth)라는 배우에게 피격, 이튿날 아침 사망

시대적 배경

南部와 北部의 政治․經濟․社會的 分裂과 葛藤이 절정에 달해 국가가 분열되는가, 통일을 유지하는가의 갈림길에 선 상황


성장 과정

평생 정식 학교교육을 1년밖에 받지 못했으나 州의회 하원의원을 거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辯護士가 됨

일리노이 주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링컨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

하원, 상원, 부통령 선거 등에서 연속 실패했으나 당시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번지던 노예제 이슈를 타고 급격하게 정치적 논쟁의 중심인물로 부상


주요 업적

南北戰爭을 북군의 승리로 이끌고 노예해방을 단행

내전으로 분열된 국가를 재통합


후대에 미친 영향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으며 후대 民權運動의 뿌리를 형성

당시 의회가 强盛하던 미국 민주정치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대통령 중심제의 골격을 형성


리더십 특성

ⓛ 中道穩健 성향, 필요할 때는 突破力을 발휘

겸손하고 온건한 중도파의 이미지로, 극단적인 국가 분열 상황에서 현실적 대안으로 급부상

노예제에 대한 혐오감을 강력한 언어로 비난하는 등 폐지론자들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즉각적 폐지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

노예제를 채택하고 있는 켄터키 주 출신이면서 노예제 반대론의 입장을 고수하는 등 양면성

대립하는 양측 강경파 리더들이 비토되면서 共和黨 대통령 후보에 지명됨[1]

단순히 중도온건이 아니라 강할 때는 강하게 약할 때는 약하게 처신하는 균형감각 발휘

强硬策과 穩健策을 산술평균한 中道가 아니라, 時宜適切한 정책을 구사. 정책의 우선순위를 중시하고 여타 사소한 것은 양보하는 대국적 정치

처음에는 무조건적 노예제 폐지를 유보하다가, 상황이 유리해지자 노예해방 선언을 함으로써 기선을 제압

② 리더십 위기를 대통령 權限强化 기회로 활용

미국 역사상 최악의 리더십 위기를 겪으면서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을 비약적으로 강화시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南部聯合이 이탈하고 취임하기도 전에 國土가 양분되면서 또 한 사람의 대통령(Davis)이 취임

출신 배경, 인맥, 경력이 모두 빈약하여 리더십과 권위 확보에 한계

당시 공화당은 최초로 권력을 장악하여 당내 경쟁이 치열했으며, 각료 7명 중 4명이 대통령 후보지명 시 링컨의 경쟁자였음. 이들은 모두 명문가 출신이거나 쟁쟁한 정치경력을 지닌 인물로서, 자수성가한 링컨을 경멸

링컨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점진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역량을 강화시키는 끈기와 인내를 발휘

※ 링컨 취임 전후의 정국

  • 1860년 11월 6일 자정: 링컨 당선 확정
  • 1860년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 발의로 남부 분리 선언(Ordinance of Secession) 발효
  • 1861년 2월 4일: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6개 주가 가세하여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결성
  • 1861년 2월 18일: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남부 대통령에 취임
  • 1861년 3월 3일: 링컨, 대통령 취임
  • 1861년 4월 4일: 남군 섬터(Sumter) 요새 공격, 전쟁 발발
  • 1861년 4월 17일: 버지니아 주, 남부연합 가담
  • 1861년 5월 40일: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남부연합 가담 완료(총 11개 주)

링컨은 전시 상황에 대통령에게 주어진 비상권한을 십분 활용, ‘强力한 戰時 大統領(tough war-time President)’으로 변신

開戰을 계기로 대통령을 능가하던 의회의 發言權을 잠재우고 開戰 이후 80일 동안 모든 조치를 의회 동의 없이 추진. “필요하면 법도 무시할 수 있다(Necessity knows no law)”는 원칙 아래 정부의 戰時權限 확대

법적 절차나 인권보호에 문제가 있더라도 승리를 위한 과감한 조치를 강력하게 단행. 軍지휘관에게 남부에서 계엄령을 선포할 권리, 民間人을 배심원 없이 軍法會議에서 재판할 권리 부여. 1862년 한 해에만 전쟁을 반대하는 민주당원 등 1만 4천 명 체포. 1863년 1월의 노예해방 선언도 의회 동의 없이 계엄령 형태로 이루어짐

군사 경험이 거의 없었으나 미국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실제 戰略戰術에 깊숙이 개입. 뜻이 맞지 않을 경우 총사령관을 즉각 해임하여 전쟁 중(1861~1864) 총사령관을 세 번이나 경질

③ 目標 달성을 위해 사소한 것은 양보

‘하나의 美國 실현’을 최우선 國家目標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사소한 것은 양보하는 유연한 자세

취임 초기,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합중국을 유지할 수 있다면, 노예제도도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

“나의 최대의 임무는 합중국을 지키는 일입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합중국을 지킬 수 있다면 노예제도를 폐지하겠습니다.”(취임 연설)

반면 남부의 합중국 탈퇴에 대해서는 반란으로 규정하고 신속하게 군사적 대응. 합중국 붕괴를 획책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內戰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결의를 과시

‘노예해방 선언’을 전략적으로 최적의 시점에서 최적의 범위로 시행

전쟁 초기에는 노예해방을 전면에 표방하지 않음. 노예해방을 강행할 경우 노예제를 인정하면서도 북부에 가담한 델라웨어, 미주리, 켄터키, 메릴랜드 4개 주가 북부에서 이탈할 가능성

전쟁의 주요 고비를 넘기고 대세가 결정된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 선언’. 이때에도 ‘합중국에 대항하는 모든 州’로 해방의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北軍에 가담한 州에 부담을 경감. 南軍측 주에 대한 노예해방 선언은 남군에 복무하고 있는 흑인들의 이탈을 불러와 戰勢의 우위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효과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에서 불멸의 연설문(Gettysburg Address)을 남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

승전 이후에도 보복 위주의 강경책을 거부하고 최대한 관용을 베푸는 남부 재건정책을 추진

남군, 북군 모두 합중국의 형제라는 관점에서 勝者獨食方式의 남부통치를 거부

남부 각주에 대해서 유권자의 10%만 연방정부에 충성을 서약해도 자주적인 주정부의 설립을 승인한다는 ‘10%案’을 관철

  • 대부분의 共和黨員들은 ‘10%案’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반발
  • 50%의 충성 서약을 요구하는 웨이드-데이비스 법안(the Wade-Davis Bill)이 제출되었으나 링컨이 거부

④ 才致와 餘裕로 주도권을 장악

1858년 상원의원 출마 시, 경쟁자인 더글러스(Douglas)와의 논쟁

더글러스는 링컨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음

“친애하는 유권자 여러분! 링컨 씨는 지난날 식품가게를 경영하면서 술을 팔았습니다. 금주 시대에 술을 판 사람이 뻔뻔스럽게도 상원의원이 되겠다니, 어디 말이나 됩니까?”

술 판매를 금지했던 당시에 작은 식품가게를 갖고 있던 링컨을 모략

이에 링컨은 “여러분, 방금 더글러스 씨가 한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가게에 술을 가장 많이 사러 오신 분은 다름 아닌 더글러스 씨였습니다.”라고 응수

다른 정견 발표장에서 더글러스가 다시 링컨을 비난

“링컨 씨야말로 두 얼굴을 가진 二重人格者라는 사실을 유권자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링컨은 “여러분, 지금 더글러스 씨는 저에게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 라고 욕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왜 하필 이런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여러분 앞에 나왔겠습니까?”라고 대응

선거구의 大부흥회에서연단에 오른 목사가 지옥과 천국에 관해 설교하면서 빽빽이 들어찬 청중들에게 天國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다들 일어서라고 함. 모두 일어섰는데 유독 링컨만 자리를 차지하고 묵묵히 앉아 있자, 목사는 언짢은 기분에 “링컨 씨,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소?”라고 물음. 링컨은 조용히 일어서더니 “저는 議會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답변


[1]민주당이 노예제 유지를 주장하는 브리켄리지(Breckenlidge)와 人民主權을 주장하는 더글러스(Douglas) 두 후보 사이에서 분열양상을 보이자 공화당 측은 정권획득의 호기로 보고 대중적인 반감을 무마시키기 위해 오히려 노예제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링컨을 후보로 내세움. 링컨은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쟁에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人民主權論을 비판.

[2]“…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